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기니스는 그의 탁월한 저서 ‘소명’에서 오늘날 기독교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데 그 도전은 한편으로는 세계화된 문화의 도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종교가 주도하는 각각의 위대한 문명이 인류를 위한 최상의 비전을 제시하겠노라고 경쟁에 나서는 도전이라고 한다.
한국 기독교도 이러한 도전의 흐름에서 예외일 수 없겠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근본적인 내부로부터의 위험에 직면해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저지르는 온갖 비리는 더 이상 그 비리의 주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세인의 관심조차 끌지 못할 정도로 흔한 현상이 되어 버렸고, 교권의 세습화를 필두로 한 교회 내부의 여러가지 부끄러운 모습들은 이미 세상의 소금과 빛이기를 포기한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의 한 마디는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많은 이들의 경청 대상이 되지만, 개신교의 지도자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스스로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이지만-이 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그 이야기에 참된 진리와 오묘한 지혜가 담겨 있더라도 무시와 조소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 한국 기독교가 처해있는 오늘의 모습인 것이다.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인 동시에 변호사로서 한국의 법조직역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2. 세상은 거룩하다.
오스 기니스는 소명의 의미를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삶 전체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사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소명의 의미가 두 가지로 왜곡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그 하나는 ‘카톨릭적 왜곡’으로 세속적인 것을 희생시킨 채 영적인 것을 격상시키는 영적인 이원론이고, 다른 하나는 ‘개신교적 왜곡’으로 카톨릭적 왜곡과 반대로 영적인 것을 희생시킨 채 세속적인것을 격상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전자의 입장을 따르게 되면 기독교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 은둔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고, 후자의 입장을 따르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다 선하고 거룩한 것이 되어서 그 일을 수행하는 인간의 원죄적 속성이 의도적으로 무시되어질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선지자로서,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한 섭정왕으로 섬겨야 할 영역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날마다 수행하는 모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교통하심을 경험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거룩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는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선하다-왜 교회가 하나님의 자리에 들어서는 지도 의문이지만-는 이분법과 교회나 개인의 사적 영역을 벗어난 세상영역에 대하여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한 마디로 대표되는 또다른 이분법-전혀 동의할 수 없는 해석이지만-으로 교인들을 옭아매고 있다. 일터에서 근무시간 외의 시간을 이용하여 기도회나 성경공부 모임을 가질 수는 있지만 이러한 개인적 신앙은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빌자면 모자와 코트와 함께 사무실 문밖에 두고 들어가서 공적인 영역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한국교인들의 지금 모습이다.
한국 기독교의 위기상황을 초래한 큰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신앙의 사사화(私事化)에 있다. 사사화경향은 기독교인의 삶의 영역을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으로 구분하고 사적인 영역에서만 믿음이 작동하는 특별한 장으로 강화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적 생활영역은 신자들에게 오스 기니스의 표현처럼 영적인 인디언보호구역과 같은 것으로서 세속사회의 구조적인 분리주의가 빚어낸 영적 놀이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이처럼 사적 영역에서만 드러내게 됨으로써 하니님의 영역을 본의아니게 축소시켜 버리고 말았으며, 이는 70년대의 한국교회의 번영의 교리, 건강과 부의 복음과 결합하여 신앙적 결단과 고민이 없는 덩치만 커다란 기형아를 만들어내게 되었고, 80년대 이후 큐티(QT- Quiet Time, 경건의 시간)로 대표되는 평신도들의 성경공부 운동 역시 이러한 사사화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였다.
한국교회가 당면한 심각한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이러한 사사화의 경향을 극복하는 데 있다. 데이비드 보쉬는 ‘한 사람의 개인적 경건이 자기와 자기 동료 사이의 관계를 어색하게 할 때, 그의 종교적 헌신이 이웃에 대하여는 오히려 마음을 닫아버리게 할 때, 성령의 역사함이 한 개인의 윤리적 영역에만 치우칠 때, 기독교가 오로지 정해진 시간에 행해지는 예배활동의 의미로만 한정되어 이해될 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절실한 요구사항에 대하여 가르쳐주는 성서의 구절들이 영적으로만 해석될 때, 속죄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서만 유효한 것으로 한정될 때,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가 접하는 모든 관계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을 때, 기관화되고 구조적인 것 속에서 자리잡은 죄가 폭로되지 않을 때, 기독교는 비성서적인 편견을 가진 겉치레이며 위와 같은 노선을 따르는 기독교인은 진실되지 못한 허위의 기독교를 따르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분을 보내셨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 안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 세워질 것이기에 우리의 헌신은 하나님께서 물리적으로 창조하신 거룩한 이 세계-가정, 사회, 정치, 문화, 교육, 재정 그 밖에 우리가 만들고 고치는 모든 세계-에 대하여 이들을 만들어내고, 유지하고, 고치고 회복시키는 모든 활동에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활동 영역은 지극히 종교적인 영역에 너무 치우쳐 있다. CLF 경제윤리 토론 시간에 제기된 이야기 중 하나를 옮기자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부를 무척 많이 하는 데 교회 헌금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별로 기부를 하지 않는 것처럼 인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활동 영역이 교회나 선교단체 지원 등 극히 종교적인 영역에 묶여 있는 한 거룩한 세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 사역에 동참할 기회는 없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전체를 구조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진리로 고백하는 복음에 사회를 변혁시키는 능력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이 세상의 체제와 긴장관계에 있어 왔으며 근본적으로 체제 전복적이었다. 기독교 신앙은 끊임없이 그가 속한 당대의 사회 체제를 비판하고 잘못된 것을 개혁시켜 나가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사회변혁적 성격을 거세하고 체제 속에 안주하여 신앙을 개인적 삶의 영역에 묶어 두려는 시도는 언제나 기독교의 타락을 초래하여 왔음을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3. 이 세계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주의할 관점들
이처럼 하나님의 온 백성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변혁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올바른 삶의 모습이라고 할 때 빠지기 쉬운 오류를 두 가지 정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정치화의 경향인데, 교회가 직접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그 사회의 ‘도덕 비밀경찰’의 역할을 감당하려는 경향이다. 지금도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네오콘)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기독교적 신념을 현실 정치에 반영시켜 수많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전쟁을 정의의 십자군 운동처럼 미화하고 있고 부시 대통령이 매일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알려진 때문에 기독교는 더욱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멀리 미국에서 예를 찾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서도 ‘기독교 세계관’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고 사회제도화하려는 시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점차 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사회기관이나 정치권력을 지지하고 나아가 교회가 직접 세속적인 권력을 차지하려 시도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세상에 속한 나라들을 기독교국가화하는 것이 지상 목표인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적 경험은 교회가 권력의 보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본래의 사명에서 멀어져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기독교가 국교화된 콘스탄틴 대제 이후의 로마가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위험한 경향은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빌자면 ‘기둥화’의 경향인데. 이러한 경향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수상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네덜란드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기둥화’ 경향은 점차 확대되는 다원주의 경향 속에서 개신교인들이 각 영역에서 자기 나름의 개신교 학교, 개신교 대학, 개신교 신문, 개신교 노조 등을 만들어 대처하였던 것처럼 각 영역에서 기독교인 공동체를 구축하여 일관성있게 기독교적인 것을 견지하려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둥화’의 경향은 만들어진 공동체 속에 안주함으로써 바깥 사회에 대한 변혁의 에너지를 잃어버리고 마침내는 흐르지 않는 물처럼 썩어버리고 만다.
4. 그리스도인의 익명성
이러한 두 가지 경향의 위험성을 피하면서 세상 속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태도로 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익명성을 제안한다. 원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신학적 개념은 에큐메니칼 신학운동에서 배출된 것으로서 성서적으로는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를 나누는 비유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백이 없이도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다소 급진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신학적 개념으로 이 익명성의 개념을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일할 때 내적으로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여 세상에 속한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다른 하나님의 백성을 섬긴다는 자세를 견지하지만, 겉으로 활동할 때에는 일반 시민과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행동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선교지역을 구분하는 용어 중에 창의적 접근지역이라는 말이 있다. 아직 복음이 공개적으로 전해질 수 없는 지역에서 복음사역을 담당하는 이들이 자신이 어떠한 목적으로 그 지역에 와 있는 지 주된 목적은 감춘 채, 상사주재원이나 학생 등의 신분으로 활동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임에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들로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 한사람 한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선교적 사명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고, 복음에 대해 전혀 우호적이지 않은, 아니 적대적이기까지 한 이 세대를 향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고 선언하는 행동보다는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는 일에 헌신하여야 할 것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이렇게 갈파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아무리 매력적으로 들린다 하여도 그들이 보고 경험하는 것과 심하게 대조되는 것일 때에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선포가 매력적으로 들리면 들릴수록 더욱 더 이 말씀 선포와 우리의 삶의 개탄스러운 질적인 면 사이에 눈에 드러나는 대조가 더 두드러지게 되는 현실에서 교회는 자주 복음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되기 보다는 장애가 되고 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한국의 지금 상황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말이나 예배의식(儀式)보다는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하나님의 창조질서로의 회복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결단과 헌신을 필요로 한다. 세상은 거룩하여야 함에도 스스로 그 거룩함을 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버렸다. 이러한 도망자들의 세상 속에서 그 반대방향을 택한 사람들은 마치 달아나버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될 것이다.
거룩한 세상,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 광수 변호사-
거룩한 세상,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 광 수 변 호 사
1. 한국기독교가 직면한 도전
오스기니스는 그의 탁월한 저서 ‘소명’에서 오늘날 기독교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데 그 도전은 한편으로는 세계화된 문화의 도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종교가 주도하는 각각의 위대한 문명이 인류를 위한 최상의 비전을 제시하겠노라고 경쟁에 나서는 도전이라고 한다.
한국 기독교도 이러한 도전의 흐름에서 예외일 수 없겠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근본적인 내부로부터의 위험에 직면해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저지르는 온갖 비리는 더 이상 그 비리의 주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세인의 관심조차 끌지 못할 정도로 흔한 현상이 되어 버렸고, 교권의 세습화를 필두로 한 교회 내부의 여러가지 부끄러운 모습들은 이미 세상의 소금과 빛이기를 포기한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의 한 마디는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많은 이들의 경청 대상이 되지만, 개신교의 지도자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스스로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이지만-이 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그 이야기에 참된 진리와 오묘한 지혜가 담겨 있더라도 무시와 조소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 한국 기독교가 처해있는 오늘의 모습인 것이다.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인 동시에 변호사로서 한국의 법조직역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2. 세상은 거룩하다.
오스 기니스는 소명의 의미를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삶 전체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사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소명의 의미가 두 가지로 왜곡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그 하나는 ‘카톨릭적 왜곡’으로 세속적인 것을 희생시킨 채 영적인 것을 격상시키는 영적인 이원론이고, 다른 하나는 ‘개신교적 왜곡’으로 카톨릭적 왜곡과 반대로 영적인 것을 희생시킨 채 세속적인것을 격상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전자의 입장을 따르게 되면 기독교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 은둔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고, 후자의 입장을 따르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다 선하고 거룩한 것이 되어서 그 일을 수행하는 인간의 원죄적 속성이 의도적으로 무시되어질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선지자로서,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한 섭정왕으로 섬겨야 할 영역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날마다 수행하는 모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교통하심을 경험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거룩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는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선하다-왜 교회가 하나님의 자리에 들어서는 지도 의문이지만-는 이분법과 교회나 개인의 사적 영역을 벗어난 세상영역에 대하여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한 마디로 대표되는 또다른 이분법-전혀 동의할 수 없는 해석이지만-으로 교인들을 옭아매고 있다. 일터에서 근무시간 외의 시간을 이용하여 기도회나 성경공부 모임을 가질 수는 있지만 이러한 개인적 신앙은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빌자면 모자와 코트와 함께 사무실 문밖에 두고 들어가서 공적인 영역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한국교인들의 지금 모습이다.
한국 기독교의 위기상황을 초래한 큰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신앙의 사사화(私事化)에 있다. 사사화경향은 기독교인의 삶의 영역을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으로 구분하고 사적인 영역에서만 믿음이 작동하는 특별한 장으로 강화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적 생활영역은 신자들에게 오스 기니스의 표현처럼 영적인 인디언보호구역과 같은 것으로서 세속사회의 구조적인 분리주의가 빚어낸 영적 놀이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이처럼 사적 영역에서만 드러내게 됨으로써 하니님의 영역을 본의아니게 축소시켜 버리고 말았으며, 이는 70년대의 한국교회의 번영의 교리, 건강과 부의 복음과 결합하여 신앙적 결단과 고민이 없는 덩치만 커다란 기형아를 만들어내게 되었고, 80년대 이후 큐티(QT- Quiet Time, 경건의 시간)로 대표되는 평신도들의 성경공부 운동 역시 이러한 사사화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였다.
한국교회가 당면한 심각한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이러한 사사화의 경향을 극복하는 데 있다. 데이비드 보쉬는 ‘한 사람의 개인적 경건이 자기와 자기 동료 사이의 관계를 어색하게 할 때, 그의 종교적 헌신이 이웃에 대하여는 오히려 마음을 닫아버리게 할 때, 성령의 역사함이 한 개인의 윤리적 영역에만 치우칠 때, 기독교가 오로지 정해진 시간에 행해지는 예배활동의 의미로만 한정되어 이해될 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절실한 요구사항에 대하여 가르쳐주는 성서의 구절들이 영적으로만 해석될 때, 속죄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서만 유효한 것으로 한정될 때,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가 접하는 모든 관계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을 때, 기관화되고 구조적인 것 속에서 자리잡은 죄가 폭로되지 않을 때, 기독교는 비성서적인 편견을 가진 겉치레이며 위와 같은 노선을 따르는 기독교인은 진실되지 못한 허위의 기독교를 따르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분을 보내셨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 안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 세워질 것이기에 우리의 헌신은 하나님께서 물리적으로 창조하신 거룩한 이 세계-가정, 사회, 정치, 문화, 교육, 재정 그 밖에 우리가 만들고 고치는 모든 세계-에 대하여 이들을 만들어내고, 유지하고, 고치고 회복시키는 모든 활동에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활동 영역은 지극히 종교적인 영역에 너무 치우쳐 있다. CLF 경제윤리 토론 시간에 제기된 이야기 중 하나를 옮기자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부를 무척 많이 하는 데 교회 헌금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별로 기부를 하지 않는 것처럼 인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활동 영역이 교회나 선교단체 지원 등 극히 종교적인 영역에 묶여 있는 한 거룩한 세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 사역에 동참할 기회는 없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전체를 구조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진리로 고백하는 복음에 사회를 변혁시키는 능력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이 세상의 체제와 긴장관계에 있어 왔으며 근본적으로 체제 전복적이었다. 기독교 신앙은 끊임없이 그가 속한 당대의 사회 체제를 비판하고 잘못된 것을 개혁시켜 나가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사회변혁적 성격을 거세하고 체제 속에 안주하여 신앙을 개인적 삶의 영역에 묶어 두려는 시도는 언제나 기독교의 타락을 초래하여 왔음을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3. 이 세계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주의할 관점들
이처럼 하나님의 온 백성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변혁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올바른 삶의 모습이라고 할 때 빠지기 쉬운 오류를 두 가지 정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정치화의 경향인데, 교회가 직접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그 사회의 ‘도덕 비밀경찰’의 역할을 감당하려는 경향이다. 지금도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네오콘)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기독교적 신념을 현실 정치에 반영시켜 수많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전쟁을 정의의 십자군 운동처럼 미화하고 있고 부시 대통령이 매일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알려진 때문에 기독교는 더욱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멀리 미국에서 예를 찾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서도 ‘기독교 세계관’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고 사회제도화하려는 시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점차 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사회기관이나 정치권력을 지지하고 나아가 교회가 직접 세속적인 권력을 차지하려 시도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세상에 속한 나라들을 기독교국가화하는 것이 지상 목표인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적 경험은 교회가 권력의 보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본래의 사명에서 멀어져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기독교가 국교화된 콘스탄틴 대제 이후의 로마가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위험한 경향은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빌자면 ‘기둥화’의 경향인데. 이러한 경향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수상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네덜란드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기둥화’ 경향은 점차 확대되는 다원주의 경향 속에서 개신교인들이 각 영역에서 자기 나름의 개신교 학교, 개신교 대학, 개신교 신문, 개신교 노조 등을 만들어 대처하였던 것처럼 각 영역에서 기독교인 공동체를 구축하여 일관성있게 기독교적인 것을 견지하려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둥화’의 경향은 만들어진 공동체 속에 안주함으로써 바깥 사회에 대한 변혁의 에너지를 잃어버리고 마침내는 흐르지 않는 물처럼 썩어버리고 만다.
4. 그리스도인의 익명성
이러한 두 가지 경향의 위험성을 피하면서 세상 속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태도로 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익명성을 제안한다. 원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신학적 개념은 에큐메니칼 신학운동에서 배출된 것으로서 성서적으로는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를 나누는 비유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백이 없이도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다소 급진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신학적 개념으로 이 익명성의 개념을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일할 때 내적으로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여 세상에 속한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다른 하나님의 백성을 섬긴다는 자세를 견지하지만, 겉으로 활동할 때에는 일반 시민과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행동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선교지역을 구분하는 용어 중에 창의적 접근지역이라는 말이 있다. 아직 복음이 공개적으로 전해질 수 없는 지역에서 복음사역을 담당하는 이들이 자신이 어떠한 목적으로 그 지역에 와 있는 지 주된 목적은 감춘 채, 상사주재원이나 학생 등의 신분으로 활동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임에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들로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 한사람 한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선교적 사명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고, 복음에 대해 전혀 우호적이지 않은, 아니 적대적이기까지 한 이 세대를 향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고 선언하는 행동보다는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는 일에 헌신하여야 할 것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이렇게 갈파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아무리 매력적으로 들린다 하여도 그들이 보고 경험하는 것과 심하게 대조되는 것일 때에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선포가 매력적으로 들리면 들릴수록 더욱 더 이 말씀 선포와 우리의 삶의 개탄스러운 질적인 면 사이에 눈에 드러나는 대조가 더 두드러지게 되는 현실에서 교회는 자주 복음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되기 보다는 장애가 되고 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한국의 지금 상황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말이나 예배의식(儀式)보다는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하나님의 창조질서로의 회복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결단과 헌신을 필요로 한다. 세상은 거룩하여야 함에도 스스로 그 거룩함을 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버렸다. 이러한 도망자들의 세상 속에서 그 반대방향을 택한 사람들은 마치 달아나버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될 것이다.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라. 그리고 필요하다면 말을 사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