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간이고 우리는 이성만으로는 살 수가 없기에, 글을 쓸 때면 자연스레 자신의 주관적인 입장이 은연중에 필터링 되어 문체에 스며든다. (독자로 하여금 가치관의 혼란을 주기도 한다.) 그렇게 어디까지나 '인간'이 적은 하느님의 말씀... 과연 믿어야 할까.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하지만 내가 믿는 하느님은 단지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유일신 여호와같은 개념은 아니다. 하느님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아니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철학일 뿐이다. 기도는 외부에 존재하는 신이라 불리우는 하느님과의 영접시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는 (흔히 '善'이라 일컫는) 하느님과의 소통일 뿐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절대 눈으로 만날수 없는 것도 그때문이다.
설령, 나의 이론이 빗나간들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성경 속에서만 찾을 것이아니라 자신과 가까운 이웃에서부터 찾아가야한다. 그렇다고 선교를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행복하게 그리고 만족하게 수행하여 주변 모두가 당신으로 하여금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음식류와 이벤트 따위로 학생들 꼬드겨서 신자들을 불리고 봉헌금을 불려 좀더 거대한 교회를 짓게하는 따위의 일들은 원하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지금 주위를 둘러보라. 신앙의 목적은 선교가 아니다. 그렇다고 성전에 대한 맹목적 믿음의 전파도 아니다.
어떤 종교이던지 성전이 곧 교과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전은 참고서 일 뿐이다. 예를 들어, '요한 복음 1장4절'이라면, 이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요한이 그대로 배껴쓴 책중 1장의 4절' 이라기 보단 '하느님의 뜻을 요한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책중 1장의 4절'이란 것이다. 같은 이야기가 각자 다른사람이 쓴 성경속에 반복하여 나오는 이유도, 한사람의 말로썬 그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힘들기에 독자로 하여금 '이 사건에 대해서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더라' 하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함이다.
필자가 중학교 시절에 학교도서관에서 몰래 훔쳐 아직까지 소장한 책이 있다. 제목은 '예수는 없다'. 모든 이들이 이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이건 당연히 안티크리스트적 글이다' 내지는 '뻔한 내용이겠지'라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아니다. 이 책의 작가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에 대한 절실한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 그럼 왜 제목을 예수는 없다고 했을까? 이 책의 제목은 바로 '올바른 태도의 신앙이 없다면 그 어디에서 예수는 없다.'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책에선 현재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를 명쾌하게 지적해준다.
'현재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문자 그 자체의 의미로서만 받아 들이려고 한다'
내가 절실히 찾고 하고싶었던 말이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렇다, 이 책에서는 현재 기독교인들의 폐해 원인을 성경에 대한 태도에 두고있다. 성경에 나오는 문자(Text) 자체만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너희 아버지가 최고야" 라고 했을때 , 아들이 정말 자기 아버지가 최고라는 걸 입증하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최고'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의 기적들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많이 등장한다. 빵과 고기를 수천명이 먹을수 있게 만든다던가, 물로서 포도주를 만든다던가, 나병환자와 죽은사람들을 살리다던지 ... 이런 기적에 대한 에피소드에 대해서 독자들은 '예수는 이렇게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던 것이 사실 이므로 우리도 그의 기적을 믿고 따르고 구원을 기대하자'가 아니라 '아... 예수는 이렇게 베푸는 삶을 살았구나, 나도 그처럼 베푸는 삶을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문자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그 이야기들에서 말하고자하는 하느님의 뜻,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넓은 마음을 가지고 넓고 유연한 생각을 해야한다.
성경?
작년에 센트럴시티 로비에서 선교하시는 분과 언쟁을 한 후 쓴 글입니다.
=============================================================
성서 또는 성경은 단지 문자일 뿐이다.
하느님의 말씀이라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이 썼다.
어린 아이나 백발 노인이나... 펜을 잡게 되면 '작가'가 된다.
우리는 인간이고 우리는 이성만으로는 살 수가 없기에, 글을 쓸 때면 자연스레 자신의 주관적인 입장이 은연중에 필터링 되어 문체에 스며든다. (독자로 하여금 가치관의 혼란을 주기도 한다.) 그렇게 어디까지나 '인간'이 적은 하느님의 말씀... 과연 믿어야 할까.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하지만 내가 믿는 하느님은 단지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유일신 여호와같은 개념은 아니다. 하느님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아니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철학일 뿐이다. 기도는 외부에 존재하는 신이라 불리우는 하느님과의 영접시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는 (흔히 '善'이라 일컫는) 하느님과의 소통일 뿐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절대 눈으로 만날수 없는 것도 그때문이다.
설령, 나의 이론이 빗나간들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성경 속에서만 찾을 것이아니라 자신과 가까운 이웃에서부터 찾아가야한다. 그렇다고 선교를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행복하게 그리고 만족하게 수행하여 주변 모두가 당신으로 하여금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음식류와 이벤트 따위로 학생들 꼬드겨서 신자들을 불리고 봉헌금을 불려 좀더 거대한 교회를 짓게하는 따위의 일들은 원하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지금 주위를 둘러보라. 신앙의 목적은 선교가 아니다. 그렇다고 성전에 대한 맹목적 믿음의 전파도 아니다.
어떤 종교이던지 성전이 곧 교과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전은 참고서 일 뿐이다. 예를 들어, '요한 복음 1장4절'이라면, 이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요한이 그대로 배껴쓴 책중 1장의 4절' 이라기 보단 '하느님의 뜻을 요한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책중 1장의 4절'이란 것이다. 같은 이야기가 각자 다른사람이 쓴 성경속에 반복하여 나오는 이유도, 한사람의 말로썬 그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힘들기에 독자로 하여금 '이 사건에 대해서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더라' 하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함이다.
필자가 중학교 시절에 학교도서관에서 몰래 훔쳐 아직까지 소장한 책이 있다. 제목은 '예수는 없다'. 모든 이들이 이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이건 당연히 안티크리스트적 글이다' 내지는 '뻔한 내용이겠지'라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아니다. 이 책의 작가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에 대한 절실한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 그럼 왜 제목을 예수는 없다고 했을까? 이 책의 제목은 바로 '올바른 태도의 신앙이 없다면 그 어디에서 예수는 없다.'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책에선 현재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를 명쾌하게 지적해준다.
'현재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문자 그 자체의 의미로서만 받아 들이려고 한다'
내가 절실히 찾고 하고싶었던 말이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렇다, 이 책에서는 현재 기독교인들의 폐해 원인을 성경에 대한 태도에 두고있다. 성경에 나오는 문자(Text) 자체만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너희 아버지가 최고야" 라고 했을때 , 아들이 정말 자기 아버지가 최고라는 걸 입증하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최고'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의 기적들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많이 등장한다. 빵과 고기를 수천명이 먹을수 있게 만든다던가, 물로서 포도주를 만든다던가, 나병환자와 죽은사람들을 살리다던지 ... 이런 기적에 대한 에피소드에 대해서 독자들은 '예수는 이렇게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던 것이 사실 이므로 우리도 그의 기적을 믿고 따르고 구원을 기대하자'가 아니라 '아... 예수는 이렇게 베푸는 삶을 살았구나, 나도 그처럼 베푸는 삶을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문자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그 이야기들에서 말하고자하는 하느님의 뜻,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넓은 마음을 가지고 넓고 유연한 생각을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