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개인적으로 내가 선호하는 성악가가 아니나-솔직히 오페라는 잘 모른다.- 그가 동시대의 3대 성악가 중의 하나라는 사실 만으로, 그가 한국에 공연왔을 때 두번이나 쫓아가 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의 음성이 특별히 더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곱고 찢어질 듯 올라가는 여성의 소프라노가 더 넋이 빠지게 하는 것은 사실. 그러나, 그 3 대 성악가들- 2003년인가, 2002년인가 그 삼대 성악가가 잠실운동장에서 함께 공연을 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 의 CD를 꾀 들어봤어도, 난 파바로티 외에 나머지 두 대성악가의 이름조차 매번 잊는다. 특별히 우리 나라 인기 성악가들과 그 나머지 두 성악가(응, 도밍고와 카레라스 였지)가 다른 점이 있는지도 모르겠으니까. . 그렇지만, 파바로티만큼은 그렇게 둔한 나도 "역시~"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한다... 아니 했었다...
모차르트의 변주곡을 치면서, 오페라를 들으면서, 아마데우스를 보면서 그와 동시대에 살지 못했던것이 얼마나 아쉬었으면, 그 천재성을 직접 느껴보기위해 오스트리아로 직접 쫓아가지 않았었던가...
그렇듯이, 천재 성악가 파바로티와 수십년간이라도 같은 시대에, 몇시간 만이라고 그의 공연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그 자체가 감격적인 순간이었었던 것 같다.....
파바로티 사망. 믿기 힘든 이 사실을, 서랍장 어느 구석인가 있는 파바로티 공연 T-shirt 처럼 고이 간직하련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JK20070907
파바로티 타계…천상의 목소리` 하늘에서 울리려나
6일 세상을 떠난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마지막 무대는 지난해 2월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이었다.
이날 그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러 3만5000여 관중을 사로잡았다.
이제 더 이상 무대에서 볼 수 없게 된 파바로티는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전성기를 누렸다.
음악 전문가들은 이들 가운데 도밍고는 작곡가 의도를 정확히 살려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카레라스는 호소력이 큰 목소리를 잘 살리고 있고, 파바로티는 몸 전체의 에너지가 실린 힘찬 음으로 팬들을 사로잡았다고 평가한다.
제빵업자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오페라 애호가이자 아마추어 테너가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 음악 재능이 발견됐다. 1955년 이탈리아 모데나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와 함께 모데나 오페라극장 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때 축구 선수를 꿈꿨던 그는 1961년 이탈리아 레조 에밀리아의 아킬레 피레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에서 루돌포 역을 맡으면서 데뷔했다.
성악가로 이름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영국 코벤트가든 무대. 이어 197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극장에서 도니체티의 `연대의 딸`에 출연해 큰 명성을 얻는다. 그는 이 공연에서 여러 번 하이C(3옥타브 도)를 불러 `하이C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한 메트로폴리탄에서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와 함께 부른 `라보엠` 실황녹음 음반은 세기의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파바로티는 1970년대 `벨칸토 창법`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테너로 꼽혔다.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 노래`를 의미하는 벨칸토는 극적 표현이나 낭만적 서정보다는 목소리 자체의 아름다움과 균등한 공명, 매끈한 창법에 중점을 뒀다. 작곡가 도니체티와 벨리니, 베르디 등의 오페라 배역에 주로 요구되는 창법이다.
8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는 목소리 표현 영역을 확장했다. 좀 더 무게가 실린 창법을 구사하며 드라마틱한 목소리가 필요한 베리스모 오페라에도 출연하게 된다.
인기 성악가로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던 파바로티는 1982년 필라델피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국제콩쿠르를 창설하기도 했다.
1988년에는 음악가로서 대기록을 세웠다. 독일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사랑의 묘약` 공연에서 박수가 무려 1시간7분이나 쏟아졌고 165번 앙코르를 받아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대중가수들과의 공연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1991년 런던 하이드파크 무대에서 무려 15만 관객을 동원해 명성을 확인시켰다.
90년대 그의 목소리는 걷잡을 수 없이 노쇠해졌지만 대규모 음악 이벤트를 열며 명성을 지켰다. 1990년 로마월드컵 전야제에서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무대에 오른 `3테너 콘서트`가 대박을 터뜨리자 세계 각국에서 대규모 관중을 동원하는 야외공연을 자주 마련했다.
한국과 인연도 깊다.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독창회를 연 후 1993년, 2000년, 2001년에도 내한 무대에 섰다. 한ㆍ일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2001년 공연에서는 카레라스, 도밍고와 호흡을 맞췄다.
한편 파바로티는 2003년 35년 연하 여자친구이자 개인비서인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00년 이혼한 전 부인 아두아 베로니와 사이에 장성한 세 딸을 두고 있으며 만토바니에게서는 딸 앨리스를 얻었다.
올해 72세인 그에 대해 일각에서는 전성기를 훌쩍 넘겨 은퇴 시기를 놓치면서 "오페라 스타라는 고급 이미지로 떼돈을 벌었다"는 비난도 있었다.
하지만 1989년 파바로티와 함께 오페라 `사랑의 묘약` 공연에 함께 선 바리톤 최현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49)는 "파바로티는 완벽한 목소리 기술을 가진 대가이면서도 부족한 면을 채우느라 꾸준히 공부를 하기도 했다"며 "역사적으로 유명한 다른 테너들에 비해서도 긴 전성기를 구가했다"고 존경심을 표시했다.
파바로티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다. 경추 수술을 받았던 그는 같은 해 6월 후두염 때문에 멕시코의 3테너 콘서트를 취소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신장까지 나빠져 수술을 받았다.
Opera Howls in the Heaven
그는 개인적으로 내가 선호하는 성악가가 아니나-솔직히 오페라는 잘 모른다.- 그가 동시대의 3대 성악가 중의 하나라는 사실 만으로, 그가 한국에 공연왔을 때 두번이나 쫓아가 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의 음성이 특별히 더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곱고 찢어질 듯 올라가는 여성의 소프라노가 더 넋이 빠지게 하는 것은 사실. 그러나, 그 3 대 성악가들- 2003년인가, 2002년인가 그 삼대 성악가가 잠실운동장에서 함께 공연을 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 의 CD를 꾀 들어봤어도, 난 파바로티 외에 나머지 두 대성악가의 이름조차 매번 잊는다. 특별히 우리 나라 인기 성악가들과 그 나머지 두 성악가(응, 도밍고와 카레라스 였지)가 다른 점이 있는지도 모르겠으니까. . 그렇지만, 파바로티만큼은 그렇게 둔한 나도 "역시~"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한다... 아니 했었다...
모차르트의 변주곡을 치면서, 오페라를 들으면서, 아마데우스를 보면서 그와 동시대에 살지 못했던것이 얼마나 아쉬었으면, 그 천재성을 직접 느껴보기위해 오스트리아로 직접 쫓아가지 않았었던가...
그렇듯이, 천재 성악가 파바로티와 수십년간이라도 같은 시대에, 몇시간 만이라고 그의 공연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그 자체가 감격적인 순간이었었던 것 같다.....
파바로티 사망. 믿기 힘든 이 사실을, 서랍장 어느 구석인가 있는 파바로티 공연 T-shirt 처럼 고이 간직하련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JK20070907
파바로티 타계…천상의 목소리` 하늘에서 울리려나

6일 세상을 떠난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마지막 무대는 지난해 2월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이었다.이날 그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러 3만5000여 관중을 사로잡았다.
이제 더 이상 무대에서 볼 수 없게 된 파바로티는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전성기를 누렸다.
음악 전문가들은 이들 가운데 도밍고는 작곡가 의도를 정확히 살려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카레라스는 호소력이 큰 목소리를 잘 살리고 있고, 파바로티는 몸 전체의 에너지가 실린 힘찬 음으로 팬들을 사로잡았다고 평가한다.
제빵업자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오페라 애호가이자 아마추어 테너가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 음악 재능이 발견됐다. 1955년 이탈리아 모데나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와 함께 모데나 오페라극장 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때 축구 선수를 꿈꿨던 그는 1961년 이탈리아 레조 에밀리아의 아킬레 피레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에서 루돌포 역을 맡으면서 데뷔했다.
성악가로 이름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영국 코벤트가든 무대. 이어 197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극장에서 도니체티의 `연대의 딸`에 출연해 큰 명성을 얻는다. 그는 이 공연에서 여러 번 하이C(3옥타브 도)를 불러 `하이C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한 메트로폴리탄에서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와 함께 부른 `라보엠` 실황녹음 음반은 세기의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파바로티는 1970년대 `벨칸토 창법`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테너로 꼽혔다.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 노래`를 의미하는 벨칸토는 극적 표현이나 낭만적 서정보다는 목소리 자체의 아름다움과 균등한 공명, 매끈한 창법에 중점을 뒀다. 작곡가 도니체티와 벨리니, 베르디 등의 오페라 배역에 주로 요구되는 창법이다.
8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는 목소리 표현 영역을 확장했다. 좀 더 무게가 실린 창법을 구사하며 드라마틱한 목소리가 필요한 베리스모 오페라에도 출연하게 된다.
인기 성악가로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던 파바로티는 1982년 필라델피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국제콩쿠르를 창설하기도 했다.
1988년에는 음악가로서 대기록을 세웠다. 독일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사랑의 묘약` 공연에서 박수가 무려 1시간7분이나 쏟아졌고 165번 앙코르를 받아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대중가수들과의 공연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1991년 런던 하이드파크 무대에서 무려 15만 관객을 동원해 명성을 확인시켰다.
90년대 그의 목소리는 걷잡을 수 없이 노쇠해졌지만 대규모 음악 이벤트를 열며 명성을 지켰다. 1990년 로마월드컵 전야제에서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무대에 오른 `3테너 콘서트`가 대박을 터뜨리자 세계 각국에서 대규모 관중을 동원하는 야외공연을 자주 마련했다.
한국과 인연도 깊다.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독창회를 연 후 1993년, 2000년, 2001년에도 내한 무대에 섰다. 한ㆍ일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2001년 공연에서는 카레라스, 도밍고와 호흡을 맞췄다.
한편 파바로티는 2003년 35년 연하 여자친구이자 개인비서인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00년 이혼한 전 부인 아두아 베로니와 사이에 장성한 세 딸을 두고 있으며 만토바니에게서는 딸 앨리스를 얻었다.

올해 72세인 그에 대해 일각에서는 전성기를 훌쩍 넘겨 은퇴 시기를 놓치면서 "오페라 스타라는 고급 이미지로 떼돈을 벌었다"는 비난도 있었다.하지만 1989년 파바로티와 함께 오페라 `사랑의 묘약` 공연에 함께 선 바리톤 최현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49)는 "파바로티는 완벽한 목소리 기술을 가진 대가이면서도 부족한 면을 채우느라 꾸준히 공부를 하기도 했다"며 "역사적으로 유명한 다른 테너들에 비해서도 긴 전성기를 구가했다"고 존경심을 표시했다.
파바로티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다. 경추 수술을 받았던 그는 같은 해 6월 후두염 때문에 멕시코의 3테너 콘서트를 취소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신장까지 나빠져 수술을 받았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일대기
△1935년 이탈리아 모데나 출생
△1955년 모데나 사범학교 졸업
△모데나오페라극장 합창단 활동
△1961년 이탈리아 아킬레 피레 국제콩쿠르 우승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에서 루돌포 역할로 데뷔
△1963 영국 코벤트가든 오페라 극장 데뷔
△197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서 `라보엠` 성공
△1977년 이화여대서 내한 독창회
△1982년 파바로티 국제콩쿠르 창설
△1990년 로마월드컵 전야제서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3테너 콘서트`
△2001년 한ㆍ일월드컵 기념 `3테너 콘서트`
△2003년 35년 연하 비서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결혼
△2005년 경추 수술에다 후두염으로 건강 악화
△2006년 신장수술에 이어 췌장암 발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