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발표되기 전부터 여산에 주둔한 제 7공수가 각 대학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전남대학교와 광주교육대에는 33특전대대가, 조선대와 전남대 의과대학에는 35특전대대가 투입되는 등 광주전남지역 12개 대학에 700여명의 공수특전단이 투입되었다. 이들은 각 대학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학교 도서관 등에 남아있던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연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전북대에서는 이세종군이 구타로 사망하기도 했다. 일요일인 18일 새벽부터 전남대 정문에는 도서관에 들어가려는 학생들과 교문을 봉쇄하는 공수부대와의 마찰이 일어났다. 오전 10시쯤에는 도서관에 들어가려는 학생들과 상당수의 학생들(휴교령이 내리면 10시에 교문 앞에 모이자고 약속되었음)이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정문 앞 다리에 연좌하여 “비상계엄 해제” “휴교령 철회”등의 구호를 외쳤고, 정문을 지키던 공수부대는 갑자기 “와”소리와 함께 달려 나와 최루탄을 쏘며 곤봉으로 학생들을 무참히 폭행하였다.
학생들은 급작스러운 공격으로일시 해산되었으나 동료학생들이 계엄군에 의해 심한 구타를 당하며 연행되는 것을 목격하고 교문에서 일정하게 떨어진 곳에서 다시 집결하여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계속했고 이에 대해 교문 안으로 철수한 공수부대는 다시 두세 차례의 해산을 종용하는 선무방송을 실시한 후 이번에는 첫 번째보다 많은 수가 2-3명 1조로 시위대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하여 쫓기던 학생들이 인근 주택가로 몸을 피할 경우 주택에 난입하면서까지 연행하는가 하면 잡히는 학생마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무참하게 구타하여 연행하였다. 학생들은 흩어지면서 금남로로 모이자는 구호를 외치며 해산하고 신역과 공용터미날, 일부는 광주공원을 거쳐 금남로 도청 앞까지 뛰어갔다. 카톨릭센타앞 금남로 거리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간 학생들은 그 숫자가 3-4백 명 정도였으며, “비상계엄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다가 11시경 전투경찰의 최루탄에 해산되었다. 골목골목으로 흩어진 학생들은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기습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1시쯤에는 학생들이 시내중심부를 벗어나 시민들에게 계엄사실을 알리기 위한 시위에 돌입하였고 군데군데에서 경찰과 학생들과의 충돌이 이어졌다. 오후 3시 30분경에는 각 대학에 주둔중이던 공수부대가 시내로 출동하여 진압에 나섰다. 이들은 수창국민학교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는 물론 지나가는 시민들에게도 곤봉과 대검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30분 만에 300여명을 연행하는 등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렀다. 금남로 일원에서 몸을 피한 학생 시위대는 일시 흩어졌다가 다시 공용터미널 광장에 모였다. 일부 학생들은 터미널 대합실 안에 들어가 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금남로 일원에서 자행된 공수부대의 잔학상을 폭로하고 있었고, 시위대는 광장에 세워져 있던 자갈을 실은 트럭을 도로 한가운데로 끌어내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이어 금남로에서 작전을 전개하던 계엄군들이 공용터미널 상황에 투입되자 경찰병력은 곧바로 철수했다.
공용터미널 부근의 시위대가 해산되고, 일부 시위대가 터미널 안으로 몸을 피하자, 이번에는 터미널 안에 무차별 최루탄을 발사한 후 방독면을 착용하고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 젊게 보이는 사람들마다 닥치는대로 곤봉과 총개머리판으로 구타하여 끌고 나갔다. 이렇듯 공수부대의 잔인한 폭력은 당시 터미널 지하실에서 수많은 시체들을 목격했다는 시민들의 말과 더불어 광주시내 뿐만이 아니라 전남일원에 급속하게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시위는 학생뿐 아니라 시민들까지 가세하여 몽둥이와 연탄집게 등으로 공수부대에 대항하였으며, 공수부대는 이날 밤늦도록 가택수색을 계속하며 젊은 사람은 무조건 연행하였다. 한편 전남북계엄분소는 통행금지 시간을 밤 9시로 앞당기고, 계엄사령부는 서울시내에 배치된 11공수를 광주에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일부는 수송기로 일부는 열차로 수송하였다.
• 5월 19일
이날 아침부터 거리거리에는 착검한 공수부대가 배치되었고, 증파된 11특전여단은 금남로에서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무력시위를 감행하였다. 거리에는 살기가 돌았고 인적이 드물어졌다. 그러나 어제의 만행이 이 집 저 집에 알려지자 분노에 찬 시민들은 오전 11시경부터 금남로 3가 카톨릭센타 앞으로 몰려나와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가 시작되자 금남로 일원 7특전여단 35대대 및 11특전여단 병력 투입되어 진압작전이 개시되었으며 이때부터 공수부대는 착검한 대검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위대열은 학생들은 거의 보이지 않은 채 일반시민들로 구성되기 시작했으며, 공수부대의 진압방법은 18일보다 가일층 잔혹해지기 시작했다. 수창국민학교 앞에서는 청년 한명을 전봇대에 기대어 세워놓고 시민들이 보는 가운데 집중 구타하여 피를 토하고 쓰러지게 했으며, 이날 오후부터는 붙잡히면 상하의를 벗기고 팬티만 입힌 채 도로상에 무릎을 꿇리고 구타를 자행하기 시작했고 나이든 시민들이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거나 추격을 제지하면 가차없이 진압봉으로 내리쳐 이날 나이든 사상자가 제일 많이 발생하였다.
점심시간이 다되어 공수부대가 교대하러 간 사이 시위대는 금남로 가톨릭센타 옥상에 고립되어 있던 몇 명의 공수부대를 공격하고, 도청 저지선에 불붙인 드럼통을 굴리는 등 적극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날은 시내 고등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하였다. 중앙여고생 1,300명은 아침 10시부터 교복에 흰 리본을 부착한 채 죽은 학생을 위한 추도식을 갖고 교내 시위에 들어갔고, 대동고와 광주일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한 채 노래와 구호를 외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날을 기해 시내 각 고등학교에 휴교조치가 내려졌고, 고교생들은 이날부터 개별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했다.
오후 5시쯤에는 계림동부근에서 위력시위를 전개하던 계엄군 장갑차가 시위대에 포위되어 감시경이 깨지고, 같이 있던 공수부대가 달아나자 다급해진 공수부대 중위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시위대를 향해 정조준 사격을 해 조대부고생 김영찬군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밤늦게까지 유동과 터미널 등지에서 시위를 전개하던 시민들은 광주역앞에 있는 KBS와 파출소에 투석하고, 임동파출소를 불태웠다. 이 때문에 유동, 임동 일대는 밤새도록 공수부대의 가택수색이 이어졌다. 한편 광주시민들은 TV 앞에 앉아 광주소식이 어떻게 방영되는가를 지켜보았으나 방송에서는 연속극과 오락프로만 방송되고 있었고, 뉴스에서도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한편 이날 미국의 태평양 지구 공군사령관 휴즈중장은 ‘북한의 남침’운운하면서 완전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내외에 천명했다.
• 5월 20일
5월 20일 새벽에 또다시 광주에 3특전여단 병력이 추가 투입되어 전남대에 주둔하며,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이 3특전여단 병력은 주로 광주역과 광주시청 일원에서 작전을 전개했다. 5월 20일 오전은 시내 전역에서 밤을 지새우는 시위가 있었던 탓으로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서 당시 계엄사에서 최초의 사망자로 공식 발표되었던 시민의 시체 한 구가 발견되어 시민들에게 공개됨으로서 상황은 더욱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남주조장에서 발견된 이 시신은 김안부씨로 얼굴과 가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상태였다. 시민들은 이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로 진출, 시민들에게 공개함으로서 다시 시위가 가열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이날 오후부터는 계엄군의 착검한 대검과 곤봉에 맞서 각목과 쇠파이프 등으로 자위적 무장을 하고 대치함으로서 이전의 양상과는 달리 공수부대는 목표를 향한 무조건 돌격식 진압작전의 형태에서 상당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눈앞에서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대검에 찔리고, 형언할 수 없을 지경으로 피곤죽이 되도록 구타를 당하는 상황을 목격해 온 시민들이었지만 얼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짓뭉개진 시신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결사적 대항의지를 갖게 되었고 오후가 되면서 금남로에 다시 집결하기 시작했다. 리어카에 실은 시신을 앞세우고 금남로에서 시위대열을 형성했던 시민들은 공수부대에 의해 흩어졌다가 다시 금남로와 연결된 도로에 수백 명 단위로 재집결하여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편 5월 19일 시외곽에서 시민들을 시내로 실어 나른다는 이유로 택시운전사 4명이 계엄군에 의해 무참히 구타당한 시신이 시내 운전사들에게 전달되어 5월 20일 공설운동장에 시내 차량들이 집결, 오후 5시경에 도청 앞에 있는 계엄군을 차량으로 물리치자는 결의로 차량시위를 전개했다. 이날의 차량시위는 택시운전자들만이 참여한 것이 아니라 시내버스, 대형트럭운전자등도 참여했는데, 이는 18, 19일 양일간에 공수부대가 시내를 운행하던 시내버스를 무조건 세우게 한 후 차내에 있던 젊은 청년이나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여 끌어내리는 만행을 곳곳에서 자행하여 운전자들이 이를 많이 목격했기 때문에 그만큼 공분이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남로는 일시에 뒤엉킨 차량과 자욱한 최루탄 가스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공수부대의 진압봉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어깨가 내려앉았으며, 비명과 함성이 뒤섞이고 피가 낭자했다. 금남로 차량시위에서 해산된 시민들은 다시 흩어져 양 옆 도로로 몸을 피했다가 당시 문화방송이 있던 장동지역에 재집결하였다.
당시 외부와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던 광주시민들은 광주에서 자행되고 있는 공수부대의 만행이 타 지역에 제대로 알려져야 한다는 갈증을 가지고 있었으나 언론에서는 소요의 모든 원인을 불순분자의 배후조종으로 보도하고 있었으며, 계엄군의 잔악한 만행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불행한 사태의 수습을 위해 군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보도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언론에 대해 시민들은 격분하였고, 마침내 문화방송이 불태워졌다.
10만여 명에 이른 시민들은 그 여세를 몰아 공용터미널을 경유, 그 지역에 있던 시민들과 합세하여 광주역으로 향했다.
광주역 광장에 이른 시위대는 도로가의 가로등과 공중전화 부스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계엄군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가 부족한 계엄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시청 지역은 공수부대가 시위대에 의해 고립되기에 이르렀다. 자정 무렵 시위대에 의해 시청과 광주역은 점거위기에 직면했다. 고립된 공수부대는 지원부대와 연결할 방법과 특히 시청과 광주역 병력의 연결을 시도했으나 시민들의 치열한 대치로 용이하지 않자, 마침내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광주역 병력은 발포를 시작했고, 시청에서는 31사로부터 긴급 지원된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며 대치하고 있던 시민들을 해산시켰다. 이날 시청 앞에서 발사한 화염방사기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최강식씨로 이후 7년여 동안 골수암을 앓다가 사망했다. 광주역과 시청일원의 시위는 공수부대의 발포와 화염방사기의 사용에 의해 해산되고 지역에서 고립되어 있던 3특전여단의 병력은 전남대로 철수했다.
• 5월 21일
21일 새벽 6시경 광주역 부근에서 밤을 새운 시위대는 계엄군이 물러난 광주역 안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역대합실에서 계엄군이 버리고 간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도청앞 광장으로 출발했다. 한편 시내일원에서 작전을 전개하던 공수부대는 20일을 전후해서 연행자들의 수가 많아지자 미처 상무대로 이송하지 못하고 전남대에 구금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의 숙영지였던 전남대로 끌려들어 간 시민들은 잡혀 올 때 만신창이가 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공수부대는 이곳 전남대학교에서 다시 들어올 때마다 여기에 구금되어 있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형언할 수 없는 만행을 자행했다. 구금된 시민들을 세워놓고 대검으로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하는가 하면 헤아릴 수 없는 구타를 자행했다.
공수부대는 1980년 5월 21일 전남대학교에서 광주교도소로 이동하면서 전남대에 구금되어 있던 시민들을 함께 이송했다. 이송은 군용 부식차량에 시민들을 세워서 빽빽하게 태운 후 그 차안에 최루탄을 터트리고 밖에서 문을 잠가버린채 이동하여 그 차안에 있던 상당수의 시민들이 질식, 또는 화상에 의해 중상을 입었으며,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과정에서 희생된 시민들도 많았다고 한다.
광주교도소에 도착한 시민들은 교도소내 창고에 구금된 채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상태에서 몽둥이로 맞고 군홧발에 걷어 채이는 등의 구타와 기합, 그리고 끊임없는 조사등으로 엄청난 고통을 치렀던 것이다. 그리고 계엄당국에서는 한미연합사의 승인을 얻어 20사단 4개 대대를 광주에 급파하기로 하여 오전 8시쯤 상무대에 도착하였다. 시민들의 저항을 광주진입에 실패한 20사단은 광주외곽 봉쇄작전에 들어갔다.
시민들은 이날 오전에 아시아 자동차로 몰려가 군용트럭과, 버스, 장갑차 등을 몰고 도청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일부 시민들은 사실전파를 위해 시외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9시가 넘어서부터는 차량을 이용한 도청공격이 본격화되었고, 차량을 몰고 도청으로 진격하던 시민과 차량위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시민 모두가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되었다. 공수부대는 도청에만 몰려 있는 상태였고, 시민들은 도청을 포위하고 있었다. 10시쯤에는 시위현장에서 뽑은 대표 김범태씨와 전옥주씨가 도청안으로 들어가 장형태 전남지사를 만나 협상했다.
이들은 지사에게
1. 유혈사태에 대해 도지사가 공개 사과할 것
2. 연행한 시민.학생을 전원 석방할 것
3. 입원시켰다는 부상자들의 소재와 신원을 공개할 것
4. 계엄군은 21일 정오까지 시내에서 모두 철수할 것
5. 전남북 계엄분소장과 시민대표의 협상을 주선할 것
등을 요구했다.
전남도지사는 ‘군철수는 최대한 노력하겠으며 나머지도 책임지고 처리하겠다’고 밝히고 대표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도지사의 무책임한 약속에 시민들은 시위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고, 11시 쯤에는 시위대가 10만을 넘어섰다. 약속한 12시가 되어도 계엄군이 철수하지 않자 시민들은 도청으로 조금씩 밀고 들어갔다. 군인들과의 거리는 10m밖에 안되었다. 12시 30분쯤 도청 스피커에서는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시민들은 숙연해졌다. 그러나 애국가 소리가 끝나자마자 콩볶는 듯한 소리가 진동하며 앞에선 시민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금남로에는 수십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시민들은 인근 골목으로 피하였다.
• 5월 22일~24일
22일 아침이 되면서 많은 시민들이 도청으로 들어갔으나 지난 싸움에서 통일된 지도부가 없어서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 오전 11시경 지역 유지급 인사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사태 수습에 나서기로 하고, 재야인사들은 수습대책위에 합류하여 정부당국에 대한 7개항의 요구사항을 결정하였다.
1. 사태수습전에 군을 투입하지 말 것
2. 연행자 전원을 석방하라
3. 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라
4. 사후 보복 금지
5. 책임면제
6. 사망자 보상
7.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해제를 하겠다.
는 내용을 가지고 수습위원 8명이 상무대 전남북계엄분소를 방문하여 군측과 협상하였으나, 계엄군은 불성실하게 협상에 응하면서 ‘무기회수’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22일부터는 지금까지 유인물을 제작하였던 팀이 합하여 ‘투사회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도청에 들어간 재야인사들은 학생들을 모아 ‘학생수습대책위’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위원장,총무,대변인,무기관리,장례담당,총기회수반,차량통제반,의료반등으로 구성된 ‘학생수습대책위’는 즉각 무기회수에 들어가 2천여 정의 버려진 무기를 도청으로 수집했다. 당시 도청안에는 도청간부와 이들이 내세운 ‘수습대책위’, 재야인사가 중심이 된 ‘수습대책위’와 ‘학생수습대책위’ 및 계엄군 정보공작요원 등이 혼재되어 체계가 잡히지 않는 상태였다. 이에 재야인사들은 학생들을 YMCA로 집결시킨 뒤 모이는 대로 도청으로 들여보냈다. 마침내 25일 저녁에는 무기를 든 많은 학생들이 도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22일 광주에 온 박충훈 국무총리는 정작 광주시민들앞에 나서지 못하고 계엄분소에 들러 상황보고만 듣고 시민들에게 보내는 호소문만 내놓았다.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의 노력으로 광주사태는 호전되고 있다. 시민들은 일부 폭도와 불순분자들의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에 현혹되거나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또한 저녁 7시 30분 전국적으로 중계된 라디오와 TV방송을 통해 “현재 광주시내에는 군병력도 경찰도 없는 치안부재상태이다. 일부 불순분자들이 관공서를 습격, 방화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군인들에게 발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은 명령 때문에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못하여 울화통이 터지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같다..”고 말했다.
• 5월 25일
오후 5시경 최규하 허수아비 대통령이 상무대를 방문하였다. 상무대에 도착한 최규하는 현지담화를 발표하고, 충정작전 계획을 보고 받았다. 이 자리에서 미국과의 합의내용을 토대로 27일 이후에 전교사 사령관인 소준열 소장의 책임하에 충정작전계획을 실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도청에서는 25일 오후 새롭게 지도부를 결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계엄군의 일방적인 항복요구에 무릎을 꿇고 만다면, 도청에 있는 수습위원들은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며 지금까지 고귀한 생명들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이 땅의 민주주의는 영원히 포기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5일 밤 항복과 투쟁의 갈림 길속에서 도청안은 수선스러웠다. 계속적인 투쟁만이 진정한 승리를 안겨다 줄 것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가두홍보방송을 통해 집결시킨 대학생들의 힘을 바탕으로 새로이 조직을 결성하고, 무기회수와 무조건 반납을 주장하던 측은 위협을 느끼며 도청을 빠져나갔다.
이때 도청내에 ‘민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 조직이 뒷날 통상 ‘항쟁지도부’로 불리게 된다.
새로운 조직 구성과 더불어 계엄군과 장기적으로 대치할 것으로 판단하고 투쟁위원회는 시민생활을 정상화시키고 산만하던 무장력을 통일된 지휘체계로 조직화하기로 하였다.
1. 시내버스를 정상운행하도록 한다.
2. 공무원과 경찰을 비무장으로 근무토록 한다.
3. 상가와 시장의 문을 열도록 한다
4. 각 동별로 피해상황을 집계한다.
5. 시민들에게 시청의 비축미를 공급한다.
6. 가능한대로 언론기관을 가동시킨다.
7. 유류사용을 통제한다
8. 시외전화를 개통시킨다
9. 순찰대를 개편강화하고 기동타격대를 운영한다.
등이었다.
또 무장력 개편을 위해 도청 주변에 산만하게 배치되었던 경계요원을 25일 새로 도청에 들어온 일반 대학생들로 교체했으며, 예비군을 동원하여 외곽경계를 서도록 하고 기동타격대를 편성 운영키로 하였다.
• 5월 26일
도청 민주투쟁위원회 위원들이 날을 새우며 새롭게 조직을 개편하고 장기전을 준비하는 동안 계엄군의 진압작전은 차근차근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새벽 5시경 화정동 통합병원에 버티고 서있던 계엄군의 탱크가 시내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김성룡신부등 일반수습위원들이 시민들과 함께 계엄군이 진입해 오는 농성동 부근으로 ‘죽음의 행진’이라 불린 침묵행진을 시작했다. 현장에서 지휘관과의 협상에서 계엄군은 ‘무조건 총기를 회수하고 반납하라’고 협박하고 수습위원들은 ‘시내질서는 우리가 책임지고 처리할 것이니 계엄군은 무력으로 밀고 들어오지 말라’고 주장하였으나, 계엄군은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서 계엄군 진입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다시 도청앞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제 4차 민주수호범시민 궐기대회가 자연스럽게 열렸다. 분노가 가득한 시민들이 분수대에 올라가 계엄군의 잔인성과 시민군과의 협상을 배신한 사실을 규탄하였다.
시민들은 22일부터 매일 오후 3시와 9시, 두 차례씩 도청 분수대 앞에서 궐기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여 진행했다원하는 사람에게 연설할 기회를 주고 토론과 발표을 했다. 시가행진의 코스와 요령 및 선언문 내용, 그리고 시내 치안유지 방법 등이 토론되었으며, 광주 조직폭력배인 오비파와 화신파 두목들도 연단에 나와 민주화 투쟁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특히 질서유지에 역점을 두고 시민들로 치안대를 구성 경찰 서장집, 박인천 사장집, 관공서 등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폭력, 방화, 강도를 방지했다. 시위차량도 조직적으로 나누어 지휘차, 대변인차, 식량수송차, 무기수송차, 시민수송차로 역할을 전개했으며 또 생필품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쌀과 석유의 매점매석을 막았다. 광주시민들은 7번의 집회를 통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면서 새로운 질서와 사회상을 창조하였다.
25일 궐기대회에서는 미7함대 소속 항공모함이 부산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26일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마친 시민들은 민족과 역사 앞에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소원’을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시민들은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고 투쟁을 다짐했다. 이 노래는 광주시민들이 항쟁기간 가장 많이 부른 노래다.
도청 옥상에서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시민 여러분! 오늘 밤 계엄군이 쳐들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죽어도 좋다는 사람들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십시오.”
★화려한 휴가★ 알고 보면 더 재밌다! (3/10 - 발단 및 전개과정3)
2> 구체적 상황
• 5월 18일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발표되기 전부터 여산에 주둔한 제 7공수가 각 대학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전남대학교와 광주교육대에는 33특전대대가, 조선대와 전남대 의과대학에는 35특전대대가 투입되는 등 광주전남지역 12개 대학에 700여명의 공수특전단이 투입되었다. 이들은 각 대학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학교 도서관 등에 남아있던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연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전북대에서는 이세종군이 구타로 사망하기도 했다. 일요일인 18일 새벽부터 전남대 정문에는 도서관에 들어가려는 학생들과 교문을 봉쇄하는 공수부대와의 마찰이 일어났다. 오전 10시쯤에는 도서관에 들어가려는 학생들과 상당수의 학생들(휴교령이 내리면 10시에 교문 앞에 모이자고 약속되었음)이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정문 앞 다리에 연좌하여 “비상계엄 해제” “휴교령 철회”등의 구호를 외쳤고, 정문을 지키던 공수부대는 갑자기 “와”소리와 함께 달려 나와 최루탄을 쏘며 곤봉으로 학생들을 무참히 폭행하였다.
학생들은 급작스러운 공격으로일시 해산되었으나 동료학생들이 계엄군에 의해 심한 구타를 당하며 연행되는 것을 목격하고 교문에서 일정하게 떨어진 곳에서 다시 집결하여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계속했고 이에 대해 교문 안으로 철수한 공수부대는 다시 두세 차례의 해산을 종용하는 선무방송을 실시한 후 이번에는 첫 번째보다 많은 수가 2-3명 1조로 시위대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하여 쫓기던 학생들이 인근 주택가로 몸을 피할 경우 주택에 난입하면서까지 연행하는가 하면 잡히는 학생마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무참하게 구타하여 연행하였다. 학생들은 흩어지면서 금남로로 모이자는 구호를 외치며 해산하고 신역과 공용터미날, 일부는 광주공원을 거쳐 금남로 도청 앞까지 뛰어갔다. 카톨릭센타앞 금남로 거리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간 학생들은 그 숫자가 3-4백 명 정도였으며, “비상계엄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다가 11시경 전투경찰의 최루탄에 해산되었다. 골목골목으로 흩어진 학생들은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기습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1시쯤에는 학생들이 시내중심부를 벗어나 시민들에게 계엄사실을 알리기 위한 시위에 돌입하였고 군데군데에서 경찰과 학생들과의 충돌이 이어졌다. 오후 3시 30분경에는 각 대학에 주둔중이던 공수부대가 시내로 출동하여 진압에 나섰다. 이들은 수창국민학교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는 물론 지나가는 시민들에게도 곤봉과 대검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30분 만에 300여명을 연행하는 등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렀다. 금남로 일원에서 몸을 피한 학생 시위대는 일시 흩어졌다가 다시 공용터미널 광장에 모였다. 일부 학생들은 터미널 대합실 안에 들어가 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금남로 일원에서 자행된 공수부대의 잔학상을 폭로하고 있었고, 시위대는 광장에 세워져 있던 자갈을 실은 트럭을 도로 한가운데로 끌어내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이어 금남로에서 작전을 전개하던 계엄군들이 공용터미널 상황에 투입되자 경찰병력은 곧바로 철수했다.
공용터미널 부근의 시위대가 해산되고, 일부 시위대가 터미널 안으로 몸을 피하자, 이번에는 터미널 안에 무차별 최루탄을 발사한 후 방독면을 착용하고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 젊게 보이는 사람들마다 닥치는대로 곤봉과 총개머리판으로 구타하여 끌고 나갔다. 이렇듯 공수부대의 잔인한 폭력은 당시 터미널 지하실에서 수많은 시체들을 목격했다는 시민들의 말과 더불어 광주시내 뿐만이 아니라 전남일원에 급속하게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시위는 학생뿐 아니라 시민들까지 가세하여 몽둥이와 연탄집게 등으로 공수부대에 대항하였으며, 공수부대는 이날 밤늦도록 가택수색을 계속하며 젊은 사람은 무조건 연행하였다. 한편 전남북계엄분소는 통행금지 시간을 밤 9시로 앞당기고, 계엄사령부는 서울시내에 배치된 11공수를 광주에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일부는 수송기로 일부는 열차로 수송하였다.
• 5월 19일
이날 아침부터 거리거리에는 착검한 공수부대가 배치되었고, 증파된 11특전여단은 금남로에서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무력시위를 감행하였다. 거리에는 살기가 돌았고 인적이 드물어졌다. 그러나 어제의 만행이 이 집 저 집에 알려지자 분노에 찬 시민들은 오전 11시경부터 금남로 3가 카톨릭센타 앞으로 몰려나와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가 시작되자 금남로 일원 7특전여단 35대대 및 11특전여단 병력 투입되어 진압작전이 개시되었으며 이때부터 공수부대는 착검한 대검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위대열은 학생들은 거의 보이지 않은 채 일반시민들로 구성되기 시작했으며, 공수부대의 진압방법은 18일보다 가일층 잔혹해지기 시작했다. 수창국민학교 앞에서는 청년 한명을 전봇대에 기대어 세워놓고 시민들이 보는 가운데 집중 구타하여 피를 토하고 쓰러지게 했으며, 이날 오후부터는 붙잡히면 상하의를 벗기고 팬티만 입힌 채 도로상에 무릎을 꿇리고 구타를 자행하기 시작했고 나이든 시민들이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거나 추격을 제지하면 가차없이 진압봉으로 내리쳐 이날 나이든 사상자가 제일 많이 발생하였다.
점심시간이 다되어 공수부대가 교대하러 간 사이 시위대는 금남로 가톨릭센타 옥상에 고립되어 있던 몇 명의 공수부대를 공격하고, 도청 저지선에 불붙인 드럼통을 굴리는 등 적극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날은 시내 고등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하였다. 중앙여고생 1,300명은 아침 10시부터 교복에 흰 리본을 부착한 채 죽은 학생을 위한 추도식을 갖고 교내 시위에 들어갔고, 대동고와 광주일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한 채 노래와 구호를 외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날을 기해 시내 각 고등학교에 휴교조치가 내려졌고, 고교생들은 이날부터 개별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했다.
오후 5시쯤에는 계림동부근에서 위력시위를 전개하던 계엄군 장갑차가 시위대에 포위되어 감시경이 깨지고, 같이 있던 공수부대가 달아나자 다급해진 공수부대 중위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시위대를 향해 정조준 사격을 해 조대부고생 김영찬군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밤늦게까지 유동과 터미널 등지에서 시위를 전개하던 시민들은 광주역앞에 있는 KBS와 파출소에 투석하고, 임동파출소를 불태웠다. 이 때문에 유동, 임동 일대는 밤새도록 공수부대의 가택수색이 이어졌다. 한편 광주시민들은 TV 앞에 앉아 광주소식이 어떻게 방영되는가를 지켜보았으나 방송에서는 연속극과 오락프로만 방송되고 있었고, 뉴스에서도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한편 이날 미국의 태평양 지구 공군사령관 휴즈중장은 ‘북한의 남침’운운하면서 완전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내외에 천명했다.
• 5월 20일
5월 20일 새벽에 또다시 광주에 3특전여단 병력이 추가 투입되어 전남대에 주둔하며,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이 3특전여단 병력은 주로 광주역과 광주시청 일원에서 작전을 전개했다. 5월 20일 오전은 시내 전역에서 밤을 지새우는 시위가 있었던 탓으로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서 당시 계엄사에서 최초의 사망자로 공식 발표되었던 시민의 시체 한 구가 발견되어 시민들에게 공개됨으로서 상황은 더욱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남주조장에서 발견된 이 시신은 김안부씨로 얼굴과 가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상태였다. 시민들은 이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로 진출, 시민들에게 공개함으로서 다시 시위가 가열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이날 오후부터는 계엄군의 착검한 대검과 곤봉에 맞서 각목과 쇠파이프 등으로 자위적 무장을 하고 대치함으로서 이전의 양상과는 달리 공수부대는 목표를 향한 무조건 돌격식 진압작전의 형태에서 상당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눈앞에서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대검에 찔리고, 형언할 수 없을 지경으로 피곤죽이 되도록 구타를 당하는 상황을 목격해 온 시민들이었지만 얼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짓뭉개진 시신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결사적 대항의지를 갖게 되었고 오후가 되면서 금남로에 다시 집결하기 시작했다. 리어카에 실은 시신을 앞세우고 금남로에서 시위대열을 형성했던 시민들은 공수부대에 의해 흩어졌다가 다시 금남로와 연결된 도로에 수백 명 단위로 재집결하여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편 5월 19일 시외곽에서 시민들을 시내로 실어 나른다는 이유로 택시운전사 4명이 계엄군에 의해 무참히 구타당한 시신이 시내 운전사들에게 전달되어 5월 20일 공설운동장에 시내 차량들이 집결, 오후 5시경에 도청 앞에 있는 계엄군을 차량으로 물리치자는 결의로 차량시위를 전개했다. 이날의 차량시위는 택시운전자들만이 참여한 것이 아니라 시내버스, 대형트럭운전자등도 참여했는데, 이는 18, 19일 양일간에 공수부대가 시내를 운행하던 시내버스를 무조건 세우게 한 후 차내에 있던 젊은 청년이나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여 끌어내리는 만행을 곳곳에서 자행하여 운전자들이 이를 많이 목격했기 때문에 그만큼 공분이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남로는 일시에 뒤엉킨 차량과 자욱한 최루탄 가스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공수부대의 진압봉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어깨가 내려앉았으며, 비명과 함성이 뒤섞이고 피가 낭자했다. 금남로 차량시위에서 해산된 시민들은 다시 흩어져 양 옆 도로로 몸을 피했다가 당시 문화방송이 있던 장동지역에 재집결하였다.
당시 외부와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던 광주시민들은 광주에서 자행되고 있는 공수부대의 만행이 타 지역에 제대로 알려져야 한다는 갈증을 가지고 있었으나 언론에서는 소요의 모든 원인을 불순분자의 배후조종으로 보도하고 있었으며, 계엄군의 잔악한 만행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불행한 사태의 수습을 위해 군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보도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언론에 대해 시민들은 격분하였고, 마침내 문화방송이 불태워졌다.
10만여 명에 이른 시민들은 그 여세를 몰아 공용터미널을 경유, 그 지역에 있던 시민들과 합세하여 광주역으로 향했다.
광주역 광장에 이른 시위대는 도로가의 가로등과 공중전화 부스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계엄군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가 부족한 계엄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시청 지역은 공수부대가 시위대에 의해 고립되기에 이르렀다. 자정 무렵 시위대에 의해 시청과 광주역은 점거위기에 직면했다. 고립된 공수부대는 지원부대와 연결할 방법과 특히 시청과 광주역 병력의 연결을 시도했으나 시민들의 치열한 대치로 용이하지 않자, 마침내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광주역 병력은 발포를 시작했고, 시청에서는 31사로부터 긴급 지원된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며 대치하고 있던 시민들을 해산시켰다. 이날 시청 앞에서 발사한 화염방사기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최강식씨로 이후 7년여 동안 골수암을 앓다가 사망했다. 광주역과 시청일원의 시위는 공수부대의 발포와 화염방사기의 사용에 의해 해산되고 지역에서 고립되어 있던 3특전여단의 병력은 전남대로 철수했다.
• 5월 21일
21일 새벽 6시경 광주역 부근에서 밤을 새운 시위대는 계엄군이 물러난 광주역 안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역대합실에서 계엄군이 버리고 간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도청앞 광장으로 출발했다. 한편 시내일원에서 작전을 전개하던 공수부대는 20일을 전후해서 연행자들의 수가 많아지자 미처 상무대로 이송하지 못하고 전남대에 구금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의 숙영지였던 전남대로 끌려들어 간 시민들은 잡혀 올 때 만신창이가 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공수부대는 이곳 전남대학교에서 다시 들어올 때마다 여기에 구금되어 있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형언할 수 없는 만행을 자행했다. 구금된 시민들을 세워놓고 대검으로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하는가 하면 헤아릴 수 없는 구타를 자행했다.
공수부대는 1980년 5월 21일 전남대학교에서 광주교도소로 이동하면서 전남대에 구금되어 있던 시민들을 함께 이송했다. 이송은 군용 부식차량에 시민들을 세워서 빽빽하게 태운 후 그 차안에 최루탄을 터트리고 밖에서 문을 잠가버린채 이동하여 그 차안에 있던 상당수의 시민들이 질식, 또는 화상에 의해 중상을 입었으며,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과정에서 희생된 시민들도 많았다고 한다.
광주교도소에 도착한 시민들은 교도소내 창고에 구금된 채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상태에서 몽둥이로 맞고 군홧발에 걷어 채이는 등의 구타와 기합, 그리고 끊임없는 조사등으로 엄청난 고통을 치렀던 것이다. 그리고 계엄당국에서는 한미연합사의 승인을 얻어 20사단 4개 대대를 광주에 급파하기로 하여 오전 8시쯤 상무대에 도착하였다. 시민들의 저항을 광주진입에 실패한 20사단은 광주외곽 봉쇄작전에 들어갔다.
시민들은 이날 오전에 아시아 자동차로 몰려가 군용트럭과, 버스, 장갑차 등을 몰고 도청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일부 시민들은 사실전파를 위해 시외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9시가 넘어서부터는 차량을 이용한 도청공격이 본격화되었고, 차량을 몰고 도청으로 진격하던 시민과 차량위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시민 모두가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되었다. 공수부대는 도청에만 몰려 있는 상태였고, 시민들은 도청을 포위하고 있었다. 10시쯤에는 시위현장에서 뽑은 대표 김범태씨와 전옥주씨가 도청안으로 들어가 장형태 전남지사를 만나 협상했다.
이들은 지사에게
1. 유혈사태에 대해 도지사가 공개 사과할 것
2. 연행한 시민.학생을 전원 석방할 것
3. 입원시켰다는 부상자들의 소재와 신원을 공개할 것
4. 계엄군은 21일 정오까지 시내에서 모두 철수할 것
5. 전남북 계엄분소장과 시민대표의 협상을 주선할 것
등을 요구했다.
전남도지사는 ‘군철수는 최대한 노력하겠으며 나머지도 책임지고 처리하겠다’고 밝히고 대표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도지사의 무책임한 약속에 시민들은 시위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고, 11시 쯤에는 시위대가 10만을 넘어섰다. 약속한 12시가 되어도 계엄군이 철수하지 않자 시민들은 도청으로 조금씩 밀고 들어갔다. 군인들과의 거리는 10m밖에 안되었다. 12시 30분쯤 도청 스피커에서는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시민들은 숙연해졌다. 그러나 애국가 소리가 끝나자마자 콩볶는 듯한 소리가 진동하며 앞에선 시민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금남로에는 수십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시민들은 인근 골목으로 피하였다.
• 5월 22일~24일
22일 아침이 되면서 많은 시민들이 도청으로 들어갔으나 지난 싸움에서 통일된 지도부가 없어서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 오전 11시경 지역 유지급 인사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사태 수습에 나서기로 하고, 재야인사들은 수습대책위에 합류하여 정부당국에 대한 7개항의 요구사항을 결정하였다.
1. 사태수습전에 군을 투입하지 말 것
2. 연행자 전원을 석방하라
3. 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라
4. 사후 보복 금지
5. 책임면제
6. 사망자 보상
7.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해제를 하겠다.
는 내용을 가지고 수습위원 8명이 상무대 전남북계엄분소를 방문하여 군측과 협상하였으나, 계엄군은 불성실하게 협상에 응하면서 ‘무기회수’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22일부터는 지금까지 유인물을 제작하였던 팀이 합하여 ‘투사회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도청에 들어간 재야인사들은 학생들을 모아 ‘학생수습대책위’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위원장,총무,대변인,무기관리,장례담당,총기회수반,차량통제반,의료반등으로 구성된 ‘학생수습대책위’는 즉각 무기회수에 들어가 2천여 정의 버려진 무기를 도청으로 수집했다. 당시 도청안에는 도청간부와 이들이 내세운 ‘수습대책위’, 재야인사가 중심이 된 ‘수습대책위’와 ‘학생수습대책위’ 및 계엄군 정보공작요원 등이 혼재되어 체계가 잡히지 않는 상태였다. 이에 재야인사들은 학생들을 YMCA로 집결시킨 뒤 모이는 대로 도청으로 들여보냈다. 마침내 25일 저녁에는 무기를 든 많은 학생들이 도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22일 광주에 온 박충훈 국무총리는 정작 광주시민들앞에 나서지 못하고 계엄분소에 들러 상황보고만 듣고 시민들에게 보내는 호소문만 내놓았다.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의 노력으로 광주사태는 호전되고 있다. 시민들은 일부 폭도와 불순분자들의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에 현혹되거나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또한 저녁 7시 30분 전국적으로 중계된 라디오와 TV방송을 통해 “현재 광주시내에는 군병력도 경찰도 없는 치안부재상태이다. 일부 불순분자들이 관공서를 습격, 방화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군인들에게 발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은 명령 때문에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못하여 울화통이 터지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같다..”고 말했다.
• 5월 25일
오후 5시경 최규하 허수아비 대통령이 상무대를 방문하였다. 상무대에 도착한 최규하는 현지담화를 발표하고, 충정작전 계획을 보고 받았다. 이 자리에서 미국과의 합의내용을 토대로 27일 이후에 전교사 사령관인 소준열 소장의 책임하에 충정작전계획을 실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도청에서는 25일 오후 새롭게 지도부를 결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계엄군의 일방적인 항복요구에 무릎을 꿇고 만다면, 도청에 있는 수습위원들은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며 지금까지 고귀한 생명들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이 땅의 민주주의는 영원히 포기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5일 밤 항복과 투쟁의 갈림 길속에서 도청안은 수선스러웠다. 계속적인 투쟁만이 진정한 승리를 안겨다 줄 것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가두홍보방송을 통해 집결시킨 대학생들의 힘을 바탕으로 새로이 조직을 결성하고, 무기회수와 무조건 반납을 주장하던 측은 위협을 느끼며 도청을 빠져나갔다.
이때 도청내에 ‘민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 조직이 뒷날 통상 ‘항쟁지도부’로 불리게 된다.
새로운 조직 구성과 더불어 계엄군과 장기적으로 대치할 것으로 판단하고 투쟁위원회는 시민생활을 정상화시키고 산만하던 무장력을 통일된 지휘체계로 조직화하기로 하였다.
1. 시내버스를 정상운행하도록 한다.
2. 공무원과 경찰을 비무장으로 근무토록 한다.
3. 상가와 시장의 문을 열도록 한다
4. 각 동별로 피해상황을 집계한다.
5. 시민들에게 시청의 비축미를 공급한다.
6. 가능한대로 언론기관을 가동시킨다.
7. 유류사용을 통제한다
8. 시외전화를 개통시킨다
9. 순찰대를 개편강화하고 기동타격대를 운영한다.
등이었다.
또 무장력 개편을 위해 도청 주변에 산만하게 배치되었던 경계요원을 25일 새로 도청에 들어온 일반 대학생들로 교체했으며, 예비군을 동원하여 외곽경계를 서도록 하고 기동타격대를 편성 운영키로 하였다.
• 5월 26일
도청 민주투쟁위원회 위원들이 날을 새우며 새롭게 조직을 개편하고 장기전을 준비하는 동안 계엄군의 진압작전은 차근차근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새벽 5시경 화정동 통합병원에 버티고 서있던 계엄군의 탱크가 시내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김성룡신부등 일반수습위원들이 시민들과 함께 계엄군이 진입해 오는 농성동 부근으로 ‘죽음의 행진’이라 불린 침묵행진을 시작했다. 현장에서 지휘관과의 협상에서 계엄군은 ‘무조건 총기를 회수하고 반납하라’고 협박하고 수습위원들은 ‘시내질서는 우리가 책임지고 처리할 것이니 계엄군은 무력으로 밀고 들어오지 말라’고 주장하였으나, 계엄군은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서 계엄군 진입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다시 도청앞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제 4차 민주수호범시민 궐기대회가 자연스럽게 열렸다. 분노가 가득한 시민들이 분수대에 올라가 계엄군의 잔인성과 시민군과의 협상을 배신한 사실을 규탄하였다.
시민들은 22일부터 매일 오후 3시와 9시, 두 차례씩 도청 분수대 앞에서 궐기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여 진행했다원하는 사람에게 연설할 기회를 주고 토론과 발표을 했다. 시가행진의 코스와 요령 및 선언문 내용, 그리고 시내 치안유지 방법 등이 토론되었으며, 광주 조직폭력배인 오비파와 화신파 두목들도 연단에 나와 민주화 투쟁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특히 질서유지에 역점을 두고 시민들로 치안대를 구성 경찰 서장집, 박인천 사장집, 관공서 등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폭력, 방화, 강도를 방지했다. 시위차량도 조직적으로 나누어 지휘차, 대변인차, 식량수송차, 무기수송차, 시민수송차로 역할을 전개했으며 또 생필품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쌀과 석유의 매점매석을 막았다. 광주시민들은 7번의 집회를 통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면서 새로운 질서와 사회상을 창조하였다.
25일 궐기대회에서는 미7함대 소속 항공모함이 부산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26일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마친 시민들은 민족과 역사 앞에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소원’을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시민들은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고 투쟁을 다짐했다. 이 노래는 광주시민들이 항쟁기간 가장 많이 부른 노래다.
도청 옥상에서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시민 여러분! 오늘 밤 계엄군이 쳐들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죽어도 좋다는 사람들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