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고향이신 그분은 1948년 월남하셔서 경찰에 투신하셨다가 경찰관생활을 하시면서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판사, 변호사를 거쳐 대법관에 오르셨다가 정년퇴임하셔서 다시 변호사 생활을 하고 계신다.
님께서는 월남한 지 50년이 되고, 대법관을 그만 두신지 6년, 춘추 71세가 되던 1998년에 일생을 회고하는 “피안”이라는 에세이집(한국사법행정학회)을 출간하셨다.
언제나 당당하고 쾌활하신 대법관님이 마치 법률논문을 쓰시듯이 정성을 다해 쓰신 글을 읽으면서 필자도 저렇게 당당하게 노년을 맞고 싶어졌다.
아래 글은 위 책의 말미 “마지막에”라는 부분 중에 일부를 옮긴 것이다.
--------------------------
일본인 의사 하루야마씨가 쓴 「뇌내혁명」이란 책을 보니 사람은 모든 일을 낙관적․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생활태도를 가져야 자신의 건강유지에 유익하다는 설명이 있었다. 모든 일을 긍정적․낙관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은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
서문에서도 적었듯이 나는 항상 처해있는 자리에서 모든 일을 낙관적․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살아왔다.
근래에 정조때의 문인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을 읽고 나는 우리가 조선왕조에 태어나 당쟁이 시달리며 살던 선비들에 비하면 비교가 안될 만큼 사회환경이 좋아진 태평성대에 태어나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무오사화때 사사당한 시임 좌의정 이극균이 형관에게 「내 나이 장차 70이고 몸에 백가지 병이 얽혔으니 지금 죽어도 한은 없다만 나라를 위한 공로가 있고 몸에 아무런 죄가 없음을 네가 돌아가 반드시 임금에게 아뢰라.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내 넋이 있어 꼭 너를 벌하고야 말 것이다.」라고 호령하여 형관이 왕에게 보고하고 왕이 그 뼈를 부수라고 명했다는 기사.
직제학 심순문은 연산군의 모 윤씨가 폐비될 때의 영의정 심회의 손자였다는 불리한 조건 때문에 지적당할 만한 잘못은 없고 단지 경연석상에서 왕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았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죽임을 당하였다는 기사, 명종때의 홍문관박사 안명세는 사초를 바른대로 기록한 것이 화가 되어 처형당하면서 유언으로 「내 자식들은 글을 배우지 못하게 하여 달라」고 부탁했다는 기사.
선조때 전라도 도사 조대중은 역신 정여립의 시체를 저자거리에서 찢던 날 담양 객사에서 그날이 마침 부모의 기일이었기 때문에 소복을 하고 술과 고기를 사양하였다가 그 거조가 정여립을 위한 것이었다고 몰려 곤장을 맞다가 죽었는데 곤장을 맞다가 국청에서 「지하에 가서 만일 비간(은나라의 충신)을 따라갈 수 있다면, 나의 외로운 혼이 웃음을 머금고 슬퍼하지 않으리」라는 시를 써서 보였다는 죄로 다시 시체에 추가로 형을 받았다는 기사.
같은 시대의 좌랑 김빙은 안질이 있어 바람이 불면 눈물이 심하게 나는데 역신 정여립의 시체를 저자거리에서 찢던 날 그 행사(조정의 모든 벼슬아치들을 참관하게 함)에 참석하였다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자주 닦았기 때문에 정여립과 친한 사이가 아닌데도 정여립의 죽음을 애도하였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기사.
효종, 현종, 숙종 3대를 치사한 거유 송우암이 효종의 상을 당하여 대비의 복제를 논하면서「정실 소생자는 적자라 하고 첩실 소생자는 서자라고 하나 정실 소생자중 장자와 중자를 구별할 때에는 장자만을 적자라 하고 중자는 서자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효종은 인조의 장자가 아니기 때문에 대비는 중자(서자)에 대한 복으로 기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후일 우암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우암은 효종을 서자로 낮추었다」는 죄목으로 수도 없이 죄주기를 청하여 오랫동안 귀양살이는 하였으나 임금이 죽이라는 청은 들어주지 않았는데 말년에 국문을 받기 위하여 유배지에서 서울로 호송하던 도중 사약을 내리는 왕명이 있어 정읍에서 금부도사와 조우하여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쳤다는 기사.
숙종이 장희빈에서 홀려 민비를 폐출할 때에 정승자리에 있던 목내선이 폐출을 고하는 진주문을 가지고 청나라로 가게 된 부사 신후재가 청나라에서 민비폐출의 이유를 힐문하면 어떤 말로 대답할지를 의논하자 「진주문에 불순이라는 문구가 있으니 불공순이라고 대답하면 어떨까」하고 말한 것이 민비가 복위된 후에 문제가 되어 나이가 80이 박두했는데 전라도 강진 신지도에 위리안치되었다는 기사 등을 읽고서 당시의 선비들이 얼마나 인생에 불안을 느꼈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선조때 명신 백사 이항복은 젊었을 때 친구 정율이 정여립의 난과 관련하여 자살하자 그를 애도하여 다음과 같은 오언시 12구를 남겼다고 한다.
대저 인생이란 본시 잠깐 들렸다 가는 것이고
온 것이란 결국 돌아갈 것을 정한 것이다
누가 장차 오래 살고 빨리 죽을 논할 수 있나
이 같은 이치를 내가 이미 밝게 알았지마는
그런데도 내가 자네를 위하여 애도하는 것은
아직 속됨을 면하지 못한 탓이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이 나도 곡하지 못하며
베개를 어루만지며 남이 엿볼까 두려워
소리내어 울 수도 없네
누가 잘드는 칼을 가지고
나의 아픈 마음을 도려내 주리.
이 시를 읽으면서 그 시대의 선비들이 얼마나 처신에 조심하고 조바심 속에 살아갔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백사는 또 말년에 광해군에게 형 임해군을 해치면 아니 된다고 극간하다가 정승자리를 버리고 양주에 은거하면서 촌로들에게「사람과 송피는 같은 것인가. 송피는 두들기면 떡이 되는데 사람은 두들기면 역전이 된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비하면 현대의 우리는 얼마나 개명하고 공명정대한 시대에 살고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요즈음 세상에도 권력의 남용, 법원의 오판 등으로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평생을 법조직에 있었으니 그 일단의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타인의 무근한 모함이나 권력자의 권리남용으로 귀중한 생명을 빼앗기는 사례는 없어졌지 않은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오늘 아침은 날씨가 유난히도 화창하다. 아마도 우리 부부가 50년만에 모처럼 찾아 나선 고향길을 축복해 주는 조물주의 은혜인 듯싶다.
나는 아침 8시에 늙은 마누라의 손을 잡고 서울역에서 신의주행 기차를 타고 평양까지 와서 만포선, 만포진행 기차를 갈아타고 정오가 조금 지나서 묘항산역에 하차하였다 묘향산역에서 우리 집까지는 개평, 고당, 온정을 지나 자동차길로 20킬로에 불과하니 차로 가면 30분거리이다. 우리는 택시 한대를 세내어 니성골 우리 집을 찾아가니 시간은 오후 2시경이었다.
줄아우벼랑에 해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옛날과 같았으나 아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웠다. 마침 옛날에 서당에서 한문을 같이 배우고 보통학교도 6년동안 같이 다녔고 1947년에는 나와 같이 38선을 넘어 서울까지 왔다가 되돌아가 이북에 살고 있던 동갑내기 친구 이공록군을 만날 수가 있었다.
50년만에 만나게 되니 처음에는 무슨 말부터 하여야 할지 말문을 잘 열리지 않았다. 서로가 그동안 남북으로 갈라져 살아온 이야기를 주고 받은 후에 나는 1948. 5. 6. 추방명령을 받았을 때는 앞이 캄캄하였지만 그것이 전화위복의 전기가 되어 38이남에서 남부럽지 않게 잘살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지금의 나의 심경을 다음과 같은 칠언시로 읊어 보았다.
어느 대법관님의
[어느 대법관님의 “피안의 세계”]
얼마 전부터 법조계의 원로들이 계시는 사무소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함께 계시는 변호사님들 중에는 대법관까지 역임하신 분도 계신다.
그 변호사님께서는 이제는 고령이라 송무업무는 하지 않으시지만
만나 뵐 때마다 귀감이 될만한 말씀과 행동으로 후배들을 독려하신다.
북한이 고향이신 그분은 1948년 월남하셔서 경찰에 투신하셨다가 경찰관생활을 하시면서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판사, 변호사를 거쳐 대법관에 오르셨다가 정년퇴임하셔서 다시 변호사 생활을 하고 계신다.
님께서는 월남한 지 50년이 되고, 대법관을 그만 두신지 6년, 춘추 71세가 되던 1998년에 일생을 회고하는 “피안”이라는 에세이집(한국사법행정학회)을 출간하셨다.
언제나 당당하고 쾌활하신 대법관님이 마치 법률논문을 쓰시듯이 정성을 다해 쓰신 글을 읽으면서 필자도 저렇게 당당하게 노년을 맞고 싶어졌다.아래 글은 위 책의 말미 “마지막에”라는 부분 중에 일부를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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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의사 하루야마씨가 쓴 「뇌내혁명」이란 책을 보니 사람은 모든 일을 낙관적․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생활태도를 가져야 자신의 건강유지에 유익하다는 설명이 있었다. 모든 일을 긍정적․낙관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은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
서문에서도 적었듯이 나는 항상 처해있는 자리에서 모든 일을 낙관적․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살아왔다.
근래에 정조때의 문인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을 읽고 나는 우리가 조선왕조에 태어나 당쟁이 시달리며 살던 선비들에 비하면 비교가 안될 만큼 사회환경이 좋아진 태평성대에 태어나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무오사화때 사사당한 시임 좌의정 이극균이 형관에게 「내 나이 장차 70이고 몸에 백가지 병이 얽혔으니 지금 죽어도 한은 없다만 나라를 위한 공로가 있고 몸에 아무런 죄가 없음을 네가 돌아가 반드시 임금에게 아뢰라.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내 넋이 있어 꼭 너를 벌하고야 말 것이다.」라고 호령하여 형관이 왕에게 보고하고 왕이 그 뼈를 부수라고 명했다는 기사.
직제학 심순문은 연산군의 모 윤씨가 폐비될 때의 영의정 심회의 손자였다는 불리한 조건 때문에 지적당할 만한 잘못은 없고 단지 경연석상에서 왕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았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죽임을 당하였다는 기사, 명종때의 홍문관박사 안명세는 사초를 바른대로 기록한 것이 화가 되어 처형당하면서 유언으로 「내 자식들은 글을 배우지 못하게 하여 달라」고 부탁했다는 기사.
선조때 전라도 도사 조대중은 역신 정여립의 시체를 저자거리에서 찢던 날 담양 객사에서 그날이 마침 부모의 기일이었기 때문에 소복을 하고 술과 고기를 사양하였다가 그 거조가 정여립을 위한 것이었다고 몰려 곤장을 맞다가 죽었는데 곤장을 맞다가 국청에서 「지하에 가서 만일 비간(은나라의 충신)을 따라갈 수 있다면, 나의 외로운 혼이 웃음을 머금고 슬퍼하지 않으리」라는 시를 써서 보였다는 죄로 다시 시체에 추가로 형을 받았다는 기사.
같은 시대의 좌랑 김빙은 안질이 있어 바람이 불면 눈물이 심하게 나는데 역신 정여립의 시체를 저자거리에서 찢던 날 그 행사(조정의 모든 벼슬아치들을 참관하게 함)에 참석하였다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자주 닦았기 때문에 정여립과 친한 사이가 아닌데도 정여립의 죽음을 애도하였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기사.
효종, 현종, 숙종 3대를 치사한 거유 송우암이 효종의 상을 당하여 대비의 복제를 논하면서「정실 소생자는 적자라 하고 첩실 소생자는 서자라고 하나 정실 소생자중 장자와 중자를 구별할 때에는 장자만을 적자라 하고 중자는 서자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효종은 인조의 장자가 아니기 때문에 대비는 중자(서자)에 대한 복으로 기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후일 우암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우암은 효종을 서자로 낮추었다」는 죄목으로 수도 없이 죄주기를 청하여 오랫동안 귀양살이는 하였으나 임금이 죽이라는 청은 들어주지 않았는데 말년에 국문을 받기 위하여 유배지에서 서울로 호송하던 도중 사약을 내리는 왕명이 있어 정읍에서 금부도사와 조우하여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쳤다는 기사.
숙종이 장희빈에서 홀려 민비를 폐출할 때에 정승자리에 있던 목내선이 폐출을 고하는 진주문을 가지고 청나라로 가게 된 부사 신후재가 청나라에서 민비폐출의 이유를 힐문하면 어떤 말로 대답할지를 의논하자 「진주문에 불순이라는 문구가 있으니 불공순이라고 대답하면 어떨까」하고 말한 것이 민비가 복위된 후에 문제가 되어 나이가 80이 박두했는데 전라도 강진 신지도에 위리안치되었다는 기사 등을 읽고서 당시의 선비들이 얼마나 인생에 불안을 느꼈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선조때 명신 백사 이항복은 젊었을 때 친구 정율이 정여립의 난과 관련하여 자살하자 그를 애도하여 다음과 같은 오언시 12구를 남겼다고 한다.
대저 인생이란 본시 잠깐 들렸다 가는 것이고
온 것이란 결국 돌아갈 것을 정한 것이다
누가 장차 오래 살고 빨리 죽을 논할 수 있나
이 같은 이치를 내가 이미 밝게 알았지마는
그런데도 내가 자네를 위하여 애도하는 것은
아직 속됨을 면하지 못한 탓이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이 나도 곡하지 못하며
베개를 어루만지며 남이 엿볼까 두려워
소리내어 울 수도 없네
누가 잘드는 칼을 가지고
나의 아픈 마음을 도려내 주리.
이 시를 읽으면서 그 시대의 선비들이 얼마나 처신에 조심하고 조바심 속에 살아갔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백사는 또 말년에 광해군에게 형 임해군을 해치면 아니 된다고 극간하다가 정승자리를 버리고 양주에 은거하면서 촌로들에게「사람과 송피는 같은 것인가. 송피는 두들기면 떡이 되는데 사람은 두들기면 역전이 된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비하면 현대의 우리는 얼마나 개명하고 공명정대한 시대에 살고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요즈음 세상에도 권력의 남용, 법원의 오판 등으로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평생을 법조직에 있었으니 그 일단의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타인의 무근한 모함이나 권력자의 권리남용으로 귀중한 생명을 빼앗기는 사례는 없어졌지 않은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오늘 아침은 날씨가 유난히도 화창하다. 아마도 우리 부부가 50년만에 모처럼 찾아 나선 고향길을 축복해 주는 조물주의 은혜인 듯싶다.
나는 아침 8시에 늙은 마누라의 손을 잡고 서울역에서 신의주행 기차를 타고 평양까지 와서 만포선, 만포진행 기차를 갈아타고 정오가 조금 지나서 묘항산역에 하차하였다 묘향산역에서 우리 집까지는 개평, 고당, 온정을 지나 자동차길로 20킬로에 불과하니 차로 가면 30분거리이다. 우리는 택시 한대를 세내어 니성골 우리 집을 찾아가니 시간은 오후 2시경이었다.
줄아우벼랑에 해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옛날과 같았으나 아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웠다. 마침 옛날에 서당에서 한문을 같이 배우고 보통학교도 6년동안 같이 다녔고 1947년에는 나와 같이 38선을 넘어 서울까지 왔다가 되돌아가 이북에 살고 있던 동갑내기 친구 이공록군을 만날 수가 있었다.
50년만에 만나게 되니 처음에는 무슨 말부터 하여야 할지 말문을 잘 열리지 않았다. 서로가 그동안 남북으로 갈라져 살아온 이야기를 주고 받은 후에 나는 1948. 5. 6. 추방명령을 받았을 때는 앞이 캄캄하였지만 그것이 전화위복의 전기가 되어 38이남에서 남부럽지 않게 잘살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지금의 나의 심경을 다음과 같은 칠언시로 읊어 보았다.
나는 이미 족한 것을 안다
나이가 이미 70이 넘었으니 수가 족하고
고시에 합격하여 법관직을 냈으니 벼슬길이 족하고
살집, 먹을 밥, 마실 물이 있으니 살아가는데 족하고
조강지처와 같이 늙었으니 처복이 있고
아들 딸 손자 손녀와 더불어 놀수 있으니 자복이 있고
모든 좋은 일은 지족으로 인한 것이다
이 군은 그것 참 좋은 한시로군 하며 다음과 같은 칠언시 4구로 화답하여 주었다.
남북이 가로막혀 50년이네
고향산천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옥같은 청춘이 이미 백박이 되었구려
나와 너의 만남이 몇해만이냐
아침 잠을 깨어보니 그것은 한바탕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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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을 일찍 여인 필자는
타계한 아버님보다도 연상이신 새로운 어른을 만나는 행운을 얻어 기쁘다.
두 번째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고는 하지만
그 의미와 실익에 대하여 국민들은 또다시 분열되어 나라는 더욱 시끄럽지만
북한에 핏줄과 고향을 둔 수백만의 실향민들의 꿈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60년이 다되도록 고향을 잊지 못하는 원로변호사님
부디 더 건강하시고 가족들이 모두 복되었으면 좋겠다.
열심히 노력해서
당당하고 힘찬 노년을 맞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여 본다.
(‘07. 8. 9. 최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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