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이름으로 국민을 욕보이는 그대가 바로 탈레반

김연주2007.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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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달간 아프가니스탄 무장 반군 세력인 탈레반에 납치된 한국인 인질로 인해 온 나라가 또 한 번 근심에 처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방침을 무시하고 위험 지역으로 떠난 봉사단에 대해 질책을 보내고 있다. 물론 그들도 우리 국민이니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은 그 누구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대다수의 인질이 무사귀환하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스스로 반성하고 돌아보는 일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인질들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탈레반에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미국과 나토 연합국가들이 심한 고충을 겪어야 했다. 탈레반 세력이 어떤 자들인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탈레반은 이슬람 원리주의의 가면을 쓰고 자국민들을 학살하고 학대한 폭정 세력이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편이 아내를 때려 죽여도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던 나라였다는 말이다. 거기에다가 이교도에 대한 반감 역시 가장 강해서, 고대 유물이자 세계 문화 유산인 마애 석불(부조 석불)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한 자들이 탈레반이다. 이라크 전쟁과는 달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유럽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유도,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인도적인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신앙의 가면을 쓰고 국민을 학대하는 탈레반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이었다. (어찌 이리 우리나라 개신교의 모습과 잘 오버랩 되는지요) 그런데, 탈레반이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의 이러한 엄격하고 가혹한 이슬람 율법이 아프간 국민들에거서 완전히 씻겨 나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그들이 비록 탈레반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교도의 이름으로 얼굴도 가리지 않고 반팔과 반바지 차림으로 버젓이 돌아다니는 외국 여성들의 모습이 얼마나 불편하게 느껴졌을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

지금 많은 비기독교인들은 인질로 잡혔던 봉사단이 선교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을 것이라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가장 강한 나라까지 가서 선교를 해야 하느냐는 여론의 힐책이 큰 이유이다. 그렇지만 해당 교회에서는 선교가 아니라 단순히 봉사를 위한 방문이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목적은 선교일 수도 있고 봉사일 수도 있다. 둘 다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어느 것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항상 방법적인 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지옥에 가지 말고 천국에 가라고 하는 것이 나쁜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강요하는 모양새이고 독선적인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반감을 사고 비난을 받는 것이다. 선교이건 봉사이건 그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방법이 타당하지 않으면 그것은 원래의 목적 달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저 자기 자신이 만족스럽다고 해서 원래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지금 한국 기독교인 중에는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상당히 자가당착적이고 독선적인 논리에 빠진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기독교 서진(西進) 이론'이다.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크리스트 교가 로마와 유럽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고 그것이 다시 한국으로, 즉 계속해서 서진해 왔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 전파를 통해 세계의 패권도 이동한다는 것이 중심 생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진이 계속되어 중국과 중동 등을 거쳐 다시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면 비로소 '종말'이 온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 전파 역사에서 전도에 앞장서야 사후에 큰 상을 받는다는 인식이 한국 기독교인들 인식 저변에 깔려있다. 또 이러한 흐름의 선두에 우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은 기독교인들은 한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중국과 동남아, 중동 지역 선교에 발벗고 나서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들 앞에서 허탈해 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인들의 '종교적인 사랑'은 참으로 이기적이고 기복적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사랑해서 그들을 위해서 신앙을 전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구복과 구원과 큰 상을 위해서 신앙 생활을 하고, 기도를 하고, 심지어 전도를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이해와 용서와 평화를 말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어찌 그리 부유하며, 어찌 그리 오만하며, 어찌 그리 기름진 얼굴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의문스럽다. 그들은 정말 신의 존재와 심판을 믿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 지도자들이야 말로 가장 완벽한 무신론자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또, 설사 이번 봉사단의 방문 목적이 봉사였다고 해도 그들의 잘못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연말이나 연초에 양로원이나 고아원을 방문해 눈도장을 찍는 정치인들의 행태에 늘 못마땅해 하고 정치인을 비난하지 않던가? 봉사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꾸준한 노력과 헌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일 년에 하루 소외된 자들을 찾는다고 해서 봉사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8, 90 년대 대학생에게 있어 여름 방학 농촌 봉사 활동(농활)은 필수적인 커리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2천년대 학번들이 이기적이거나 봉사 정신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장마철에 집중된 농활 활동이 농민들에게 도움이 되기는 커녕 짐만 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세 번에 걸쳐 농활을 다녀왔지만 두 번은 해당 지역 농민들에게 냉대를 받아야 했다. 기간이 너무 짧기도 했거니와 농민들에게 정작 인력이 필요한 시기도 아니었고, 학생들에게 농업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의료 봉사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환영을 받는다. 지역민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의사 1명(의대 지원자라는 의견이 있네요), 간호사 1명으로 구성된 23명의 의료 봉사단은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리고 불과 2주 동안 무슨 봉사를 한단 말인가? 선교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2주 동안 무슨 선교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바로 한국 교회의 생색내기 단기 봉사, 생색내기 단기 선교의 실상이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와 석가모니도 자신의 신성과 깨달음을 전하는 데 몇 년이 소요되었다. 하물며 일개 인간이 신앙을 전파하는 데 2주면 충분하다는 말인가? 2주 동안 봉사를 통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실질적인 도움이 무엇인가? 의료 지식도 없는 사람들이 의료 봉사를 한다고 나섰다면 그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야 말로 무의미한 것이다.

한국 교회의 생색내기 봉사와 생색내기 선교 행태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번 사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방만하고 독선적인 재정 운영의 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해외 단기 선교 봉사(여행)이다. 하지만 말이 좋아 선교이고 봉사이지, 실상은 교회의 눈 먼 돈으로 해외 여행이나 하자는 발상일 뿐이다. (실제로 많은 세금이 교회의 봉사 명목 지원금으로 지출되고 있다.) 일부 공기업들의 임직원 해외 연수, 출장 행태와 똑같다고 보면 된다. 차이가 있다면 기업의 연수, 출장 행태는 남성들의 전유물이고 교회의 단기 선교, 봉사 여행 행태는 여성들의 전유물이라는 차이점 정도이다. 기업과 교단에서 지원해 주는 비용으로 싸게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그리고 평소 가보기 힘든 곳에 갈 수 있다는 발상을 놓고 본다면 아무런 차이도 없다. 결국 기업의 직원들은 무언가를 배우고 오지도 않고 뭔가 업무를 처리하고 오지도 않는다. 교회의 교인들은 봉사를 한 것도 아니고 선교를 한 것도 아닌 것이다. 그냥 이름을 빌어 여행을 하고 온 것일 뿐이다. 그냥 솔직하게 여행을 간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정직할 것이다. (저도 교회 오래 다녔습니다. 교회다니는 분들 거짓말이니 뭐니 그런 비겁한 변명은 하지 마시길)

허울뿐인 단기 선교, 단기 봉사 여행을 왜 해야 하는가? 그저 남들에게 자랑하고 추억으로 남길 사진 몇 장 남기려고 가는 것인가? 그러면서도 굳이 가지 말라는 곳을 억지로 찾아가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무슨 순교자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 불리기라도 원하였는가? 기독교인들이 보이는 위선과 독선으로 인해 대다수 국민이 인질들에게서도 등을 돌려 버렸다. 천국은 하늘에 있는 것이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낭떠러지에 매달려 울면서 기도한다고 신께서 당신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바람과는 달리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존재가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많은 탈레반 대원들이 인질들과 맞교환 되었다면 그들은 사람을 수도 없이 죽였고 또 죽일 자들이었다. 공평한 신은 지금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그 인질들을 위해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으셨다. 신은 인간의 행동을 판단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심판할 뿐이다.

순진하고 때론 어리석기까지 한 젊은 크리스챤들을 사지로 내모는 종교 지도자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순교를 강요하는 것인가? 그들은 진정 하늘 나라를 바라는 자들인가? 봉사와 헌신의 화신인 마더 테레사의 일화가 최근 공개되었다. 신을 향한 오롯한 믿음과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 완전히 무장했을 것만 같던 그녀도 신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갖고 고뇌하여야 했다. 종교를 떠나 모든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이해인 수녀는 아직도 불쑥불쑥 찾아오는 불신과 의심으로 고뇌한다고 고백하였다. 인간은 그처럼 나약한 존재이다. 자신이 100%의 믿음으로 무장하였다고 자랑하는 인간이야 말로 가장 교만한 불신자라고 나는 단언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의문과 의심을 인정하는 자세야 말로 신앙적으로 가장 정직한 태도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 조차 그러한 의문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한 인간이 타인에게 신과 신앙을 강요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자신은 100의 믿음 속에 산다고 자신하는 신앙인이 대한민국 사회에 유독 많은 것이 바로 불행의 씨앗인 것이다.

신앙은 오롯이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고 단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나에게 주어진 신독(愼獨)의 순간에 나는 망설이고 부끄러워 하며 나를 다잡는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을 통해 나는 나의 믿음의 경계가 한 발짝 신을 향해 다가감을 느낀다. 나는 신앙과 불신앙을 위해 분연히 분탕을 치는 사람들에게 감히 묻고 싶다. 당신은 100퍼센트의 믿음을 가지고 그토록 화를 내느냐고. 그 100퍼센트의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위선적일 수 있느냐고. 나는 또 감히 묻고 싶다. 당신은 100퍼센트의 불신을 가지고 그토록 성을 내느냐고. 그 100퍼센트의 불신을 가지고 어째서 그리스도에게 주제넘은 사랑을 강요하느냐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믿음은 한층 강해질 수도 있고 흔들릴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가장 충직한 제자 베드로 조차도 자기 목숨을 위해 그리스도를 세 번 부정하였다. 당신은 누군가 머리에 총을 겨누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라고 한다면 어찌하겠는가? 그 누구도 믿음에 대해 단언할 수 없다. 소망은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다. 천국을 향한 소망은 우리를 들뜨게 하지만, 현실의 모순과 의문은 우리의 소망을 꺾어버릴 때가 많다. 하지만 사랑은 그 자체로 나누고 커져야 한다. 나는 나의 흔들리는 믿음이 꺼져버릴까봐 두려울 때가 있다. 나는 나의 작은 소망이 속절없이 버려질까 두렵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자기를 죽이려던 사람들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두 같아야 한다. 양심있고 정직한 신앙인들이 분연히 일어서야 할 때이다. 먼저 뼈를 깎는 자기 반성과 용서 구함이 먼저이다. 이해와 반성과 사랑으로 먼저 다가갈 때만이 신앙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오늘도, 불신자와 불순자에 대한 투쟁과 증오를 설파하는 대한민국 종교인들이여. 부끄러워 하라. 그리고 그대 자신부터 돌아보라. 교회 땅을 팔아서라도 국민에게 진 빚을 갚으라. 신앙의 이름으로 같은 국민을 욕보이는 당신이야 말로 탈레반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