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한국 기득권의 수구세력과 한국 대중사회의 집단무의식을 겨냥한 재치 넘치는 독설로 지식인 사회에선 오래 전부터 자리매김해왔던 진보논객 진중권씨가 갑자기 엉뚱한 계기로 대중들 사이에서까지 유명해지고 있다. '비호감' 이라나?; 지적 성장과정에서 그에게 적쟎이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기분이 묘하다.
진중권은 언제나 날카롭고 자신만만하며 거침이 없다.
그는 적과 대면하면 기어이 쓰러뜨리고야 마는 무림의 검객이며 아직까지는 누구에게도 패배해 본 적 없는 절정의 고수다.
그는 자신이 믿는 상식과 정의에 배치되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결코 타협하지 않는 선비다.
검객인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합의점을 찾는 토의가 아닌 시시비비를 가리는 날선 논쟁이며
선비인 그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고 관철하는 것일 뿐 다른 이야기는 이단이요 반박의 대상일 뿐이다.
그 개인에 대한 평은 이만 하고.
어제 100분토론에서도 그는 역시나 특유의 재치넘치는 독설로, 그가 언제나 적으로 삼아 왔던 한국 대중사회의 집단무의식을 사정없이 난타하였다. 나도 그의 통쾌한 독설을 들으며 즐겁게 웃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가치와 한계를 모두 드러내었다.
특히 한 대학원생과 주고받은 플롯에 관한 논쟁은 그 결정판이었다. 여기선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진중권이 영화 '디워'의 스토리 전개가 인과관계가 전혀 없고 황당무계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2500년 전에 이야기한 플롯의 기본'조차 없으므로 평가할 가치조차 없다고 것에 대하여
한 학생이 바로 진중권 자신이 한 영화잡지에 기고한 영화 '300'에 대한 평론을 인용하며 그 모순됨을 따졌다.
말인즉, 진중권은 '300'에 대해서는 비록 플롯이 단순하고 허술하긴 하지만 어차피 만화를 원작으로 한 보여주기 위한 오락영화이므로 문제될 게 없다는 식의 평을 했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를 '디워'에도 적용한다면 역시 보여주기 위한 오락영화인데 플롯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진중권은 이렇게 반론했다. '300은 비록 단순하고 허술할지라도 어쨌든 인과가 있고 플롯이 있다. 그러나 디워에는 플롯이라는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둘은 엄연히 다르다.'
여기서 진중권의 논리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플롯이 '제대로 있는' 영화를 A
'300'처럼 플롯이 '단순 허술한' 영화를 B
'디워'처럼 플롯이 '아예 없는' 황당무계한 영화를 C
라고 한다면
진중권의 논리에 따르면 B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해줄 수 있지만 C에 대해서는 평가할 가치조차 없다. 즉 A와 B는 퀄리티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B와 C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건 명백한 이중잣대이며, 자신의 임의대로 '합격'과 '불합격'의 기준선을 그어놓고 흑과 백으로 양단하는 논리의 비약이다. 누군가의 표현을 인용하여 좀 더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지적 사기'다.
플롯의 인과관계가 영화의 중요한 요소라면 그것이 허술하든 아예 없든 마찬가지로 똑같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동일하게 혹평을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어떤 것은 '최소 기준선'에 들었으므로 괜챦고 어떤 것은 그것에 미달하므로 안된다는 논리는 납득할 수 없는 폭거다.
대체 그 기준을 누가 정한단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2500년전에 이야기한 기본'은 물론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모든 것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선이 될 수는 없다.
영화 '300'이 흥행하던 때에 영화 속의 역사왜곡과 어이없는 설정들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그 때에 일각에서 나온 이야기는 '그냥 보고 즐기면 되는 오락영화를 가지고 무슨 시비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정말이지 생각없는 이야기에 동의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영화 한장면이 주는 정신적 영향력은 책 수백 페이지의 그것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컴퓨터마냥 '생각하며 보는 것'과 '생각없이 보는 것'을 일도양단하여 실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개그다. 영화 '300'을 본 사람이라면 알몸에 까만 빤스만 입고 빨간 망또걸친 몸짱들을 '스파르타'의 이미지로, 괴상망측한 괴물군단과 야만인들을 '페르시아'의 이미지로 기억할 수 밖에 없다.
다행히 고대 근동사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 강렬한 영상의 이미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것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그냥 그대로 영화의 장면들을 역사 이미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오락 영화든 예술 영화든간에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차별없는 분석과 비판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게 평론이며 진중권 자신이 어제 그토록 열변을 토하며 강조한 평론가의 존재 이유다.
어떤 기준에 합격하면 좋은영화고 불합격하면 나쁜영화라는 쌍팔년도 검열을 연상시키는 편협한 흑백논리나, 이건 오락영화니까 닥치고 즐기라는 해괴망측한 우격다짐은 모두 한가지로 백해무익하다.
나는 어제의 토론에서는 진중권의 이야기에 거의 다 동의하였으며 그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적 현상에 대해 분명 유익하고 통쾌한 일침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아닌 걸 아니라고 누구보다 명쾌하게 표현하는 것. 그것은 그의 가치다.
그러나 한 학생과의 논쟁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이중잣대는 역시나 검객이며 선비인 그의 한계를 드러냈다. 습관적으로 나오는 현학적 인용과 언제나 정해져 있는 지나치게 명쾌한 결론은 그가 빠져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도그마다.
진중권의 플롯이야기에 대해.
주로 한국 기득권의 수구세력과 한국 대중사회의 집단무의식을 겨냥한 재치 넘치는 독설로 지식인 사회에선 오래 전부터 자리매김해왔던 진보논객 진중권씨가 갑자기 엉뚱한 계기로 대중들 사이에서까지 유명해지고 있다. '비호감' 이라나?; 지적 성장과정에서 그에게 적쟎이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기분이 묘하다.
진중권은 언제나 날카롭고 자신만만하며 거침이 없다.
그는 적과 대면하면 기어이 쓰러뜨리고야 마는 무림의 검객이며 아직까지는 누구에게도 패배해 본 적 없는 절정의 고수다.
그는 자신이 믿는 상식과 정의에 배치되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결코 타협하지 않는 선비다.
검객인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합의점을 찾는 토의가 아닌 시시비비를 가리는 날선 논쟁이며
선비인 그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고 관철하는 것일 뿐 다른 이야기는 이단이요 반박의 대상일 뿐이다.
그 개인에 대한 평은 이만 하고.
어제 100분토론에서도 그는 역시나 특유의 재치넘치는 독설로, 그가 언제나 적으로 삼아 왔던 한국 대중사회의 집단무의식을 사정없이 난타하였다. 나도 그의 통쾌한 독설을 들으며 즐겁게 웃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가치와 한계를 모두 드러내었다.
특히 한 대학원생과 주고받은 플롯에 관한 논쟁은 그 결정판이었다. 여기선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진중권이 영화 '디워'의 스토리 전개가 인과관계가 전혀 없고 황당무계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2500년 전에 이야기한 플롯의 기본'조차 없으므로 평가할 가치조차 없다고 것에 대하여
한 학생이 바로 진중권 자신이 한 영화잡지에 기고한 영화 '300'에 대한 평론을 인용하며 그 모순됨을 따졌다.
말인즉, 진중권은 '300'에 대해서는 비록 플롯이 단순하고 허술하긴 하지만 어차피 만화를 원작으로 한 보여주기 위한 오락영화이므로 문제될 게 없다는 식의 평을 했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를 '디워'에도 적용한다면 역시 보여주기 위한 오락영화인데 플롯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진중권은 이렇게 반론했다. '300은 비록 단순하고 허술할지라도 어쨌든 인과가 있고 플롯이 있다. 그러나 디워에는 플롯이라는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둘은 엄연히 다르다.'
여기서 진중권의 논리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플롯이 '제대로 있는' 영화를 A
'300'처럼 플롯이 '단순 허술한' 영화를 B
'디워'처럼 플롯이 '아예 없는' 황당무계한 영화를 C
라고 한다면
진중권의 논리에 따르면 B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해줄 수 있지만 C에 대해서는 평가할 가치조차 없다. 즉 A와 B는 퀄리티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B와 C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건 명백한 이중잣대이며, 자신의 임의대로 '합격'과 '불합격'의 기준선을 그어놓고 흑과 백으로 양단하는 논리의 비약이다. 누군가의 표현을 인용하여 좀 더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지적 사기'다.
플롯의 인과관계가 영화의 중요한 요소라면 그것이 허술하든 아예 없든 마찬가지로 똑같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동일하게 혹평을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어떤 것은 '최소 기준선'에 들었으므로 괜챦고 어떤 것은 그것에 미달하므로 안된다는 논리는 납득할 수 없는 폭거다.
대체 그 기준을 누가 정한단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2500년전에 이야기한 기본'은 물론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모든 것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선이 될 수는 없다.
영화 '300'이 흥행하던 때에 영화 속의 역사왜곡과 어이없는 설정들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그 때에 일각에서 나온 이야기는 '그냥 보고 즐기면 되는 오락영화를 가지고 무슨 시비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정말이지 생각없는 이야기에 동의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영화 한장면이 주는 정신적 영향력은 책 수백 페이지의 그것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컴퓨터마냥 '생각하며 보는 것'과 '생각없이 보는 것'을 일도양단하여 실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개그다. 영화 '300'을 본 사람이라면 알몸에 까만 빤스만 입고 빨간 망또걸친 몸짱들을 '스파르타'의 이미지로, 괴상망측한 괴물군단과 야만인들을 '페르시아'의 이미지로 기억할 수 밖에 없다.
다행히 고대 근동사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 강렬한 영상의 이미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것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그냥 그대로 영화의 장면들을 역사 이미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오락 영화든 예술 영화든간에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차별없는 분석과 비판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게 평론이며 진중권 자신이 어제 그토록 열변을 토하며 강조한 평론가의 존재 이유다.
어떤 기준에 합격하면 좋은영화고 불합격하면 나쁜영화라는 쌍팔년도 검열을 연상시키는 편협한 흑백논리나, 이건 오락영화니까 닥치고 즐기라는 해괴망측한 우격다짐은 모두 한가지로 백해무익하다.
나는 어제의 토론에서는 진중권의 이야기에 거의 다 동의하였으며 그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적 현상에 대해 분명 유익하고 통쾌한 일침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아닌 걸 아니라고 누구보다 명쾌하게 표현하는 것. 그것은 그의 가치다.
그러나 한 학생과의 논쟁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이중잣대는 역시나 검객이며 선비인 그의 한계를 드러냈다. 습관적으로 나오는 현학적 인용과 언제나 정해져 있는 지나치게 명쾌한 결론은 그가 빠져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도그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