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고 싶었다
영하 40 'C의 거센 바람이 불고
AM8 : 00
해가 떠오를 때면 빙벽 너머로
구름과 하늘이 온통 붉게 타오른다.
설산을 뒤덮은 산불,
빙벽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붉은 연기.
남극의 아침은
불과 얼음으로 가득 채워진다.
태양도 얼음을 이기지 못한다.
불은 얼음으로 옮겨 붙지 않고
금세 꺼지고 만다.
불로 시작한 하루는 불로 끝난다.
하늘과 호수를 뒤덮은 구름을 붉게 태우며
전속력으로 몰려오는 어둠.
제 정신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비현실적인 아름다움.
블리자드
블리자드(blizzard)는 초속 13미터 이상의 바람을 동반하고 가시거리를 200미터 이하로 떨어뜨리는 강력한 눈폭풍이다. 블리자드가 불기 시작하면 온도계의 수치는 의미가 없어진다. 모든 외부활동이 금지되고 세상은 온통 암흑으로 가득 찬다. 그 무시무시한 블리자드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대자연 앞에서 불가항력을 인정하는 순간, 놀랍게도 평화가 찾아온다.
창밖의 블리자드를 바라보듯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마음속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안절부절못할 필요는 없다. 누구도 블리자드에 맞설 수는 없다. 마음속을 채우고 있는 블리자드를 바라보며 자신의 불가항력을 인정하는 순간 평화가 찾아온다.
서울에서는 한 순간도 멈춰서는 안 될 거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도 멈춰 있지 않았으니까,
잠시라도 멈췄다가는 곧 뒤쳐져서 도태될 거 같았으니까.
그래서 폭풍우 때문에 한 발자국 내딛기 힘들 때조차
앞으로 나가려고 아득바득 헤맸었다.
600m 이하의 깊고 어두운 물속까지 잠수해
배를 채우고 돌아온 웨델해표 weddell seal는 졸립다.
잠에 취한 해표의 눈가에 묻어 있는 졸음은 전염성이 강하다.
저 졸음을 추출할 수 있다면 최고의 불면증 치료제가 될 것이다.
고된 하루는 곤한 잠을 부른다.
여름바다는 푸르다. 얼음이 녹은 바다 위로 푸른 하늘이 담긴다.
바다는 푸른색의 거대한 데칼코마니가 된다.
살아 있는 것들에게 혹독하고도 긴 겨울에 비하면
생명에게 후한 봄은 짧다.
그래서 남극에서의 삶은 신비롭다.
칠레의 국민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펭귄의 빛깔을 낮과 밤이라고 했다.
만약 네루다가 남극에서 뛰어다니는 펭귄들을 봤다면
분명 다르게 표현했을 것이다.
펭귄의 흑과 백은 어두운 바다와 하얀 얼음이다.
임금펭귄 king penguin 은 황제펭귄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크기가 좀 더 작아서 '임금' 이란 이름을 얻게 됐다. 어떤 진화적 요구가 이 새의 목덜미에 이토록 아름다운 금빛 무늬를 만들었을까. 저것은 어쩌면 하얀 얼음가 검은 바다 위로 비치는 금빛 석양인지도 모른다.
빙벽을 한번 보면 가슴 속에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 한 조각을 간직하게 된다.
빙벽은 세월을 품은 채 바다로 밀려온다.
시간의 아웃렛, 빙벽.
그 앞에 서면 30여 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내 몸의 유효기간이 유난히 짧게 느껴진다.
짧은 유효기간은 생명의 증거.
소멸시한을 넘기면 내 육체도
푸른 시간 속으로 반납될 것이다.
가까이에서 빙벽을 보고 나면,
다른 어떤 것에도 감탄하지 않게 된다.
해안빙벽은 마치 푸른 피가 흐르는 근육의 단면처럼 보인다.
빙벽은 끊임없이 푸른빛을 변주한다.
빙벽이 푸르게 보이는 이유는 가시광선의 푸른 영역을 산란시켜서 밖으로 튕겨내기 때문이다.
실상 푸르다는 것은 푸른빛을 거부한다는 것.
태양아래 모든 것은 자신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빛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빙벽 앞에 서면 빙벽을 밀어붙이고 있는 빙하의 힘을 느낄 수가 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려서 모든 걸 짓이겨버릴 것 같은 무게감,
빙하에 담겨 있는 그 엄청난 시간.....
바람과 얼음의 대륙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남극산책 | 고경남 지음 | 북센스
2006년 1월 소아과 의사 고경남(33)씨는 얼음 절벽이 치솟은 남극 세종기지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는 "일상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모든 것에 시큰둥" 했다고 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뒤, "'나' 를 찾고 싶다" 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세종기지에서 복무할 공중 보건의를 뽑는 공고를 봤다. 고씨는 번쩍 손을 들었고 5대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됐다. 사진 촬영을 즐기던 이 젊은 의사는 남극행 보따리 속에 묵직한 일제(日製) 전문가용 디지털 카메라와 망원 렌즈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지난 2월. 13개월간의 기지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고씨는 눈과 얼음과 펭귄과 폭풍과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을 담은 사진 수천 장을 건져 왔다. 영하 40~20도를 오르내리는 극지에서 1년 이상을 먹고 자고 뒹군 사람만이 잡아낼 수 있는 이 사진들과 그의 짧은 글들은 25일 '남극산책'(북센스)에 담겨 발간됐다.
고씨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나고 자랐다. 어려서 파도가 발 밑에 밀려드는 동네에 살았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퇴근 후 어린 고씨를 데리고 바닷가를 거닐곤 했다. 아버지는 고씨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다. 혼자 남은 어머니가 양장점을 하며 고씨와 고씨의 동생(32)을 키웠다.
"저는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글을 읽는 게 제일 좋았어요. 어머니께서는 제가 공부로 1등을 했을 때보다 백일장에서 상을 탔을 때 더 좋아하셨어요. 아버지도 글 쓰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셨다면서, '너는 꼭 아버지를 닮았다' 고 흐뭇해하셨죠. 남극 간다는 얘기를 어머니께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뜻밖에 선선히 '다녀오라'고 하셨어요."
세종기지는 서울에서 1만7240㎞ 떨어진 곳이다. 여름이면 끝없는 얼음 위에 해가 하루 스무 시간씩 떠서 지지 않는다. 겨울이면 시도 때도 없이 눈폭풍이 휘몰아친다. 겨울엔 17명까지 줄었다가, 여름이면 다시 50여명으로 불어나는 세종기지 식구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게 의사인 고씨의 첫째 임무였지만, 할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주방 보조도 겸했거든요. 진료할 사람 없는 평온한 날이면 쌀 씻고 찌개 끓이고 설거지를 했죠." 게다가 카메라 들고 온 '죄'로 기지의 각종 활동을 촬영하는 일도 그에게 맡겨졌다. 덕택에 남극의 이곳 저곳을 누비며 셔터를 누를 수 있었다. 고씨의 렌즈에 담긴 남극은 기묘하게 아름답고 동시에 무자비하다. 검은 눈을 말똥말똥 뜬 펭귄 부부와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끼 두 마리를 찍은 단란한 '가족 사진' 아래 고씨는 이렇게 적었다.
"칼을 품고 달려오는 눈보라를 뚫고 기적처럼 성장한 귀여운 펭귄 형제 중 한 마리는 앞으로 몇 달을 채 못 버틸 것이다. 남극에서 자연이 생명을 다루는 방식은 신비로우면서도 가혹하다."
고씨는 "누구라도 빙벽을 한번 보면 가슴 속에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 한 조각을 간직하게 된다" 고 했다. 서늘한 대륙의 기억을 가슴에 품고 젊은 의사 고씨는 오늘도 수원 응급의료정보센터에 근무 중이다. 내년 4월에 공중보건의 임기를 마치면, 대학에 돌아가 소아 신경학을 더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조선일보 발췌-원문보기)
남극산책-바람과 얼음의 대륙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남 극 산 책
나를 찾고 싶었다
영하 40 'C의 거센 바람이 불고
AM8 : 00 해가 떠오를 때면 빙벽 너머로 구름과 하늘이 온통 붉게 타오른다. 설산을 뒤덮은 산불, 빙벽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붉은 연기.
남극의 아침은 불과 얼음으로 가득 채워진다. 태양도 얼음을 이기지 못한다. 불은 얼음으로 옮겨 붙지 않고 금세 꺼지고 만다.
불로 시작한 하루는 불로 끝난다. 하늘과 호수를 뒤덮은 구름을 붉게 태우며 전속력으로 몰려오는 어둠. 제 정신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비현실적인 아름다움.
창밖의 블리자드를 바라보듯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마음속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안절부절못할 필요는 없다. 누구도 블리자드에 맞설 수는 없다. 마음속을 채우고 있는 블리자드를 바라보며 자신의 불가항력을 인정하는 순간 평화가 찾아온다.
여름바다는 푸르다. 얼음이 녹은 바다 위로 푸른 하늘이 담긴다. 바다는 푸른색의 거대한 데칼코마니가 된다.
빙벽을 한번 보면 가슴 속에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 한 조각을 간직하게 된다.
바람과 얼음의 대륙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남극산책 | 고경남 지음 | 북센스 2006년 1월 소아과 의사 고경남(33)씨는 얼음 절벽이 치솟은 남극 세종기지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는 "일상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모든 것에 시큰둥" 했다고 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뒤, "'나' 를 찾고 싶다" 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세종기지에서 복무할 공중 보건의를 뽑는 공고를 봤다. 고씨는 번쩍 손을 들었고 5대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됐다. 사진 촬영을 즐기던 이 젊은 의사는 남극행 보따리 속에 묵직한 일제(日製) 전문가용 디지털 카메라와 망원 렌즈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지난 2월. 13개월간의 기지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고씨는 눈과 얼음과 펭귄과 폭풍과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을 담은 사진 수천 장을 건져 왔다. 영하 40~20도를 오르내리는 극지에서 1년 이상을 먹고 자고 뒹군 사람만이 잡아낼 수 있는 이 사진들과 그의 짧은 글들은 25일 '남극산책'(북센스)에 담겨 발간됐다.
고씨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나고 자랐다. 어려서 파도가 발 밑에 밀려드는 동네에 살았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퇴근 후 어린 고씨를 데리고 바닷가를 거닐곤 했다. 아버지는 고씨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다. 혼자 남은 어머니가 양장점을 하며 고씨와 고씨의 동생(32)을 키웠다.
"저는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글을 읽는 게 제일 좋았어요. 어머니께서는 제가 공부로 1등을 했을 때보다 백일장에서 상을 탔을 때 더 좋아하셨어요. 아버지도 글 쓰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셨다면서, '너는 꼭 아버지를 닮았다' 고 흐뭇해하셨죠. 남극 간다는 얘기를 어머니께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뜻밖에 선선히 '다녀오라'고 하셨어요."
세종기지는 서울에서 1만7240㎞ 떨어진 곳이다. 여름이면 끝없는 얼음 위에 해가 하루 스무 시간씩 떠서 지지 않는다. 겨울이면 시도 때도 없이 눈폭풍이 휘몰아친다. 겨울엔 17명까지 줄었다가, 여름이면 다시 50여명으로 불어나는 세종기지 식구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게 의사인 고씨의 첫째 임무였지만, 할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주방 보조도 겸했거든요. 진료할 사람 없는 평온한 날이면 쌀 씻고 찌개 끓이고 설거지를 했죠." 게다가 카메라 들고 온 '죄'로 기지의 각종 활동을 촬영하는 일도 그에게 맡겨졌다. 덕택에 남극의 이곳 저곳을 누비며 셔터를 누를 수 있었다. 고씨의 렌즈에 담긴 남극은 기묘하게 아름답고 동시에 무자비하다. 검은 눈을 말똥말똥 뜬 펭귄 부부와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끼 두 마리를 찍은 단란한 '가족 사진' 아래 고씨는 이렇게 적었다.
"칼을 품고 달려오는 눈보라를 뚫고 기적처럼 성장한 귀여운 펭귄 형제 중 한 마리는 앞으로 몇 달을 채 못 버틸 것이다. 남극에서 자연이 생명을 다루는 방식은 신비로우면서도 가혹하다."
고씨는 "누구라도 빙벽을 한번 보면 가슴 속에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 한 조각을 간직하게 된다" 고 했다. 서늘한 대륙의 기억을 가슴에 품고 젊은 의사 고씨는 오늘도 수원 응급의료정보센터에 근무 중이다. 내년 4월에 공중보건의 임기를 마치면, 대학에 돌아가 소아 신경학을 더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조선일보 발췌-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