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금 그들의 혐오감을 증폭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또한 개신교의 막무가내식 포교 활동과 본질적인 교리의 애매성은 일반인에게 개신교에 대한 친밀감을 저하시키는 커다란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국내 기독교 인구가 공식적 통계로만 800만 (교계추산 1200만) 을 육박하는 이 시대에, 이러한 반감과 오해 그리고 서로에 대한 불신은 자칫 국민적 분열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최근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密陽)이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함으로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그 영화 내용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접하게 되었다. 금기시 되어왔던 영역인 개신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다룬 영화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신애는 아들 준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서 살게 된다. 신애는,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불륜을 저질렀다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남편을, 애써 감싸려고 하는 알 수 없는 인물이다. 남편이 죽자 아들과 함께 밀양을 찾아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끔찍이도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밀양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는 신애는 피아노 학원을 새로 개업한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카센터 사장 김종찬과 인연이 닿는데, 홀로 자식을 키우며 살아가는 신애를 종찬은 안쓰럽게 생각하며 사사건건 일을 돕기 시작한다
신애는 서울에서 온 과부라는 주위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싫어
밀양에 땅을 투자하러온 부자처럼 행색하게 된다. 신애가 정말
부자인 줄 알았던 아들 준의 웅변학원 원장은 급기야 준을
유괴하고 신애에게 돈을 요구한다.
아들의 유괴소식에 이성을 잃은 신애는 실제로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기에 있는 돈 모두를 인출해 유괴범에게 가져다 주지만
그 유괴범은 정해진 액수와 맞지 않다며 결국 아들 준을 무참히
살해한다.
아들의 살해소식을 접한 신애는 한동안 패닉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살다가, 피아노학원 앞에 있는 약국에 있는 집사님으로부터 부흥회
에 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처음에 믿지 않았던 신애는 그냥 한번
그 교회에 갔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이후의 신애의 삶은 변화와 변화를 거듭하여 거의 성자와 같은
용서와 사랑 그리고 마음의 안정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 한 층
신애의 신앙이 성숙해 갈 무렵 신애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웅변학원 원장이 있는 교도소로 찾아가 그를 용서하기로 마음먹는다.
용서의 마음을 들고 교도서를 찾아간 신애는, 철창을 사이에 두고
유괴범을 대면하였다. 그리고는 그 유괴범에게 자기가 지금까지
느낀 하나님에 대한 느낌과 사랑을 설명하며 그 유괴범 에게도
하나님을 알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는 용서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전은 여기서 시작된다.
철창 안의 유괴범의 말은 지금도 생각할 수록 소름이 돋는다.
그 살인자는 온화한 표정으로
"준이 어머니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 이야기를 듣게 되니 참말로 감사합니다... "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그 유괴범을 용서하러 간 것도 신애이고
유괴범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싶어했던 것도 신애인데,
신애는 유괴범이 이미 하나님을 만나 행복하고 온화하게 하루하루
를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듣자 적지 않은 충격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이 영화는 기독교의 두리뭉실한 기독교적 합리화에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나의 것은 너의 것이 아니게 되는데, 하나님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는 너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이고 우리의 하나님이다.
자신의 아들을 처참하게 살해한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어 행복하고 밝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면 그 부모 입장에서 하나님이 곱게 인식 될리가 없는것이다. 아무리 자기를 구원했다는 확신이 있고 믿음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그 배신감과 허탈함은 어찌 할 도리가 없는것이다.
기독교의 사랑의 본질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고차원적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실질적이고, 실천적인 모티프를 제공하지 못하여 점차 관념화 되어가고 있다는 점 또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궁극적 사랑으로 승화되거나 초탈이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할 준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에 회의를 느낀 신애는, 점차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고 기도회를 방해 한다거나 장로를 꼬여내는 등의 개인적 일탈을 시작하다가 결국엔 칼로 손을 그어 병원 신세를 지고 만다.
세상의 모든 일들의 주님의 뜻이고, 주님의 계획 아래 있음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습관처럼 고백하고 또 믿는다.
또한 나는, 내가 최근에 가진, 순복음적 신앙, 즉 절대 긍정의 하나님 치료의 하나님 예비의 하나님 등등 항상 하나님의 특징을 희망적인 단어로 규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배제성이 없으신 분이다. 즉 다시 말해 나에게 희망의 하나님은 타인에게도 희망의 하나님이시다. 결국 하나님은 나의 편도 아닌 원수의 편도 아닌 그저 절대적 존재일 뿐이라는 인식으로 귀결된다.
그럼 이것이 무엇인가,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나의 편이 되어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과는 모순적으로 대립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또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내가 나에게 죄 진자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그 죄인을 용서하신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데, 하나님은 그의 편에도 서 계신다. 이런 난감한 상황이....
이러한 병폐가 생기는 원인중에 하나를 나는 기독교의 용서의 댓가가 너무 저렴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떻게 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용서는 진실한 회개와 그 마음이 변화를 입었을 때 비로소 주시는 것이며, 그것은 사죄이다.
그러나 대개는 개인이 죄사함 받음을 그 각자의 방식대로 인식하게 됨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기도만 하면 용서해주시니까 지금은 눈 질끈 감고 죄 져도 죄 짓고 나서 회개하면 용서해 주실거야 라는 합리화를 부추기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는 죄사함을 완벽히 부정할 수는 없다.
새롭게 회개한 사람은 새로운 마음을 입을 권리를 주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러한 모순은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가.
정녕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니님이라는 존재를 올바로 인식할 수는없는 것인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모순없이 느낄수는 없는것인가, 만약 나에게도 저런 상황이 다가 올때 그 소름끼치는 상황에서 나도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할 수 있을까.
기독교 800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 각각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무턱대고 아니면 교회음악이나 그 분위기에 심취되어 습관적으로 믿는것은 아닐까.
요즘 부쩍 장로님들의 기도가 가식적이고 형식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온갖 미사여구로 하나님을 꾸며대고는 그들의 스케일과는 전혀 거리가 멀 것 같은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해 한마디씩 하나님께 간구하며 회복시켜달라고 애원(?)하듯 달려든다. 기도문은 외우지도 않고 그 많은 예배자들 앞에서 보고 읽기가 일쑤이며 신앙의 선배라고 선출된 자로서의 성숙한 믿음은 찾아 볼 수 없다. 기도 중간중간 들려오는 성도들의 '아멘'의 화답소리 크기가 자신의 기도가 얼마나 영향력있는지 측정하는 수단쯤으로 전락해 버렸고 기도의 감동이나 능력은 잃은지 오래다. 장로들은 그들의 권위를 찾기 위해 장로회를 구성하고 그들만의 모임 그들만의 하나님은 추종하며 일반 성도들과의 거리를 점점더 벌려 간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러한 기독교의 비판적 시각과, 모태신앙으로 자라면서 지금까지는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교회에 대한 반감은 한낮 젊은날의 소모적인 고민이라고 생각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런 사항은 나에게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이며 하나님의 실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기회가 된다.
신앙의 위기인가 아니면 본질을 깨닫는 과정인가.
개인적으론 나의 이러한 생각들이 단순한 신앙적 일탈에서
그치기를 바라고 있지만 영화 밀양에서 느꼈던
소름끼치는 기독교의 현실적 모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언젠가 내 친구가 나에게 기독교는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객관적 시각에서 그것은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인들은 무조건적으로 성경에 의거하여 모든것들을
합리화 시키고 논리를 끼워 맞춘다.
나는 종교가 논리적으로 설명된다는 것은 곧 인간이 만들어 냈기 때문이라고 답변하곤 한다. 기독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는 처음부터 끝이 모두 논리로 구성된다. 하나하나 인간의 이치에 안 맞아 떨어지는 것이 없다. 고로 사회 구성원들의 공감을 얻어 내기에 쉽다. 그렇다고 기독교의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특징이 절대 전한 신이 창조한 종교라는 것을 반증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오히려 질문한 친구에게 반감을 심어줄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기도 하다.
일반인들은 기독교의 설명 과정들을 모순과 비논리로 인식할 것이다. 기독교는 일반인(비 기독교인)에게 논리적으로 그들의 종교를 설명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끝이 모두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절대적 진리. 절대적 믿음. 그리고 하나님.
나는 이러한 것들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그것들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을 때 가끔씩은 회의를 느낀다.
물론 신앙적 지식이 부족하고 내 신앙이 아직은 덜 성숙했을
탓도 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전문적 신앙의 지식이 없다고 가정할 때 이것은 기독교 전체적인 문제가 된다.
일부 기독교 지식인층만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일부 지식인층의 종교이지 모두의 종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순이 마음으로 느끼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설명 말고
실제로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는가의 여부가 앞으로
기독교의 존폐운명을 결정짓는 관건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기독교는 이러한 내부적 성찰과 반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을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정죄하고, 사탄이라고 규정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더이상 기독교를 대중종교로 확산 시킬 수 없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것이며 기독교는 더이상 우리 사회에서 참신하고 새로운 구원의 제시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이러한 글을 쓰는 내내 하나님께 죄짓는 일이
아닐까 노심초사 했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서 내 신앙이
좀더 확고해지고 더욱더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내 나름의
논리가 생겨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
끝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기에 이른다면 그 이후의 내가 느끼는 혼란과 혼돈은 단분간은 식지 않을 것이다.
믿는 사람들!! 제 혼란 좀 해결해주실래요
영화 '밀양'을 통한 내 신앙에 대한 고찰.
영화에 나타난 하나님의 비배제성과
기독교에서의 회개에 대하여
최근 아프간 피랍사태를 기회로 그 이전부터 불거져 나온 기독교의
윤리적 성찰 문제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관심이 뜨겁다.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날로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잇따른
개신교의 비도덕적이고 불명예적인 사건과 사고들은 일반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혐오감을 증폭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또한 개신교의 막무가내식 포교 활동과 본질적인 교리의 애매성은 일반인에게 개신교에 대한 친밀감을 저하시키는 커다란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국내 기독교 인구가 공식적 통계로만 800만 (교계추산 1200만) 을 육박하는 이 시대에, 이러한 반감과 오해 그리고 서로에 대한 불신은 자칫 국민적 분열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최근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密陽)이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함으로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그 영화 내용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접하게 되었다. 금기시 되어왔던 영역인 개신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다룬 영화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신애는 아들 준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서 살게 된다. 신애는,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불륜을 저질렀다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남편을, 애써 감싸려고 하는 알 수 없는 인물이다. 남편이 죽자 아들과 함께 밀양을 찾아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끔찍이도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밀양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는 신애는 피아노 학원을 새로 개업한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카센터 사장 김종찬과 인연이 닿는데, 홀로 자식을 키우며 살아가는 신애를 종찬은 안쓰럽게 생각하며 사사건건 일을 돕기 시작한다
신애는 서울에서 온 과부라는 주위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싫어
밀양에 땅을 투자하러온 부자처럼 행색하게 된다. 신애가 정말
부자인 줄 알았던 아들 준의 웅변학원 원장은 급기야 준을
유괴하고 신애에게 돈을 요구한다.
아들의 유괴소식에 이성을 잃은 신애는 실제로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기에 있는 돈 모두를 인출해 유괴범에게 가져다 주지만
그 유괴범은 정해진 액수와 맞지 않다며 결국 아들 준을 무참히
살해한다.
아들의 살해소식을 접한 신애는 한동안 패닉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살다가, 피아노학원 앞에 있는 약국에 있는 집사님으로부터 부흥회
에 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처음에 믿지 않았던 신애는 그냥 한번
그 교회에 갔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이후의 신애의 삶은 변화와 변화를 거듭하여 거의 성자와 같은
용서와 사랑 그리고 마음의 안정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 한 층
신애의 신앙이 성숙해 갈 무렵 신애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웅변학원 원장이 있는 교도소로 찾아가 그를 용서하기로 마음먹는다.
용서의 마음을 들고 교도서를 찾아간 신애는, 철창을 사이에 두고
유괴범을 대면하였다. 그리고는 그 유괴범에게 자기가 지금까지
느낀 하나님에 대한 느낌과 사랑을 설명하며 그 유괴범 에게도
하나님을 알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는 용서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전은 여기서 시작된다.
철창 안의 유괴범의 말은 지금도 생각할 수록 소름이 돋는다.
그 살인자는 온화한 표정으로
"준이 어머니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 이야기를 듣게 되니 참말로 감사합니다... "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그 유괴범을 용서하러 간 것도 신애이고
유괴범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싶어했던 것도 신애인데,
신애는 유괴범이 이미 하나님을 만나 행복하고 온화하게 하루하루
를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듣자 적지 않은 충격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이 영화는 기독교의 두리뭉실한 기독교적 합리화에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나의 것은 너의 것이 아니게 되는데, 하나님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는 너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이고 우리의 하나님이다.
자신의 아들을 처참하게 살해한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어 행복하고 밝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면 그 부모 입장에서 하나님이 곱게 인식 될리가 없는것이다. 아무리 자기를 구원했다는 확신이 있고 믿음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그 배신감과 허탈함은 어찌 할 도리가 없는것이다.
기독교의 사랑의 본질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고차원적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실질적이고, 실천적인 모티프를 제공하지 못하여 점차 관념화 되어가고 있다는 점 또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궁극적 사랑으로 승화되거나 초탈이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할 준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에 회의를 느낀 신애는, 점차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고 기도회를 방해 한다거나 장로를 꼬여내는 등의 개인적 일탈을 시작하다가 결국엔 칼로 손을 그어 병원 신세를 지고 만다.
세상의 모든 일들의 주님의 뜻이고, 주님의 계획 아래 있음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습관처럼 고백하고 또 믿는다.
또한 나는, 내가 최근에 가진, 순복음적 신앙, 즉 절대 긍정의 하나님 치료의 하나님 예비의 하나님 등등 항상 하나님의 특징을 희망적인 단어로 규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배제성이 없으신 분이다. 즉 다시 말해 나에게 희망의 하나님은 타인에게도 희망의 하나님이시다. 결국 하나님은 나의 편도 아닌 원수의 편도 아닌 그저 절대적 존재일 뿐이라는 인식으로 귀결된다.
그럼 이것이 무엇인가,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나의 편이 되어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과는 모순적으로 대립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또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내가 나에게 죄 진자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그 죄인을 용서하신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데, 하나님은 그의 편에도 서 계신다. 이런 난감한 상황이....
이러한 병폐가 생기는 원인중에 하나를 나는 기독교의 용서의 댓가가 너무 저렴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떻게 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용서는 진실한 회개와 그 마음이 변화를 입었을 때 비로소 주시는 것이며, 그것은 사죄이다.
그러나 대개는 개인이 죄사함 받음을 그 각자의 방식대로 인식하게 됨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기도만 하면 용서해주시니까 지금은 눈 질끈 감고 죄 져도 죄 짓고 나서 회개하면 용서해 주실거야 라는 합리화를 부추기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는 죄사함을 완벽히 부정할 수는 없다.
새롭게 회개한 사람은 새로운 마음을 입을 권리를 주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러한 모순은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가.
정녕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니님이라는 존재를 올바로 인식할 수는없는 것인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모순없이 느낄수는 없는것인가, 만약 나에게도 저런 상황이 다가 올때 그 소름끼치는 상황에서 나도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할 수 있을까.
기독교 800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 각각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무턱대고 아니면 교회음악이나 그 분위기에 심취되어 습관적으로 믿는것은 아닐까.
요즘 부쩍 장로님들의 기도가 가식적이고 형식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온갖 미사여구로 하나님을 꾸며대고는 그들의 스케일과는 전혀 거리가 멀 것 같은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해 한마디씩 하나님께 간구하며 회복시켜달라고 애원(?)하듯 달려든다. 기도문은 외우지도 않고 그 많은 예배자들 앞에서 보고 읽기가 일쑤이며 신앙의 선배라고 선출된 자로서의 성숙한 믿음은 찾아 볼 수 없다. 기도 중간중간 들려오는 성도들의 '아멘'의 화답소리 크기가 자신의 기도가 얼마나 영향력있는지 측정하는 수단쯤으로 전락해 버렸고 기도의 감동이나 능력은 잃은지 오래다. 장로들은 그들의 권위를 찾기 위해 장로회를 구성하고 그들만의 모임 그들만의 하나님은 추종하며 일반 성도들과의 거리를 점점더 벌려 간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러한 기독교의 비판적 시각과, 모태신앙으로 자라면서 지금까지는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교회에 대한 반감은 한낮 젊은날의 소모적인 고민이라고 생각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런 사항은 나에게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이며 하나님의 실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기회가 된다.
신앙의 위기인가 아니면 본질을 깨닫는 과정인가.
개인적으론 나의 이러한 생각들이 단순한 신앙적 일탈에서
그치기를 바라고 있지만 영화 밀양에서 느꼈던
소름끼치는 기독교의 현실적 모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언젠가 내 친구가 나에게 기독교는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객관적 시각에서 그것은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인들은 무조건적으로 성경에 의거하여 모든것들을
합리화 시키고 논리를 끼워 맞춘다.
나는 종교가 논리적으로 설명된다는 것은 곧 인간이 만들어 냈기 때문이라고 답변하곤 한다. 기독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는 처음부터 끝이 모두 논리로 구성된다. 하나하나 인간의 이치에 안 맞아 떨어지는 것이 없다. 고로 사회 구성원들의 공감을 얻어 내기에 쉽다. 그렇다고 기독교의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특징이 절대 전한 신이 창조한 종교라는 것을 반증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오히려 질문한 친구에게 반감을 심어줄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기도 하다.
일반인들은 기독교의 설명 과정들을 모순과 비논리로 인식할 것이다. 기독교는 일반인(비 기독교인)에게 논리적으로 그들의 종교를 설명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끝이 모두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절대적 진리. 절대적 믿음. 그리고 하나님.
나는 이러한 것들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그것들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을 때 가끔씩은 회의를 느낀다.
물론 신앙적 지식이 부족하고 내 신앙이 아직은 덜 성숙했을
탓도 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전문적 신앙의 지식이 없다고 가정할 때 이것은 기독교 전체적인 문제가 된다.
일부 기독교 지식인층만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일부 지식인층의 종교이지 모두의 종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순이 마음으로 느끼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설명 말고
실제로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는가의 여부가 앞으로
기독교의 존폐운명을 결정짓는 관건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기독교는 이러한 내부적 성찰과 반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을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정죄하고, 사탄이라고 규정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더이상 기독교를 대중종교로 확산 시킬 수 없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것이며 기독교는 더이상 우리 사회에서 참신하고 새로운 구원의 제시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이러한 글을 쓰는 내내 하나님께 죄짓는 일이
아닐까 노심초사 했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서 내 신앙이
좀더 확고해지고 더욱더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내 나름의
논리가 생겨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
끝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기에 이른다면 그 이후의 내가 느끼는 혼란과 혼돈은 단분간은 식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실제로 실재하시는 분이었으면 좋겠다.
믿고싶다.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