광개토태왕(광개토경호태열제)은 백제를 공격하여 황해도 지역과 대륙 백제의 많은 땅을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광개토태왕은 백제만 정벌한게 아닙니다. 광개토태왕비 영락 5년 기사를 보면 거란을 정복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게다가 영락 8년에는 숙신을 정벌하여 가태라곡 등 숙신의 지역을 빼앗았고, 토곡을 순시했지요. 그런데 어떤 학자는 토곡을 토욕혼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저멀리 토욕혼(위구르~티벳 지역)을 고구려 강역으로 했지요. 이 말이 사실이라듯 신채호 선생은 자신의 저서 조선상고사에 광개토태왕 5년에 정벌한 와려가 감숙성 지방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려(비려,와려)가 자주 변경을 침노하므로 죽위 5년, 기원 395년에 원정군을 일으켜 파부산과 부산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그 부락 6,7백을 파괴하고 소,말,양을 노획하여 돌아오니 파부사는 수문비사에 지금의 음산산맥의 와룡이라 하였고 부산은 지금 감숙성 서북쪽의 아랍선산이라 하였으며 염수는 몽고지지에 의하면 소금기가 있는 호수나 강이 허다한데 아랍선산 아래에 길란태란 염수가 있어 물가에 늘 2자 이상 6자 이하의 소금더미가 응결된다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대개 광개토왕의 발자취가 지금의 감숙성 서북에 미쳤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고구려 역사상 유일한 원정이 될 것이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고구려는 저 멀리 일본열도에도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일본서기 이중천황 5년(404년, 영락 14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3월에 축자(筑紫)에 있는 세 신이 궁궐에 나타나 "어찌하여 우리 백성을 수탈하는가. 나는 지금 그대를 부끄럽게 만들겠다"고 말했다 (중략) 9월에 천황이 담로도(淡路島)에서 사냥을 했다. 이 때에 삼에 있는 이장낙신(伊奬諾神)의 신탁에 "피 냄새 때문에 견디가 어렵다"고 말했다. (중략) 그 달 계묘일에 바람소리처럼 하늘에서 부르는 소리가 있어 "검도태자왕(劒刀太子王)"이라 했다. (중략) 갑자기 사자가 와서 천황의 부인이 죽었다고 했다. 천황은 매우 놀라 말을 타고 돌아왔다. 병오일에 담로도에 도착했다. 10월에 황비를 제사지내고 천황은 신의 탓함을 다스리지 않아 황비가 죽은 것은 후회하고 신이 노한 원인을 알아내려고 했다. 어떤 사람이 "차지군(車持君)이 축자국에 가서 모든 차지부민을 조사하여 징수하고, 겸하여 신에 배당한 백성을 수탈했습닏. 반드시 이 죄일 것입니다"고 하였다. 천황은 즉시 차지군을 불러 심문하니 사실이었다. 그래서 "너는 차지군이지만, 마음대로 천자의 백성을 수탈했고 신에 배당한 부를 수탈한 죄를 범했다"고 질책했다. 그래서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공물을 내어 제서를 지내게 하고 반성하게 했다. 천황은 명하여 "지금부터 축자의 차지부를 관장하지 못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모두 거두어 새로 나누어서 삼신에게 바쳤다.」
이 기사는 고구려의 일본열도 침공 기록입니다. 축자와 담로도는 오늘날의 구주지방으로 당시 왜국의 중심이었습니다. 위 기록은 신과 관련있는 것처럼 꾸며져 고구려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왜의 자치부를 다스리는 사람이 고구려에 대항하다가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아 패배했고, 그 결과 이중천황의 부인까지 죽임을 당하여 천황이 고구려에 대한 죄를 용서받기 위해 모둔 죄를 차지군에 돌리고, 축자의 차지부 지역을 고구려에 바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 고구려가 일본 열도를 정복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중천황이 광개토태왕 또는 그의 아들(검도태자왕)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을 한 위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죠. 그리고 이중천황 다음에 반정천황(405~410)이 즉위하는데, 반정천황이 바로 담로궁(담로도의 궁궐)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로 볼 때 가능성이 더욱 높아 보입니다. 게다가 반정천황은 일존에서도 고구려계통의 천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 발견된 고구려 계통의 갑주와 거의 같은 것이 5세기 후반 일본의 근기(오사카) 지방의 고분군에 대량으로 출토되었고, 마주(馬胄)도 근기지방에서 가까운 화가산현 대곡고분에 출토되었습니다. 고구려 계통의 유적이 일본 각지에서 계속 출토됨은 결국 고구려가 일본을 정복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게다가 고구려는 영원한 숙적 후연을 정복했습니다. 영락 12년인 402년 광개토태왕은 요하를 넘어 후연의 요충지 숙군성(대능하 중류 지역)을 공략함으로써, 후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합니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는 크게 승리함으로써, 후연의 중심부를 타격했을 뿐 아니라 후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어 후연이 멸망에 이르게 하였죠.
『진서』에는 고구려군이 연군(오늘날 북경 지역)에 쳐들어와서 100명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이는 고구려군이 대능하를 지나 만리장성 너머까지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광개토태왕비문을 보면 영락 17년에 5만명의 군대로 적을 물리쳐 적으로부터 획득한 갑옷이 1만여 벌에 이르는 등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빼앗았다는 대승 기록을 전하고 있습니다.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고구려와 싸운 적이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기사는 후연과의 전쟁을 기록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당시 고구려군이 5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맞서 싸울 상대는 후연 밖에 없습니다.(이미 백제, 신라, 가야, 왜국은 고구려에 굴복한 상태였으니...)
평안남도 대안시에 덕흥리 고분이 있는데, 이 고분의 주인은 유주자사 진입니다. 유주는 오늘날 북경 일대인데, 유주자사의 무덤이 고구려 영역에 발굴되었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하였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입니다.
첫째, 공격적인 전략이다. - 적극적인 대응
당시의 동북아시아 정세는 대륙에 이른바 5호16국시대가 전개되면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한반도 남쪽에는 백제와 신라 및 왜가 각축을 벌이는 그야말로 다극화시대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 시기에 광개토대왕은 방어개념의 국가전략을 과감하게 공격개념으로 전환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였고 이러한 전략은 전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여 난관을 타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전략에는 기본적으로 전구성원인 고구려인들에게 내재된 유목전사적인 기질이 발휘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둘째, 열린 정책이다. - 참여정신
고구려는 전통적인 기마민족의 후예이다. 기마민족의 특성이 그러하듯이 고구려도 공동체를 중요시하고 각개인이 전사로서의 기능을 다하도록 키워진 기마전사 집단인 것이다. 전사들의 특징은 그들의 행동이 강제성에 있지 않고 자발성에 있다. 그래서 집단의 정책이 다수에게 충분히 공개적으로 인지되고 의견이 모아지면 그들은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그들의 자발성은 지도계층만 정책에 관여하는 제도가 아닌 전국민이 정책에 대표를 보내 참여하는 일종의 열린 정책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 또한 유목민족에게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전통으로서, 부족장과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중대회를 통한 단합을 다지는 행사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셋째, 과감한 포용성이다. - 자율성의 보장과 Open Mind
광개토대왕이 점령지에서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행정관의 임명이었다. 군사적으로 점령한 지역을 먼저 고구려의 행정지도관이 들어가 지역유지를 선발하여 지역인으로 하여금 행정체제를 관장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는 바로 현채인(현지채용인)위주의 경영을 과감히 위임하고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전략을 취했던 것으로 이는 다른 역대 어느 정복자도 감히 취하지 못한 획기적인 시도이었다. 고대에는 전쟁에서 패할 경우 완전히 포로가 되거나 노예가 되는 비참한 신분을 면하지 못했으므로 광개토대왕의 이러한 조치는 피정복민들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자율성을 보장하고 선진적인 행정기법을 전수하는 식의 이러한 정책은 사실 자발성에서 기인하여 믿고 맡기는 유목전사들의 기본적인 행동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수의 군대로 다수의 정복민들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넷째, 자긍심의 고취이다. -‘내가 바로 고구려!’라는 평등의식
광개토대왕은 전투에서 전사들과 항상 함께하며, 동등하게 잠을 자고 똑같이 식사하는 등 소속감과 평등의식을 심어주었고 항상 ‘내가 바로 고구려’라는 인식을 각개전사에게 설파하여 모두가 고구려전사로서의 자긍심과 명예심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떳떳하게 전사로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일구어내어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 것이다.
이외에도 광개토대왕의 정책이나 전략은 이루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하였지만 대왕의 지휘에 고구려전사들이 적극적으로 따랐기에 가능한 개척사업이었다. 즉, 광개토대왕의 개척정신은 이러한 여거가지 요인들이 뒷받침되어 동북아시아를 재패하였던 것이고 우리민족의 혈관과 뇌리속에 유구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고구려,영광의 고구려를 이끈 광개토태왕★
광개토태왕(광개토경호태열제)은 백제를 공격하여 황해도 지역과 대륙 백제의 많은 땅을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광개토태왕은 백제만 정벌한게 아닙니다. 광개토태왕비 영락 5년 기사를 보면 거란을 정복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게다가 영락 8년에는 숙신을 정벌하여 가태라곡 등 숙신의 지역을 빼앗았고, 토곡을 순시했지요. 그런데 어떤 학자는 토곡을 토욕혼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저멀리 토욕혼(위구르~티벳 지역)을 고구려 강역으로 했지요. 이 말이 사실이라듯 신채호 선생은 자신의 저서 조선상고사에 광개토태왕 5년에 정벌한 와려가 감숙성 지방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려(비려,와려)가 자주 변경을 침노하므로 죽위 5년, 기원 395년에 원정군을 일으켜 파부산과 부산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그 부락 6,7백을 파괴하고 소,말,양을 노획하여 돌아오니 파부사는 수문비사에 지금의 음산산맥의 와룡이라 하였고 부산은 지금 감숙성 서북쪽의 아랍선산이라 하였으며 염수는 몽고지지에 의하면 소금기가 있는 호수나 강이 허다한데 아랍선산 아래에 길란태란 염수가 있어 물가에 늘 2자 이상 6자 이하의 소금더미가 응결된다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대개 광개토왕의 발자취가 지금의 감숙성 서북에 미쳤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고구려 역사상 유일한 원정이 될 것이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고구려는 저 멀리 일본열도에도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일본서기 이중천황 5년(404년, 영락 14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3월에 축자(筑紫)에 있는 세 신이 궁궐에 나타나 "어찌하여 우리 백성을 수탈하는가. 나는 지금 그대를 부끄럽게 만들겠다"고 말했다 (중략) 9월에 천황이 담로도(淡路島)에서 사냥을 했다. 이 때에 삼에 있는 이장낙신(伊奬諾神)의 신탁에 "피 냄새 때문에 견디가 어렵다"고 말했다. (중략) 그 달 계묘일에 바람소리처럼 하늘에서 부르는 소리가 있어 "검도태자왕(劒刀太子王)"이라 했다. (중략) 갑자기 사자가 와서 천황의 부인이 죽었다고 했다. 천황은 매우 놀라 말을 타고 돌아왔다. 병오일에 담로도에 도착했다. 10월에 황비를 제사지내고 천황은 신의 탓함을 다스리지 않아 황비가 죽은 것은 후회하고 신이 노한 원인을 알아내려고 했다. 어떤 사람이 "차지군(車持君)이 축자국에 가서 모든 차지부민을 조사하여 징수하고, 겸하여 신에 배당한 백성을 수탈했습닏. 반드시 이 죄일 것입니다"고 하였다. 천황은 즉시 차지군을 불러 심문하니 사실이었다. 그래서 "너는 차지군이지만, 마음대로 천자의 백성을 수탈했고 신에 배당한 부를 수탈한 죄를 범했다"고 질책했다. 그래서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공물을 내어 제서를 지내게 하고 반성하게 했다. 천황은 명하여 "지금부터 축자의 차지부를 관장하지 못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모두 거두어 새로 나누어서 삼신에게 바쳤다.」
이 기사는 고구려의 일본열도 침공 기록입니다. 축자와 담로도는 오늘날의 구주지방으로 당시 왜국의 중심이었습니다. 위 기록은 신과 관련있는 것처럼 꾸며져 고구려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왜의 자치부를 다스리는 사람이 고구려에 대항하다가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아 패배했고, 그 결과 이중천황의 부인까지 죽임을 당하여 천황이 고구려에 대한 죄를 용서받기 위해 모둔 죄를 차지군에 돌리고, 축자의 차지부 지역을 고구려에 바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 고구려가 일본 열도를 정복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중천황이 광개토태왕 또는 그의 아들(검도태자왕)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을 한 위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죠. 그리고 이중천황 다음에 반정천황(405~410)이 즉위하는데, 반정천황이 바로 담로궁(담로도의 궁궐)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로 볼 때 가능성이 더욱 높아 보입니다. 게다가 반정천황은 일존에서도 고구려계통의 천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 발견된 고구려 계통의 갑주와 거의 같은 것이 5세기 후반 일본의 근기(오사카) 지방의 고분군에 대량으로 출토되었고, 마주(馬胄)도 근기지방에서 가까운 화가산현 대곡고분에 출토되었습니다. 고구려 계통의 유적이 일본 각지에서 계속 출토됨은 결국 고구려가 일본을 정복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게다가 고구려는 영원한 숙적 후연을 정복했습니다. 영락 12년인 402년 광개토태왕은 요하를 넘어 후연의 요충지 숙군성(대능하 중류 지역)을 공략함으로써, 후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합니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는 크게 승리함으로써, 후연의 중심부를 타격했을 뿐 아니라 후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어 후연이 멸망에 이르게 하였죠.
『진서』에는 고구려군이 연군(오늘날 북경 지역)에 쳐들어와서 100명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이는 고구려군이 대능하를 지나 만리장성 너머까지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광개토태왕비문을 보면 영락 17년에 5만명의 군대로 적을 물리쳐 적으로부터 획득한 갑옷이 1만여 벌에 이르는 등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빼앗았다는 대승 기록을 전하고 있습니다.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고구려와 싸운 적이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기사는 후연과의 전쟁을 기록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당시 고구려군이 5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맞서 싸울 상대는 후연 밖에 없습니다.(이미 백제, 신라, 가야, 왜국은 고구려에 굴복한 상태였으니...)
평안남도 대안시에 덕흥리 고분이 있는데, 이 고분의 주인은 유주자사 진입니다. 유주는 오늘날 북경 일대인데, 유주자사의 무덤이 고구려 영역에 발굴되었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하였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입니다.
첫째, 공격적인 전략이다. - 적극적인 대응
당시의 동북아시아 정세는 대륙에 이른바 5호16국시대가 전개되면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한반도 남쪽에는 백제와 신라 및 왜가 각축을 벌이는 그야말로 다극화시대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 시기에 광개토대왕은 방어개념의 국가전략을 과감하게 공격개념으로 전환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였고 이러한 전략은 전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여 난관을 타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전략에는 기본적으로 전구성원인 고구려인들에게 내재된 유목전사적인 기질이 발휘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둘째, 열린 정책이다. - 참여정신
고구려는 전통적인 기마민족의 후예이다. 기마민족의 특성이 그러하듯이 고구려도 공동체를 중요시하고 각개인이 전사로서의 기능을 다하도록 키워진 기마전사 집단인 것이다. 전사들의 특징은 그들의 행동이 강제성에 있지 않고 자발성에 있다. 그래서 집단의 정책이 다수에게 충분히 공개적으로 인지되고 의견이 모아지면 그들은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그들의 자발성은 지도계층만 정책에 관여하는 제도가 아닌 전국민이 정책에 대표를 보내 참여하는 일종의 열린 정책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 또한 유목민족에게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전통으로서, 부족장과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중대회를 통한 단합을 다지는 행사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셋째, 과감한 포용성이다. - 자율성의 보장과 Open Mind
광개토대왕이 점령지에서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행정관의 임명이었다. 군사적으로 점령한 지역을 먼저 고구려의 행정지도관이 들어가 지역유지를 선발하여 지역인으로 하여금 행정체제를 관장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는 바로 현채인(현지채용인)위주의 경영을 과감히 위임하고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전략을 취했던 것으로 이는 다른 역대 어느 정복자도 감히 취하지 못한 획기적인 시도이었다. 고대에는 전쟁에서 패할 경우 완전히 포로가 되거나 노예가 되는 비참한 신분을 면하지 못했으므로 광개토대왕의 이러한 조치는 피정복민들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자율성을 보장하고 선진적인 행정기법을 전수하는 식의 이러한 정책은 사실 자발성에서 기인하여 믿고 맡기는 유목전사들의 기본적인 행동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수의 군대로 다수의 정복민들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넷째, 자긍심의 고취이다. -‘내가 바로 고구려!’라는 평등의식
광개토대왕은 전투에서 전사들과 항상 함께하며, 동등하게 잠을 자고 똑같이 식사하는 등 소속감과 평등의식을 심어주었고 항상 ‘내가 바로 고구려’라는 인식을 각개전사에게 설파하여 모두가 고구려전사로서의 자긍심과 명예심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떳떳하게 전사로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일구어내어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 것이다.
이외에도 광개토대왕의 정책이나 전략은 이루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하였지만 대왕의 지휘에 고구려전사들이 적극적으로 따랐기에 가능한 개척사업이었다. 즉, 광개토대왕의 개척정신은 이러한 여거가지 요인들이 뒷받침되어 동북아시아를 재패하였던 것이고 우리민족의 혈관과 뇌리속에 유구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광개토대왕의 개척정신을 되살려야만 한다.
출처 : 블로그 > Network of Corea history - 烈帝의 21세기 한국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