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독일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1483년 11월 10일에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한스 루터는 강인하고 부지런한 시골 광부로서, 그의 아들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自負心)을 가지고 있었다.
농민들의 평판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그의 부지런함과 정직함때문에 상당히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그의 아들을 학교에 보내 열심히 공부시킬 때면, 한편 그의 아내는 교회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그의 아들에게 주입시키곤 했다. 장차 아들을 변호사를 만들 열심으로 맨스필드(Mansfield), 막데불그(Magdeburg), 아이스낙(Eisenach)에서 공부시켜, 1501년 엘후르트(Erfurt) 대학에 입학시켰다.
거기서 루터는 진지하고, 사귈 만하고, 음악 좋아하는 학생으로 알려졌다. 인본주의 운동이 그 대학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나, 그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는 라틴 고전과 오캄(Occam)을 대표로 하는 후기 스콜라철학의 유명론(唯名論)을 읽었다. 엘프르트 대학에서 문학사(1502), 문학석사(1505)를 받고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률을 공부하게 되었다.
생애의 전환점
루터는 좀 까다로운 성격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쾌활하고 명랑하며 노래나 교제를 좋아하는 면이 있는가 하면, 고집스럽고 명상적이며 하나님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내성(內省)과 자책감으로 자기를 들볶기도 하였다.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느날, 22세된 젊은 루터에게 그의 삶을 새롭게 결정해야 할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친구와 들판을 걷는 중 비를 피하려고 큰 나무 밑에 있다가, 낙뇌(落雷)로 인하여 친구가 자기 면전(面前)에서 죽었다. 이것이 소위 루터의 ‘공포의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그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고, 그때 그는 기도하기를, “오 안나여! 나를 구하소서! 나는 이제 수도사가 되렵니다!”라고 서원(誓願)하였다.
그후 루터는 깊은 죄의식과 영혼의 구원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다가 드디어 7월 17일 엘후르트의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수도사로 들어갔다. 왜냐하면 수도원은 천국으로 향하는 탁월한 길로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생활은 이 세상의 혼탁함과 복잡성 같은 것에서 분리되어져, 명상생활과 고귀한 미덕(美德)들을 실천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교회는 도덕적 성취의 단계를 구분지어 놓았으니, 어떤 권고(勸告;precepts)는 모든 사람, 즉 좀 작은 상을 받을만한 사람을 위해 짐지워져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권고는 더 큰 상을 받을만한 고귀한 사람들을 위햬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예를 들면, 십게명은 모든 사람을 위해 적용되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금지명령(禁止命令) - 모든 것을 팔아, 아비와 어미를 저버리고, 악(惡)에게 대항하지 말라 - 은 이 세상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렵고도 실행키 힘든 것으로서, 이는 수도원 생활을 위해 예비된 것이라고 했다. 수도사는 당연히 재산도, 아내도, 무기도 지니지 않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 독신생활 그리고 평화주의 등은 명령에 속한 것이 아니고, 복음의 권고에 속한 것이다. 이것들만이 완전에 대한 조언(助言)이고, 또 이것들만이 범상(凡常)치 않은 상을 수여(授與)하게 된다고 했다.
당시의 금욕주의적(禁慾主義的)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일례(一例)는 고대교회의 죄관(罪觀)을 살펴보면 곧 알수 있다. 당시의 죄관에는 중한 죄(mortal sin)와 가벼운 죄(venial sin)사상과 함께, 참회(懺悔), 배상(賠償), 정화(淨化)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복음의 이중적(二重的) 도덕표준 등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비텐베르그 대학
루터가 몸담은 어거스틴파의 독일인 모임(German Congregation)은 일반의 존경이 높으며, 중세기 수도원의 최상(最上)을 대표했다. 그 신학은 완전히 중세적인 것이었으나, 이 수도원은 설교를 중히 여겼으며 어거스틴의 깊은 종교적 인식을 본받는 경건하고 신비적인 인물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루터는 슈타우피츠(Johnn von Staupitz)에게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상급 수도사들은 그의 극단적인 행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지성(知性)을 인정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루터는 수도원생활에서 곧 인정을 받고, 1507년에 신부 안수를 받고 엘후르트 대학에서 견습수도사(見習修道士)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다음 해인 1508년 겨울에 상부(上府)의 명령으로 그는 비텐베르그(Wittenberg)에 연구와 강의를 위해 파견되었다. 이 대학은 1502년에 색손(Saxon) 지방의 제후(諸侯)인 프레드릭(Frederick III, 'the Wise', 1486-1525)이 세운 곳이어서, 창립된지 6년밖에 안되었다. 제후인 프레드릭은 비텐베르그를 자기 영토의 수도(首都)로 선정, 그곳을 독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려고 했다.
프레드릭 제후는 금전만능주의도, 또 단순하게 믿음만 깊은 사람도 아니었다. 자기 영내를 문화적으로 성장시키려는 대망(大望)도 품고 있었다. 비텐베르그 대학을 창설한 것도 그런 목적에서였다. 학생수가 300명을 넘지 않는 자그마한 대학이었지만 신설된 소규모 단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공격적인 자세와 새로운 것에 대한 문호개방(門戶開放)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루터는 1509년 신학사(神學士)로 졸업하고, 다시 엘후르트로 돌아갔는데, 아마 피터 롬바드의 유명한 교부들 연설집(演說集;Sentences) 공부를 위함이었을 것이다.
루터는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윤리학과 기독교 신학을 강의했다. 모든 점으로 보아 그에게는 화려한 대학교수 생활이 약속되어 있는 듯이 보였다. 동료들도 학생도 그에게 호의를 보였고 그의 지성도 더욱 성숙해갔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영혼에 대해 고민했고, 하나님과의 결합(結合)을 얻는 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스콜라 산타의 계단
2년간 연구와 강의를 계속한 후, 1510년에 루터는 상급 수도사와 함께 어거스틴파 수도회의 외교적 사명을 띠고 로마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진면목(眞面目)을 대하게 되면서 그는 많은 실망을 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신앙심은 로마에서는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다. 대신 존중된 것은 돈이었다. 창녀, 사기꾼, 거지 등이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어느날 루터가 미사를 올리고 있노라니까, 한 이태리인 사제가 그의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미사를 속히 끝내기를 재촉하는 것이었다. 결국 로마에는 거룩함과 속됨이 병존하고 있었다. 성도(聖都)로서의 로마는 그 일면에 지나지 않았고, 또 다른 일면은 관광객들을 손짓하는 세속의 도시였던 것이다.
루터는 실망했지만 그러나 완전히 희망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교회의 권위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스콜라 산타(Scola Santa)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었다. 이 행위는 연옥(煉獄)에서 구출받기를 원하는 영혼의 애타는 심정을 표현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고행(苦行)을 통해서 죄에서 해방될 수 없음을 깨닫고, 무릎을 풀고 다시 그 계단을 걸어서 내려왔다고 전해진다.
그후 루터는 1512년 신학박사가 되어 비텐베르그 대학의 신학교수로 정착을 하였다. 그는 곧 성서강의를 시작, 1513년에서 1515년까지는 시편, 그리고 1516년 말까지 로마서, 그 다음 갈라디아, 히브리서, 디도서를 강의했다. 그의 실제적 능력은 그의 여러가지 직임(職任)이 증명한다. 1515년 자기 수도원의 연구주임 겸 설교자로도 훌륭한 능력을 보였다. 그는 그 수도원에서 경건과 헌신과 수도적 열성이 대단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는 독일에서 신구약의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문(原文)으로 그의 강의의 기초를 삼은 처음 신학교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는 독일에서 라틴어 대신에 독일어로 강의한 첫 교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루터 신학의 출발점
그는 시편(詩篇)을 강의할 때 비로소 ‘구원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임을 발견했다. 즉 로마서의 이신칭의(以信稱義;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를 깨달았다는 의미이다. 즉 교회에서 행해온 참회(懺悔)의 개념에는 죄악, 범죄, 질병 등 모든 강박관념이 얽혀 있다. 그러나 성서에 나오는 ‘메타노이아’(metanoia)는 회심(回心)이라고 하는 의미인데, 루터에게 있어서 이것은 인간이 자발적인 선의(善意)로 하나님과 마주하는 정신상태를 뜻하고 있었다.
진정한 고해(告解)의 성사(聖事)란 복수적(復讐的)인 하나님이 죄에 대해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회생(回生)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루터는 느꼈다. 영혼의 회생(回生)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루터 신학의 출발점이었다.
루터의 신념을 뒷받침한 것은 고대교회의 어거스틴의 가르침이었다. 구원받는 자는 그 공적(功積)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매개자(媒介者)인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 선택된다. 즉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에 의해 그들의 의(義)를 인정받게 된다. 이같은 어거스틴의 사상이 어둠을 헤매는 루터의 영혼에 큰 희망과 용기를 안겨 주었다.
그는 시편 22편의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성구에서 그리스도께서 왜 버림을 받으셔야만 했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버림받은 그리스도!’, 이것이 그에게 큰 숙제로 다가왔다. 하나님은 순결하시지만 인간은 악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능하시지만 인간은 연약하다.
그러므로 그 대답은 우리의 약함과 죄악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연관해서 루터가 발견한 로마서 1장 17절의 ‘오직 믿음’(Sola Fide)이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다.
● 곤고한 심령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믿음으로서만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죄인은 이 은총을 오직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 믿음으로 받은 구원의 은총은 갈급한 죄인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더 이상 내가 어느 단계인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1517년 루터는 교황청이 저지르는 극심한 폐단(弊端)에 대해 항쟁(抗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은 막대한 비용으로 벌써 100년 이상 공사했으나 아직 완성을 보지 못해, 교황 레오 10세(1513-1523 재위)가 그 완공을 속행(速行)하기 위해서 면죄부(免罪符)를 팔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알브레트 브란덴버그(Albrecht Brandenburg)가 레오 교황에게 요청해 마인츠, 막데북 두 감독구와 할버스탈트 감독구까지 겸임(兼任)을 하고 거액(巨額)을 지불했다.
면죄부를 허락한 예배의식은 캐톨릭의 적선(積善), 및 여공(餘功;work of superogation)의 교리에 근거하였다. 적선은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성인(聖人)들은 이러한 영예(榮譽)의 재단(財團)에 많은 것을 보태었던 것이다. 캐톨릭교회는 가르치기를, 복음은 사람에게 단지 명령만을 내릴 뿐이 아니라, 우리에게 왕덕(王德)의 권고까지도 한다고 했다.
이 교훈은 성경의 부자 청년 통치가의 이야기에 근거하였다. 그는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예수께 말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가 온전하여지려거든 가서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마 19:21)고 하셨다.
교회는 가르치기를, 만약 그가 그리스도의 교훈을 마음에 두었더라면 적선(積善)을 행하였을 것이고, 많은 보상(報償)을 마땅히 받을만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성자(聖者)들은 그와 같은 일을 행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재물을 팔아서 교회에나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다. 이 모든 것이 하늘에 공적을 쌓음에 보탬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공(餘功)의 일로서 모여진 가치있는 재산은 지상(地上)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의 책임 하에 있었다. 마치 우리가 은행의 구좌(口座)에 돈을 많게 하려고 인출(引出)을 억제하듯이, 교황도 공로가 부족한 죄인들의 유익을 위하여 하늘나라에 공로의 재산을 끌어올리려고 면죄부를 허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모든 관련된 자들의 무거운 참회(懺悔)와 고행(苦行)을 제거하였다. 이것이 백성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그들은 면죄부를 사는 것이 다른 형벌을 당하는 것보다 쉬움을 알았다.
이 면죄부 판매의 수금(收金) 책임자인 도미닉 교단의 수도사요 웅변가인 존 테첼(John Tetzel, 1465-1519)은 최고의 수입을 위해 면죄부 효과를 극구 선전하였다. 존 테첼이 비텐베르그에도 입성(入城)하려 할 때, 루터는 그의 입성(入城)을 반대하고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였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인격적 관계만이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은 루터에게는 그런 허무한 선전이 참 종교를 파괴한다고 믿었다.
95개 조항
면죄부의 매매는 오랜 동안 큰 추문(醜聞)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테첼이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모습으로 비텐베르그에서 면죄부를 외치며 팔고 돌아다녔다. 루터는 백성들이 오랫동안 속고 있음을 보았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과 그같은 캐톨릭교회의 신앙적 오류(誤謬)에 대해 면밀히 조사한 후, 기숙사의 사실(私室)로 돌아와서 펜을 잡고 면죄부에 대한 그의 견해를 포함해서 95개조항을 완전히 썼다.
그리고 1517년 10월 31일 제성축일(諸聖祝日;the Eve of All Saints) 전야에, 그때도 비텐베르그 내에 면죄부가 팔려지고 있을 때, 루터는 대학 정문 게시판에 토론을 위한 ‘95개조항’을 붙였다. 그 조항들에서 루터는 면죄부 그 자체만을 공격한 것이 아니고, 면죄부의 판매에 관계된 병폐(病幣)들도 공격하였다. 이미 위클립과 후스가 이런 종류의 병폐를 항의한 바 있다.
그 95개조항은 라틴어로 씌어졌다. 그 내용으로 볼 때 그런 폭발을 일으켰음이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다. 그것은 민중을 선동(煽動)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 책임자들에게 도전해 설명을 들으며 학자들 간에 변론하려 한 것이다. 그 사실은 곧 독일 전토에 퍼졌고, 며칠 사이에 북유럽 제국에 퍼져 면죄부 판매가 줄어들었다. 이 95개 조항이란 조직적인 논문이 아니었다. 루터의 타오르는 의분(義憤)으로 그의 확신을 써놓은 것 뿐이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참회는 일시적 행동이 아니요, 일평생 마음의 습관이다.
● 교회의 참된 보화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총이다.
●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할 것이다.
● 참된 양심의 후회와 가책을 느끼는 신자는 면죄부가 없어도 고통과 죄책(罪責)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 면죄부는 교황청에서 지은 죄라면 몰라도 하나님께 지은 죄는 사할 수가 없다. 면죄부는 우리의 죄를 사할 수가 없다. 죄를 사하는 것은 면죄부나 돈이 아니라, 회개 뿐이다.
● 회걔의 내적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 하나님만이 생사(生死)의 주님이시다. 죽은 자는 교회의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다. 그러기에 연옥(煉獄)에 있는 영혼을 위한 면죄부는 무효(無效)이다.
이상과 같은 95개 조항의 내용을 볼 때 루터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점에서 교황권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었던 것을 볼 수 있다.
● 로마 교황청의 착취에 대해 독일 국민이 분개한 이유에 대해서이다. 루터의 관점에 있어서 이는 그다지 큰 고려점은 아니었지만, 허나 그는 특색있는 열정을 가지고 그 점에 대해서 의견을 내었고, 또 그것에 따라 행동하였다. 참으로 교황이 독일 민족의 빈곤을 알았더라면, 그의 양들의 피를 빨아 재산을 쌓아 올리기 보다는 차라리 재 가운데 있는 성 베드로의 위치를 택했을 것이다.
● 연옥에 대한 교황의 지배권에 대한 문제이다. 그가 참으로 영혼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어째서 그 장소를 비워버리지 않는가? 더욱 보수적(保守的)인 신학자로서의 루터는, 땅에서는 오직 교황에 의해서만 강요된 형벌을 면제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지적했다. 면죄부는 연옥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또 죄를 사할 수도 없다. 이러한 반대사상들은 전에도 말해왔고, 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지되어 왔던 것이다.
● 가장 나쁜 영향을 준 것이라고 루터가 결정적으로 확정지은 것이 있다. 그것은 면죄부가 사람의 마음을 나쁜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말해서, 형벌을 모면해 보고자 하는 죄인은 이미 소망이 없는 자이다. 만일 그 죄인이 구원받길 원한다면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야 할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기 전에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아픔 속에서 구원이 시작되기 때문에, 만일 연옥에 대한 믿음에서 그가 풀려나오기를 원치 않는다면, 바로 이것이야 말로 연옥의 고통인 것이다. 평화는 오직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오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 평화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가 아무리 교황에 의해서 백만번 용서받았다 할지라도 그는 버리운 자이다.(Roland H. Bainton,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40).
루터의 소환
한편 마이쯔의 대주교가 테첼로부터 면죄부 판매의 속행(速行)을 바랐으니, 자연히 이 조항들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는 이 조항들의 사본(寫本)을 로마에 있는 레오 교황에게 보냈다. 교황은 처음에는 대단한 일로 생각치 않았다. 교황은 루터의 수도원 원장에게 루터라는 수도사가 비텐베르그에서 좀 조용히 있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는 동안 도미닉파 수도사요 로마의 종교재판관인 마쪼리니(Mazzolini)는 루터의 결정을 신랄히 비판한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존 에크(John Eck)는 팜프렛으로 반박문(反駁文)을 내어 루터를 캐톨릭교회의 이단자(異端者)라고 규탄하였다. 루터는 ‘면죄부와 은혜’(Indulgence and Grace)라는 설교로 자기 입장을 옹호하고 에크에게 답하였다.
1518년 초에 마인츠 대감독 알브레흐트와 도미닉 교단으로부터 루터에게 대한 불평을 로마에 보냈다. 교황은 그것을 수도원 내부의 논쟁으로 알고, 마침내 루터는 4월 하이델베르그에서 열린 수도사회의에 호출되었다. 거기서 루터는 새 동지들을 얻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이가 마르틴 부서(Martin Bucer)였다. 그때쯤 루터는 결의문(決議文;Resolutions)이란 답변서로 면죄부에 대한 자기 입장을 조직적으로 변호했다.
레오 10세는 1518년 6월에 루터에게 로마로 오라는 소환장을 내는 동시에, 도미닉 교단의 마쪼리니에게 루터의 서적을 검열해 그의 입장에 대한 의견서를 내라 했다. 교황의 소환장과 마쪼리니의 의견서는 8월 초에 루터에게 닿았다. 의견서 요점은 ‘로마교회는 추기경단(樞機卿團)이 대표하며, 또한 실제로 최고 교황의 교회이다. 로마교회가 면죄부에 대해서 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이단이다’함이다.
개혁에로의 점화(點火)
그러나 이 일은 루터로 하여금 더 강하게 교황권과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不當性)에 대해 비판하게끔 만들어 주었다.루터는 신실하며 현명하고 능력 있는 친구, 삭손(Saxon)의 제후 프레드릭(Fredrick)을 사귀고 있었다. 여러 해동안 독일 국민들은 로마 교황청을 대항하여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제후 프레드릭은 테첼이 삭손에서 면죄부를 행상(行商)하는 것을 금하였다. 프레드릭은 자기 지방의 돈이 교회에게 넘겨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비텐베르그의 대학은 제후의 매우 특별한 사랑을 받았었고, 루터도 그 대학의 가장 인기 있고도 유명한 교수였다. 그러므로 프레드릭은 교황의 소환(召喚)을 말소(抹消)하고자, 로마로 그의 총 영향력을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 수완을 다해, 루터의 심문소를 로마에서 아우구스불그의 교황 사절에게로 옮기게 했다.
교황청은 당시의 온 유럽에서 유명한 신학자이자 아퀴나스 주석자인 추기경 토마스 비오(Thomas Vio, 1469-1534)를 루터 심문관에 명했는데, 그는 루터에게 교황의 면죄부 판매권 비난을 철회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교회의 권위를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면죄부 악폐(惡弊)에 대해서는 양보치 않았다. 그는 그 회의의 무효를 선언하고 교황청에 자기 입장을 더 알아 보라고 한 후, 친구들의 도움으로 1518년 10월 20일 회의에서 도피했다. 그는 비번텍에서 11월에 총회를 열 것을 호소했으나, 교황은 그 달에 면죄부에 대한 해명서만 냈다.
그후 교황은 그의 시종(侍從)을 루터에게 보내어, 분쟁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사건을 독일 감독들에게 맡기고 교황에게 겸손한 편지를 올리라는 호의(好意)를 전달했으나, 그러나 실제적으로 합의는 불가능했다. 루터의 비번텍 동료 칼슈타트(Andreas Carlstadt)는 1518년 에크 반박 논쟁에,‘온 교회의 권위보다 성서 말씀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에크가 변론을 요구하자, 칼슈타트도 응했다. 루터도 끌려들어 결국 캐톨릭교회의 최상권(最上權)이란 역사나 성서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라이프찌히에서 웜스까지
1519년 7월 14일에 라이프찌히에서 루터와 에크는 서로 만났고, 루터는 힘껏 변론했다. 그러나 재치있는 에크는 많은 청중 앞에서 루터가 존 후스(John Huss)와 유사한 견해를 갖고 있다고 공격했다. 후스는 보헤미아의 학자로서 민중에게 성서나 기적에 의존하지 말고 성서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주장하다가 100년쯤 전에 화형당한 인물이었다.
그러자 루터는 에크에게 맹렬한 기세로 응수했다. “콘스탄스(Constance)의 종교회의가 후스를 이단으로 단정한 것은 잘못이다. 그의 사상 속에는 기독교적인 것이 많이 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저윽이 당황했다. 설사 교황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다손 치드라도, 감히 종교회의가 내린 판단을 루터가 공격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루터의 말대로 만일 종교회의까지도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고 한다면, 신자들은 대체 어디에서 그들 신앙의 권위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루터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언이었다. 그는 벌써 교황의 최상권을 부인했고, 종교회의의 무오류성(無誤謬性)을 또한 거부했다. 그것은 루터가 중세기 모든 권위 구조를 버리고, 성서의 권위만 인정한 것이다.
에크는 그것으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신하면서, 종교회의의 무오류(無誤謬)를 부인(否認)하는 자는 이단이요 죄인이라고 선언하였다. 에크는 루터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루터문제는 교황의 정죄 교서(Bull)로 정리될 것을 믿었다.
루터로 인한 소용돌이는 점점 커져 교황도 손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나, 그런 판국에 황제 막시밀리안(Maximilian) 1세가 죽었다. 교황은 제국의 정치에 쫓겨 이단논의에 관여할 겨를이 없어졌다. 이로 인해 루터는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어졌다.
마침내 교황은 루터에게 1520년 6월 15일 파면장을 보냈으나, 루터는 12월 20일 그 파문장을 비텐베르그의 동료들과 학생들과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불태워 버렸다. 그후 루터는 로마의 성직제도를 대항한 표준적 반항을 독일에 다시 회복하기 위해, 1520년 후반에 세가지 저작, 곧 종교개혁의 3대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 1520년 8월, 그는 [기독교 신자의 신분개혁에 관하여 독일 국민중의 그리스도 신자 귀족에게 보냄]이라는 책을 간행했다. 그 속에서 그는 교회가 스스로 개혁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생애
마르틴 루터의 생애
초기 생애
학생시절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독일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1483년 11월 10일에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한스 루터는 강인하고 부지런한 시골 광부로서, 그의 아들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自負心)을 가지고 있었다.
농민들의 평판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그의 부지런함과 정직함때문에 상당히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그의 아들을 학교에 보내 열심히 공부시킬 때면, 한편 그의 아내는 교회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그의 아들에게 주입시키곤 했다. 장차 아들을 변호사를 만들 열심으로 맨스필드(Mansfield), 막데불그(Magdeburg), 아이스낙(Eisenach)에서 공부시켜, 1501년 엘후르트(Erfurt) 대학에 입학시켰다.
거기서 루터는 진지하고, 사귈 만하고, 음악 좋아하는 학생으로 알려졌다. 인본주의 운동이 그 대학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나, 그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는 라틴 고전과 오캄(Occam)을 대표로 하는 후기 스콜라철학의 유명론(唯名論)을 읽었다. 엘프르트 대학에서 문학사(1502), 문학석사(1505)를 받고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률을 공부하게 되었다.
생애의 전환점
루터는 좀 까다로운 성격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쾌활하고 명랑하며 노래나 교제를 좋아하는 면이 있는가 하면, 고집스럽고 명상적이며 하나님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내성(內省)과 자책감으로 자기를 들볶기도 하였다.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느날, 22세된 젊은 루터에게 그의 삶을 새롭게 결정해야 할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친구와 들판을 걷는 중 비를 피하려고 큰 나무 밑에 있다가, 낙뇌(落雷)로 인하여 친구가 자기 면전(面前)에서 죽었다. 이것이 소위 루터의 ‘공포의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그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고, 그때 그는 기도하기를, “오 안나여! 나를 구하소서! 나는 이제 수도사가 되렵니다!”라고 서원(誓願)하였다.
그후 루터는 깊은 죄의식과 영혼의 구원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다가 드디어 7월 17일 엘후르트의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수도사로 들어갔다. 왜냐하면 수도원은 천국으로 향하는 탁월한 길로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생활은 이 세상의 혼탁함과 복잡성 같은 것에서 분리되어져, 명상생활과 고귀한 미덕(美德)들을 실천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교회는 도덕적 성취의 단계를 구분지어 놓았으니, 어떤 권고(勸告;precepts)는 모든 사람, 즉 좀 작은 상을 받을만한 사람을 위해 짐지워져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권고는 더 큰 상을 받을만한 고귀한 사람들을 위햬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예를 들면, 십게명은 모든 사람을 위해 적용되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금지명령(禁止命令) - 모든 것을 팔아, 아비와 어미를 저버리고, 악(惡)에게 대항하지 말라 - 은 이 세상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렵고도 실행키 힘든 것으로서, 이는 수도원 생활을 위해 예비된 것이라고 했다. 수도사는 당연히 재산도, 아내도, 무기도 지니지 않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 독신생활 그리고 평화주의 등은 명령에 속한 것이 아니고, 복음의 권고에 속한 것이다. 이것들만이 완전에 대한 조언(助言)이고, 또 이것들만이 범상(凡常)치 않은 상을 수여(授與)하게 된다고 했다.
당시의 금욕주의적(禁慾主義的)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일례(一例)는 고대교회의 죄관(罪觀)을 살펴보면 곧 알수 있다. 당시의 죄관에는 중한 죄(mortal sin)와 가벼운 죄(venial sin)사상과 함께, 참회(懺悔), 배상(賠償), 정화(淨化)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복음의 이중적(二重的) 도덕표준 등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비텐베르그 대학
루터가 몸담은 어거스틴파의 독일인 모임(German Congregation)은 일반의 존경이 높으며, 중세기 수도원의 최상(最上)을 대표했다. 그 신학은 완전히 중세적인 것이었으나, 이 수도원은 설교를 중히 여겼으며 어거스틴의 깊은 종교적 인식을 본받는 경건하고 신비적인 인물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루터는 슈타우피츠(Johnn von Staupitz)에게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상급 수도사들은 그의 극단적인 행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지성(知性)을 인정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루터는 수도원생활에서 곧 인정을 받고, 1507년에 신부 안수를 받고 엘후르트 대학에서 견습수도사(見習修道士)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다음 해인 1508년 겨울에 상부(上府)의 명령으로 그는 비텐베르그(Wittenberg)에 연구와 강의를 위해 파견되었다. 이 대학은 1502년에 색손(Saxon) 지방의 제후(諸侯)인 프레드릭(Frederick III, 'the Wise', 1486-1525)이 세운 곳이어서, 창립된지 6년밖에 안되었다. 제후인 프레드릭은 비텐베르그를 자기 영토의 수도(首都)로 선정, 그곳을 독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려고 했다.
프레드릭 제후는 금전만능주의도, 또 단순하게 믿음만 깊은 사람도 아니었다. 자기 영내를 문화적으로 성장시키려는 대망(大望)도 품고 있었다. 비텐베르그 대학을 창설한 것도 그런 목적에서였다. 학생수가 300명을 넘지 않는 자그마한 대학이었지만 신설된 소규모 단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공격적인 자세와 새로운 것에 대한 문호개방(門戶開放)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루터는 1509년 신학사(神學士)로 졸업하고, 다시 엘후르트로 돌아갔는데, 아마 피터 롬바드의 유명한 교부들 연설집(演說集;Sentences) 공부를 위함이었을 것이다.
루터는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윤리학과 기독교 신학을 강의했다. 모든 점으로 보아 그에게는 화려한 대학교수 생활이 약속되어 있는 듯이 보였다. 동료들도 학생도 그에게 호의를 보였고 그의 지성도 더욱 성숙해갔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영혼에 대해 고민했고, 하나님과의 결합(結合)을 얻는 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스콜라 산타의 계단
2년간 연구와 강의를 계속한 후, 1510년에 루터는 상급 수도사와 함께 어거스틴파 수도회의 외교적 사명을 띠고 로마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진면목(眞面目)을 대하게 되면서 그는 많은 실망을 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신앙심은 로마에서는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다. 대신 존중된 것은 돈이었다. 창녀, 사기꾼, 거지 등이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어느날 루터가 미사를 올리고 있노라니까, 한 이태리인 사제가 그의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미사를 속히 끝내기를 재촉하는 것이었다. 결국 로마에는 거룩함과 속됨이 병존하고 있었다. 성도(聖都)로서의 로마는 그 일면에 지나지 않았고, 또 다른 일면은 관광객들을 손짓하는 세속의 도시였던 것이다.
루터는 실망했지만 그러나 완전히 희망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교회의 권위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스콜라 산타(Scola Santa)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었다. 이 행위는 연옥(煉獄)에서 구출받기를 원하는 영혼의 애타는 심정을 표현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고행(苦行)을 통해서 죄에서 해방될 수 없음을 깨닫고, 무릎을 풀고 다시 그 계단을 걸어서 내려왔다고 전해진다.
성서적 구원신앙의 확립
성서 강의
그후 루터는 1512년 신학박사가 되어 비텐베르그 대학의 신학교수로 정착을 하였다. 그는 곧 성서강의를 시작, 1513년에서 1515년까지는 시편, 그리고 1516년 말까지 로마서, 그 다음 갈라디아, 히브리서, 디도서를 강의했다. 그의 실제적 능력은 그의 여러가지 직임(職任)이 증명한다. 1515년 자기 수도원의 연구주임 겸 설교자로도 훌륭한 능력을 보였다. 그는 그 수도원에서 경건과 헌신과 수도적 열성이 대단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는 독일에서 신구약의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문(原文)으로 그의 강의의 기초를 삼은 처음 신학교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는 독일에서 라틴어 대신에 독일어로 강의한 첫 교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루터 신학의 출발점
그는 시편(詩篇)을 강의할 때 비로소 ‘구원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임을 발견했다. 즉 로마서의 이신칭의(以信稱義;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를 깨달았다는 의미이다. 즉 교회에서 행해온 참회(懺悔)의 개념에는 죄악, 범죄, 질병 등 모든 강박관념이 얽혀 있다. 그러나 성서에 나오는 ‘메타노이아’(metanoia)는 회심(回心)이라고 하는 의미인데, 루터에게 있어서 이것은 인간이 자발적인 선의(善意)로 하나님과 마주하는 정신상태를 뜻하고 있었다.
진정한 고해(告解)의 성사(聖事)란 복수적(復讐的)인 하나님이 죄에 대해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회생(回生)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루터는 느꼈다. 영혼의 회생(回生)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루터 신학의 출발점이었다.
루터의 신념을 뒷받침한 것은 고대교회의 어거스틴의 가르침이었다. 구원받는 자는 그 공적(功積)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매개자(媒介者)인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 선택된다. 즉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에 의해 그들의 의(義)를 인정받게 된다. 이같은 어거스틴의 사상이 어둠을 헤매는 루터의 영혼에 큰 희망과 용기를 안겨 주었다.
그는 시편 22편의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성구에서 그리스도께서 왜 버림을 받으셔야만 했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버림받은 그리스도!’, 이것이 그에게 큰 숙제로 다가왔다. 하나님은 순결하시지만 인간은 악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능하시지만 인간은 연약하다.
그러므로 그 대답은 우리의 약함과 죄악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연관해서 루터가 발견한 로마서 1장 17절의 ‘오직 믿음’(Sola Fide)이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다.
● 곤고한 심령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믿음으로서만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죄인은 이 은총을 오직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 믿음으로 받은 구원의 은총은 갈급한 죄인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더 이상 내가 어느 단계인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교황권과의 조우(遭遇)
면죄부
1517년 루터는 교황청이 저지르는 극심한 폐단(弊端)에 대해 항쟁(抗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은 막대한 비용으로 벌써 100년 이상 공사했으나 아직 완성을 보지 못해, 교황 레오 10세(1513-1523 재위)가 그 완공을 속행(速行)하기 위해서 면죄부(免罪符)를 팔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알브레트 브란덴버그(Albrecht Brandenburg)가 레오 교황에게 요청해 마인츠, 막데북 두 감독구와 할버스탈트 감독구까지 겸임(兼任)을 하고 거액(巨額)을 지불했다.
면죄부를 허락한 예배의식은 캐톨릭의 적선(積善), 및 여공(餘功;work of superogation)의 교리에 근거하였다. 적선은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성인(聖人)들은 이러한 영예(榮譽)의 재단(財團)에 많은 것을 보태었던 것이다. 캐톨릭교회는 가르치기를, 복음은 사람에게 단지 명령만을 내릴 뿐이 아니라, 우리에게 왕덕(王德)의 권고까지도 한다고 했다.
이 교훈은 성경의 부자 청년 통치가의 이야기에 근거하였다. 그는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예수께 말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가 온전하여지려거든 가서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마 19:21)고 하셨다.
교회는 가르치기를, 만약 그가 그리스도의 교훈을 마음에 두었더라면 적선(積善)을 행하였을 것이고, 많은 보상(報償)을 마땅히 받을만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성자(聖者)들은 그와 같은 일을 행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재물을 팔아서 교회에나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다. 이 모든 것이 하늘에 공적을 쌓음에 보탬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공(餘功)의 일로서 모여진 가치있는 재산은 지상(地上)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의 책임 하에 있었다. 마치 우리가 은행의 구좌(口座)에 돈을 많게 하려고 인출(引出)을 억제하듯이, 교황도 공로가 부족한 죄인들의 유익을 위하여 하늘나라에 공로의 재산을 끌어올리려고 면죄부를 허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모든 관련된 자들의 무거운 참회(懺悔)와 고행(苦行)을 제거하였다. 이것이 백성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그들은 면죄부를 사는 것이 다른 형벌을 당하는 것보다 쉬움을 알았다.
이 면죄부 판매의 수금(收金) 책임자인 도미닉 교단의 수도사요 웅변가인 존 테첼(John Tetzel, 1465-1519)은 최고의 수입을 위해 면죄부 효과를 극구 선전하였다. 존 테첼이 비텐베르그에도 입성(入城)하려 할 때, 루터는 그의 입성(入城)을 반대하고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였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인격적 관계만이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은 루터에게는 그런 허무한 선전이 참 종교를 파괴한다고 믿었다.
95개 조항
면죄부의 매매는 오랜 동안 큰 추문(醜聞)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테첼이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모습으로 비텐베르그에서 면죄부를 외치며 팔고 돌아다녔다. 루터는 백성들이 오랫동안 속고 있음을 보았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과 그같은 캐톨릭교회의 신앙적 오류(誤謬)에 대해 면밀히 조사한 후, 기숙사의 사실(私室)로 돌아와서 펜을 잡고 면죄부에 대한 그의 견해를 포함해서 95개조항을 완전히 썼다.
그리고 1517년 10월 31일 제성축일(諸聖祝日;the Eve of All Saints) 전야에, 그때도 비텐베르그 내에 면죄부가 팔려지고 있을 때, 루터는 대학 정문 게시판에 토론을 위한 ‘95개조항’을 붙였다. 그 조항들에서 루터는 면죄부 그 자체만을 공격한 것이 아니고, 면죄부의 판매에 관계된 병폐(病幣)들도 공격하였다. 이미 위클립과 후스가 이런 종류의 병폐를 항의한 바 있다.
그 95개조항은 라틴어로 씌어졌다. 그 내용으로 볼 때 그런 폭발을 일으켰음이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다. 그것은 민중을 선동(煽動)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 책임자들에게 도전해 설명을 들으며 학자들 간에 변론하려 한 것이다. 그 사실은 곧 독일 전토에 퍼졌고, 며칠 사이에 북유럽 제국에 퍼져 면죄부 판매가 줄어들었다. 이 95개 조항이란 조직적인 논문이 아니었다. 루터의 타오르는 의분(義憤)으로 그의 확신을 써놓은 것 뿐이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참회는 일시적 행동이 아니요, 일평생 마음의 습관이다.
● 교회의 참된 보화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총이다.
●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할 것이다.
● 참된 양심의 후회와 가책을 느끼는 신자는 면죄부가 없어도 고통과 죄책(罪責)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 면죄부는 교황청에서 지은 죄라면 몰라도 하나님께 지은 죄는 사할 수가 없다. 면죄부는 우리의 죄를 사할 수가 없다. 죄를 사하는 것은 면죄부나 돈이 아니라, 회개 뿐이다.
● 회걔의 내적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 하나님만이 생사(生死)의 주님이시다. 죽은 자는 교회의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다. 그러기에 연옥(煉獄)에 있는 영혼을 위한 면죄부는 무효(無效)이다.
이상과 같은 95개 조항의 내용을 볼 때 루터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점에서 교황권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었던 것을 볼 수 있다.
● 로마 교황청의 착취에 대해 독일 국민이 분개한 이유에 대해서이다. 루터의 관점에 있어서 이는 그다지 큰 고려점은 아니었지만, 허나 그는 특색있는 열정을 가지고 그 점에 대해서 의견을 내었고, 또 그것에 따라 행동하였다. 참으로 교황이 독일 민족의 빈곤을 알았더라면, 그의 양들의 피를 빨아 재산을 쌓아 올리기 보다는 차라리 재 가운데 있는 성 베드로의 위치를 택했을 것이다.
● 연옥에 대한 교황의 지배권에 대한 문제이다. 그가 참으로 영혼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어째서 그 장소를 비워버리지 않는가? 더욱 보수적(保守的)인 신학자로서의 루터는, 땅에서는 오직 교황에 의해서만 강요된 형벌을 면제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지적했다. 면죄부는 연옥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또 죄를 사할 수도 없다. 이러한 반대사상들은 전에도 말해왔고, 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지되어 왔던 것이다.
● 가장 나쁜 영향을 준 것이라고 루터가 결정적으로 확정지은 것이 있다. 그것은 면죄부가 사람의 마음을 나쁜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말해서, 형벌을 모면해 보고자 하는 죄인은 이미 소망이 없는 자이다. 만일 그 죄인이 구원받길 원한다면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야 할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기 전에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아픔 속에서 구원이 시작되기 때문에, 만일 연옥에 대한 믿음에서 그가 풀려나오기를 원치 않는다면, 바로 이것이야 말로 연옥의 고통인 것이다. 평화는 오직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오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 평화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가 아무리 교황에 의해서 백만번 용서받았다 할지라도 그는 버리운 자이다.(Roland H. Bainton,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40).
루터의 소환
한편 마이쯔의 대주교가 테첼로부터 면죄부 판매의 속행(速行)을 바랐으니, 자연히 이 조항들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는 이 조항들의 사본(寫本)을 로마에 있는 레오 교황에게 보냈다. 교황은 처음에는 대단한 일로 생각치 않았다. 교황은 루터의 수도원 원장에게 루터라는 수도사가 비텐베르그에서 좀 조용히 있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는 동안 도미닉파 수도사요 로마의 종교재판관인 마쪼리니(Mazzolini)는 루터의 결정을 신랄히 비판한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존 에크(John Eck)는 팜프렛으로 반박문(反駁文)을 내어 루터를 캐톨릭교회의 이단자(異端者)라고 규탄하였다. 루터는 ‘면죄부와 은혜’(Indulgence and Grace)라는 설교로 자기 입장을 옹호하고 에크에게 답하였다.
1518년 초에 마인츠 대감독 알브레흐트와 도미닉 교단으로부터 루터에게 대한 불평을 로마에 보냈다. 교황은 그것을 수도원 내부의 논쟁으로 알고, 마침내 루터는 4월 하이델베르그에서 열린 수도사회의에 호출되었다. 거기서 루터는 새 동지들을 얻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이가 마르틴 부서(Martin Bucer)였다. 그때쯤 루터는 결의문(決議文;Resolutions)이란 답변서로 면죄부에 대한 자기 입장을 조직적으로 변호했다.
레오 10세는 1518년 6월에 루터에게 로마로 오라는 소환장을 내는 동시에, 도미닉 교단의 마쪼리니에게 루터의 서적을 검열해 그의 입장에 대한 의견서를 내라 했다. 교황의 소환장과 마쪼리니의 의견서는 8월 초에 루터에게 닿았다. 의견서 요점은 ‘로마교회는 추기경단(樞機卿團)이 대표하며, 또한 실제로 최고 교황의 교회이다. 로마교회가 면죄부에 대해서 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이단이다’함이다.
개혁에로의 점화(點火)
그러나 이 일은 루터로 하여금 더 강하게 교황권과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不當性)에 대해 비판하게끔 만들어 주었다.루터는 신실하며 현명하고 능력 있는 친구, 삭손(Saxon)의 제후 프레드릭(Fredrick)을 사귀고 있었다. 여러 해동안 독일 국민들은 로마 교황청을 대항하여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제후 프레드릭은 테첼이 삭손에서 면죄부를 행상(行商)하는 것을 금하였다. 프레드릭은 자기 지방의 돈이 교회에게 넘겨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비텐베르그의 대학은 제후의 매우 특별한 사랑을 받았었고, 루터도 그 대학의 가장 인기 있고도 유명한 교수였다. 그러므로 프레드릭은 교황의 소환(召喚)을 말소(抹消)하고자, 로마로 그의 총 영향력을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 수완을 다해, 루터의 심문소를 로마에서 아우구스불그의 교황 사절에게로 옮기게 했다.
교황청은 당시의 온 유럽에서 유명한 신학자이자 아퀴나스 주석자인 추기경 토마스 비오(Thomas Vio, 1469-1534)를 루터 심문관에 명했는데, 그는 루터에게 교황의 면죄부 판매권 비난을 철회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교회의 권위를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면죄부 악폐(惡弊)에 대해서는 양보치 않았다. 그는 그 회의의 무효를 선언하고 교황청에 자기 입장을 더 알아 보라고 한 후, 친구들의 도움으로 1518년 10월 20일 회의에서 도피했다. 그는 비번텍에서 11월에 총회를 열 것을 호소했으나, 교황은 그 달에 면죄부에 대한 해명서만 냈다.
그후 교황은 그의 시종(侍從)을 루터에게 보내어, 분쟁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사건을 독일 감독들에게 맡기고 교황에게 겸손한 편지를 올리라는 호의(好意)를 전달했으나, 그러나 실제적으로 합의는 불가능했다. 루터의 비번텍 동료 칼슈타트(Andreas Carlstadt)는 1518년 에크 반박 논쟁에,‘온 교회의 권위보다 성서 말씀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에크가 변론을 요구하자, 칼슈타트도 응했다. 루터도 끌려들어 결국 캐톨릭교회의 최상권(最上權)이란 역사나 성서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라이프찌히에서 웜스까지
1519년 7월 14일에 라이프찌히에서 루터와 에크는 서로 만났고, 루터는 힘껏 변론했다. 그러나 재치있는 에크는 많은 청중 앞에서 루터가 존 후스(John Huss)와 유사한 견해를 갖고 있다고 공격했다. 후스는 보헤미아의 학자로서 민중에게 성서나 기적에 의존하지 말고 성서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주장하다가 100년쯤 전에 화형당한 인물이었다.
그러자 루터는 에크에게 맹렬한 기세로 응수했다. “콘스탄스(Constance)의 종교회의가 후스를 이단으로 단정한 것은 잘못이다. 그의 사상 속에는 기독교적인 것이 많이 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저윽이 당황했다. 설사 교황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다손 치드라도, 감히 종교회의가 내린 판단을 루터가 공격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루터의 말대로 만일 종교회의까지도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고 한다면, 신자들은 대체 어디에서 그들 신앙의 권위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루터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언이었다. 그는 벌써 교황의 최상권을 부인했고, 종교회의의 무오류성(無誤謬性)을 또한 거부했다. 그것은 루터가 중세기 모든 권위 구조를 버리고, 성서의 권위만 인정한 것이다.
에크는 그것으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신하면서, 종교회의의 무오류(無誤謬)를 부인(否認)하는 자는 이단이요 죄인이라고 선언하였다. 에크는 루터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루터문제는 교황의 정죄 교서(Bull)로 정리될 것을 믿었다.
루터로 인한 소용돌이는 점점 커져 교황도 손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나, 그런 판국에 황제 막시밀리안(Maximilian) 1세가 죽었다. 교황은 제국의 정치에 쫓겨 이단논의에 관여할 겨를이 없어졌다. 이로 인해 루터는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어졌다.
마침내 교황은 루터에게 1520년 6월 15일 파면장을 보냈으나, 루터는 12월 20일 그 파문장을 비텐베르그의 동료들과 학생들과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불태워 버렸다. 그후 루터는 로마의 성직제도를 대항한 표준적 반항을 독일에 다시 회복하기 위해, 1520년 후반에 세가지 저작, 곧 종교개혁의 3대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 1520년 8월, 그는 [기독교 신자의 신분개혁에 관하여 독일 국민중의 그리스도 신자 귀족에게 보냄]이라는 책을 간행했다. 그 속에서 그는 교회가 스스로 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