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랑, 산유화로 지다

이영주2007.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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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랑, 산유화로 지다 정창권 지음 풀빛 2004.05.27 본문보기 평점

 

열녀 향랑으로부터 현대 가족의 유래를 찾다

 

참 이상타. 요즘 가족에 대한 일종의 공부를 하던 와중, 딱딱한 책 읽기가 너무 싫어서 나름 가벼운 책으로 머리나 식힐 겸 집어든 책인데, 일부러 가족 관련한 책을 고른 것도 아닌데, 책을 읽기 전까지는 향랑이 어떤 인물인지도 몰랐는데, 소설인지 논문인지 알 수 없는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드는 조선 후기 향랑 이야기는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가족에 대한 기원 혹은 유래를 역사적으로 밝혀놓고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계시인가. ㅡㅡ;;

 

어찌됐든, 이 책은 조선 후기 17세기의 결혼과 이혼, 재혼, 그리고 부부 간의 재산분배 등 당대의 가족문제를 향랑이라는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빌어 전하고 있다.

향랑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조선후기의 숱한 문헌에 실린 실존인물로 결혼 후 남편의 구박에 이혼한 뒤 자살한 인물이다. 이러한 향랑에 대해 대다수 조선후기 문헌들은 열녀 향랑으로 표현하고 있다. 양반가의 법도를 배우지 못한 어염집 아낙 향랑이 남편과 이혼하고도 재가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결을 선택했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당시의 부부관계, 이혼과 재혼에 대한 사회적 시선 등을 여러 문헌을 통해 보여주며 향랑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역사적 배경을 밝히고 있다. 결국 향랑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는 이혼한 전 남편에 대한 절개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남편의 외도와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친지로부터 배척당하고 어느 누구도 받아주지 않았던 사회풍토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에 대한 분석은 논문과 같은 문체로, 향랑의 구체적인 삶을 보여주는 부분과 죽은 향랑을 열녀로 만드는 양반들의 행적은 허구가 다분히 가미된 소설적 문체로 풀어냈고, 이 둘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허구화 사실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화법은 이 책을 다른 역사소설과 구분짓게 하는 특징이 된다.

 

저자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조선 전기까지는 고려시대까지의 결혼풍습과 남녀관계가 고스란히 전해져 유교사상에도 불구하고 남녀의 경제적 권리나 결혼에 관한 권리는 매우 동등한 편이었다. 이런 관습은 조선 중기까지 내려오는데 17세기 중반 이후인 조선 후기에 이르러 유학 가운데서도 성리학, 더 나아가 주자학이 전사회적으로 침투하면서, 요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완고한 가부장제 가족제도가 형성된 것이다.

생각해 보니 현모양처의 표본이라고 추앙되는 사임당 언니도 친가에서 쭉 살다가 나이들어 시가로 들어갔고, 죽을 때 남편에게 "나 죽었다고 재가할 생각 말라"고 협박까지 했다. 다시 말해 사임당 언니 시절만 해도 부부 사이의 권력관계가 지금 당연시되는 전통적 부부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얘기다.

현대인들이 전통적 부부관계, 가족관계라고 생각하는 남존여비의 권력관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 사회체제가 총체적 위기에 맞닥뜨린 시점인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완고한 가부장제는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아니, 정확히 말해 봉건적 지배질서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배계급이 선택한 일종의 체제유지 수단이었던 것이다.

 

향랑은 바로 그 시기, 주자학이 전사회적으로 침투하면서 양반가뿐 아니라 평민사회에서도 여성의 지위가 급격히 하락하던 그 시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계속되는 흉년과 돌림병으로 어떻게 하면 입 하나라도 줄일 수 있을까 궁리하던 평민계급의 한 여성에게 주어진 삶은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평민 중에서도 그나마 넉넉한 집으로 출가시키는 것이 자식 위하는 길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아버지에 의해 원치 않는 결혼을 했고, 주색 좋아하고 게으름이 뚝뚝 떨어지던 남편이 외도를 일삼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그에 대항에 대들다가 폭력에 쓰러져야 했고, 결국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혼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나 이혼한 여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재가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사실 재혼해봤자 전 남편과 같은 놈 안 만난다는 보장도 없고...) 부모와 친지로부터 내침을 당한 향랑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죽음뿐이었다. 그래도 그냥 죽기는 너무 억울하여 한 소녀에게 자신의 억울한 삶을 모두 털어놓고 '산유화'라는 노래를 부르고 강에 뛰어들었다.

 

 天何高遠   (천하고원)    하늘은 어이하여 높고도 멀며
 地何廣邈   (지하광막)    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아득한가. 
 天地雖大   (천지수대)    하늘과 땅이 비록 크다 하나
 一身靡託   (일신미탁)    이 한 몸 의탁할 곳이 없구나.
 寧投江水   (영투강수)    차라리 이 강물에 빠져 
 葬於魚腹   (장어어복)    물고기 배에 장사 지내리.

 

사연이 이러한데도 자신의 임기 중에 의와 정절의 상징을 찾아 치적을 쌓고 싶었던 양반에 의해 향랑은 열녀로 둔갑한다. 그리고 점점 완고해지는 가부장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향랑의 희생과 정절은 더욱더 미화되어 현재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아마도 무지 때문이겠지만, 남존여비의 가족관계가 '전통'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횡포를 부리는 와중에도 과거사라는 이유로 진짜 '전통'인가에 대해 의문조차 품어보지 않았던 내게 이 책은 전통적인 가족형태와 그 안에서의 권력관계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 책이다. 소설과 분석글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화법도 신선했고, 역사 고증을 통해 조선시대의 가족제도에 대해 낱낱이 파헤치는 재미도 있었고.

이런 연구도 꽤 재미있을 듯하다. 향랑의 자살 사건 외에도 얼마나 많은 사실들이 진실을 외면한 채 지배계급의 언어로 윤색되고 포장되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가부장적 횡포를 부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