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화가 모네展

이영주2007.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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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는 역시나 빛의 화가였어!

 

칠렐레팔렐레한 나의 성격(?) 또는 습관(?)이 만드는 불편함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동사무소 주민등록증 발급 서류만 봐도 알 수 있지만 18살 이후 주민등록증을 새로 발급 받을 때마다 덕지덕지 붙인 내 사진은 이미 서류 한 장을 넘어섰고, 1년에 1~2회씩 지갑은 바꿔줘야 하고, 집 열쇠 바꾸기도 계절행사인 데다가 카드 재발급도 아주 자주 치러야 하는 일상 중 하나다.

나이들어 치매 초기 현상이 온 것 아닌가 의심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님께 귀가 닳도록 야단을 들어야 했던 이유도 분실과 건망증에 관련한 것이었으니, 꼭 나이탓만은 아닌 거다. 나의 건망증과 칠렐레팔렐레 분실벽은 거의 선천적이라 할 수 있다. ㅠㅠ

 

그러나 간혹 이런 건망증과 분실벽이 예상밖의 횡재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지난 주 일종의 친구들이 내 사는 곳까지 찾아와 함께 점심을 먹었고, 10분 단위로 소나기와 땡볕을 오락가락하던 날씨 탓에 우산을 들고 약속장소에 나갔던 나는 어김없이 친구분의 차에 우산을 놓고 내렸다. 내 우산도 아니고 사무실 후배에게 빌려간 우산이어서 어떻게든 돌려받아야 했는데 친구분이 전시회 티켓이 있다며 우산도 전해줄 겸 전시회를 보러 가자고 했다. 야호~~ -_-;;

 

일요일 오후 덕수궁 돌담길은 연인과 가족 단위로 나들이를 나온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서울시립미술관까지 가는 길을 가득 메운 인파를 보며 혹시 사람들에 떠밀려 전시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그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초등학생들의 방학이 끝났다는 것. 여름이든 겨울이든 방학이면 방학숙제 때문에 이름난 전시회마다 학생들로 넘쳐난다는 것, 그래서 그림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아이들 구경만 하고 돌아오기 일쑤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비록 휴일이지만 방학보다는 한가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일요일인만큼 전시회를 찾은 이들이 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꼼꼼히 그림 구경하기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 다행이다... 휴...

 

생각해 보니 모네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인상파 화가라는 것만 안다. 인상파가 뭔지는 모르고. ㅡㅡ;;; 교과서에 실린 정도가 내가 기억해낼 수 있는 모네 그림의 전부였고, 을 그린 마네와 지금까지도 헷갈릴 정도이니, 뭐, 말 다했다. 도슨트의 해설 없이 이번 전시를 관람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일요일 도슨트의 해설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어쩐다지? ㅠㅠ

하하...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더니, 먼저 미술관에 도착해 있던 친구분이 도슨트의 해설 대신 오디오로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장비를 대여해 놓으셨다. 요즘은 이렇게 하는구나. 어쨌든, 친구님 감사합니다. ^0^/

이어폰을 한쪽씩 귀에 꽂고 천천히 전시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전시실 초반을 채운 것은 모네가 말년을 보낸 지베르니의 정원 연못에 핀 수련을 그린 그림들이었고, 모네의 연보와 기록사진, 가족과 지인의 초상화, 그리고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각지를 돌며 받은 인상을 그린 그림들과 센느강을 그린 그림들, 다시 지베르니 정원과 집을 그린 그림들이 3층 전시실까지 이어져 있었다.

오디오 장비를 통해 각각의 그림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그림을 보았지만, 내가 이전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모네의 인상과 직접 그림을 보며 느낀 인상 사이에는 차이가 컸다. 지금까지 내게 모네는 밝은 색상을 이용해 화려한 그림을 그린 화가라고 기억돼 있었다. (이건 이 모네의 작품인지 마네의 작품인지 헷갈렸던 바닥 수준의 얄팍한 미술지식이 한몫한 것 같긴 하지만... ㅡㅡ;; ) 그러나 직접 본 모네의 작품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직접 원화를 본 적은 없지만 고흐의 그림을 보며 형태보다는 색에 매혹되곤 했는데, 모네의 그림에서는 눈길을 잡아끌만큼 매력적인 색도 형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 모네의 작품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이 있다면 그것은 명암이었다. 빛의 화가라고 불리는 램브란트와는 전혀 다른 빛과 어두움의 대비. 마치 일부터 노출을 심하게 주고 촬영한 사진 같은 느낌의 그림들. 빛바랜 수묵화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들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번 전시의 메인이 모네가 말년 백내장을 앓던 시절 그린 지베르니 정원의 수련 연작임에도 불구하고 그 그림들보다는 안개 자욱한 런던의 국회의사당 그림이나 강물과 다리의 경계마저 모호한 채링크로스 다리 그림에 더 시선이 갔던 것도 아마 유화임에도 불구하고 수묵화의 명암 기법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듯한 빛과 어두움의 조화에 빠져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이런 감상이 모네의 숱한 작품들 중 어둡고 칙칙한 색조의 그림들만 공수해 온 이번 전시의 편향된(?) 기획 때문인지 화려한 색채보다는 물기 잔뜩 머금은 명암 대비에 필이 꽂혀 버린 내 개인적 취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웹 상에서나마 찾아본 모네의 대표작들이 지닌 화려한 색채를 보면 전자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도 웹에서는 화사하지만 실제 원본을 보면 어두운 느낌을 주는 그림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원래 모네가 색채보다는 빛과 어두움에 주력했던 작가인가 싶기도 하고, 판단하기 어렵다.

어찌됐든 화사한 색채의 향연을 기대하고 찾은 에서 만난 칙칙한 느낌의 그림들이 오히려 좋다. '빛의 화가'라는 타이틀이 전혀 무색하지 않은 모네의 진면모를 발견한 것 같아 뿌듯하기까지 하다. 지금까지 모네는 교과서 속 인상파의 거장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는데(사실 인상파의 특징조차 제대로 모른다... ㅡㅡ;;) 이번 전시를 통해 빛의 화가라는 강한 인상은 남은 것 같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모네가 백내장에 걸려 색깔 구분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몇 년 동안 그린 그림이 현대 추상화의 효시가 됐다는 점이다. 사실 속내를 들여다 보면 (내 짐작에 불과하긴 하지만) 모네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릴 수 없는 형편에서 나온 그림들일지도 모르는데, 그 그림이 새로운 미술사조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역사 속에서 우연은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

 

어쨌든, 장에 탈이 나서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껏 그림 구경한 덕에 배가 부르다.

친구님, 감사합니다. ^__________^

 

 

  극작가 끌레르빌 / 캐리커쳐, 32 X 24 cm, 마르모땅 미술관, 파리

모네의 처음은 캐리커쳐 작가였다. 초기 캐리커쳐 그림 몇 점이 전시됐는데, 후에 형체보다는 빛의 느낌을 중시하는 인상파 화가가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익살스러운 형태의 미를 뽐내는 그의 캐리커쳐가 꽤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속으로 캐리커쳐 계속 그리지, 이게 더 나은데... 이런 생각도 했다. ㅋㅋ)

 

  과일 타르트 1882, 캔버스에 유화, 65.5 × 81.5 ㎝, 개인 소장, 파리

모네가 묵었던 숙소에서 기막히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었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이 과일 타르트란다. 모네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표현했다나 뭐라나.


  햇살 속의 수잔느 1890, 캔버스에 유화, 162 X 107 cm, 까조 베로디에르 갤러리, 파리

모네의 의붓딸 수잔느를 모델로 그린 초상화다. 웹 상에서는 꽤나 해사한 햇살을 받고 있는 수잔느의 형상이지만 실제 원화를 보면 햇살 속의 수잔느라는 제목이 의아할 정도로 매우 어두운 그림이다.

 

  네덜란드의 튤립 밭 1886, 캔버스에 유화, 65 x 81 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모네가 유럽 각국을 돌며 그림을 그리던 시절, 네덜란드의 튤립에 깊은 인상을 받아 튤립밭을 여러 차례 그렸다고 한다. 전시됐던 작품 중 거의 유일하게(?) 웹 상의 그림보다 원화가 훨씬 더 화사한 색감을 가지고 있는 그림이 아닐까?


  돛단배, 저녁의 효과 1885, 캔버스에 유화, 54 X 65 cm, 마르모땅미술관, 파리

모네는 같은 풍경을 시차를 두고 여러 점을 그리곤 했다. 시간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색과 밝기에 집착했던 모네의 노력이 그에게 '빛의 화가'라는 닉네임을 선사한 듯하다.


 

  런던 국회의사당, 웨스트민스터의 탑들

1903, 캔버스에 유화, 81 X 92 cm, 앙드레말로 미술관, 르아브르

내가 알기론 이 풍경을 그린 그림이 수 점 된다. 안개가 자욱할 때, 비가 내릴 때, 모처럼 화창한 햇살이 내리쬘 때 그린 런던의 거리는 전혀 다른 그림을 만들었다. 안개 속에 갇힌 듯한 이 그림이 가장 인상적이다.

 

  베테이유 센느강의 지류 1878, 캔버스에 유화, 57×73 ㎝, 뚜르 미술관, 프랑스

시시각각 형체와 빛깔을 달리하는 하늘과 물은 시간과 날씨에 따라 변하는 빛을 담아내기에 적합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특히 물에 비친 숲과 나무, 꽃을 보면 모네의 그림을 조금이나마 가깝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쏘의 골짜기 1884, 캔버스에 유화, 65 X 81 cm, 마르모땅 미술관, 파리

 

  상선의 정박지, 르아브르 1874, 캔버스에 유화, 37 X 45 cm, 리에쥬 근대 미술관, 벨기에

고흐의 그림에서도 자주 보이던 항구와 배. 그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서 유행이었단다. ^^ 모네의 그림을 보면 볼수록 느끼는 건데 이 양반은 물보다는 하늘 그리는 데 탁월한 화가였던 듯. 물론 개인적 취향이지만. ㅋ

 

  센느 강변 / 1878, 캔버스에 유화, 54 X 65 cm, 개인 소장, 파리

센느 강변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나 강보다는 버드나무인지 뭔 나무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무의 짙은 초록빛이 눈에 먼저 들어오던 그림. 이 그림도 웹 상의 이미지보다 원화가 훨씬 짙고 화려한 색채를 보여주는 몇 안 되는 그림 중 하나다. ^^

 

  수련 / 1903, 캔버스에 유화, 89 x 100 cm, 마르모땅 미술관, 파리

이번 전시의 메인이라 할 수 있는 수련 연작들 중 하나. 사실 웹 상에서 보았던 화사한 느낌의 연못만 보다가 원화의 칙칙한 수련을 보았을 때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모네가 직접 가꾼 정원과 연못, 그리고 수련. 그의 말년은 꽤나 평온했던 듯. ^^

 

  술 달린 모자를 쓴 미쉘 모네의 초상 1880, 캔버스에유화, 46 X 38 cm, 마르모땅미술관, 파리

모네의 둘째아들 미쉘의 초상화. 모네는 자화상도 타인의 초상화도 별로 그리지 않았는데 그나마 그린 인물화는 거의 가족이다. 첫 부인이었던 끌로델이 둘째 아들 미쉘을 출산한 뒤 바로 죽었으니 이 그림을 그릴 때의 모네 마음이 꽤나 짠했을 것 같다.

 

   옹플뢰르 항구의 배들 1917, 캔버스에 유화, 50 X 61 cm, 마르모땅 미술관, 파리

뭐가 배고 뭐가 항구인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그림. ^^;; 직접 확인한 모네의 그림은 캔버스 네 귀퉁이까지 채색이 안 된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리다 만 듯한 그림이 많았다. 사실 '이 양반 너무 성의없네' 이런 투덜거림이 나올 만한 그림들이었다. 이런 대충 그리는 기법이 인상파의 나름 특징이었다니 뭐, 할 말은 없지만서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엔 성의 없어 보인다구... ㅡㅡ;;

 

  장미 정원에서 바라본 집 1922~1924, 캔버스에 유화, 89 x 93 cm, 마르모땅 미술관, 파리

장미 정원은 어디 있고 집은 또 어디 있냐고? 흠흠... 왼쪽 상단 노란 하늘 아래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모네가 말년을 보낸 지베르니의 집 2층 지붕이고 그 앞에는 무성한 숲이 있는 풍경이다. 같은 제목으로 그나마 형체를 조금은 더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는 그림 한 점이 나란히 전시돼 있어서 이런 추측을 가능케 했다. 모네가 백내장에 걸려 색깔 구분도 못하던 시절 그린 그림이니 이해해야지 뭐. ㅡㅡ;;

 

  좌초된 배 1881, 캔버스에 유화, 82 X 60 cm, 도쿄 후지 미술관, 일본

당시 유행했다던 항구와 배 그림 중 하나. 이 그림은 주인공인 배보다도 캔버스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하늘의 색깔과 구름의 모양이 인상적이다. 정말이지 하늘 그리는 데는 탁월했던 듯. ^^

 

  채링크로스 다리 1899~1901, 캔버스에 유화, 60 X 100 cm, 마르모땅 미술관, 파리

내 개인적 취향에 딱 맞았던 그림 중 하나. 이 그림을 보며 김민기의 '친구'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강인지... 두루뭉수리한 다리의 형태로 간신히 구분해 놓은 이 구도가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 ^^;;

 

  포르비예의 센느강 1889, 캔버스에 유화, 52 X 92 cm, 마르모땅미술관, 파리

이번 전시에서 만난 마이 베스트 페이보릿. ^^;;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올 여름 여행 때 빗 속에 잠긴 충주호와 월악산을 보며 그리고 싶었던 그 느낌을 모네의 그림에서 만나다니. 완전 좋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