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18년 유신 독재의 아성을 지켜 오던 박정희가 자신의 심복 김재규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이른바 ‘10․26 사태’(1979)를 계기로, 이 땅 민중은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었고, 민주화를 향한 민중들의 요구가 분출되면서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전개되었기 때문입니다.
10․26이라고 불리는 박정희 암살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1960부터 70년대 내내 계속된 민주화 투쟁, 특히 1979년에 접어들어 YH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 부마 민중 항쟁 등으로 급격히 고조된 민주화 투쟁의 도정에서 일어난 일인 만큼, 그것은 마땅히 이 땅의 민주화로 이어져야 했습니다. 이렇게, 유신 독재의 아성을 18년간이나 지켜 오던 박정희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사라진 상황에서 빼앗긴 정부 선택권을 되찾고 민주주의를 확립하며 민주적 기본권을 확보하기 위한 개헌 논의가 전민중의 높은 관심과 참여 속에 본격화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각계각층의 민주화 운동은 봇물 터지듯 전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우리 대학생들은, 1980년 새 학기가 시작되자 유신 체제하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총학생회와 교수 협의회가 많은 대학에서 부활되었고 3월과 4월 두 달 동안 학원 민주화 운동에 주력한 학생들은 5월 초부터 본격적인 사회 민주화 투쟁에 돌입하였습니다. 전국의 대학생들은 유신 잔당 타도, 계엄 철폐, 정부 주도 개헌 반대, 정치 일정 단축 등을 외치며 5월 13일부터 가두시위에 돌입하였고, 급기야 5월 15일 서울에서는 30만의 시민, 학생이 서울역 광장에서 궐기 대회를 성사하였습니다. 이러한 때 광주의 대학생들도 5월 14일부터 가두로 진출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평화적인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내로 진출한 학생들은 광주의 중심인 도청 앞 분수대에 집결, ‘민주화 성회’를 개최하고 비상계엄 해제 등 민주화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를 제출했고 학생들의 가두시위와 집회는 경찰의 별다른 제지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대학생들을 필두로 시작된 16일 밤 3만여 명이 참여한 횃불 시위는 경찰의 협조 속에 평화적으로 이루어졌고 학생들은 시위 후 자진 해산 하였습니다.
한편, 노동자들의 요구 역시 거세게 타져 나왔습니다. 전국 각지의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근로 조건 개선, 노조 결성, 어용 노조 민주화 등을 요구하며 투쟁에 일제히 돌입하였습니다. 청계 피복, 사북 동원 탄좌, 인천 제철, 일신 제강 등 10.26 이후 1980년 5월 17일까지 노동쟁의 발생 건수는 2168건에 달했으며, 투쟁 방식도 작업 거부, 농성, 가두시위 등 완강했습니다. 특히 1980년 4월 20일, 임금 인상, 어용 노조 민주화를 내걸고 시작된 강원도 사북 동원 탄좌 노동자들의 투쟁은 매우 격렬한 것이어서, 유신 체제하에서 빼앗기고 억눌리고 당하기만 해온 노동자의 분노가 어떤 것인가를 여실히 증명하였습니다. 결국 권력과 자본․어용 노조에 의해 짓눌려 온 사북 노동자들은 지리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진압 경찰 병력을 몰아내고 사북읍을 장악하였으며 경찰은 진압을 포기하고 물러난 채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각계각층의 민주화 요구는 분출하고 있었지만 현실의 다른 한켠에서는 역사의 시계 바늘을 되돌리기 위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습니다. 1979년 12.12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장세동, 박준병 등의 이른바 신군부의 유신 잔재 세력은 새로운 군부 지배 체제로의 개편을 확립하기 위한 준비를 은밀히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태 반전을 위한 이들의 계획은 5월 17일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드러났습니다. 급기야 5월 15일 학생 운동 지도부의 시위 중지 결정에 의해 전국 각지의 시위가 대부분 소강상태에 들어간 상황에서, 5월 17일 이규현 문공부 장관은 “현재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요 사태 등을 감안 할 때 전국 일원이 비상사태 하에 있다고 판단”되므로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발표해 정국은 소용돌이에 빠졌습니다. 이와 함께 계엄 사령부는 학생 운동, 노동 운동의 지도적 인사와 김대중 씨를 비롯한 재야 정치인, 민주 인사, 그리고 유신 세력의 일부를 불시에 급습, 체포하였고 전국의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습니다. 마침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노동자, 시민들에 대해 군부가 정면 도전을 하고 나선 것입니다.
★화려한 휴가★ 알고 보면 더 재밌다! (3/10 - 발단 및 전개과정1)
1. 발단
1980년의 봄은 ‘민주화의 봄’이라고 불립니다.
왜냐하면 18년 유신 독재의 아성을 지켜 오던 박정희가 자신의 심복 김재규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이른바 ‘10․26 사태’(1979)를 계기로, 이 땅 민중은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었고, 민주화를 향한 민중들의 요구가 분출되면서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전개되었기 때문입니다.
10․26이라고 불리는 박정희 암살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1960부터 70년대 내내 계속된 민주화 투쟁, 특히 1979년에 접어들어 YH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 부마 민중 항쟁 등으로 급격히 고조된 민주화 투쟁의 도정에서 일어난 일인 만큼, 그것은 마땅히 이 땅의 민주화로 이어져야 했습니다. 이렇게, 유신 독재의 아성을 18년간이나 지켜 오던 박정희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사라진 상황에서 빼앗긴 정부 선택권을 되찾고 민주주의를 확립하며 민주적 기본권을 확보하기 위한 개헌 논의가 전민중의 높은 관심과 참여 속에 본격화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각계각층의 민주화 운동은 봇물 터지듯 전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우리 대학생들은, 1980년 새 학기가 시작되자 유신 체제하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총학생회와 교수 협의회가 많은 대학에서 부활되었고 3월과 4월 두 달 동안 학원 민주화 운동에 주력한 학생들은 5월 초부터 본격적인 사회 민주화 투쟁에 돌입하였습니다. 전국의 대학생들은 유신 잔당 타도, 계엄 철폐, 정부 주도 개헌 반대, 정치 일정 단축 등을 외치며 5월 13일부터 가두시위에 돌입하였고, 급기야 5월 15일 서울에서는 30만의 시민, 학생이 서울역 광장에서 궐기 대회를 성사하였습니다. 이러한 때 광주의 대학생들도 5월 14일부터 가두로 진출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평화적인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내로 진출한 학생들은 광주의 중심인 도청 앞 분수대에 집결, ‘민주화 성회’를 개최하고 비상계엄 해제 등 민주화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를 제출했고 학생들의 가두시위와 집회는 경찰의 별다른 제지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대학생들을 필두로 시작된 16일 밤 3만여 명이 참여한 횃불 시위는 경찰의 협조 속에 평화적으로 이루어졌고 학생들은 시위 후 자진 해산 하였습니다.
한편, 노동자들의 요구 역시 거세게 타져 나왔습니다. 전국 각지의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근로 조건 개선, 노조 결성, 어용 노조 민주화 등을 요구하며 투쟁에 일제히 돌입하였습니다. 청계 피복, 사북 동원 탄좌, 인천 제철, 일신 제강 등 10.26 이후 1980년 5월 17일까지 노동쟁의 발생 건수는 2168건에 달했으며, 투쟁 방식도 작업 거부, 농성, 가두시위 등 완강했습니다. 특히 1980년 4월 20일, 임금 인상, 어용 노조 민주화를 내걸고 시작된 강원도 사북 동원 탄좌 노동자들의 투쟁은 매우 격렬한 것이어서, 유신 체제하에서 빼앗기고 억눌리고 당하기만 해온 노동자의 분노가 어떤 것인가를 여실히 증명하였습니다. 결국 권력과 자본․어용 노조에 의해 짓눌려 온 사북 노동자들은 지리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진압 경찰 병력을 몰아내고 사북읍을 장악하였으며 경찰은 진압을 포기하고 물러난 채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각계각층의 민주화 요구는 분출하고 있었지만 현실의 다른 한켠에서는 역사의 시계 바늘을 되돌리기 위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습니다. 1979년 12.12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장세동, 박준병 등의 이른바 신군부의 유신 잔재 세력은 새로운 군부 지배 체제로의 개편을 확립하기 위한 준비를 은밀히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태 반전을 위한 이들의 계획은 5월 17일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드러났습니다. 급기야 5월 15일 학생 운동 지도부의 시위 중지 결정에 의해 전국 각지의 시위가 대부분 소강상태에 들어간 상황에서, 5월 17일 이규현 문공부 장관은 “현재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요 사태 등을 감안 할 때 전국 일원이 비상사태 하에 있다고 판단”되므로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발표해 정국은 소용돌이에 빠졌습니다. 이와 함께 계엄 사령부는 학생 운동, 노동 운동의 지도적 인사와 김대중 씨를 비롯한 재야 정치인, 민주 인사, 그리고 유신 세력의 일부를 불시에 급습, 체포하였고 전국의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습니다. 마침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노동자, 시민들에 대해 군부가 정면 도전을 하고 나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