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계획과 시도에 관해 애기할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목표', '야망', '성취', '평가' 등의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청중'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쉽게 간과한다. 오직 광인, 천재, 최고의 이기주의자만이 순전히 스스로를 위해 일한다. 군중 앞에서 뽐내는 것이나, 다른 사람의 북소리에 맞춰 행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당신 자신의 북소리에만 맞추어 행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부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어떤 청중의 찬사를 생각하면서 일을 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청중이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청중을 갖고 있느냐이다.
이런 관찰은 소명의 진리에 담긴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소명에 귀기울이면서 산 인생은 다른 모든 청중을 밀어내는 단 한 분의 청중--유일한 청중(the Audience of One)--앞에서 살아낸 인생이다.
창세기에서 볼 수 있는 아브라함의 소명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여정동안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보통은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는데, 한번은 그분이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음성뒤에는 하나님의 눈이 있고, 그 눈 뒤에는 얼굴이 있으며 얼굴 뒤에는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앞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미의 마음앞에서)의 삶을 사는 것인데, 그것은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이신 하나님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점을 더욱 강조하신다. 그분은 자신이 부르신 자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는' 분임을 상기시키신다. 하나님은 참새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알고 계시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분이다. 자기의 덕을 선전하고, 남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기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이 보편적인 인간 심리인데, 예수님은 그와 반대로 은밀히 선행을 하라고 요구하셨다. "그러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6:4)
청교도들은 유일한 청중이신 하나님앞에서의 삶을 매우 강조하였다. 존 코튼(John Cotton)은 이 청중이란 주제를 더욱 발전시킨다. 그는 에베소서 6:6을 인용하면서 종의 소명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인간을 섬기고, 인간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긴다는 믿음 안에서 우리의 소명 가운데 믿음으로 사는 것" 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저 청교도식의 말장난에 불과한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유일한 청중이신 그분 앞에서 사는 삶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격려를 받지 못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하는 자이다. 반면에 믿지 않는 자는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제일 못한 일만 드러나 크게 불평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의 영웅주의는 남의 눈에 띄게 하거나 공공연하게 떠벌릴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장 위대한 행위는 유일한 청중 앞에서 행한 것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유일한 청중의 눈에 띄고 그분의 칭송을 받는 자는 그 이하의 다른 청중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한번은 동료 국회 의원의 악한 공격을 받는데도 왜 고통스러워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그 사람을 존경한다면 그의 의견에 신경을 쓰겠지요. 그러나 그를 존경하지 않는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유일한 청중앞에서 사는 자도 세상을 향해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단 한 분의 청중밖에 없다. 네 앞에서는 내가 입증해야 할 것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말할 필요도 없이, 현대 세계는 청교도 세계로부터 몇 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우리는 소명이 내면의 나침반 역할을 했던 '내부 지향적인' 청교도 세계로부터, 우리의 동시대인이 인도자가 되어 버린 '외부 지향적인' 현대 세계로 옮겨 왔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이동 레이더가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신호를 포착하는 것처럼 살고 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십대들은 자기 또래에게 귀기울이고, 여성들은 여성 잡지와 유행이 현혹하는 이미지를 좇아가고, 정치인은 여론 조사 결과를 맹종하고, 목사들은 '추구자들'과 '현 세대'에 관한 최근의 연구결과를 노심초사하며 따라간다. 어떤 큰 교회의 목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교인들의 눈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이 언제나 다른 교회로 옮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한 가지 신가한 사실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자들--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같은 몇몇 선한 지도자들, 레닌과 스탈린 같은 많은 악한 지도자들--과 더불어 20세기가 시작되었으나 나중에는 추종자들에게 병적으로 의존하는 연약한 리더십--이익에 쉽게 영합하는 뚜쟁이 같은 지도자들--과 더불어 끝났다는 점이다.
1941년 9월 30일 처칠은 하원에서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지도자는 귀를 계속 땅에 디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영국 국민이 그처럼 보기 흉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지도자들을 존경하기는 아주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때에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갤럽 여론 조사의 변덕스러운 기류--항상 맥박을 짚고 체온을 재고 있는--안에서 사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처칠 자신은 청중앞에서 대부분 깊은 인상을 남기고 때로는 청중을 압도했음에도, 그의 친구 바이올렛 본햄 카터(Violet bonham Carter)는 처칠을 "여론의 분위기에 너무나 무감각한 사람" 이라고 묘사했다. 해리 트루먼(Harry Truman)도 이와 비슷했다. 그는 마샬 플랜과 핵폭탄의 최초 사용 등 기념비적인 결정을 내린 대통령이었음에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모세가 애굽에서 여론 조사를 했다면 얼마만큼 지지를 받았을지 의심스럽다."
이와 대조적으로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와 같이 위대한 천재도 "내가 별로 알려지지 않은 도시에 있을 때에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고 1778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쓴 적이 있다. 극단적인 '외부 지향형'이나 '외관형'의 사고 방식은 쉽게 눈에 띄고 또 조롱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옛날 이야기에 따르면 어떤 혁명가가 파리의 카페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바껭서 왁자지껄한 소리를 들었다.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저기 군중들이 간다. 내가 저들의 지도자다. 난 저들을 따라가야 한다" 고 외쳤다는 것이다. 처칠의 친구이자 동료였던(후에 수상이 된) 로이드 조지(David Loyd George)는 여론에 지극히 민감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케인즈(Keynes) 경은, 로이드 조지가 방에 홀로 있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묻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케인즈는 "로이드 조지가 방에 홀로 있을 때에는 그 곳에 아무도 없답니다" 라고 대답했다.
스크린의 여신 마를렌 디트리히(Marlene Dietrich)는 자신이 카바레에서 받은 갈채를 녹음해서 음반을 만들기까지 했는데, 양면에 온통 박수 소리밖에 녹음되지 않았다. 그녀의 전기를 쓴 작가에 의하면 그녀는 종종 친구들을 초대해 놓고 그 레코드의 양면을 모두 틀로록 고집한 다음 '저건 누구누구고', '저건 누구누구야'라고 뻐기면서 말했다고 한다.
그러한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바보 같은 짓일지 모르나 우리 모두는 그런 퐁조에 영향을 바고 있다. 청교도들은 마치 자이로스코프(gyroscope : 고리에 바퀴를 세워 회전축이 어느 방향으로든 향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서, 바퀴가 빠리 회전하면 고리의 방향과 상관없이 본래의 회전 수준을 유지한다)를 삼킨 것처럼 살았고,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갤럽 여론 조사를 삼킨 것처럼 살고 있다. 마틴 루터 킹이 '버밍행 감옥에서 쓴 편지'(Lettter from Birmingham Jail)에서 쓴 것처럼 "당시에는 교회가 단순히 여론의 생각과 원리를 기록한 온도계가 아니라 사회의 관습을 변혁시키는 온도 조절 장치였다." 지도자인가, 뚜쟁이인가? 자리로스코프인가, 갤럽 여론 조사인가? 온도 조절 장치인가, 온도계인가?오직 유일한 청중의 임재를 연습하는 자들만이 전자에 이르고 후자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그 유일한 청중을 점차 더 알아 간 것이 나 자신의 소명의 변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과거에 발견하여 성취하고자 노력해 온 소명 중 일부는 복음을 이 세상에 이해시키는 것(변증가로서)과 이 세상을 교회에 이해시키는 것(분석가로서)이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중간 수준으로, 즉 고도로 전문화된 학적인 지식과 평범하고 대중적인 사고 사이의 중간 수준으로 해 내려고 노력해 왔다.
이처럼 양자간에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단 한 사람의 인간 청중을 나의 유일한 청중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각 청중은 상대편에게 미치려는 노력을 비웃는 것이 상례이다. 한 편이 그런 노력을 부질없이 '지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순간 다른 편은 그것을 '순진한 대중화 작업' 이라고 경멸한다. 따라서 도무지 만족시킬 수 없는 두 그룹 위에, 또한 그 너머에 진정으로 중요한 단 한의 청중 (유일한 정중)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나에게는 계속되는 도전인 동시에 크나큰 위안이 된다.
그 유일한 청중앞에서 사는 일은 뚜렷한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19세기의 위대한 그리스도인 군인이었던 찰스 고든(Charles Gordon)장군--'중국인 고든'(Chinese Gordon)이나 카르토움의 고든(Gordon of Khartoum)으로 알려진--의 성품과 삶이 뛰어난 본보기다. 윈스턴 처칠은 수단 탈환에 관해 쓴 책에서 고든 장군을 "남자들의 찡그린 얼굴이나 여자들의 미소, 생명이나 안락함, 부나 명성 등에 대해 똑같이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또한 이런 단어들은 고든 자신이 직접 사용한 것이기도 하다. "인생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난파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북극성에 의거해서만 방향을 조정하는 것, 한마디로 하나님 한 분에게만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그리고 결코 사람의 호의나 미소에 주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분이 당신에게 미소짓고 계시다면 사람의 미소나 찡그림에는 상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고든 장군은 카르토움이 포위되었을 때 결국 버림받아 전사했는데, 그것은 런던에 있던 윌리엄 그래드스톤 수상과 내각의 도덕적인 비겁함 때문이었다. 마흐디(Mahdi)와 그의 광적인 추종자들 손에서 맞이한 고든의 최후 순간은 가히 전설적이다. 그러나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나타난 바, 소명감이 고취한 그의 강인함도 그에 못지 않게 전설적이다.
한번은 잔인한 왕이었던 아비시니아의 존이 고든에게, "고든 장군, 내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너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라고 고함쳤다.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폐하" 라고 고든이 대답했다.
"폐하가 기뻐하신다면 당장에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뭐라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렇습니다. 저는 항상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권력이 너한테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라고 왕이 씩씩거렸다.
"아무것도 저를 위협하지 못합니다." 라고 고든이 대답하자, 왕은 놀란 채 그의 곁을 떠났다.
고든이 죽은 후 그의 친구였던 존 보나르(John Bonar)가 고든의 형제에게 이렇게 썼다. "즉각적으로 그리고 항상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하나님과의 하나됨이 고든의 모든 행동과 안목을 지배했다는 사실일세. 나는 지금까지 고든 만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그토록 인내한 인물은 보지 못했네." 그리고 그는 고든이 "하나님과 함께, 또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처럼 보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찰스 고든 장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군사 전략가요, 전설적인 지휘관이자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그는 그 유일한 청중 앞에서 너무나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그의 때가 왔을 때 단 한 걸음만으로도 본향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결정적인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다른 모든 이와 같이 고든 장군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유일한 청중 앞에서 살고 있다. 다른 모든 청중 앞에서는 내가 입증할 것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청중 (the Audience of One)
유일한 청중 (the Audience of One)
자신의 계획과 시도에 관해 애기할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목표', '야망', '성취', '평가' 등의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청중'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쉽게 간과한다. 오직 광인, 천재, 최고의 이기주의자만이 순전히 스스로를 위해 일한다. 군중 앞에서 뽐내는 것이나, 다른 사람의 북소리에 맞춰 행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당신 자신의 북소리에만 맞추어 행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부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어떤 청중의 찬사를 생각하면서 일을 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청중이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청중을 갖고 있느냐이다.
이런 관찰은 소명의 진리에 담긴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소명에 귀기울이면서 산 인생은 다른 모든 청중을 밀어내는 단 한 분의 청중--유일한 청중(the Audience of One)--앞에서 살아낸 인생이다.
창세기에서 볼 수 있는 아브라함의 소명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여정동안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보통은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는데, 한번은 그분이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음성뒤에는 하나님의 눈이 있고, 그 눈 뒤에는 얼굴이 있으며 얼굴 뒤에는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앞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미의 마음앞에서)의 삶을 사는 것인데, 그것은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이신 하나님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점을 더욱 강조하신다. 그분은 자신이 부르신 자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는' 분임을 상기시키신다. 하나님은 참새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알고 계시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분이다. 자기의 덕을 선전하고, 남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기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이 보편적인 인간 심리인데, 예수님은 그와 반대로 은밀히 선행을 하라고 요구하셨다. "그러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6:4)
청교도들은 유일한 청중이신 하나님앞에서의 삶을 매우 강조하였다. 존 코튼(John Cotton)은 이 청중이란 주제를 더욱 발전시킨다. 그는 에베소서 6:6을 인용하면서 종의 소명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인간을 섬기고, 인간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긴다는 믿음 안에서 우리의 소명 가운데 믿음으로 사는 것" 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저 청교도식의 말장난에 불과한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유일한 청중이신 그분 앞에서 사는 삶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격려를 받지 못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하는 자이다. 반면에 믿지 않는 자는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제일 못한 일만 드러나 크게 불평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의 영웅주의는 남의 눈에 띄게 하거나 공공연하게 떠벌릴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장 위대한 행위는 유일한 청중 앞에서 행한 것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유일한 청중의 눈에 띄고 그분의 칭송을 받는 자는 그 이하의 다른 청중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한번은 동료 국회 의원의 악한 공격을 받는데도 왜 고통스러워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그 사람을 존경한다면 그의 의견에 신경을 쓰겠지요. 그러나 그를 존경하지 않는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유일한 청중앞에서 사는 자도 세상을 향해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단 한 분의 청중밖에 없다. 네 앞에서는 내가 입증해야 할 것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말할 필요도 없이, 현대 세계는 청교도 세계로부터 몇 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우리는 소명이 내면의 나침반 역할을 했던 '내부 지향적인' 청교도 세계로부터, 우리의 동시대인이 인도자가 되어 버린 '외부 지향적인' 현대 세계로 옮겨 왔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이동 레이더가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신호를 포착하는 것처럼 살고 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십대들은 자기 또래에게 귀기울이고, 여성들은 여성 잡지와 유행이 현혹하는 이미지를 좇아가고, 정치인은 여론 조사 결과를 맹종하고, 목사들은 '추구자들'과 '현 세대'에 관한 최근의 연구결과를 노심초사하며 따라간다. 어떤 큰 교회의 목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교인들의 눈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이 언제나 다른 교회로 옮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한 가지 신가한 사실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자들--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같은 몇몇 선한 지도자들, 레닌과 스탈린 같은 많은 악한 지도자들--과 더불어 20세기가 시작되었으나 나중에는 추종자들에게 병적으로 의존하는 연약한 리더십--이익에 쉽게 영합하는 뚜쟁이 같은 지도자들--과 더불어 끝났다는 점이다.
1941년 9월 30일 처칠은 하원에서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지도자는 귀를 계속 땅에 디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영국 국민이 그처럼 보기 흉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지도자들을 존경하기는 아주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때에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갤럽 여론 조사의 변덕스러운 기류--항상 맥박을 짚고 체온을 재고 있는--안에서 사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처칠 자신은 청중앞에서 대부분 깊은 인상을 남기고 때로는 청중을 압도했음에도, 그의 친구 바이올렛 본햄 카터(Violet bonham Carter)는 처칠을 "여론의 분위기에 너무나 무감각한 사람" 이라고 묘사했다. 해리 트루먼(Harry Truman)도 이와 비슷했다. 그는 마샬 플랜과 핵폭탄의 최초 사용 등 기념비적인 결정을 내린 대통령이었음에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모세가 애굽에서 여론 조사를 했다면 얼마만큼 지지를 받았을지 의심스럽다."
이와 대조적으로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와 같이 위대한 천재도 "내가 별로 알려지지 않은 도시에 있을 때에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고 1778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쓴 적이 있다. 극단적인 '외부 지향형'이나 '외관형'의 사고 방식은 쉽게 눈에 띄고 또 조롱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옛날 이야기에 따르면 어떤 혁명가가 파리의 카페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바껭서 왁자지껄한 소리를 들었다.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저기 군중들이 간다. 내가 저들의 지도자다. 난 저들을 따라가야 한다" 고 외쳤다는 것이다. 처칠의 친구이자 동료였던(후에 수상이 된) 로이드 조지(David Loyd George)는 여론에 지극히 민감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케인즈(Keynes) 경은, 로이드 조지가 방에 홀로 있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묻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케인즈는 "로이드 조지가 방에 홀로 있을 때에는 그 곳에 아무도 없답니다" 라고 대답했다.
스크린의 여신 마를렌 디트리히(Marlene Dietrich)는 자신이 카바레에서 받은 갈채를 녹음해서 음반을 만들기까지 했는데, 양면에 온통 박수 소리밖에 녹음되지 않았다. 그녀의 전기를 쓴 작가에 의하면 그녀는 종종 친구들을 초대해 놓고 그 레코드의 양면을 모두 틀로록 고집한 다음 '저건 누구누구고', '저건 누구누구야'라고 뻐기면서 말했다고 한다.
그러한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바보 같은 짓일지 모르나 우리 모두는 그런 퐁조에 영향을 바고 있다. 청교도들은 마치 자이로스코프(gyroscope : 고리에 바퀴를 세워 회전축이 어느 방향으로든 향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서, 바퀴가 빠리 회전하면 고리의 방향과 상관없이 본래의 회전 수준을 유지한다)를 삼킨 것처럼 살았고,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갤럽 여론 조사를 삼킨 것처럼 살고 있다. 마틴 루터 킹이 '버밍행 감옥에서 쓴 편지'(Lettter from Birmingham Jail)에서 쓴 것처럼 "당시에는 교회가 단순히 여론의 생각과 원리를 기록한 온도계가 아니라 사회의 관습을 변혁시키는 온도 조절 장치였다." 지도자인가, 뚜쟁이인가? 자리로스코프인가, 갤럽 여론 조사인가? 온도 조절 장치인가, 온도계인가?오직 유일한 청중의 임재를 연습하는 자들만이 전자에 이르고 후자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그 유일한 청중을 점차 더 알아 간 것이 나 자신의 소명의 변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과거에 발견하여 성취하고자 노력해 온 소명 중 일부는 복음을 이 세상에 이해시키는 것(변증가로서)과 이 세상을 교회에 이해시키는 것(분석가로서)이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중간 수준으로, 즉 고도로 전문화된 학적인 지식과 평범하고 대중적인 사고 사이의 중간 수준으로 해 내려고 노력해 왔다.
이처럼 양자간에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단 한 사람의 인간 청중을 나의 유일한 청중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각 청중은 상대편에게 미치려는 노력을 비웃는 것이 상례이다. 한 편이 그런 노력을 부질없이 '지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순간 다른 편은 그것을 '순진한 대중화 작업' 이라고 경멸한다. 따라서 도무지 만족시킬 수 없는 두 그룹 위에, 또한 그 너머에 진정으로 중요한 단 한의 청중 (유일한 정중)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나에게는 계속되는 도전인 동시에 크나큰 위안이 된다.
그 유일한 청중앞에서 사는 일은 뚜렷한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19세기의 위대한 그리스도인 군인이었던 찰스 고든(Charles Gordon)장군--'중국인 고든'(Chinese Gordon)이나 카르토움의 고든(Gordon of Khartoum)으로 알려진--의 성품과 삶이 뛰어난 본보기다. 윈스턴 처칠은 수단 탈환에 관해 쓴 책에서 고든 장군을 "남자들의 찡그린 얼굴이나 여자들의 미소, 생명이나 안락함, 부나 명성 등에 대해 똑같이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또한 이런 단어들은 고든 자신이 직접 사용한 것이기도 하다. "인생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난파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북극성에 의거해서만 방향을 조정하는 것, 한마디로 하나님 한 분에게만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그리고 결코 사람의 호의나 미소에 주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분이 당신에게 미소짓고 계시다면 사람의 미소나 찡그림에는 상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고든 장군은 카르토움이 포위되었을 때 결국 버림받아 전사했는데, 그것은 런던에 있던 윌리엄 그래드스톤 수상과 내각의 도덕적인 비겁함 때문이었다. 마흐디(Mahdi)와 그의 광적인 추종자들 손에서 맞이한 고든의 최후 순간은 가히 전설적이다. 그러나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나타난 바, 소명감이 고취한 그의 강인함도 그에 못지 않게 전설적이다.
한번은 잔인한 왕이었던 아비시니아의 존이 고든에게, "고든 장군, 내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너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라고 고함쳤다.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폐하" 라고 고든이 대답했다.
"폐하가 기뻐하신다면 당장에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뭐라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렇습니다. 저는 항상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권력이 너한테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라고 왕이 씩씩거렸다.
"아무것도 저를 위협하지 못합니다." 라고 고든이 대답하자, 왕은 놀란 채 그의 곁을 떠났다.
고든이 죽은 후 그의 친구였던 존 보나르(John Bonar)가 고든의 형제에게 이렇게 썼다. "즉각적으로 그리고 항상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하나님과의 하나됨이 고든의 모든 행동과 안목을 지배했다는 사실일세. 나는 지금까지 고든 만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그토록 인내한 인물은 보지 못했네." 그리고 그는 고든이 "하나님과 함께, 또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처럼 보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찰스 고든 장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군사 전략가요, 전설적인 지휘관이자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그는 그 유일한 청중 앞에서 너무나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그의 때가 왔을 때 단 한 걸음만으로도 본향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결정적인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다른 모든 이와 같이 고든 장군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유일한 청중 앞에서 살고 있다. 다른 모든 청중 앞에서는 내가 입증할 것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오스 기니스의 -소명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