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기법의 일환. 상품에 논란-구설수-잡음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어, 상품의 품질-특성에 관계없이 소비자가 호기심으로 상품을 구입하도록 유도함.
최근 심형래의 영상물 "디워"를 둘러싼 논쟁과 진중권이 가세한 소모적인 다툼을 보면, "노이즈 마케팅"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차이가 있다면 디워는 자신의 의도보다는 타인의 공세에 의해 "관객수 폭등"이라는 효과를 많이 받았고, 진중권은 스스로 노이즈 마케팅을 하지만 효과는 적고 부작용이 많다는 정도 일 것이다.
현재 디워를 둘러싼 논쟁-다툼이 혼탁한 양상이며,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노이즈 마케팅에 일정부분 관여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 논쟁에 참여하는 것이 달갑지는 않다. 그러나 진중권에 의해 폄훼 되는 "논객"과 "진보"의 가치를 수수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진중권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하려 한다.
1. 디워 Vs 300
<진중권의 300에 대한 평가>- 2007-03-20 '자유'를 생명으로 한다는 미국이 이제 와서 스파르타의 전체주의를 국가의 이상으로 여기게 된 것은 매우 이상한 역설이다.'300'은 컴퓨터 생성 이미지로 된 새로운 유형의 정치의식, 즉 역사와 신화가 한데 어우러진 디지털 시대의 '판타지형 정치의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그냥 백인우익 마초 근성을 비웃으며 디지털 기술의 미학성을 즐기면 될 일이다. ----------------------------------------------- 300은 BC 480년 페르시아의 침공을 수일간 지연시킨 스파르타의왕과 300명의 병사에 관한 영상물이다. 당시 스파르타는 사악함의 중심에 있었다. 튼튼하지 못한 아이를 죽이는 유아살해를 서슴없이 하고, 아이들이 7세가 되면 부모를 떠나 국가에서 교육시키는데, 타인의 것을 도둑질하며 자라기를 강요했다. 스파르타는 자신들이 정복한 선주민을 노예로 부리며 체제를 유지했는데, 그 방식이 단순한 착취뿐만 아니라, 평화롭게 잘살고 있는 선주민의 마을을 주기적으로 공격해 학살-방화를 일삼는 것 이었다. 학살의 이유는 스파르타인 보다 수가 많은 선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공포를 심어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중권은 디워와 300을 비교하면서 시나리오 구성을 들먹이는데, 진중권이 과연 문화평론가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영상물에 대한 평가는 시나리오 구성 분야 하나에만 귀착되는 것이 아니다. 영상물이 담고 있는 사상, 관객들에게 전이시키는 파급력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가치 평가가 되는 것이다. 300은 사악한 스파르타를 마치 "자유의 수호자"인 것처럼 포장하며 백인우월주의와 침략의 정당성을 호도하는 선전-선동영상물이다.
디워가 아무리 허술한 시나리오 구성을 갖고 있더라도(12세 관람가 괴수 영상물에 시나리오 어쩌고 하는 것이 우습기는 하다), 선전-선동의 300보다는 영상-도덕적 측면에서 우위에 있다 평해야 한다. 그러나 진중권은 300의 문제점을 일부 파악하고서도 "영화는 영화일 뿐 CG나 즐기자"라는 주장을 하면서 디워에 대해서는 "CG 말고는 볼게 없다"라는 혹평을 한다.
이중잣대를 가진 진중권이 잘못인가? 그 이중잣대를 비판하는 네티즌이 잘못인가?
2. 마케팅 마이오피아
"마케팅 마이오피아(근시안)"는, 소비자 중심이 아닌 상품 중심의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영상물을 녹화-재생할 수 있는 VTR의 예를 보자.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VTR자체가 아니다. 소비자들은 영상물을 보기 원하고 VTR이 영상재생을 할 수 있으므로 VTR을 구입했던 것이다. 따라서 DVD같은 다른 종류의 영상재생장치가 나오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소비자의 구매형태이다.
그런데 VTR 제조자가 착각을 한다. VTR의 헤드 수를 5개로 늘렸고, 20배속-자동녹화 기능을 가진 명품이니 자기의 제품을 소비자가 당연히 구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VTR 대신에 DVD를 구입한 소비자들에게 원망의 시선을 보낸다. 평론가라는 사람들은 한술더떠 "DVD를 산 소비자의 안목이 형편없다 비판한다.
어리석은 쪽은 자신의 필요에 맞는 소비행동을 보인 소비자가 아니고,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 못한 체, 자신이 만든 상품을 맹신하는 제조자와 그것을 부추기는 평론가들이다.
현재 디워를 둘러싼 논쟁도 유사한 상황이다. 관객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영상물"이지 몇몇 영화인들에 의해 규정된 형식에 맞는 "그들만의 영화"가 아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몇몇 충무로 감독들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평론가란 사람들이 "영화"라 규정하는 대상이 없어진다 하여도 소비자인 관객들이 찾을 수 있는 영상물은 넘치고도 남는다.
일부 충무로 감독이 명심해야 할 것은 "관객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디워의 흥행이 못마땅하다면, 관객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관객의 기호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디워보다 더 관객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영상물을 만드는 것이 상식에 맞는 일이다.
3. 민족주의-애국주의-인간극장?
디워에서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자극하는 기법을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디워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국의 영화산업이 오랜 침체기에 빠져있을 때, 관객들은 "한국영화 살려야 한다"라는 애국심으로 충무로 영화들을 소비해줬다. 또한 한국영화를 살리기 위한 "스크린쿼터 지키기" 역시 민족주의-애국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며, 디워가 아닌 충무로 영화에서 민족주의-애국심 마케팅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부 충무로 감독들과 진중권류의 평론가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민족주의-애국심 마케팅이 디워 흥행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심형래는 당시 다작 감독으로 유명한 남기남과 손잡고 "영구 시리즈"를 만들었다. 1989년 발표된 "영구와 땡칠이"는 당시로는 기록적인 270만의 흥행기록을 세웠다. 영구 시리즈가 성공을 하자 심형래는 "영구 아트"를 설립하고 1993년 자신의 주도하에 "영구와 공룡 쭈쭈"를 시작으로 연속적으로 영상물을 만들어냈다.
심형래 이외에도 코미디언 출신의 영상물 제작이 있었지만, 그들이 충무로의 틀 속에서 자신을 변신시키려 노력했다면, 심형래는 TV녹화를 영화 형식의 영상물로 대체한 수준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바로 이점이 충무로 주류 영화인과 심형래가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되고, 서로에 대해 올바로 평가하지 못하는 장애물이라 볼 수 있다.
심형래의 출연-제작 영상물들은, 흥행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B급 영상물로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18년이 지난 지금 그 어린 관객들이 성인으로 성장하여 디워의 흥행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즉, 디워의 흥행성공은 20년이 가까운 시간을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며 한 우물을 판, 심형래의 일관성과 끈기가 만들어낸 보상이라 평해야 옳은 것이다.
미국에서 디워가 성공할 지? 아닐지?는 현재로서 명확히 예상하기 어렵다. 진중권의 주장대로 민족주의-애국심-인간극장이 없어 흥행에 실패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흥행성공을 거두고 있는 디워를 비판할 근거가 될 수 없다.
영상물 이외에 심형래가 한국에 투자한 시간과-심력을 인정해 주는 것이 디워를 관람한 한국 영상물 소비자의 선택이라면, 같은 논리로 미국에 큰 투자를 하지 못한 심형래의 디워는 온전히 영상물자체로 미국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디워가 미국에서 흥행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한국에서보다 가일층 분발해야 하지만, 미국에서의 흥행이 불투명하다 하여, 한국에서의 흥행성공이 폄하되는 것은 견강부회라 평하겠다.
필자는 다른 사람이 심형래와 같은 길을 걸어서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많지 않다 생각한다. 그의 도전 정신에 박수를 보내고, 도전자가 나올 수 있는 토대에 마련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것은 민족주의-애국심을 뛰어넘는 인류 보편적 가치이다.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만들어냈지만, 그 중 일부가 성공을 거두었기에 "발전-진보-개혁"이라는 것이 있었다.
"진보(?)"를 칭하며, 사악한 스파르타의 행위를 "자유의 수호자로"로 둔갑시키는 선전-선동물 300에 "영화는 영화일 뿐 CG나 즐기자"라고 말하는 사람
디워에 대한 생각 발췌글..
- 노이즈 마케팅 (Noise Marketing) -
마케팅 기법의 일환. 상품에 논란-구설수-잡음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어, 상품의 품질-특성에 관계없이 소비자가 호기심으로 상품을 구입하도록 유도함.
최근 심형래의 영상물 "디워"를 둘러싼 논쟁과 진중권이 가세한 소모적인 다툼을 보면, "노이즈 마케팅"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차이가 있다면 디워는 자신의 의도보다는 타인의 공세에 의해 "관객수 폭등"이라는 효과를 많이 받았고, 진중권은 스스로 노이즈 마케팅을 하지만 효과는 적고 부작용이 많다는 정도 일 것이다.
현재 디워를 둘러싼 논쟁-다툼이 혼탁한 양상이며,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노이즈 마케팅에 일정부분 관여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 논쟁에 참여하는 것이 달갑지는 않다. 그러나 진중권에 의해 폄훼 되는 "논객"과 "진보"의 가치를 수수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진중권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하려 한다.
1. 디워 Vs 300
<진중권의 300에 대한 평가>- 2007-03-20
'자유'를 생명으로 한다는 미국이 이제 와서 스파르타의 전체주의를 국가의 이상으로 여기게 된 것은 매우 이상한 역설이다.'300'은 컴퓨터 생성 이미지로 된 새로운 유형의 정치의식, 즉 역사와 신화가 한데 어우러진 디지털 시대의 '판타지형 정치의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그냥 백인우익 마초 근성을 비웃으며 디지털 기술의 미학성을 즐기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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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은 BC 480년 페르시아의 침공을 수일간 지연시킨 스파르타의왕과 300명의 병사에 관한 영상물이다. 당시 스파르타는 사악함의 중심에 있었다. 튼튼하지 못한 아이를 죽이는 유아살해를 서슴없이 하고, 아이들이 7세가 되면 부모를 떠나 국가에서 교육시키는데, 타인의 것을 도둑질하며 자라기를 강요했다. 스파르타는 자신들이 정복한 선주민을 노예로 부리며 체제를 유지했는데, 그 방식이 단순한 착취뿐만 아니라, 평화롭게 잘살고 있는 선주민의 마을을 주기적으로 공격해 학살-방화를 일삼는 것 이었다. 학살의 이유는 스파르타인 보다 수가 많은 선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공포를 심어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중권은 디워와 300을 비교하면서 시나리오 구성을 들먹이는데, 진중권이 과연 문화평론가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영상물에 대한 평가는 시나리오 구성 분야 하나에만 귀착되는 것이 아니다. 영상물이 담고 있는 사상, 관객들에게 전이시키는 파급력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가치 평가가 되는 것이다. 300은 사악한 스파르타를 마치 "자유의 수호자"인 것처럼 포장하며 백인우월주의와 침략의 정당성을 호도하는 선전-선동영상물이다.
디워가 아무리 허술한 시나리오 구성을 갖고 있더라도(12세 관람가 괴수 영상물에 시나리오 어쩌고 하는 것이 우습기는 하다), 선전-선동의 300보다는 영상-도덕적 측면에서 우위에 있다 평해야 한다. 그러나 진중권은 300의 문제점을 일부 파악하고서도 "영화는 영화일 뿐 CG나 즐기자"라는 주장을 하면서 디워에 대해서는 "CG 말고는 볼게 없다"라는 혹평을 한다.
이중잣대를 가진 진중권이 잘못인가? 그 이중잣대를 비판하는 네티즌이 잘못인가?
2. 마케팅 마이오피아
"마케팅 마이오피아(근시안)"는, 소비자 중심이 아닌 상품 중심의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영상물을 녹화-재생할 수 있는 VTR의 예를 보자.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VTR자체가 아니다. 소비자들은 영상물을 보기 원하고 VTR이 영상재생을 할 수 있으므로 VTR을 구입했던 것이다. 따라서 DVD같은 다른 종류의 영상재생장치가 나오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소비자의 구매형태이다.
그런데 VTR 제조자가 착각을 한다. VTR의 헤드 수를 5개로 늘렸고, 20배속-자동녹화 기능을 가진 명품이니 자기의 제품을 소비자가 당연히 구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VTR 대신에 DVD를 구입한 소비자들에게 원망의 시선을 보낸다. 평론가라는 사람들은 한술더떠 "DVD를 산 소비자의 안목이 형편없다 비판한다.
어리석은 쪽은 자신의 필요에 맞는 소비행동을 보인 소비자가 아니고,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 못한 체, 자신이 만든 상품을 맹신하는 제조자와 그것을 부추기는 평론가들이다.
현재 디워를 둘러싼 논쟁도 유사한 상황이다. 관객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영상물"이지 몇몇 영화인들에 의해 규정된 형식에 맞는 "그들만의 영화"가 아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몇몇 충무로 감독들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평론가란 사람들이 "영화"라 규정하는 대상이 없어진다 하여도 소비자인 관객들이 찾을 수 있는 영상물은 넘치고도 남는다.
일부 충무로 감독이 명심해야 할 것은 "관객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디워의 흥행이 못마땅하다면, 관객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관객의 기호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디워보다 더 관객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영상물을 만드는 것이 상식에 맞는 일이다.
3. 민족주의-애국주의-인간극장?
디워에서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자극하는 기법을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디워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국의 영화산업이 오랜 침체기에 빠져있을 때, 관객들은 "한국영화 살려야 한다"라는 애국심으로 충무로 영화들을 소비해줬다. 또한 한국영화를 살리기 위한 "스크린쿼터 지키기" 역시 민족주의-애국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며, 디워가 아닌 충무로 영화에서 민족주의-애국심 마케팅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부 충무로 감독들과 진중권류의 평론가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민족주의-애국심 마케팅이 디워 흥행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심형래는 당시 다작 감독으로 유명한 남기남과 손잡고 "영구 시리즈"를 만들었다. 1989년 발표된 "영구와 땡칠이"는 당시로는 기록적인 270만의 흥행기록을 세웠다. 영구 시리즈가 성공을 하자 심형래는 "영구 아트"를 설립하고 1993년 자신의 주도하에 "영구와 공룡 쭈쭈"를 시작으로 연속적으로 영상물을 만들어냈다.
심형래 이외에도 코미디언 출신의 영상물 제작이 있었지만, 그들이 충무로의 틀 속에서 자신을 변신시키려 노력했다면, 심형래는 TV녹화를 영화 형식의 영상물로 대체한 수준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바로 이점이 충무로 주류 영화인과 심형래가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되고, 서로에 대해 올바로 평가하지 못하는 장애물이라 볼 수 있다.
심형래의 출연-제작 영상물들은, 흥행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B급 영상물로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18년이 지난 지금 그 어린 관객들이 성인으로 성장하여 디워의 흥행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즉, 디워의 흥행성공은 20년이 가까운 시간을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며 한 우물을 판, 심형래의 일관성과 끈기가 만들어낸 보상이라 평해야 옳은 것이다.
미국에서 디워가 성공할 지? 아닐지?는 현재로서 명확히 예상하기 어렵다. 진중권의 주장대로 민족주의-애국심-인간극장이 없어 흥행에 실패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흥행성공을 거두고 있는 디워를 비판할 근거가 될 수 없다.
영상물 이외에 심형래가 한국에 투자한 시간과-심력을 인정해 주는 것이 디워를 관람한 한국 영상물 소비자의 선택이라면, 같은 논리로 미국에 큰 투자를 하지 못한 심형래의 디워는 온전히 영상물자체로 미국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디워가 미국에서 흥행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한국에서보다 가일층 분발해야 하지만, 미국에서의 흥행이 불투명하다 하여, 한국에서의 흥행성공이 폄하되는 것은 견강부회라 평하겠다.
필자는 다른 사람이 심형래와 같은 길을 걸어서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많지 않다 생각한다. 그의 도전 정신에 박수를 보내고, 도전자가 나올 수 있는 토대에 마련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것은 민족주의-애국심을 뛰어넘는 인류 보편적 가치이다.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만들어냈지만, 그 중 일부가 성공을 거두었기에 "발전-진보-개혁"이라는 것이 있었다.
"진보(?)"를 칭하며, 사악한 스파르타의 행위를 "자유의 수호자로"로 둔갑시키는 선전-선동물 300에 "영화는 영화일 뿐 CG나 즐기자"라고 말하는 사람
자기 한계를 극복하려는 도전자의 영상물을 소비해주고 응원글을 남기는 네티즌들
양쪽을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더 떳떳한지 진중권 스스로 자문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