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알고 보면 더 재밌다! (6/10 - 열사 이야기1)

김상규2007.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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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 알고 보면 더 재밌다! (6/10 - 열사 이야기1)




1. 오월, 청소년 열사 이야기


• 박금희 (18세-전남여상3)                 

헌혈을 호소하는 방송차량을 보고 기독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계엄군의 총격에 배를 맞고 기독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지고 말았다.

4남4녀중 막내딸인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실업계인 춘태여상(현 전남여상)에 다니고 있었다. 때로는 교통비가 없어 1시간 이상을 걸어서 등·하교를 해야했고 도시락을 가져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이렇게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박금희는 몸과 마음이 대단히 건강하였다. 학교 성적도 우수하였고 선도부장을 맡을 정도로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음악을 좋아하여 기타를 치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낭만적인 성격이기도 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인 그는 시민들의 애틋한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박금희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87년까지 매년 5월 21일이 되면 친구들은 금희가 누워있는 묘지 가까운 산 속에서 경찰들 눈을 피해 숨어서 생일파티를 해주었다고 한다.


• 박성룡 (18세-조대부고3)

“공수부대는 이 나라 군인이고 국민인데 왜 부모형제 같은 광주시민을 이렇게 무참히 죽이는 것인가”

19일 파출소가 불타는 것을 구경하러 나갔다가 21일 저녁에 어머니께서 걱정하고 계실까봐 집에 들어와 토한 울분이었다. 그는 3일 만에 집에 들어와 광주역에서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었고 광주공원에서는 자기 친구가 공수부대에게 맞아 죽었다고 하면서 어머니 앞에서 분노를 누르지 못했다.

그는 “광주시민을 이렇게 다 죽이고 있는데 젊은 놈이 어떻게 집에만 있을 수 있겠는냐”며 26일에 다시 집을 나가 27일 도청으로 들어가 27일 새벽 최후항쟁에 참여하여 숨졌다.


그는 ‘왜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시민을 죽이는가 ?’ 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총을 들고 불의에 맞섰던 것이다. 그는 27일 도청에서 배와 허벅지에 총을 맞고 숨졌다.


• 박현숙 (17-신의여고3)

신의여고 3학년이던 박현숙양은 21일 공수부대가 물러간 뒤 도청으로 들어가 지하실에 안치된 시신을 깨끗하게 닦고 옷을 갈아 입히는 등 여고생으로는 하기 힘든 일을 하였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숨지자 광주에서는 관이 동났다.

그래서 21일 화순으로 가는 소형버스에 몸을 실었다가 주남마을에서 공수부대가 쏜 총에 맞아 몸이 벌집이 되어 숨졌다.


•양창근 (16세-숭의실고1)

숭의실고 1학년이던 양창근군은 휴교령이 내리는 19일 오후부터 거리를 돌아다녔다.

다칠 것을 염려한 가족들이 ‘꼭 집에만 있으라’고 당부했지만 그는 집에 있는 것조차 죄로 생각되어 시위대열을 따라 다녔다. 공수부대가 물러간 21일이 지나도 양군이 집에 들어오지 않자 가족들은 그를 찾아 나섰으나 찾지 못하고 나중에 망월동에 묻혀 있는 양군의 시신을 찾게 되었다.


• 김완봉 (15세-무등중3)

무등중학교 3학년인 김완봉군은 부처님 오신날 어머니 송영도씨와 함께 절에 가던 중 구시청 사거리에서 젊은 여자들이 모금된 돈 10만원을 주며 ‘금남로 청년들에게 빵과 우유를 사다 주라’는 부탁을 받고 도청에 갔다 숨졌다.


• 안종필 (17세-광주상고1)

광주상고 1학년인 안종필군은 18일부터 항쟁에 참여했다. 22일 저녁에 집에 들어오자 가족들이 ‘그러다 개죽음 당하면 너만 손해다’며 참여를 막자 ‘이번 죽음은 절대로 개죽음이 아니다’고 가족들을 설득하며 밤에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25일 저녁에 다시 집에 와 “나는 도청에서 지하실에 안치된 시신을 가족들이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며 “시체를 보면 무섭지 않더냐”는 가족들 말에 “그들의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비참한 것이다.”고 대답했다. 26일 밤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청을 찾아간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한 채 그는 다음날 새벽 짧지만 굵은 삶을 마감했다.

 그는 새벽에 친구 대신 신문배달을 해주고 구두닦이 아이들이 있으면 어머니가 하는 식당에 데리고 와 고기를 먹이곤 하였다.  6살 때부터 시작된 신앙생활은 그에게 확고한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비록 나이는 어린 고등학생이었지만 역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도청에서 선배들과 운명을 함께 했다.


• 문재학 (17세-광주상고1)

광주상고 1학년이던 문재학군은 21일부터 시위에 참여하여 27일 도청에서 숨진다.  26일 밤 도청으로 찾아온 부모님에게 “얼마나 많은 광주시민들이 죽었는데, 집에 돌아가 편히 잠잘 수 있겠어요? 도청에 남아 심부름이라도 해야한다”고 말하면서 부모의 간곡한 요구를 뿌리쳤다.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에 남아 시민군들과 함께 했던 문재학군의 정신은 우리 청소년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 김종철 (18세-노동자)

집안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한 채 장롱을 만드는 자개공으로 근무하던 그는 아버지와 함께 외삼촌댁으로 가다 손수레에 싣고 도청으로 가던 시신 2구를 본 다음 아버지에게 “더 이상 못 참겠다”며 그 길로 항쟁에 참여했다.

25일 아버지가 도청으로 가서 집에 가자고 할 때 “지금 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은 끝맺어야 될 것 아닙니까”며 아버지를 돌려보냈다. 이것이 아버지와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는 눈을 맞아 뒷머리가 없는 모습으로 도청에서 숨졌다.

그는 광주민중항쟁에 불을 지른 손수레 시신을 보고 항쟁에 뛰어 들었고 결사항전으로 아름다운 청년의 생을 마친 진짜배기 노동자였다.


• 전재수 (11세-효덕 초등학교4)

효덕초등학교 4학년이던 재수는 평소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였다. 형과 누나도 있었지만 학교에서 상장 타오는 자식은 재수밖에 없었다. 봄에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자 학교는 임시 휴계령이 내려졌다.

24일 재수는 밖에서 놀다 들어와 점심을 먹고 여동생과 장난하며 놀았다. 아버지는 몸이 불편해 애들 노는 소리에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며 야단쳤다. 재수는 마음이 착해 “밖에서 친구들과 놀겠다”며 나갔다. 내가 그때 “조용히 해라는 말만 안했어도 그 놈이 나가서 그런 비참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하며 가슴 아파하고 있다.

오후 1시 15분쯤 집에 있던 아버지는 폭죽 터지듯󰡐따다다다…󰡑하는 총소리를 듣고󰡐무슨 일인가󰡑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시 후 마을 아이가 와서 “재수가 총에 맞아 죽었어요”하는 청천병력 같은 말을 했다. 바로 밖으로 나갔으나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못 보게 했다. 안보는 것이 속편할거라고 했다. 시신 주위에는 파리가 들끓고 있었다.  사람들이 상황을 말해 주었다. 아이들이 마을 앞 선산에서 도로로 이어진 비탈길에서 미끄럼을 타면서 놀고 있었다.  애들은 느닷없는 총소리를 듣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선산 위쪽에 있던 아이들은 총소리를 듣고 재빨리 숨었는데, 선산 아래에 있던 재수는 선산 위쪽으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다가 고무신이 벗겨졌다. 9일전 어머니가 생일선물로 사준 그 신발을 주우려고 돌아선 순간 총탄이 옆구리와 허벅지에 6·7발 날아와 어린 생명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자식이 죽고 나서 아버지는 술이라도 먹고 잊어버리려 했지만 엄마는 밥도 안 먹고 시름시름 앓다가 4년 후, 화병으로 아들 곁으로 가고 말았다.


• 손옥례 (19세)

손옥례양은 희생자중에서 가장 잔인하게 죽은 사람이며 가정파괴도 가장 비극적으로 이루어졌다.

21일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손옥례씨는 대검에 왼쪽 젖가슴이 찔리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70센티 박달나무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아 온 몸이 두부처럼 짓이겨지고  아랫배에는 수십 발의 총탄세례를 받고 숨졌다.

동생도 공수부대에게 얻어맞은 휴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남동생 손병석씨는 이상현 외과병원에 일반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8일은 일요일이라 평소부터 다니던 은광교회를 가다가 서석병원 앞에서 공수부대원한테 두들겨 맞았다. 그 자리에서 실신한 후 깨어보니 통합병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상처를 치료받기는커녕 계엄분소로 끌려가 왼쪽 허벅지를 대검에 찔려 10센티미터 이상 상처가 났으며 오른쪽 무릎관절을 비롯한 온몸이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온통

멍들어 있었다.

손병석씨는 풀려나고서 근무하던 병원에 입원하였다. 현재 간질 비슷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일 뿐 아니라 군인들만 보면 덤벼들어 싸우려 한다.

아들이 병원에 누어 있는데다 딸마저 끔찍하게 죽자 부모님은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술로 아픔을 달래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자주 호소하더니 1981년 9월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도 딸 때문에 충격으로 사지마비를 일으켰다.

남편이 죽자 가슴앓이가 심해져  1986년 12월에 54세에 딸과 남편 곁으로 갔다. 


• 방광범 (14세-중1)

24일 오전 11시 지원동에 주둔했던 공수부대는 27일 작전을 위해 공항으로 이동했다. 

일부는 차를 이용하고 나머지는 걸었다. 주민들은 공수부대에게 물을 주는 등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진월동을 지나면서 주택가에 총격을 했다.

12시 40분쯤에 광범이는 10여명 친구들과 원제부락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총소리에 놀라 몸을 피하던 그는 친구들이 “광범아 엎드려”하고 소리치는 순간 총에 머리를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아버지 방두형씨는 머리가 날아가고 없다는 말에 현장에 가보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오후에 동네 청년들이 야산에다 아버지도 모르게 묻어줬다.

이틀 후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저수지를 지나서 정신 없이 야산으로 갔다.

야산에서 방광범씨의 묘를 찾으러 돌아다니는데 공수부대가 총을 겨누었다. 

아내가 “아들이 죽어 묘 찾으러 왔다, 총 쏘지 마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밥도 못 먹고 술로 고통을 잊으려고 했다. 결국 정신분열증까지 생겨 부인과 이혼하고 말았다.  공수부대는 광범이의 머리와 행복했던 가정을 이렇게 깨뜨리고 말았다.


• 김부열 (18세-조대부고3)

조대부고 3학년인 그는 19일 학교에 다녀와 “조선대 앞에서 군인들이 여대생을 붙잡아 속옷만 입혀놓고 토끼뜀을 시키더라”는 얘기를 하며 몹시 열을 냈다. 20일부터는 고등학교까지 휴교령이 내렸고 이때부터 그는 항쟁에 참여했다.

시민군이 된 그는 지원동 야산에서 주택가에 총격을 하고 있던 공수부대를 쫓아가다 죽었다.  그는 주남마을에서 머리와 왼팔이 잘린 채 발견되었다.


• 전영진 (19세-대동고3)

대동고 3학년이던 전영진군은 5월 18일 참고서를 사기 위해 시내에 나갔다가 공수부대에게 얻어맞고 돌아와 치솟는 울분을 참느라 밥도 먹지 않았다. 21일 그는 도청 옥상에서 정조준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 박기현 (16세-동신중3)

동신중학교 3학년이던 박기현군은 책을 사러 자전거를 타고 가다 공수부대에게 붙잡혔다.

자전거에서 내리게 한 공수부대원은 “너 지금 어디 연락하러 가는 길이냐”며 진압봉으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중학생이라고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이 자식이 폭도 연락병이다”며 정수리를 내리쳤다. 그는 앞머


리가 깨지고 온 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어머니는 그 때 충격으로 심장병을 얻었다.


• 김명숙 (16세-서광여중3)

27일 오후 8시쯤에 친구에게 참고서를 빌리려 가다 전대 앞 천변에서 계엄군이 쏜 총을 맞고 숨졌다.

오빠와 언니가 중학교에 가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여 참고서를 사지 못해 친구에게 빌리러 가다 김명숙양은 희생된 것이다.


• 함광수(18세-미장공)

80년 5월 22일 함광수군은 오전까지 아버지와 함께 공사장에서 일을 했다. 오후 4시경 갑자기 총성이 들려 옥상으로 올라간 그는 송정리 방향에서 탱크를 앞세운 수백 명의 군이들이 몰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군인들은 도로 양편에서 무차별 총격을 가하며 전진해 오고 있었다. 군인들의 총구엣 뿜어진 총탄은 주택가에도 날아들었고 도로에서 움직이는 것은 모조리 쓰러뜨렸다. 이 광경을 옥상에서 구경하다가 함광수는 계엄군의 총탄에 머리를 맞고 사망했다.


• 이성자(15세-가정형편으로 미취학)

고아원에서 자라 당시 부모에게 입양되어 가정형편으로 초등학교를 마친 후 포목상을 하는 부모 밑에서 일을 돕던 이성자양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시내 데모를 구경한다며 5월 21일 오후에 집을 나갔다가 동구청 뒤에서 공수부대의 총탄에 가슴을 관통 당해 바로 사망했다.


• 김춘례(18세-일신방직 여공)

일신방직 여공이었던 김춘례양은 80년 5월 23일이 할아버지 제사여서 고향인 화순으로 가기 위해 기숙사 동료인 고영자양과 함께 시내로 나왔다. 이미 시외전화까지 끊겨 있고 화순 가는 시외버스도 없어 도청으로 가서 시민군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화순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시민군 9명이 차량 한 대에 두여공을 태우고 화순으로 가는 도중 공수부대의 주둔지인 지원동 주남마을을 1Km 남짓 지났을 때 갑자기 양쪽 산에서 공수부대의 빗발치는 총탄에 김춘례양과 함께  차에 탔던 사람 모두 차에서 내려 손을 들고 쏘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계속 쏟아지는 총탄에 맞고 숨졌다.


• 김종연(17세-고입 재수생)

장흥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김종연군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광주에서 자취하며 공부하고 있었다. 김종연군은 80년 5월 18일부터 시위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따라 다니거나 구경만 하다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학살만행을 보고 직접 시위에 참여하여 마지막 27일 새벽 도청에서 사망했다.

80년 5월 30일 아버지는 망월동에서 이미 입관된 아들의 시신을 확인했다. 가슴과 어깨, 좌측 무릎과 골반에 관통상을 당한 아들의 시신은 부패되고 있었다. 관 위에는 도청에서 시위하다가 사망했다고 쓰여져 있었다.


• 김재형(18세-구두닦이)

광주학살의 참상을 왜곡 보도하는 언론에 대한 응징으로 시민들이 광주 MBC를 불태웠을 때도 김재형군은 함께 행동했다. 그러나 곧 이어 공수부대의 반격이 있자 피하는 과정에서 김재형군은 계엄군의 무차별 난사를 목에 맞고 쓰러졌다. 광주 고등학교 앞길에서 김재형군은  젊은 나이로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 염행렬(17세-검정고시 수험생)

중학교때 부터 공부를 썩 잘했던 염행렬군은 대학에 갈 수 없는 집안 형편 때문에 아예 포항제철 부설 직업학교에 가야했다. 그러나 남달리 대학에 대한 집념이 강했던 염행렬군은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광주에 올라와 학원에 다니다 5월 27일 새벽 도청 후문에서 공수부대의 총탄이 복부를 관통하여 숨졌다.



• 그 외

박인배(18세-자개공),  김영두(17세-검정고시 준비 학원생),  민청진(19세-기능공), 양희영(19세), 이종연(17세-재수생), 양희태(16세), 김평용(17세-사레오고 2학년), 이강수(19세-재수생), 서종덕(18세), 김승후(17세-선반공), 백대환(19세-전문대 1학년), 김함옥(18세), 문민규(18세), 이성귀(18세-광주상고 2학년), 박창권(14세-숭의중 2학년),



• 행불자

임옥환(17세-조대부고 3학년), 김남석(19세), 김준동(17세-목공), 이기환(15세-기능공), 유재성(17세), 권호형(17세-학생), 김기운(18세-송원고), 김광복(14세-가구공), 김재영(17세), 문미숙(10세), 윤순애(1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