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영웅들의 등용문 "권투도장"

김민수2007.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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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해 

권투 글로브 끼웠던

헝그리 복서들은 사라지고… 
K1, 프라이드 같은
  '이종격투기'가 인기를 끌고.

 

  김홍균_월간중앙 기자 redkim@joongang.co.kr

먹고 사는 '생존' 위해 권투 글로브 끼웠던 헝그리 복서들은 사라지고,

살빼고 몸 가꾸려는  '댄스복싱'이 인기 끄는 세상…


 “기자양반, 요새 권투선수의 개런티가 얼마나 될 거 같아?”

   “……글쎄요.”

  덕흥권투체육관 김병하(57) 관장은 자신의 체육관을 방문한 기자에게 마치 화가 난듯 따지듯 묻습니다.

  “4라운드 경기에 40만 원이야. 그것도 대전료 20만원 주고나면 20만원인데, 정말이지 짜장면 값이라니까. 이게 10년 전 가격 그대론데, 요새 중국집에서 일하는 자장면 배달원의 월급을 물어봤더니 120만원은 된다고 하더라고. 이러니 누가 권투하겠다고 나서겠냐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링 위에 선수가 오를 리 없고, 볼거리 없는 경기에 관중이 찾을 리 없습니다. 대전료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김 관장은 “현재 일본 챔피언 200만 엔과 한국 챔피언 200만 원의 대전료 사이에도 10배의 간극이 있다”라고도 말했습니다. 결국 공짜 시합을 벌여도 관중이 찾아오지 않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권투인들 사이에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대통령이 권투를 좋아해야 권투가 산다고들 그래. 과거 전두환씨가 대통령 할 때 권투가 최고였잖아요. 방송에서도 매주 권투 중계를 했던 시절이니까. 타이틀매치 아니라도 매주 자정이 넘어서 권투 중계를 했는데, 대통령이 한번은 방송국에 전화를 걸었대. ‘여러분은 잠도 안 자고 권투 봅니까?’, 권투 중계시간이 너무 늦다는 이야기지. 그래서 방송국이 부랴부랴 권투프로는 9시 반으로 당겨서 편성했다는 거야. 우리 권투의 전성기 때 이야기지.”

  

어디 그것이 권투만의 이야기였을까만, 한국권투의 흥망사를 고스란히 지켜봐온 그로서는 화가 날만하다. 군사독재와 국가주의 그늘 아래에서 당시 복싱 경기는 배고픈 국민들을 흑백 TV 앞에 끌어모았던 당대의 최고 ‘빅쇼’였고, 복싱 챔피언들은 아이들의 우상이자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 최초 세계챔프 김기수, 두체급을 석권했던 4전5기 신화 홍수환, 최고의 아웃복서 염동균과 박찬희, 원투 스트레이트의 대명사 최충일, 무쇠같은 ‘돌주먹’ 문성길, 17차 챔프방어의 신화 유명우….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지만 온 국민을 울린 비운의 복서도 있습니다. 1982년 어느날, 라스베이거스의 뙤악볕 아래서 당시 미국의 복싱영웅인 레이 맨시니와 맞붙은 김득구 말입니다. 라스베이거스의 대표적인 호텔인 시저스 팰리스 특설링에서 열린 세계권투연맹(WBA) 라이트급 타이틀 매치에서 김득구는 맞으면 때리고 맞으면 때리고..., 한국팬들이 그동안 한번도 구경해본 적이 없는 최고의 난타전을 펼쳤습니다. 정말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두 선수 간의 카운터 블로가 잇따라 떠져나왔죠. 챔피언 붐붐 맨시니를 끝내 그로키 상태까지 몰고가 온국민을 열광시켰던 김득구는 14회엔가 결국 맨시니의 레프트 어퍼컷에 이은 라이트 스트레이트 한 방을 맞고 그 차가운 아메리카의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한국을 방문한 맨시니는 '슬픈 영웅' 김득구에 대해 "고(故) 김득구 선수는 전사(戰士)였고, 챔피언의 마음을 가진 선수였다"고 말했습니다. 맨시니는 김득구와의 경기 이후로 권투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챔피언을 꿈꾸었는지, 도시에 권투도장이 즐비했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아시안게임에서도 권투는 한국의 전통적인 메달밭이 되었고,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학교 교실 안에 있이던, 공장의 생산라인이든, 직장인들의 술자리든 간에 홍수환의 ‘칠전팔기’ 신화와 김태식의 펀치 세례, 최충일의 원투 스트레이트는 늘상 안줏거리에 올랐습니다.

  그런 프로권투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김득구의 죽음 이후권투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져 갔습니다. 그로부터 25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국민들 대부분은 세계 타이틀을 보유한 한국 복서가 누구인지, 타이틀 매치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세계 타이틀 매치가 아니라면 방송에서 복싱중계를 구경하기가 사실상 어려워졌고, 이들 경기에 대한 기업후원도 뚝 끊겼습니다. 길거리에서 복싱도장 간판들이 사라져가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프로복서 파이트머니가

자장면 배달부 봉급 수준은 돼야” 

  프로레슬링만큼이나 권투가 인기 끌던 시절, 김 관장도 링 위에서 글로브를 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1976년 한국 주니어라이트급 타이틀매치에서 이이다노 선수에게 패배한 뒤 자신의 선수생활을 접었습니다. 그런 그가 1980년 신림동에 복싱도장(덕흥권투체육관)을 연 것입니다. 그의 덕흥체육관에서 수많은 이들이 꿈을 키웠습니다.

  김 관장은 자신의 권투지도자로서의 30년을 “여한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동양 미들급 챔피언 송기연과 올림픽 국가대표 조동범, 한국 챔피언인 최강·돌석·송화영·박용수·신팔만 같은 선수들이 그에게서 ‘발 떼기’를 배우고, 샌드백을 두들겼습니다. 김 관장은 특히 1993년 송기연을 중량급 선수로는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미국 현지로 데려가 미들급 타이틀매치를 벌였습니다. 김관장은 그때를 자신의 복싱지도자로서 최고 황금기라고 말합니다.

  덕흥권투체육관은 전성기 때 소속선수가 40명에 달했습니다. 선수들은 25평 남짓한 지하실 체육관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면서 비지땀을 흘렸습니다. 그시절 김 관장을 두말할 나위없고, 그의 부인까지도 갖은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선수들 시합날짜라도 정해질라치면 김관장 부부는 아예 선수를 집으로 데려가 밥을 해먹이면서 극진히 그들의 꿈을 가꾸어주었습니다. 김 관장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 한국권투협회(KBC)가 선정한 ‘최우수 관장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KBC가 선정한 최고의 권투지도자상은 그가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세계 챔피언을 키워내지는 못했어도 난 그동안 정통 복싱을 가르쳐왔어. 선수 만드느라 집까지 팔아치웠지만, 결코 후회해본 적이 없어. 권투선수로는 화려하지 못했지만, 지도자 생활은 여한이 없어. 선수들 덕분에 해외여행도 많이 했지, 뭐.” 

 

  그의 말로는, 3년 전에 이사온 서울 번동의 체육관은 신림동 체육관에 비하면 ‘호텔’ 수준이라고 합니다. 서울 시내에 있는 어떤 복싱 체육관을 가봐도 60평 되는 복싱도장은 없기 때문입니다. 번동으로 자리를 옮겨온 뒤 덕흥체육관에는 402명의 신규 회원이 모였고, 올해 새로 입관한 회원도 56명이나 됩니다. 숫자는 그 시절과 비교해서 결코 뒤처지지 않지만, 요사이 권투체육관은 많이 다릅니다. 챔피언을 꿈꾸는 복서 대신해 다이어트를 위한 취미복싱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된서리가 내리던 권투도장도 덕분에 사정은 조금 나은 편입니다. 전국적으로 권투체육관이 70곳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김 관장의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게 다 다이어트 복싱이고, 즐기는 댄싱 복싱이거든. 먹고살기 위해 죽도록 샌드백을 쳤던 시절과 살을 빼겠다고 샌드백을 두드리는 시절을 어떻게 비교하겠어? 대전료가 자장면 배달원 월급 정도라면 몰라도,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기는 이제 틀린 거지.”◎

사진*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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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블로그 어딘가..

  왠지 간접적으로 한 체육관을 홍보하는듯한 느낌도 들지만

글을 쓴 목적은 분명히 홍보가 아닐거라 믿고 퍼왔습니다.

 

  저 또한 한국 권투가 이전의 한국 권투처럼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고 우리 모두 한국 권투를 사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