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세 박사의 초상 - 고흐

김세철2007.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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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세 박사의 초상 -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반 고흐는 북프랑스로 돌아가면 건강을 회복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지만 소란스러운 파리에서 동생 가족과 생활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았고, 에라니에 있던 피사로도 그를 맞이 할 형편이 못되었다. 대신 피사로는 테오에게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살고 있는 가셰 박사(1828-1909)를 추천해주었다.

가셰 박사는 반 고흐의 생애 마지막 두 달 동안 그를 돌봐주었다.
이 의사는 많은 면에서 빈센트의 관심을 끌었다.
아마추어 화가, 판화가, 수집가였던 그는 브라스리 앙들레의 사실주의자 그룹과 신아테네파 화가들과 친분이 있었다. 몽티셀리, 도미에, 쿠르베, 게다가 브뤼야스까지 만난 적이 있었던 그는, 브뤼야스에 대해서는 빈센트와 견해가 같았다.

1872년 가셰는 오베르에 집을 한 채 샀고, 도비니의 이웃, 피사로의 친구, 세잔의 하숙집 주인이 되었다.
반 고흐는 자신만큼이나 '병적이고 멍해 보이는' 그 남자에게서 괴리감을 느끼지 않았다.
자신과 그의 유사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렇지만 그의 직업과 신념이 그를 지탱해준다" 라고 했다.
가셰는 반 고흐의 그림을 높이 평가했고 전적으로 인정해주었다.

반 고흐가 판화 작업을 하도록 격려하기도 했던 그는 반 고흐가 그린 초상화 속에서 '광신자적인' 모습을 보인다. 반 고흐는 불그스름한 얼굴, 다갈색의 머리카락, 군청색 옷 등 고양된 색을 통해 가셰의 '열정적인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 그림은 가셰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MHD
            '멜랑콜리'의사, 가셰   닥터 가셰는 어딘가에 병색이 있어 보이고 멍해 보인다. 나이가 많은데 수년 전에 상처했다고 한다. 그는 의사라는 일과 신념으로 사는 것 같다. 우리는 곧 친해졌다. 그도 몽펠리에의 브뤼야스를 알고 있었으며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나의 의견에 공감했다. 요즘 그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 아주 환한 금발에 흰 모자를 쓰고 밝은 살색의 손을 붉은 테이블에 기댄 모습이다. 그는 파란 연미복을 입었는데 바탕도 코발트 블루이다. 테이블 위에는 노란색의 책과 보라색 디기탈리스 꽃이 놓여있다. 초상을 여기로 올 때 그린 자화상과 같은 감정을 담아 그렸다. (1890. 6. 3 테오에게)   가셰를 만난 후의 소감을 적은 것이다. 편지에 언급한 대로 빈센트는 가셰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셰는 흰 모자를 즐겨 쓰고 파이프를 피웠다. 6월 13일 윌에게 가셰를 우수에 찬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고 적었다. 그가 이 초상을 그릴 때 가셰는 예순한 살 이었다. 가셰는 피사로와 세잔 외에도 기요맹, 모네, 르누아르와 교분이 두터웠다. 세잔은 오베르에 살았으며 피사로는 오베르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퐁투아즈의 에라니에 살았는데 이들은 가셰의 단골환자들이었다. 가셰는 테오에게 6월 8일 일요일 오베르에서 함께 지내자며 테오 부부를 초대했다. 오베르로 온 테오는 형이 이곳에서의 생활에 만족해하는 걸 보고는 안심했다. 빈센트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어린 조카에게 병아리, 토끼, 고양이, 오리 등을 보여주었다.   오베르의 교회를 그리면서 왼쪽에 전통의상을 한 여인을 그려 넣었다. 이 작품을 가셰가 좋아했다. 테오에게 적었다.   "이곳에서 살고 싶은 이유가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가셰가 있기 때문이란다. 그가 친구가 되어 줄 걸로 믿는다. 그를 만나면 좋은 인상을 받게 되고 매주 일요일이나 월요일 저녁식사에 날 초대한다."   윌에게는 가셰를 진정한 친구로 믿고 형제처럼 지낸다고 적었다.   가셰는 의대에 재학할 때 귀스타브 쿠르베를 중심으로 모이는 화가들 그룹에 끼어 있으면서 회화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가 공부를 마치고 오베르로 와서 개업한 건 1872년이었다. 그는 열정적인 공화당원이며 사회주의자였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그는 친구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고 자신도 주말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에 반 리셀이란 예명을 사용했다. 빈센트를 만난 후 그는 빈센트에게 정신분열증 또는 간질증세가 있다는 걸 이내 알 수 있었다. 그가 박사학위 논문을 우울증에 관해 썼으므로 친구들은 그를 "우울 melancholy"이란 별명으로 불렀다. 그는 빈센트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는 빈센트의 작품에 더욱 더 호감을 가졌던 것 같다. 빈센트가 6월 3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가셰의 딸의 초상을 그리려 한다는 구절도 있다. 6월 24일자 편지에 다음 주에 초상을 그릴 것이라고 쓰여 있어 그때까지 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6월 26일(혹은 27일)자 편지에 스케치를 동봉하면서 어제와 그제 양일에 걸쳐서 초상을 그렸으며 드레스를 핑크색으로, 벽을 초록색 바탕에 오렌지 점이 박혀 있는 것으로, 카페트를 붉은색 바탕에 초록색 무늬가 있는 것으로, 피아노는 진한 보라색으로 했다고 적었다.    
       

고흐는 5월 21일 몇 점의 그림을 들고 의사 가셰가 살고 있는 오베르 쉬르 오아즈로 향하였다. 가셰는 때마침 출타중이어서 며칠 후인 일요일이 되어서야 만날 수 있었다. 그림에 대한 안목이 깊으며 그 자신도 아마추어 화가인 가셰는 고흐의 그림에 호감을 가졌다. 세잔과 피사로도 한때 가셰와 교분을 갖고 이곳에서 머문 적이 있었다. 가셰는 내과 의사였으며 부인과 사별한 후 아직 출가하지 않은 딸 마르그리트와 단 둘이 살면서 여생을 의료 활동보다는 그림 수집과 감상에 더 정신이 팔려 있는 미술 마니아였다.

 

가셰는 고흐에게 자신의 초상을 그려 줄 것을 부탁하였다. 고흐는 검푸른 재킷에 누르스름한 색깔의 묘한 모자를 쓰고 오른손으로 턱을 고인 채 수심에 가득 차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가셰를 그렸다. 가셰는 이 그림을 보고 자기의 개성을 밀도 있게 표현했다고 만족해하면서 다시 한 점을 부탁했다. 두번째 초상화는 좀더 밝은 색조에 물결치는 굵은 점선으로 칠하고 테이블 위에는 노란색 표지의 책과 유리컵에 꽃을 꽂아 놓고 턱을 고인 채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이 초상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의사 가셰는 인간의 모든 고뇌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우수에 잠긴 모습이었다. 실제로 그는 현실보다도 이상적인 그 무엇을 추구하며 은둔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가셰는 틈틈이 고흐를 초청해서 성찬을 대접하며 많은 그림을 그리도록 부탁하였다.

 

고흐는 자기 자신의 죽음을 예고나 하려는 듯이 물결치는 붓놀림으로 마지막 열정을 불살랐다. 1890년 6월에 그린 '까마귀 나는 밀밭', '오베르 성'도 이 때 그린 그림이다. 7월 27일 고흐는 오베르 들판을 정신없이 돌아다닌 후 해질 무렵 갑자기 가셰를 찾아가 세잔과 피사로의 그림을 방치해두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리며 불안한 모습으로 서성거리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나서 마침내 '큰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고흐는 돌아오는 길에 어디선가 자신의 권총으로 쏜 총탄에 의해 가슴에 심한 상처를 입고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 다락방의 비좁은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 방에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때 아닌 괴성에 놀란 여관집 주인이 황급히 고흐의 방으로 뛰어 올라가 방문을 열어 보니 고흐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 침대 옆에 쓰러져 있었다. 다행히 고흐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집주인은 곧바로 의사 가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외과 의사가 아닌 가셰는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왼쪽 어깨 아래 부분 검게 그을린 조그마한 구멍에서 시뻘건 피가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흐가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때 손이 떨렸기 때문에 총알은 심장을 약간 건드리고 옆구리에 박혀 곧바로 숨이 끊기지는 않았으나 거의 치명적이었다. 얼마 후 외과 의사 마즐리 박사가 뛰어와 고흐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맥을 짚어 보았으나 의사는 때가 늦었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며 빨리 가족에게 알리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다. 마즐리의 말에 의하면 총알이 심장 가까이 깊숙하게 박혀 집도를 해 보아야 헛일이라는 것이다. 의사 가셰와 주변 사람들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노라니 고흐는 의식을 다소 회복한 듯 힘없이 눈을 떠 보였다. 그런데 그거 어디에서 권총을 구입하였으며, 어느 장소에서 자살을 기도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평소 거닐던 인근 들판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여관 헛간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다음날 늦게 테오가 비보를 듣고 황망히 달려와 형을 끌어 앉고 울부짖었다. 고흐는 테오에게 "나라는 인간은 죽는 것마저 서투른 모양이다"라며 힘없이 말을 이어 갔다. 그의 뺨에서는 어느새 마지막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어쨌든 이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그는 1890년 5월에 퇴원해서 파리에 있는 테오에게 갔다. 그리고 나흘 뒤에는 파리에서 열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오베르 마을로 옮겼다. 이곳에는 신경과 의사 폴 페르디낭 가셰(P.F.Gachet)박사가 예술가들을 위한 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고흐는 이 마을의 라부 여관 3층 다락방에서 마지막 10주를 보냈다. 두 평 남짓한 이 다락방은 하루 방세가 3프랑 50상팀이었다.

 

고흐는 오베르 마을에 70일 남짓 머무는 동안 80여 점의 그림을 남겼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까마귀가 있는 밀밭」과 1990년 이후 더욱 유명해진 「가셰 박사의 초상」이다(고흐는 한 번도 즐거운 표정의 얼굴을 그린 적이 없는데, 그림 속 가셰 박사도 웃지 않고 있다). 어쨌든 고흐는 그림이 완성되면 여관의 골방에 놓고 말린 다음 빈 염소 우리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그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셰 박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양반은 무척 괴팍한 사람이야. 나처럼 어떤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는 게 분명해.

 

죽음을 4주 남겨놓은 7월 1일에는 이렇게 썼다.

 

나한테 여자가 생길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 내 나이가 사십이라고 말하는 게 두려울 뿐이다……차라리 아무 말도 말자.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어떤 삶의 전환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어쩌면 그는 이렇게 쓰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가정을 꾸려 아이들을 키우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그가 사랑을 고백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가셰 박사의 딸이었다. 그러나 가셰 박사의 아들은 이렇게 단언했다.

 

"누이는 한쪽 귀가 떨어져나간 그 화가를 멀리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가셰 박사는 딸에게 고흐를 만나지 못하도록 했고, 고흐도 집으로 찾아오지 못하게 했다.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뜨거운 햇빛으로 이글거리는 밀밭으로 달려갔다. 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었는데, 까마귀를 쫓는다는 명분으로 빌린 것이었다. 그는 이 총으로 자신의 배를 쏘았다. 심장이 아니라 복부였다. 그는 이런 몸을 질질 끌고 1킬로미터나 떨어진 여관까지 걸어갔다. 여관 주인 부부의 설명에 따르면 고흐는 여관 홀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아무런 도움도 없이 혼자서 계단을 올라가서는 자신의 방 침대에 앉아 파이프를 피워 물었다고 한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달려오자 고흐는 자신이 쏜 것이 분명하다고 장담했다. 가셰 박사가 왔을 때는 너무 고통스러워 이렇게 말했다.

 

"누구 내 배를 갈라 줄 사람 없소?"

 

고흐가 총상을 입고도 1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었고, 40시간 이상이나 살아 있었던 것은 권총이 낡은데다가 복부가 관통될 정도로 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앞서 귓바퀴를 자른 사건에서도 그랬듯이 고흐가 정말 죽을 마음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는 주장이 나온다. 가셰 박사의 아들은 훗날 고흐의 자살에 대해, 원래는 죽을 마음이 없었으나 히스테리적 충동에 이끌려 저지른 행동이라고 단언했다. 어쨌든 고흐의 상태를 진단한 가셰 박사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뒤늦게 달려온 마을 의사도 가셰 박사의 의견에 동의했다. 7월29일 밤 마침내 빈센트 반 고흐가 서른일곱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의 동생 테오도 반년 뒤에 죽어 오베르 마을에 마련된 형의 묘지 옆에 묻혔다.

 

고흐가 죽기 직전 한 비평가가 미술잡지에 고흐의 그림에 대해 처음으로 글을 쓰면서, 그를 가리켜 '환성적인 에너지와 격정적인 도취'를 보여준 탁월한 외톨이 화가로 격찬하였다. 그러나 고흐는 이 사실도 모르고 죽어갔다. 혹시 생전에 알았더라면 미미하나마 위안이 되지는 않았을까?

 

 

 

 

 

이번에는 반 고흐가 그린 다른 의사의 초상화를 보자.

 

생레미 요양소에서 퇴원한 반 고흐는 파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도시 오베르로 갔다. 그곳에는 화가 도비니를 위시해 폴 세잔과 같은 유명 화가들이 있었으며, 반 고흐의 동생과 친분이 있는 의사 가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셰 박사는 몇 해 전에 상처(喪妻)하고 아들딸과 함께 그곳에서 살며, 또 파리에는 무료 진료소를 개설하여 두 곳을 오가며 환자를 보는 예순둘의 노인 의사였다. 그는 시골 생활의 미덕을 강조하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오베르에 집을 장만하고 시골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의학 이외에 골상학, 관상학, 필적학 그리고 수상술(手相術)등 여러 분야에 관심이 있었으며 미술에도 상당한 식견이 있는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해서 반 고흐 이전에도 유명 화가들과 교유하고 있었다.
가셰 박사는 식물에서 류머티즘에 쓰이는 약을 추출했으며, 상처의 치료제도 만들었다. 이것을 동네 사람들은 '가셰 박사의 묘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반 고흐가 자신의 초상화에 '디기탈리스'라는 식물을 그려 넣은 것도 그러한 사연에서이다.
가셰 박사는 우울증에 관한 논문을 많이 써 우울증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실은 본인도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 반 고흐가 가셰 박사를 만나서 지내는 동안 그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가셰 박사를 너무 의지해서는 안 되겠다. 그분도 어떻게 보면 나와 꼭 같은 병에 걸린 환자인 것 같다"고 쓰고 있다.
반 고흐가 가셰의 요청으로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나서 그의 누이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우울한 표정을 한 사람으로 그렸는데 그 표정은 종종 찌푸린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거야"라고 쓴 것을 보면 가셰 박사를 그리 좋아한 것 같지는 않다.

 

이후 반 고흐는 자살하려고 권총으로 자기 배를 쏘았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가셰 박사에게 왕진을 청했다. 그는 상처를 소독만 하고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복부를 수술하여 탄환을 뽑아낼 수 있는 외과 의사에게 이송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여 반 고흐가 이틀 만에 사망하게 한 처사 때문에 그는 후세에 두고두고 비난받는다. 지금 같으면 의사의 의무 태만이라 해서 당장 처벌 대상이 되었을 것인데 그 당시만 해도 의사에게 따지고 드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그대로 넘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반 고흐가 그린 가셰의 초상화는 그간 여러 화상과 미술관을 거쳐 1990년에는 미술 애호가인 일본의 한 재벌에 의해 사상 최고 가격인 일화 124억 엔에 낙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