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인(지혜있는자)과 야만인(어리석은자)의 분류는 당시 헬라와 로마세계에서의 민족 구분법으로, 알렉산드가 이룩한 헬라제국은 가장 아름다운 언어와 높은 문화, 생활양식 그리고 종교를 가진것 때문에 타 민족과 구분지어졌다.
당시의 시와 소설, 철학, 연극, 합리적 사고, 미의 생산....등은 어느 민족도 감히 따를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 때문에 문명인으로서 그들이 갖는 높은 우월감은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다른 저급한 민족을 지배함이 당연하고 또 마땅한 것으로 여겼다.
로마가 헬라를 무너뜨리고 세계를 지배했어도 헬라문화는 지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로마인들도 높은 문화인들이 되기위해 그들의 언어(나전어)를 버리고 헬라어 습득을 필수과목으로 해서 헬라의 높은 문화를 그들의 것으로 가져 그들도 지혜있는자로 자처했다. 그로 인해 당시의 높은 언어인 헬라어를 모르고 또 그 문화를 모르는 민족은 저급한 민족이요 야만인으로 분류되어 짐승이나 노예취급을 당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과 이런 사회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할 책임을 느껴 복음에 빚진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당시의 헬라와 로마인들이 가장 높은 언어와 문화를 가졌으나 지혜있는 자가 아님을 알았으며, 또한 그들에게 짐승취급 당하는자들이 헬라어를 모르고 헬라의 높은 문화를 몰라서 어리석은 자가 되고 야만인이 된 것이 아님을 알았다.
당시의 지혜있는 자들인 그들도 그들의 높은 지혜에도 불구하고 지혜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고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기며 온갖 짐승과 버러지와 무생물을 신으로 섬겨 그들의 신전은 신들의 집합소였다. 고로 하나님의 지혜에서 보면 그들은 지혜있는자가 아니라 우둔하게 되어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밖에 기다릴 것이 없는 어리석기 짝이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복음임을 알았고 복음을 듣고 깨달아 지혜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알 때 그들이 비로소 지혜있는자 들이 된다는 것을 알았으며 야만인으로 분류된 자들에게 필요한 것도 헬라어와 헬라문화가 아니라 주님의 복음이며 복음을 듣고 또 복음을 깨달아 하나님을 알므로서 지혜로운 자가 된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고로 복음이 선포되어야 피조물이 비로소 피조물로 남게되고 또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며, 가장 지혜있는자요 높은 문화인은 복음을 통해 창조주를 아는 지식을 가진자이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를 가진자이다.
그런데 이 복음이 그 상황에서, 지혜있다는 그들의 이해에서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이론이고 부끄럽기가 짝이 없는 것이었다.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며 또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리고 육체를 입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선언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 사고에 의하면 메시야는 민족해방과 자유를 가져와야 하고 이스라엘에게 통치권을 가져다 주어야 하는데 자유는 커녕 갈릴리 변방에서 병자나 고치고 인기를 좀얻어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자기가 메시야라고 부르짖다가 제사장들에 의해 신성 모독죄로 정죄되어 치욕적인 십자가의 형벌을 받은자를 메시야라고 부른다는 것은 정말 웃음꺼리요 수치중의 수치였다.
그리고 당시의 문명인들이요 지혜있는자들에 의하면 물질은 악하고 육신은 빨리 벗어 버려야 할 천한 것인데 하나님이 육신을 입었다는 것은 가치없는 이론이고, 죽음이 곧 행복의 나라로 가는길목이며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도 바른 이성을 사용하므로서이지 예수를 믿음으로 죄에서 해방된다는 논리는 높은 지혜를 가진 그들이 받아드릴 진리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한 것이다(고전1:18-25참조). 그리고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자들에게 미련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하나님의 지혜가 결코 미련한 것은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이 하신일이 우리 인간의 지혜로 다 풀지 못할 신비중의 신비요 지혜중의 지혜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큰 권능의 일이다. 고로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권능)이다. 하나님은 처음 창조때도 권능(말씀)으로 창조를 이루셨고 처음 창조를 회복하는 새창조도 동일한 권능으로, 복음(말씀)으로 이루시는 것이다.
전도의 미련한 것(고전1:21)은, 하나님의 지혜가 미련한 것이 아니고 지혜있다고 자부하는 세상의 지혜의 잣대로 볼 때,그리고 멸망으로 작정된 자들의 지식적 표준에서 볼 때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세상 지혜를 많이 가지고 높은 문화를 소유한 자들에게는 복음도 그들 수준에 맞게 전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이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부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주님의 복음을 바로알고 사도가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섬겼으며 또 어떻게 전했는지를 바르게 배워야만 이 어두움의 시대에서 주님의 복음을 복음으로 대접하고 또 섬기며 그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권능의 일에 헌신하는 자로 살 수 있을 것이다.
복음에 빚진자
당시의 시와 소설, 철학, 연극, 합리적 사고, 미의 생산....등은 어느 민족도 감히 따를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 때문에 문명인으로서 그들이 갖는 높은 우월감은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다른 저급한 민족을 지배함이 당연하고 또 마땅한 것으로 여겼다.
로마가 헬라를 무너뜨리고 세계를 지배했어도 헬라문화는 지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로마인들도 높은 문화인들이 되기위해 그들의 언어(나전어)를 버리고 헬라어 습득을 필수과목으로 해서 헬라의 높은 문화를 그들의 것으로 가져 그들도 지혜있는자로 자처했다. 그로 인해 당시의 높은 언어인 헬라어를 모르고 또 그 문화를 모르는 민족은 저급한 민족이요 야만인으로 분류되어 짐승이나 노예취급을 당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과 이런 사회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할 책임을 느껴 복음에 빚진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당시의 헬라와 로마인들이 가장 높은 언어와 문화를 가졌으나 지혜있는 자가 아님을 알았으며, 또한 그들에게 짐승취급 당하는자들이 헬라어를 모르고 헬라의 높은 문화를 몰라서 어리석은 자가 되고 야만인이 된 것이 아님을 알았다.
당시의 지혜있는 자들인 그들도 그들의 높은 지혜에도 불구하고 지혜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고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기며 온갖 짐승과 버러지와 무생물을 신으로 섬겨 그들의 신전은 신들의 집합소였다. 고로 하나님의 지혜에서 보면 그들은 지혜있는자가 아니라 우둔하게 되어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밖에 기다릴 것이 없는 어리석기 짝이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복음임을 알았고 복음을 듣고 깨달아 지혜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알 때 그들이 비로소 지혜있는자 들이 된다는 것을 알았으며 야만인으로 분류된 자들에게 필요한 것도 헬라어와 헬라문화가 아니라 주님의 복음이며 복음을 듣고 또 복음을 깨달아 하나님을 알므로서 지혜로운 자가 된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고로 복음이 선포되어야 피조물이 비로소 피조물로 남게되고 또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며, 가장 지혜있는자요 높은 문화인은 복음을 통해 창조주를 아는 지식을 가진자이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를 가진자이다.
그런데 이 복음이 그 상황에서, 지혜있다는 그들의 이해에서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이론이고 부끄럽기가 짝이 없는 것이었다.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며 또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리고 육체를 입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선언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 사고에 의하면 메시야는 민족해방과 자유를 가져와야 하고 이스라엘에게 통치권을 가져다 주어야 하는데 자유는 커녕 갈릴리 변방에서 병자나 고치고 인기를 좀얻어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자기가 메시야라고 부르짖다가 제사장들에 의해 신성 모독죄로 정죄되어 치욕적인 십자가의 형벌을 받은자를 메시야라고 부른다는 것은 정말 웃음꺼리요 수치중의 수치였다.
그리고 당시의 문명인들이요 지혜있는자들에 의하면 물질은 악하고 육신은 빨리 벗어 버려야 할 천한 것인데 하나님이 육신을 입었다는 것은 가치없는 이론이고, 죽음이 곧 행복의 나라로 가는길목이며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도 바른 이성을 사용하므로서이지 예수를 믿음으로 죄에서 해방된다는 논리는 높은 지혜를 가진 그들이 받아드릴 진리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한 것이다(고전1:18-25참조). 그리고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자들에게 미련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하나님의 지혜가 결코 미련한 것은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이 하신일이 우리 인간의 지혜로 다 풀지 못할 신비중의 신비요 지혜중의 지혜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큰 권능의 일이다. 고로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권능)이다.
하나님은 처음 창조때도 권능(말씀)으로 창조를 이루셨고 처음 창조를 회복하는 새창조도 동일한 권능으로, 복음(말씀)으로 이루시는 것이다.
전도의 미련한 것(고전1:21)은, 하나님의 지혜가 미련한 것이 아니고 지혜있다고 자부하는 세상의 지혜의 잣대로 볼 때,그리고 멸망으로 작정된 자들의 지식적 표준에서 볼 때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세상 지혜를 많이 가지고 높은 문화를 소유한 자들에게는 복음도 그들 수준에 맞게 전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이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부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주님의 복음을 바로알고 사도가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섬겼으며 또 어떻게 전했는지를 바르게 배워야만 이 어두움의 시대에서 주님의 복음을 복음으로 대접하고 또 섬기며 그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권능의 일에 헌신하는 자로 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