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례적인 경우인데다(여기서부터 디워에 대해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충무로 상도에 어긋난다.) 패널들의 주장은 처음부터 평행선을 달렸다. 그래도 처음엔 비교적 논리적으로 진행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토론이 점차 가열되면서 개인적 사견이 마치 객관적인 태도인양 포장되어지고 결국엔 그 포장마저 풀어헤쳐 한 편의 영화에 대해 서슴없는 모독발언이 행해졌다.
그 당사자는 '진중권' 문화평론가다. 나는 '진중권'이라는 사람에 대해 반감이 없는 사람 중 하나다. 오히려 그의 진보적 논리와 사상을 추종하는 편에 속한다. 그의 저서도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어제 토론장에서 보여준 그의 태도는 그동안 내가 추종하던 진보적 지식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자리에서야 얼마든지 이성을 놓고 감정적으로 대립할 수 있다. 그도 사람이니까. 하지만 어제 그 자리는 사적인 자리가 아니었다. '문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을 걸고 공적으로 토론에 임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논조를 띄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막말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적어도 상대편 입장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평론가는 오직 객관적인 결과에 대해 칼날을 들이댈 뿐이라면서도 정작 본인이 객관적이지 못하고 지극히 주관적인 비판을 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낸 꼴이다. 시민논객이 영화'300'의 단순한 스토리라인을 CG위주로 만든 영화니 덮어두겠다,는 식의 본인의 평에 관해 질문했을 때, 그의 감정적인 주장이 두드러졌다. 아니, 드러났다, 혹은 들켰다,는 표현이 어쩌면 더 어울릴 듯하다. 그는 흥분하며 <디워>는 '300'보다 못하고 유치하며 평가할 가치도 없다고까지 원색적 비난을 쏟아냈다. 평가할 가치도 없다면 어제의 토론은 처음부터 무의미하다. 그는 <디워>를 옹호하는 분위기에 '꼭지'가 돈다는 표현까지 썼다. 그의 속내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그는 <디워>에 대해 객관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과 다른 부류에 배타적이고 근본적인 멸시와 편견으로 가득찬 한 지식인의 모습이 여실히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순간이었다. 중간중간 꽤나 많은 스포일러성 발언을 흥분하며 할 때는 그가 영화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는 문화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지켜줘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디워>에 대한 관객들의 옹호를 '비이성적'인 '이상징후'라 말하는 그는, '비이성적'으로 한 영화에 대해 기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평론가들의 '이상징후'는 왜 보지 못할까.
영화만 보고 평가겠다는 평론가, 소위 전문가집단. 하지만 그들은 영화만 보지 않았다. 관객들이 이해할 수 없어하고 분노하는 부분이 그 점이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영화 내적인 부분보다 영화 외적인 것들에 더 칼날을 들이댔다. 영화의 스토리라인이 엉성하다, 개연성이 부족하다, 우연의 남발이다 등의 내적인 부분에 대한 비평은 많은 관객들이 수긍하는 부분이다. 그들도 <디워>가 아주 매끄럽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마케팅 운운하는 발언이다. 마케팅을 하지 않는 영화는 없다. 소위 충무로의 변방이라는 독립영화조차 한국영화를 살려야 한다,는 애국심마케팅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지 않은가. 작년 한반도를 휩쓴 '괴물' 또한 애국심마케팅의 효과를 본 영화 중 하나다. 그때는 평단에서 아무도 그런 것을 문제삼거나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괴물'의 선전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괴물' 뿐만아니라 내 기억으로 마케팅이 그렇게 문제가 된 영화는 없었다. 그런데 왜 유독 <디워>에만 문제가 되느냐 말이다. 이것이 바로 평론가집단이 영화만을 보지 않는다는 단적인 증거다. 400만 관객을 끌어들이고 있는 영화의 힘을 마케팅만의 힘으로 전락시키고 싶은 것일까. 마케팅이 어느 정도 작용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그게 잘못됐다는 식의 문제제기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마케팅의 힘으로 영화가 잘 되는 것이 문제라면 모든 영화가 잘못이다.
패널로 나온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의 어떤 부분의 논리를 보면서 나는 참으로 씁쓸했다. 이 또한 시민논객의 질문에서 드러난 부분이다. 자신이 제작한 '올드미스다이어리' 홍보 때 상영관을 많이 잡지 못하는 소외된 영화에 대해 응원을 해주자는 취지의, 소위 애국심마케팅을 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자신의 경우과 <디워>는 다르다고 답했다. 앞서 자신이 충무로의 진정한 변방, 왕따이고 <디워>는 아니라,고 주장한 그는 심형래감독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있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피해의식에 빠져있는 사람은 바로 그, 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약자인 자신은 그런 마케팅이 문제가 되지 않고 강자라고 말하는 <디워>는 문제가 된단 말인가. 강자, 약자라는 구분은 누가 하는가.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라는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충무로의 약자라는 피해의식에 잡혀있는 듯 보이는 그는 자신에게는 유달리 관대해보였다. 그것이 약자들의 속성일까. 그렇다면 본인이 영화판의 약자라 주장하는 심형래감독이 스스로에게 관대한 건 같은 경우지 않은가. 두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디워>에 대한 객곽적이지 못한 시선이다. 마케팅을 들먹이는 그가 '귀여워'의 마케팅은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건 영화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저질 마케팅의 한 경우다.
평론가가 영화의 내적인 것을 평하는 사람이라면, <디워>의 경우 너무도 지나치게 외적인 논의가 진행된 것이고, 평론가가 영화가 가지는 내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평하는 사람이라면, <디워>의 사회적, 역사적 가치는 논의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적어도 한국의 CG기술을 어느 정도까지 끌어올렸느냐에 관해서조차. 이런데도 그들은 명징하게 <디워>에 대해 객관적이었다 말할 수 있을까. 관객들이 느끼는 그 싸늘한 한기는 분명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은 좀 솔직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보지 않고 영화를 논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지금이 아닌가.
언론도 처음엔 심형래감독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일부 우호적으로 돌아선 건 흥행몰이를 하고부터다. <디워>는 충무로로 대표되는 영화인집단, 평론가집단, 언론 등을 상대로 처음부터 핸디캡을 가지고 시작한 게 사실이다. 다른 영화와 똑같은 출발선에 서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일궈가고 있다. 한국의 CG기술의 발전과 함께 그것을 많은 관객들이 인정해주고 있는 셈이다. 문화를 즐길 줄 아는 여유를 점차 넓혀가는 관객들의 모습에 나는 일견 흐믓하다. 그리고 평론가들의 역할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경계해야 할 것은 어느 한쪽이 절대적 진실이라 믿는 오만이다. 이번 <디워>를 향한 평단의 태도에 나는 그런 우려를 표한다. 이 영화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건 관객들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부인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이 부분이 관객들이 자신들의 진실만을 주장하지 않는 점이다. 하지만 평단은 자신들의 진실만을 주장한다. 자신들이 혹평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싸잡아 심형래라는 마케팅의 대가에 농락당한 '영구'쯤으로 보는 건 지극히 오만한 생각이다. 그들의 논리대로 관객이 '영구'라면 그들은 모자란 영구를 상대로 감정싸움을 하고 있는 옹졸한 어른인 셈이다.
관객이 형편없다 말하는 영화들조차 평단의 평이 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왜 <디워>에는 그들이 이렇게도 견고하게 하나로 똘똘 뭉쳤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주례사비평은 비단 출판계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어제 오늘의 얘기 또한 아니다. 평단에 대한 불신이 과연 관객들의 책임일까. 관객들이 이미 모든 영화가 지극히 객관적으로 평해지지는 않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평단은 불편한 것이 아닐까. <디워>에 관한 관객들의 반응에 그들은 필요없이 예민해 있는 듯 보인다.
토론의 결말은 비판이든 옹호든 그것은 한국영화와 심형래감독의 발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의견으로 도출됐다. 이것도 패널들 간에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손석희 진행자의 합의와 권유에 따른 것이다. 그조차 편안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CG의 기술력조차 깍아내리는 진중권 문화평론가를 보며 우리가 과연 함께 한국영화의 발전을 바라는 것이 맞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론가의 피드백 역할을 강조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 피드백이 있어야 하는 궁극적 이유가 무엇이냐고. 스크린쿼터를 사수하기 위한 영화인들이 호소는 도대체 무엇 때문이냐고. 스크린 쿼터와 <디워>의 경우를 두고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논리를 적용하는 집단 이기주의라 말하는 관객들이 과연 우매한 민중에 불과한 것인지. 관객에게 균형을 잡으라 말하기 전에 스스로 균형을 잡고 제대로 서 있는 게 맞는지 한번 점검해보는 것은 어떤지 말이다. 한 영화의 흥행몰이가 왜 '100분 토론'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디워>가 왜 100분 토론에까지 올려져야 할까
어제의 토론은 결국 소모적인 말씨름판이 돼버렸다.
개봉한 지 이제 일주일가량 된 영화를 토론판에 올리는 것부터가
이례적인 경우인데다(여기서부터 디워에 대해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충무로 상도에 어긋난다.) 패널들의 주장은 처음부터 평행선을 달렸다. 그래도 처음엔 비교적 논리적으로 진행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토론이 점차 가열되면서 개인적 사견이 마치 객관적인 태도인양 포장되어지고 결국엔 그 포장마저 풀어헤쳐 한 편의 영화에 대해 서슴없는 모독발언이 행해졌다.
그 당사자는 '진중권' 문화평론가다. 나는 '진중권'이라는 사람에 대해 반감이 없는 사람 중 하나다. 오히려 그의 진보적 논리와 사상을 추종하는 편에 속한다. 그의 저서도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어제 토론장에서 보여준 그의 태도는 그동안 내가 추종하던 진보적 지식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자리에서야 얼마든지 이성을 놓고 감정적으로 대립할 수 있다. 그도 사람이니까. 하지만 어제 그 자리는 사적인 자리가 아니었다. '문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을 걸고 공적으로 토론에 임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논조를 띄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막말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적어도 상대편 입장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평론가는 오직 객관적인 결과에 대해 칼날을 들이댈 뿐이라면서도 정작 본인이 객관적이지 못하고 지극히 주관적인 비판을 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낸 꼴이다. 시민논객이 영화'300'의 단순한 스토리라인을 CG위주로 만든 영화니 덮어두겠다,는 식의 본인의 평에 관해 질문했을 때, 그의 감정적인 주장이 두드러졌다. 아니, 드러났다, 혹은 들켰다,는 표현이 어쩌면 더 어울릴 듯하다. 그는 흥분하며 <디워>는 '300'보다 못하고 유치하며 평가할 가치도 없다고까지 원색적 비난을 쏟아냈다. 평가할 가치도 없다면 어제의 토론은 처음부터 무의미하다. 그는 <디워>를 옹호하는 분위기에 '꼭지'가 돈다는 표현까지 썼다. 그의 속내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그는 <디워>에 대해 객관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과 다른 부류에 배타적이고 근본적인 멸시와 편견으로 가득찬 한 지식인의 모습이 여실히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순간이었다. 중간중간 꽤나 많은 스포일러성 발언을 흥분하며 할 때는 그가 영화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는 문화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지켜줘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디워>에 대한 관객들의 옹호를 '비이성적'인 '이상징후'라 말하는 그는, '비이성적'으로 한 영화에 대해 기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평론가들의 '이상징후'는 왜 보지 못할까.
영화만 보고 평가겠다는 평론가, 소위 전문가집단. 하지만 그들은 영화만 보지 않았다. 관객들이 이해할 수 없어하고 분노하는 부분이 그 점이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영화 내적인 부분보다 영화 외적인 것들에 더 칼날을 들이댔다. 영화의 스토리라인이 엉성하다, 개연성이 부족하다, 우연의 남발이다 등의 내적인 부분에 대한 비평은 많은 관객들이 수긍하는 부분이다. 그들도 <디워>가 아주 매끄럽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마케팅 운운하는 발언이다. 마케팅을 하지 않는 영화는 없다. 소위 충무로의 변방이라는 독립영화조차 한국영화를 살려야 한다,는 애국심마케팅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지 않은가. 작년 한반도를 휩쓴 '괴물' 또한 애국심마케팅의 효과를 본 영화 중 하나다. 그때는 평단에서 아무도 그런 것을 문제삼거나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괴물'의 선전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괴물' 뿐만아니라 내 기억으로 마케팅이 그렇게 문제가 된 영화는 없었다. 그런데 왜 유독 <디워>에만 문제가 되느냐 말이다. 이것이 바로 평론가집단이 영화만을 보지 않는다는 단적인 증거다. 400만 관객을 끌어들이고 있는 영화의 힘을 마케팅만의 힘으로 전락시키고 싶은 것일까. 마케팅이 어느 정도 작용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그게 잘못됐다는 식의 문제제기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마케팅의 힘으로 영화가 잘 되는 것이 문제라면 모든 영화가 잘못이다.
패널로 나온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의 어떤 부분의 논리를 보면서 나는 참으로 씁쓸했다. 이 또한 시민논객의 질문에서 드러난 부분이다. 자신이 제작한 '올드미스다이어리' 홍보 때 상영관을 많이 잡지 못하는 소외된 영화에 대해 응원을 해주자는 취지의, 소위 애국심마케팅을 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자신의 경우과 <디워>는 다르다고 답했다. 앞서 자신이 충무로의 진정한 변방, 왕따이고 <디워>는 아니라,고 주장한 그는 심형래감독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있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피해의식에 빠져있는 사람은 바로 그, 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약자인 자신은 그런 마케팅이 문제가 되지 않고 강자라고 말하는 <디워>는 문제가 된단 말인가. 강자, 약자라는 구분은 누가 하는가.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라는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충무로의 약자라는 피해의식에 잡혀있는 듯 보이는 그는 자신에게는 유달리 관대해보였다. 그것이 약자들의 속성일까. 그렇다면 본인이 영화판의 약자라 주장하는 심형래감독이 스스로에게 관대한 건 같은 경우지 않은가. 두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디워>에 대한 객곽적이지 못한 시선이다. 마케팅을 들먹이는 그가 '귀여워'의 마케팅은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건 영화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저질 마케팅의 한 경우다.
평론가가 영화의 내적인 것을 평하는 사람이라면, <디워>의 경우 너무도 지나치게 외적인 논의가 진행된 것이고, 평론가가 영화가 가지는 내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평하는 사람이라면, <디워>의 사회적, 역사적 가치는 논의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적어도 한국의 CG기술을 어느 정도까지 끌어올렸느냐에 관해서조차. 이런데도 그들은 명징하게 <디워>에 대해 객관적이었다 말할 수 있을까. 관객들이 느끼는 그 싸늘한 한기는 분명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은 좀 솔직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보지 않고 영화를 논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지금이 아닌가.
언론도 처음엔 심형래감독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일부 우호적으로 돌아선 건 흥행몰이를 하고부터다. <디워>는 충무로로 대표되는 영화인집단, 평론가집단, 언론 등을 상대로 처음부터 핸디캡을 가지고 시작한 게 사실이다. 다른 영화와 똑같은 출발선에 서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일궈가고 있다. 한국의 CG기술의 발전과 함께 그것을 많은 관객들이 인정해주고 있는 셈이다. 문화를 즐길 줄 아는 여유를 점차 넓혀가는 관객들의 모습에 나는 일견 흐믓하다. 그리고 평론가들의 역할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경계해야 할 것은 어느 한쪽이 절대적 진실이라 믿는 오만이다. 이번 <디워>를 향한 평단의 태도에 나는 그런 우려를 표한다. 이 영화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건 관객들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부인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이 부분이 관객들이 자신들의 진실만을 주장하지 않는 점이다. 하지만 평단은 자신들의 진실만을 주장한다. 자신들이 혹평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싸잡아 심형래라는 마케팅의 대가에 농락당한 '영구'쯤으로 보는 건 지극히 오만한 생각이다. 그들의 논리대로 관객이 '영구'라면 그들은 모자란 영구를 상대로 감정싸움을 하고 있는 옹졸한 어른인 셈이다.
관객이 형편없다 말하는 영화들조차 평단의 평이 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왜 <디워>에는 그들이 이렇게도 견고하게 하나로 똘똘 뭉쳤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주례사비평은 비단 출판계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어제 오늘의 얘기 또한 아니다. 평단에 대한 불신이 과연 관객들의 책임일까. 관객들이 이미 모든 영화가 지극히 객관적으로 평해지지는 않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평단은 불편한 것이 아닐까. <디워>에 관한 관객들의 반응에 그들은 필요없이 예민해 있는 듯 보인다.
토론의 결말은 비판이든 옹호든 그것은 한국영화와 심형래감독의 발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의견으로 도출됐다. 이것도 패널들 간에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손석희 진행자의 합의와 권유에 따른 것이다. 그조차 편안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CG의 기술력조차 깍아내리는 진중권 문화평론가를 보며 우리가 과연 함께 한국영화의 발전을 바라는 것이 맞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론가의 피드백 역할을 강조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 피드백이 있어야 하는 궁극적 이유가 무엇이냐고. 스크린쿼터를 사수하기 위한 영화인들이 호소는 도대체 무엇 때문이냐고. 스크린 쿼터와 <디워>의 경우를 두고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논리를 적용하는 집단 이기주의라 말하는 관객들이 과연 우매한 민중에 불과한 것인지. 관객에게 균형을 잡으라 말하기 전에 스스로 균형을 잡고 제대로 서 있는 게 맞는지 한번 점검해보는 것은 어떤지 말이다. 한 영화의 흥행몰이가 왜 '100분 토론'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