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바로크음악의 거장

신문섭2007.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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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Johan Sebastian Bach(1685.3.21~1750.7.28)

 

바로크음악의 거장 : 음악의 아버지



▶ 바흐 가계

17세기 후반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음악가를 탄생시킨 바흐의 가문은 200여 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하였다. 중부독일 튀링겐에 있는 빵집 주인으로 치터(Zither:현악기의 일종)의 애호가였다는 파이트(1619년 사망)가 바흐가문의 옛 조상이라 하며, 파이트의 장남 요하네스(1580?∼1626)가 바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증조부가 된다. 유명한 거리의 악사였던 요하네스의 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하인리히는 모두 작곡가였으며 수편의 작품이 남아 있다. 바흐의 조부는 그 중 차남인 크리스토프(1613∼61)이며, 그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다. 장남 게오르그 크리스토프는 바흐 가문에서는 처음으로 교회합창단장인 칸토르의 지위에 올랐으며, 쌍둥이 동생 요한 크리스토프와 요한 암브로지우스(1645∼95)는 거리의 악사가 되었다. 그리고 암브로지우스의 막내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大바흐)이다. 그에게는 20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1710∼84), 차남 카를 필립 에마누엘(1714∼88),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1735∼82)의 3명은 음악사에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에마누엘과 크리스티안은 전자가 '함부르크의 바흐' '베를린의 바흐', 후자가 '밀라노의 바흐' '런던의 바흐'로 일컬어질 정도로 전 유럽에서 활약하고 대바흐와 헨델을 정점으로 하는 바로크음악에서 하이든, 모차르트의 빈고전파로 음악사를 크게 전환시켰다.

 

 

▶ 바흐의 생애

요한 세바스티안은 중부 독일에 있는 루터파신앙의 중심지인 아이제나흐에서 거리의 악사인 요한 암브로지우스의 8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당숙 요한 크리스토프의 오르간 연주를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10세 때 양친을 여의고,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집에서 살면서 독일 오르간음악의 전통을 익히게 되었다. 큰형의 가족수가 늘어나자 자립을 해야 했던 바흐는 1700년 봄 북독일의 뤼네부르크로 가서 그 곳 고등학교 급비학생이 되어 루터파의 교육을 받으면서 교회의 합창단원으로서 북독일악파의 다양한 종교음악과 친숙하게 되었다. 170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듬해 바이마르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근무하면서 연주경험을 쌓았고, 3개월 후에는 아른슈타트의 교회 오르간 주자로 채용되었다. 오르간 주자는 오랫동안 희망하였던 자리였으므로 성능이 좋은 오르간이 설치된 새 직장에서 그는 열심히 오르간 연주법과 작곡법을 공부하였다. 그는 성가대를 훈련시키는 한편, 과거와 당시의 대가들의 작품을 필사·연구하여 점차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해 나갔다. 유명한 라단조의《토카타와 푸가》《여행을 떠나는 사랑하는 형에게 붙이는 카프리치오》등이 이 시기에 쓴 작품들이다. 1707년 6월 바흐는 아른슈타트에서 같은 중부독일의 뮐하우젠으로 옮겨, 성브라지우스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여기서도 그는 전과 같이 열심히 작곡하면서 교회칸타타에도 손을 댔으며,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해 가을에 그는 사촌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그 후 13년 동안에 7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그 중 빌헬름 프리데만과 카를 필립 에마누엘은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하였다. 결혼한 이듬해 바흐는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가, 궁정예배당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약 10년간의 바이마르시절에 그는 오르간 주자로서 명성이 높아지고 작품도 점차 원숙해져 대가로서의 풍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전주곡과 푸가》《토카타》《코랄전주곡》과 같은 오르간작품이었으며, 따라서 이 시기를 '오르간곡의 시대라고도 부른다. 한편 그는 교회칸타타를 거의 매달 한 곡씩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궁정악단의 연주를 통해 비발디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악파의 음악을 알게 되었다. 바흐는 이탈리아의 협주양식이라는 새로운 작곡법에도 착안, 비발디의 협주곡을 오르간이나 쳄발로로 편곡하였다. 이것이 훗날 협주곡의 명작을 낳는 기초가 되었다. 1717년 말, 그때까지 궁정의 집안싸움에 휘말리기도 하고, 또 희망하고 있던 궁정악장의 지위도 얻지 못하자, 바이마르궁정악단에 실증을 느끼게 된 바흐는 괴텐으로 이사하였다. 괴텐궁정악단의 지위는 새바람을 찾고 있던 바흐에게 가장 조건이 좋은 것이었으며, 그는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17인으로 구성된 궁정악단을 이끌어 가면서 자유롭게 작곡과 연주에 열중하였다. 좋은 환경과 풍족한 생활 속에서 창작에 대한 의욕이 높아진 그는 잇달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 기악곡, 3개의《바이올린협주곡》, 6곡의《브란덴부르크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의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 등은 이 시기에 작곡된 것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밝은 빛으로 충만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흐의 사회적·가정적인 행복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1720년에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죽자, 이듬해 35세의 바흐는 안나 막달레나를 새로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녀를 위하여《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곡집》(《프랑스모음곡》도 포함)을, 그리고 장남 프리데만을 위하여《인벤션》을 작곡하였으며, 《평균율 클라비어곡집》도 이 시기에 정리된 것이다. 23년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교회의 칸토르에 취임하여 죽을 때까지 27년간을 교회음악가로 보내게 된다. 그의 임무는 기악과 성악의 개인지도와 합창단의 훈련, 그리고 이 도시의 교회음악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성토마스교회와 성니콜라이교회에서는 일요일마다 칸타타가 연주되었고, 성금요일에는 수난곡이 불려졌다. 이러한 가운데《우리의 하나님은 견고한 성이로다》등을 포함한 140곡 이상의 교회칸타타,《마태오수난곡》을 포함한 몇 곡의 수난곡,《마니피카트》《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나단조미사》등 많은 교회음악이 작곡되었다. 이 라이프치히시기를 '교회음악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옳지만, 사실상 그는 이 때 대학생의 연주단체를 위해 많은 세속적인 칸타타와 클라비어협주곡도 작곡하였고, 만년에는 대위법작법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골드베르크변주곡》《음악의 헌정》《푸가의 기법》 등도 작곡하였다. 그러나 이 최후의《푸가의 기법》은 급속히 쇠약해진 시력과 뇌졸중의 발작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1750년 뇌졸증의 발작과 시력 감퇴로 체력이 두드러지게 약해졌는데, 수술과 치료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그해 7월 28일, 65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성 요한교회의 묘지에 묻혔다.


 

▶ 바흐의 업적

현대의 서양 클래식음악이 모두 한꺼번에 사라진다 해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만 남아 있다면 현재의 음악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할 만큼 음악사에서 바흐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음악사상 가장 많은 음악가를 배출한 바흐의 가문은, 1685년에 태어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바흐의 가계는 멀리 16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그들의 집안은 대대로 중부독일의 튀링겐을 중심으로 하여 활동을 해 온 전형적인 프로테스탄트 가문이었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트를 창시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바흐 집안의 활동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아이젠나하에서 그 신앙적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바흐의 인생과 음악을 움직이게 해준 대부분의 사람들이 루터파의 신앙생활에 충실했었다는 것이 첫째 이유가 될 것이다. 바흐의 아버지는 요한 암브로시우스(Johann Ambrosius Bach)이며, 그에게는 요한 크리스토프(Johann Christoph Bach)라는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그들 쌍둥이 형제의 맏형이 게오르그 크리스토프(Georg Christoph Bach)인데, 이 3형제를 낳아준 요한 크리스토프와 그의 아버지인 요하네스 등은 모두가 유명한 악사들로 훗날 J.S.Bach가 태어날 수 있는 혈통적 유전질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흐 역시 20명에 달하는 많은 자녀를 두었다. 그 중에서도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Wilhelm Frideman, 1710-1784)과 차남인 카알 필립 에마누엘(Karl Phillip Emamuel Bach, 1714-1788), 막내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Johann Christian Bach, 1735-1782) 등은 모두가 뛰어난 음악가로서 바하의 가문을 빛나게 해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 유럽에서 뛰어난 음악활동을 펼침으로써 바흐와 헨델을 정점으로 하는 바로크음악과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비인 고전악파의 징검다리 구실을 해주었다는 점에서도 그들이 차지한 음악사적인 위치가 크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독실한 신자였는데, 음악으로서 신에게 봉사하는 데에 그 생애를 바쳤다. 그의 풍부한 멜로디와 절묘한 대위법의 취급에 의해 한없는 아름다움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 기교의 밑바닥에는 종교적인 신념이 깃들여 있다. 그는 대위법의 작법에 기반을 두면서도 여기에 화성적인 수법을 가미시켰다. 말하자면 화성적인 복음악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토벤은 그를 가리켜 화성의 아버지라고 말한 바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대 미사곡, 마태 수난곡, 토카타 d단조 오르간곡, 기악 독주곡, 중주곡, 합주곡, 협주곡 등 여러 방면에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그리고 12평균율의 조율법에 의한 48곡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200여년간에 걸친 바흐의 가문의 음악을 총결산하면서 세계 음악사상 가장 높은 봉우리로 우뚝 솟은 거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음악의 물줄기는 바흐로부터 흘러 나와서 다시 바흐로 되돌아갈 만큼, 그의 이름이 차지하는 음악사적 비중은 너무나 크고 당당하다. 그래서 바흐를 가리켜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컬으며, 그 이름에 합당할 만큼 바흐의 음악은 인류의 위대한 음악 문화적 유산으로 길이 흠모되고 있는 것이다. 바흐의 이름자인 bach는 독일어로 '작은 시냇물'이란 뜻이다. 그러나 악성 베토벤은 바흐를 가리켜 "당신은 작은 시냇물이 아니라 드넓은 대양입니다."라고 멋진 비유를 했다. 사실 바흐의 이름으로 작곡되어진 모든 음악들이야말로 어떤 대해보다도 드넓으며, 어떤 계곡보다도 깊고 오묘하다. 평생동안을 프로테스탄트적 신앙생활을 지켜가면서 써낸 수많은 종교 음악을 비롯해서 기악곡과 관현악곡에 이르는 모든 부문에 이르기까지 바흐는 엄청난 대작업을 이루어낸 것이다.


 

▶ 바흐의 작품

바흐는 대략 17세기 초엽에서 시작되는 바로크음악의 총괄자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독일의 전통적인 대위법 예술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북독일의 북스테후데와 남독일의 파헬벨의 오르간음악의 작법을 습득하였다. 다음에 코렐리와 비발디로부터 이탈리아음악의 명쾌한 협주양식과 풍부한 화성, 그리고 라틴적인 형식감을 도입하였으며, 륄리와 쿠프랭에게서 프랑스음악의 섬세한 건반작법과 대담한 프랑스식 서곡을 배웠다. 이러한 당시의 온갖 음악의 전통과 각 국민의 양식이 바흐의 천재적인 개성 속에서 융화되어 긴장도가 높은 독특한 음악을 낳게 한 것이다. 그러나 바흐를 전통적인 보수주의자, 여러 양식의 총괄자로서만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겠다. 그의 작풍에는 베토벤이 낭만파를 예견하고, 바그너가 20세기의 음악을 예견한 것과 같이, 훗날 발생한 고전파의 양식을 암시하는 많은 특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바흐는 50대 후반부터 인기 없는 작곡가에 속했고 사후에 거의 잊혀져 갔다. 거의 100년쯤 지난 1829년 베를린에서 멘델스존의 지휘로 이 연주되면서 비로써 바흐의 음악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바흐는 뛰어난 대위법적 작곡 기술로 다성양식(多聲樣式)을 완성하였다. 또한 평균율(平均律)을 채용하여 근대음악발달의 바탕을 이루었다.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브람스 등이 기존의 음악가를 능가하기 위한 창조력의 원천을 바흐에서 찾았으며, 현대 음악의 문을 연 A.쉔베르크가 의 이론적 기초를 바흐의 대위법에서 구했다.


 

▶ 바흐 연표

1685년 3월 21일 아버지 요한 암브로사우스 바흐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레멜필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694년(9세) 5월 3일 어머니를 여의다. 8개월 뒤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다.

1695년 오르간을 배우다.

1700년 15세에 뤼네부르크 미가엘 성당 부속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 오케스트라에 들어가 바이올린 연주. 오르간 주자이며 작곡가인 게오르크 벰을 만나다.

1701년 16세에 오르간 명수인 빈첸트 뤼베크를 알게 되어 이때부터 작곡시작, '그대 밝은 날의 그리스도', '그대 착하고 바른 신이여'를 작곡

1702년 17세에 미카엘 부속학교 졸업

1703년 18세에 에른스트 공의 실내교향악단에 바이올린 주자로 들어가다. 에른슈타드의 성당에서 훌륭한 연주를 하여 정식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 'E장조의 전주곡과 푸가', '토가타와 푸가'를 작곡

1707년 22세에 성 브라쥬스 성당의 음악장으로 일함, 마리아와 결혼. 정리와 교회음악을 채택하려 함, 루터파의 경건주의와 정면으로 대립한 게오르크 아일머와 친교를 맺다.

1708년 23세에 바이마르 궁전의 오르간 연주자로 취직하고 유명한 '팟사카리아 다단조'발표

1710년 25세에 전주곡과 푸가, 코라르 전주곡, 토카가등 오르간곡을 만듬

1713년 28세에 헨델의 스승 프리드리히 찻호의 후계자로 추대

1720년 7월 7월 아내 마리아 사망, 한때 창작 의욕과 용기를 잃다.

1721년 36세에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 그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기악곡 발표. 케텐 악단의 우수한 16명의 연주가를 위해 수많은 작곡을 하다.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와 건반용 음악으로 '영국 조곡', '프랑스 조곡', '브란덴 부르크 협주곡',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등 대표적 오케스트라 작품 완성

1722년 37세에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의 음악장을 원했으나 거절되고 대신 시 참사회에 추천, 칸타타 22번 '예수는 사도들을 가까이 부르다', '요한 수난곡', '평균율' 전곡 완성

1723년 2월, 성 토마스 교회의 음악장으로 임명, 성 토마스 교회와 성 니콜라스 교회를 위한 대합창곡을 작곡, '미사속', '수난곡', '오라토리오'를 발표함

1738년 53세에 작센공 궁정 작곡가 칭호를 받다.

1747년 62세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밑에 있는 아들 카를 필리프 에나누엠을 찾아 포츠담에 가다.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나 그가 요구한 주제로 작곡을 하다.

1750년 65세에 세상을 떠나기 며칠전 사위에게 불러준 '그대 앞에 이제 나 나가리'를 끝으로  삶을 마치다.

1750년 7월 28일 저녁 8시 아름다운 음악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세상을 떠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