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분야는 서상륜 이상재 윤치호 서재필 김약연 이동휘 김구 안창호 현순 김규식 조만식 신흥우 유관순 등 13명 이 선정됐다. 한국 최초의 성서번역자이자 새문안교회 창설자인 서상륜을 비롯해 우리나라 근대화에 공헌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이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조만식...
조만식 /조만식호는 고당(古堂). 8세 때 한학자 장정봉의 문하에 들어가 한학을 배웠고, 16세 때부터 상업을 시작, 포목상과 지물상을 경영해 상당한 재산을 모으고 사업가로 이름을 날렸다. 23세 되던 해인 1904년 친구이자 동업자인 한정교의 전도로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이듬해인 1905년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해 1908년에 졸업했다. 그해 6월 일본 도쿄[東京]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해 3년간 수학했으며,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배워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기로 결심했다. 한일합병 이후 1911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진학했고, 이때 김성수·송진우 등을 만나 교우관계를 맺었다. 1913년 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유학을 준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했다. 귀국 즉시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취임했다. 이후 오산학교 교감을 거쳐 1915년 교장이 되었고, 1919년 2월 3·1운동을 위해 교장직을 사임하기까지 무보수로 민족교육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3·1운동 직후 보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1월 만기를 1개월 앞두고 가출옥했다. 그해 10월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일제가 교장 취임을 승인하지 않아 1년 만인 1921년 4월 사임했다. 같은 해 5월에 숭실전문학교 강사로 2년간 봉직하는 동시에 평양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로 취임해 1932년까지 활발한 사회운동을 전개했으며 그해 산정현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1922년 오윤선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국산품 장려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조선의 간디'로 불렸다. 1923년 김성수·송진우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해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했고, 1925년 4월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지만 1년 만에 6·10만세운동으로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1926년 9월 평양의 숭인중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일제측의 교장 승인 거부로 1927년 9월 사임했고, 그해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 및 평양지회장으로 활동했다. 1930년 관서(關西) 체육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1932년 11월 경영난과 내분으로 어려움을 겪던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해 민족언론지 육성에 주력했으며, 1943년 지원병제도(志願兵制度) 실시에 따른 협조를 간청하러 온 조선군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正四郞]의 면담 요청을 거절하고 이 제도에 반대해 구금당했다가 곧 석방되었으나, 산정현교회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쇄당하자 낙향했다. 1945년 8·15해방이 되자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약했고, 같은 해 소련 군정청(軍政廳)에서 북조선 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고했으나 소련의 한국공산화정책을 간파하여 이를 거부했다. 같은 해 11월 민족주의자들을 결집해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을 뚜렷이 하는 동시에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소련군정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와 신탁통치 반대의 입장 고수로 인해 1946년 1월 5일 이후 평양 고려 호텔에 감금됨과 아울러 조선민주당 역시 소련 군정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접수되었으나, 끝까지 제자들의 월남 권유를 거절하다가 6·25전쟁때 조선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0년 8월 15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76년 12월 어린이대공원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1976년 1월 '고당 조만식선생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매년 2월 1일 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그의 사상 및 업적을 후세에 알리고 있다.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2가 4번지에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우사 김규식....
신념(信念)의 사람 우사 김규식
어려서부터 남다른 삶의 고난을 겪어야 했던 우사 김규식 박사는 한마디로신념의 인물입니다. 1881년 청풍 김씨 후예, 신라 김알지의 후손인 김대유가 시조로서 조선 왕조의 서인계에 속하는 노론으로서 가문에 벼슬아치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귀양살이로 훌쩍 떠나버린 아버지, 그리고 곧 이어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지게 됨으로 천하 고아가 됩니다. 어려서 이름도 모르는 죽을 병을 치르면서 당시로는 오랑캐나 다름없는 연세 대학 설립자였던 서양인 선교사 언더우드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컷을까 생각하면 우사는 하늘이 키운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입니다.
본시 우사는 봉건 조선 왕조의 명문의 후예였지만 허물어져가는 대한 제국을 인해서는 그 역시 역사의 회오리 바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사는 우리 현대사를 재조명해 주는 역사적 인물입니다.
고아였던 그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돌봄으로 성장해서 경신학교를 거치고 17세 되던 해 버지니아의 로녹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미국에 와서 이미 의학 공부를 마친 서재필 박사의 도움이 컸습니다. 1904년 6년에 유학 생활을 마친 청년 김규식은 어엿한 당대의 선각적 지식인이 되었으며 조국은 그를 기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해 한반도는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발발하여 치열한 국제 권력 다툼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승리로 끝난 이 전쟁은 소위 일본의 통감 정치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을사 보호 조약의 의정서가 체결되는 속수무책의 비통한 국운이었습니다.
이를 목도한 우사는 생명의 은인인 언더우드 목사의 보좌역으로, 비서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 기간 조국을 구체적으로 섬길 수 있는 방도를 강구했습니다. 동시에 모교 경신학교의 학감으로 봉직하면서 새문안 교회의 장로로서 평신도 사역자 직분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YMCA와 몇몇 학교에서 강의가 쇄도했습니다. 이때 유석 조병옥도 연희 전문 학교의 학생이었습니다.
그 후에 조선 총독 데라우찌(寺內)가 압록강 철교 낙성식에 참가하기 위해 신의주를 들렀을 때 도중에서 그를 암살하려 했다는 날조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서 윤치호와 함께 비인격적 대우와, 육신적으로 처절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나라는 한 마디로 풍전등화의 상황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상해로 잠시 몸을 숨겨야 했는데 당시 중국은 손문에 의해 신해 혁명을 치르고 청나라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민족 운동이 일어 나던 시기입니다. 1944년 우사가 임시 정부 부주석이 되었을 무렵, 중국 유수의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했습니다. 특별히 그의 세익스피어 강의는 명성을 날리고 그 권위를 크게 인정 받았습니다.
일찍이 세계를 한 눈으로 내다보았던 그의 활동 무대는 몽고, 프랑스, 러시아, 미국 중국이 좁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8.15 해방이 되면서 환국한 우사 김규식 박사는 운남 이승만, 백범 김구와 더불어 민족의 향방을 붙들어주는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우사의 삶은 전 생애가 조국을 위한 헌신이었습니다. 투철한 기독교 신앙과 정신을 바탕으로 종횡무진 나라 사랑, 교회 사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1945년 11월 21일 새문안 교회의 강단에서 외친 그의 ‘교회도 통일 하자’는 연설은 오늘의 한국 교회가 되새겨 볼 시대의 진단이며 예언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인 담보였던 그의 좌, 우 합작 논의는 여러가지 해석이 따르겠지만 사리 사욕, 자기를 비웠던 기개가 높은 정치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마음껏 조국의 필요에 한 시대를 통해 쓰임받은 인물입니다. 어쩌면 그가 누린 최고의 행복의 부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연히도 우사의 셋째 아들 김진세 장로를 택사스 샌안토니오에서 만났습니다. 그 때는 샌안토니오 연합감리교회의 사경회 인도 차 갔었지만 그 후 여러 차례 서신, 전화로 왕래하면서 가족사의 일부를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가족마저 돌볼 수 없었던 아픔이 자식들에게 얼마간 스며 있었다는 고백은 우리 민족 전체의 아픔이며 고난이었기에 이길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인의 신념은 인격적 에너지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움직이는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의 사사로운 탐심은 민족을 품었었기에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찍이 시대를 읽었던 우사의 삶의 가치관에 기인합니다. 준비된 인물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한국 교회도 이제는 새시대를 감당할 인물을 양육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꿈나무들이 오고 고는 세대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월남 이상재...
아버지는 희택(羲宅)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1867년(고종 4) 과거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서울에서 박정양(朴定陽)을 만나 문객(門客)으로 있으면서 나라의 움직임과 세계대세, 제국주의 세력이 우리나라로 밀려들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1881년 박정양이 신사유람단의 조사(朝士)로 일본을 시찰하게 되자 수원(隨員)으로 따라갔다. 이때 홍영식(洪英植)과 친교를 맺고, 1884년 홍영식이 우정국(郵政局) 총판(總辦)이 되자 인천에 파견되어 통신사무를 맡았다. 그해 12월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도 연루자로 몰렸으나 수색 책임자인 한규설(韓圭卨)을 만나 떳떳이 처신하고 고향으로 내려감으로써 처벌을 면했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갈 때 공사관 서기생(1등서기관)으로 동행했다. 워싱턴에서 청나라 공사가 국서(國書)의 봉정을 직접 하려 하자, 청나라 공사관 서기관과 담판하여 박정양이 단독으로 봉정하게 했다. 청의 압력으로 귀국한 뒤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주한외교관들의 친목단체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개화정책의 실천을 위해 군국기무처가 설치되고 박정양이 내무독판이 되자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에 임명되었다. 다시 박정양이 학부대신이 되자 학부아문참의로 학무국장을 겸하여 신교육령을 반포하고,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했다. 이때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가 외국어학교 교사는 일본인만을 고용하라고 강요했으나 단호히 거절했으며, 외국어학교 교장으로 청년들을 지도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무너지자 내각총서(內閣總書)가 되었다. 그해 7월 의정부 총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독립협회 위원이 되었다. 1898년 2월 러시아인 교련관과 탁지부고문의 철수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작성했으며, 5월 17일 서재필(徐載弼)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윤치호(尹致昊)와 함께 독립협회를 주도했다. 그해 10월 28일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개최하여 전제군주권을 제한하고 내각책임 행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헌의6조(獻議六條)를 결의하여 고종에게 건의하자 30일 고종이 이를 수락한 후 중추원을 개정하여 중추원 관제를 발표했으나, 조병식(趙秉式)·유기환(兪箕煥) 등의 반격으로 11월 4일 독립협회 해산령이 내리고 정교(鄭喬)·남궁억(南宮檍) 등 16명과 함께 구속되었다.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열어 시위항의를 함으로써 11월 10일 태(笞) 40대를 맞고 풀려났다. 이후 만민공동회를 지도하여 헌의6조의 실시를 요구하면서 황국협회에 맞섰으나 12월 25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당하자, 이듬해 1월 관직에서 쫓겨났다. 1902년 6월 정부의 무능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국체개혁의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아들 승인(承仁)과 함께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옥중에서 기독교를 접하게 되어 1903년 기독교도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사범들의 석방과 함께 풀려났다. 연동교회에 입교하고 황성 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고종의 부탁으로 의정부참찬이 되었으며, YMCA 교육부위원장이 되었다. 1907년 6월 만국평회회의 밀사 파견준비를 위하여 한규설과 이상설(李相卨)의 집을 왕래하던 중 통감부에 의해 구속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뒤 풀려났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자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민중시위를 전개했다. 1908년 황성 YMCA 종교부 총무가 되었다. 1910년 전국기독학생회 하령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학생운동을 일으켰다. 1913년 105인사건으로 YMCA 총무 질렛트가 국외추방을 당하자 총무에 취임하여 총독부의 매수공작과 유신회 등 YMCA를 일제에 예속시키려는 계획을 저지했다. 이후 조선중앙 YMCA를 비롯하여 재일조선 YMCA, 경신·배재·전주·신흥·광주·숭일 등 10개 YMCA를 규합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조직하고 명예총무로서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배후인물로 활약하다가 검거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해 6월 최규동(崔奎東)·김병로(金炳魯) 등과 함께 한국인의 민족적인 자각을 촉구하고, 교육을 통해서 착실한 민족적인 역량을 배양함으로써 장차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1922년 3월 민립대학기성회를 발기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WSCF)에 신흥우(申興雨)·이대위(李大偉)·김활란(金活蘭) 등 YMCA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하여 일본 YMCA 대표단과 담판하여 한국YMCA가 단독으로 세계 YMCA 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지 말고 상하이[上海]로 가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국내에 있는 동포들과 청년들을 위하여 민족과 함께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뜻에서 해외망명을 거절했다. 귀국 후 김활란·김필례(金弼禮) 등이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만드는 것을 후원했다. 1924년 연합 소년척후단(少年斥候團)의 초대총재가 되었고, 물산장려운동·절제운동·지방전도운동·창문사운동 등을 지도했다. 그해 9월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취임한 뒤 11월 1일부터 지방판 부록을 발행하고, 11월 23일부터는 조석간(朝夕刊) 6면체제를 확립했다. 1925년 4월 15일 제1회 전국기자대회가 열리자 의장을 지냈다. 1927년 2월 15일 기회주의를 부정하고 사상·이념을 초월해 민족적 단결을 목표로 하는 민족단일전선 신간회가 결성되자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병석에 있었으나 이를 수락했다. 그해 3월 죽은 뒤 4월 7일 최초의 사회장이 치러졌고, 한산 선영(先塋)에 안장되었다.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경기도 양주군 장흥명 삼하리로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교육구국사상이상재는 미국견문 등을 통해 일찍 서구문명과 국제정세에 눈을 떴고, 열강이 한반도를 침략하는 가운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을 통한 자주독립의 길을 모색했다. 그의 인격과 사상은 기독교 신앙과 YMCA 운동을 전개하면서도 전통적인 선비의 윤리적 가치관을 그대로 견지해 유교의 전통적인 인애(仁愛)의 윤리를 본(本)으로 하고 개항 이후 서구물질문명의 수용을 용(用)으로 하는 동도서기적(東道西器的)인 논리의 틀 속에 머물렀다. 1920년대 민족운동에 나타난 좌·우익 대립과 사상적 대결 속에서도 동양의 정신과 문화를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양무론적(洋務論的) 논리를 유지했다. 1910년 이후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신앙운동과 교육운동이 일치하는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고 그것은 YMCA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생각으로 청년회 일에 몰두했다. YMCA의 기능은 청년회가 스스로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청년·종교·사회운동체로서 자체사업을 해나가는 것이고, 청년회가 촉매공동체가 되어 언론·교육·사회·종교의 각 영역에 필요한 기초조직을 만드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항일의 방법으로 실력양성을 택하고, 이를 토대로 민족의 자주독립과 주체적 역량을 기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청년을 교육시켜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을 만들기 위해 모든 기성세대가 청년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모든 기성세대가 노인의 노인으로 있지 말고 노년의 청년이 되어 진취적인 자세로 모든 정열을 쏟아 하루빨리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주민족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각 개인의 마음이 변하고 혁신되면 사회적 혁신이 가능해지며, 따라서 사회교육을 통하여 각자 마음의 혁신을 일으켜 제도적 개선을 추구하자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는 전통적으로 체(體)보다 덕(德)을 기르는 것을 중요시했고 지(智)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아왔으나, 민족의 수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를 기름이 필수적이라며 농공상·의학·화학·천문학 및 제반 기술학 등을 길러야 학술을 발달시킬 수 있고, 학술이 발달해야 민족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지혜가 가능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가 생각한 교육은 단지 인간을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인간을 만들면서 사회를 재형성하는 것으로서, YMCA 회원뿐만 아니라 1910년부터 담배공장 직공과 상점 사환들을 대상으로 노동야학을 시작하는 등 사회교육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유관순열사...이화학당(梨花學堂) 재학 당시 3·1운동이 일어나자 아오내[竝川] 장터 시위를 주동하고 수감된 뒤에도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죽었다. 본관은 고흥(高興). 아버지는 중권(重權)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1916년 기독교감리교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5일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뒤 총독부 임시휴교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당하자 3월 8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고향에서는 이종성(李鍾成)이 주동이 되어 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구금당해 실행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3월 9일 밤 예배가 끝난 뒤 조인원(趙仁元)·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언니와 함께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여 즉석에서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오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안성·목천·연기·청주·진천 등의 마을 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기 위한 연락원으로 선출되어 20일 동안 수백 리를 왕복하며 시위운동에 참여할 것을 설득했다.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의 선도로 시위가 시작되자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시위 도중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주동자로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했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자 재판장에게 자신의 투쟁이 정당함을 역설하고 의자를 집어던져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인해 몸이 상했으나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에도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때문에 더욱 혹독한 형벌을 당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1920년 17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8·15해방 후 충청남도와 천안군의 협력으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현순...일명 송원상(宋元相). 1902년 하와이로 건너가 기독교회에서 공부한 뒤 1911년 귀국, 선교활동을 했다. 1919년 3·1운동 때 상하이[上海]에 체류하던 중 이승훈(李昇薰)·함태영(咸台永)이 김지환(金智煥) 편으로 보내온 독립선언서 및 독립탄원서를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과 파리 강화회의에 보냈다. 3·1운동 직후 상하이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임시정부 조직의 움직임이 있자,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에 임시사무소를 개설하고 총무로 활동했다. 그해 4월 10일 손정도(孫貞道) 등 29명과 함께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의결하고 외무차장으로 선임되었다. 또 서울에서 개최된 13도대표국민대회에서는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8월 내무차장에 임명되었으며, 9월에는 만주·노령 지역에 임시정부 특사로 파견되었고, 김병조(金秉祚)·손정도·조상섭(趙尙燮) 등과 함께 대한기독교연합회 대표로서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국제연맹에 제출했다. 11월 내무차장직을 사임한 뒤 대한적십자회 상의원(常議員)에 선출되었고 임시정부 서울지역 조사원에 임명되어 국내 사정을 조사·보고했다. 1920년 4월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안현경(安顯景)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구미위원부 위원장 서리로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21년 서재필(徐載弼)·정한경(鄭翰景) 등과 임시정부의 외교대표 자격을 놓고 갈등을 일으켜 사임했다.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의 주비회(籌備會)가 발족되면서 임시정부가 내분에 빠지자, 상하이로 돌아와 안창호(安昌浩)·여운형(呂運亨) 등이 조직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 가입해 단결을 모색했으나 대립이 심해 탈퇴했다. 그뒤 하와이에 거주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지원을 맡아 활동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서재필 선생...서재필 /서재필서재필 /서재필의 묘, 국립현충원갑신정변 주역의 한 사람이며, 〈독립신문〉의 발간과 독립협회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본관은 대구. 호는 송재(松齋). 미국 귀화명은 필립 제이슨. 일본유학과 갑신정변아버지는 광언(光彦)이다. 어렸을 때 친척인 광하(光夏)에게 입양되었고 7세 때에 상경하여 양모(養母)의 동생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배웠다. 1882년(고종 19)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교서관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김옥균·서광범 등과 사귀었다. 1883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서 6개월간 일본어 교육을 받은 후 도야마 육군학교[戶山陸軍學校]에 입학했다. 약 7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7월 귀국해 고종의 승락을 얻어 사관(士官)을 양성하는 조련국(操鍊局) 사관장(士官長)이 되었으나,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1884년 군대의 통솔권을 장악하고 군대의 훈련을 위해 청나라 장교를 부르자 군에서 쫓겨났다. 1884년 갑신정변에 적극 참여하여 정변계획중에는 일본유학의 경험을 토대로 김옥균과 조선주둔 일본군 무라가미[村上] 중대장 간의 연락을 담당했으며, 정변진행중에 사관생도를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정권장악 후 구성된 정부에서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에 임명되었다. 망명시기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일본이 갑신정변에 깊이 참여했다는 외국의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이들을 냉대하자 1885년 4월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1886년 9월에는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베어 시에 있는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해 1889년 6월 졸업했다. 1889년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전신으로 당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대학인 코크란대학에 입학하여 1893년 졸업하고, 그해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이때는 미국 육군의학박물관에서 동양서적을 번역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시민권을 얻었다. 1894년 6월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한 후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했으나 백인들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으로 생활이 어려워 조선으로 돌아올 때는 주미조선공사관에서 여비를 마련해주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활동1894년 갑오개혁이 이루어지면서 갑신정변으로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망명중 미국에 들른 박영효의 권유를 받아들여 1895년 12월에 귀국했다. 귀국 후 개화파정부는 서재필을 외부협판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서재필은 보수파로부터의 만약의 방해에 대비하기 위해 권력의 내부에 들어가기보다는 권력의 외부에서 안전한 미국시민으로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이에 개화파정부와 근대화운동의 한 방편으로 신문의 발간을 합의하고 신문창간의 자금과 생활비를 지원받는 한편, 1896년 1월에 중추원고문에 임명되었다. 국내 온건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 그리고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1896년 4월 7일 창간되어 1899년 12월 4일까지 발간된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주시경의 노력에 힘입어 순한글로 간행되었으며 영문판 〈The Independent〉로도 발행되었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후에는 이상재·남궁억·이완용·김가진·안경수 등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초기에 고급관료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독립협회는 이후 토론회·구국상소·만민공동회 등을 통해 민중의 계몽과 근대화에 노력했다. 또 서재필은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가면서 1896년 11월 13명의 회원으로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했는데 1년 만에 회원이 약 200명으로 증가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던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침투에 한계를 느낀 러시아는 군사적·정치적 압력을 확대하면서 만주와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폈다. 이에 서재필은 러시아의 대한정책과 동아시아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쓰는 한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 고문단의 철수를 요구했다. 친러정권과의 대립으로 중추원고문직에서 해고되자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일제시대와 해방 후의 활동그후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1924년까지 인쇄업과 각종 장부를 취급하면서 사무실용 가구를 파는 필립제이슨상회를 경영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재미한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이 되었다. 이 대회의 결과에 따라 상해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산하에 한인통신부를 설치하고 영문기관지로 〈한국평론 Korea Review〉을 월간으로 발간했으며 〈어린이〉·〈순난자〉·〈대한정신〉 등 영문 소책자를 발행하여 배부했다. 이 책들은 미국에 일본의 만행을 소개하고 독립의지를 표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으며, 지방순회강연의 홍보책자로 활용되었다. 또한 이 통신부에 한인연합대회에 연사로 초빙되었던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의 자유독립 원조 및 한일기독교도의 선교자유 보장과, 한인이 당하는 일본인의 악형을 영구히 방지하며 미국의 일반 국민에게 한국의 진상을 전파할 것을 목적으로 한 한국친우동맹(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이 결성되어 구미위원회의 활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한편 1920, 1921년에는 3·1운동 기념식을 뉴욕에서 열기도 했다. 1921~22년 워싱턴에서 일본의 해군력 팽창을 억제하고 중국침략을 견제하려는 취지에서 미국이 주최한 태평양회의가 열리자 임시정부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일본대표 도쿠가와[德川家達]에게 제출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각국 대표와 세계여론에 호소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조선문제가 전혀 논의되지 않자 실망하여 경제난으로 한인통신부와 한국친우동맹에 관한 사업을 정지한다는 보고를 구미위원회에 보냈다. 이후 양탄자를 취급하는 이탄뉴상회의 사장으로 사업에 종사했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송진우·백관수·신흥우 등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의 잔학함을 규탄하고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1926년 펜실베이니아의과대학의 특별학생으로 등록했으며 그후 여러 병원의 고용의사로 종사하는 한편, 몇 편의 병리학 관계논문을 썼다. 1936년부터는 필라델피아에서 개업의로 생활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징병검사관을 했다고 한다. 그동안 국내의 잡지에 대개 민족성 개조와 실력 양성을 주장하는 몇 편의 글을 기고했으며 〈동아일보〉에 〈회고갑신정변〉과 〈체미오십년〉이라는 글을 영문으로 적어 보내어 번역·수록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정청 장관 하지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귀국했다. 1948년 국회에서 행해진 대통령선거에서 1표를 얻기도 했으나 외국국적을 가졌기 때문에 무효로 처리되었다. 194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백범 김구...본관은 안동. 아명(兒名)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구(龜)·구(九)로 개명했다. 자는 연상(蓮上), 호는 연하(蓮下)·백범(白凡). 아버지는 순영(淳永)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887년 11세 때 아버지가 집안에 세운 서당에서 한문과 한글을 익혔다. 15세에는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당시(唐詩)와 〈대학〉을 공부하고 과문(科文) 등을 익혔다. 17세때 우리나라 마지막 과거인 경시(慶試)에 응시하기 위해 해주에 갔으나, 매관매직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와 풍수지리서·관상학·병서 등을 읽으며 훈장을 지냈다. 동학교문활동과 의병활동1893년 동학의 평등주의에 감화되어 입도한 뒤 포덕(布德)에 힘을 기울여 접주(接主)가 되었다. 1894년 황해도 도유(都儒)로 뽑혀 보은집회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손병희(孫秉熙)를 만났으며,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라는 첩지를 받는 등 북접계열로 동학교문활동을 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친일정권은 일본군과 연합하여 농민군을 공격하는 한편, 동학교도 전체를 비적(匪賊)으로 몰아 탄압했다. 귀향길에 농민전쟁을 목도한 그는 그해 9월 삼남에서 올라온 경통(敬通:通文)에 호응하여 해주 죽산장(竹山場)에서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깃발 아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뒤 배신한 우군(友軍) 이동엽(李東燁) 부대의 습격을 받아 대패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학군 토벌에 나선 신천(信川) 진사 안태훈(安泰勳:安重根의 아버지)의 집에 은거했으며, 위정척사계열인 유인석(柳麟錫)과 동문인 고능선(高能善)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한 명분론적인 세계관에 몰입하였다. 1895년에는 남만주로 건너가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참패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살해되자 충격을 받고 1896년 2월 귀국하여 안악(安岳)으로 오는 도중 치하포(河浦)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 를 때려 죽인 뒤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었다. 1897년 사형이 확정되어 집행되기 직전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정지되었으나,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했다. 1898년 탈옥하여 삼남일대를 떠돌다 하동 쌍계사(雙溪寺)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그해 가을 공주 마곡사(麻谷寺)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서울의 새절을 거쳐 평양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방주가 되었으나 1899년 환속하였다. 애국계몽활동기1900년 강화도로 건너가 개화인사들과 교유하고 교육과 계몽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 사고의 틀을 벗어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해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 백남훈(白南薰)에게 인계하고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 1905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한 뒤, 대한문 앞에서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가두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 1906년 종산 서명의숙(西明義塾)의 교원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안악 양산학교(楊山學校)의 교원이 되었다. 1909년에는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을 겸했다. 1909년에는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를 조직하여 학무총감(學務總監)이 되어 도내 각지 강습소를 다니며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강연 주제는 "한인이 배일(排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것 등이었다. 이때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사건이 발생하자, 사건관련자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불기소로 풀려났다. 안창호(安昌浩)가 주도하는 비밀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이 되었으며, 1910년 양기탁(梁起鐸)이 소집한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국내에서는 무력 항쟁을 하고 만주에는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일제와 투쟁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1911년 안악(安岳) 부호들을 협박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빼앗아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 했다는 소위 안명근(安明根:안중근의 종제)사건의 관련자로 5월에 체포당했다(→ 안악사건). 김홍량(金鴻亮) 등 양산학교 관계자들도 서울에 압송되었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7년형을 선고받아 복역중 감형되어 1914년 7월 가출옥되었다. 그뒤 양산학교장인 김홍량의 동산평농장(東山坪農場) 농감(農監)이 되어 학교를 세우고 소작인을 교육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활동기상해로 망명한 그는 안창호의 추천으로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으며, 1923년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진로를 둘러싸고 제기된 창조론(創造論)과 개조론(改組論) 등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마련된 국민대표회가 분열로 치닫자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하였다. 1924년 국무총리대리를 거쳐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27년 약체화된 당시 임정의 처지와 구성원상 국무령제로는 내각 구성조차 어려워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 겸 주석이 되었다. 이러한 임정활동에서 그는 사회주의를 배척 반대했으며,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에 대하여는 별다른 비판을 하지 않았다. 1928년 사회주의계열을 제외한 민족주의계열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동녕·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했다. 1932년에는 청년들을 모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침략주의자들의 암살사건을 지휘했다.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의거가 대표적인 성공사례이다. 이 사건으로 일경의 탄압이 강화되자 상해를 탈출했다. 1933년 난징[南京] 에서 장제스[蔣介石]을 만나 광복군 무관양성소 설치와 항일전투방략을 협의했다. 1934년 국무위원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으나,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의정원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의 폭격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를 장쑤 성[江蘇省]의 전장[鎭江], 후난 성[湖南]의 창사[長沙]로 옮기는 한편, 임정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6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했다. 이는 공세를 강화해가는 일본과 최후 결전을 앞두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민족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고 결전태세를 갖추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1940년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정당조직으로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 등 3당을 한국독립당의 이름아래 통합하여 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1월 25일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의 이념적 통합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공포했다. 이것은 통합된 단일정당조직이 단순한 물리적인 결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념적인 융합차원으로까지 진전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체였다. 한국의 건국정신은 정치 경제·교육의 평등을 보장하는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있으며, 3·1독립선언에 입각하여 수립된 정부는 민족자력으로 이민족의 전제를 물리치고 5천년 군주정치의 낡은 껍질을 벗겨 새로운 민주제도를 확립하고 사회계급을 타파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이 건국강령은 사회주의적 이념을 도입한 좌우합작 타협의 소산물이었다. 이 좌우합작은 전민족적 차원에서 결성된 것이 아닌 김구와 김원봉(金元鳳)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좌우연합전선상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다. 또한 이는 이들을 주체로 민족해방을 쟁취한 뒤 추진할 새로운 국가건설의 가늠자로서 임시정부의 진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해 가을 충칭[重慶]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고 일제를 무력으로 몰아낼 계획을 추진했다. 1941년 12월 9일 5개항의 대일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임전태세에 돌입했다. 1942년 7월에는 중국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정식협정을 체결하여 연합군과 더불어 항일공동작전에 나설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되었으며,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朴贊翊)을 선출하고 결전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나온 학도병을 광복군에 편입시켰으며, 미육군전략처(OSS)와 제휴하여 국내침투를 위한 특수부대로 광복군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세우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전격적으로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참전하지 못한 채 8·15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정국기의 활동<script type=text/javascript>dic_flash(','http://file.dic.daum.net/dic100/brit/files/media/swf/k03g000101v1.swf','180','136','dcFlashBox5772')
개신교를 욕하는것은 이분들을 욕하는것과 다른거 없다
독립운동 분야는 서상륜 이상재 윤치호 서재필 김약연 이동휘 김구 안창호 현순 김규식 조만식 신흥우 유관순 등 13명 이 선정됐다. 한국 최초의 성서번역자이자 새문안교회 창설자인 서상륜을 비롯해 우리나라 근대화에 공헌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이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조만식...
조만식 /조만식호는 고당(古堂).8세 때 한학자 장정봉의 문하에 들어가 한학을 배웠고, 16세 때부터 상업을 시작, 포목상과 지물상을 경영해 상당한 재산을 모으고 사업가로 이름을 날렸다. 23세 되던 해인 1904년 친구이자 동업자인 한정교의 전도로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이듬해인 1905년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해 1908년에 졸업했다. 그해 6월 일본 도쿄[東京]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해 3년간 수학했으며,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배워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기로 결심했다. 한일합병 이후 1911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진학했고, 이때 김성수·송진우 등을 만나 교우관계를 맺었다. 1913년 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유학을 준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했다. 귀국 즉시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취임했다. 이후 오산학교 교감을 거쳐 1915년 교장이 되었고, 1919년 2월 3·1운동을 위해 교장직을 사임하기까지 무보수로 민족교육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3·1운동 직후 보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1월 만기를 1개월 앞두고 가출옥했다. 그해 10월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일제가 교장 취임을 승인하지 않아 1년 만인 1921년 4월 사임했다. 같은 해 5월에 숭실전문학교 강사로 2년간 봉직하는 동시에 평양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로 취임해 1932년까지 활발한 사회운동을 전개했으며 그해 산정현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1922년 오윤선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국산품 장려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조선의 간디'로 불렸다. 1923년 김성수·송진우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해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했고, 1925년 4월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지만 1년 만에 6·10만세운동으로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1926년 9월 평양의 숭인중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일제측의 교장 승인 거부로 1927년 9월 사임했고, 그해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 및 평양지회장으로 활동했다. 1930년 관서(關西) 체육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1932년 11월 경영난과 내분으로 어려움을 겪던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해 민족언론지 육성에 주력했으며, 1943년 지원병제도(志願兵制度) 실시에 따른 협조를 간청하러 온 조선군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正四郞]의 면담 요청을 거절하고 이 제도에 반대해 구금당했다가 곧 석방되었으나, 산정현교회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쇄당하자 낙향했다.
1945년 8·15해방이 되자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약했고, 같은 해 소련 군정청(軍政廳)에서 북조선 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고했으나 소련의 한국공산화정책을 간파하여 이를 거부했다. 같은 해 11월 민족주의자들을 결집해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을 뚜렷이 하는 동시에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소련군정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와 신탁통치 반대의 입장 고수로 인해 1946년 1월 5일 이후 평양 고려 호텔에 감금됨과 아울러 조선민주당 역시 소련 군정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접수되었으나, 끝까지 제자들의 월남 권유를 거절하다가 6·25전쟁때 조선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0년 8월 15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76년 12월 어린이대공원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1976년 1월 '고당 조만식선생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매년 2월 1일 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그의 사상 및 업적을 후세에 알리고 있다.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2가 4번지에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우사 김규식....
신념(信念)의 사람 우사 김규식
어려서부터 남다른 삶의 고난을 겪어야 했던 우사 김규식 박사는 한마디로신념의 인물입니다. 1881년 청풍 김씨 후예, 신라 김알지의 후손인 김대유가 시조로서 조선 왕조의 서인계에 속하는 노론으로서 가문에 벼슬아치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귀양살이로 훌쩍 떠나버린 아버지, 그리고 곧 이어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지게 됨으로 천하 고아가 됩니다. 어려서 이름도 모르는 죽을 병을 치르면서 당시로는 오랑캐나 다름없는 연세 대학 설립자였던 서양인 선교사 언더우드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컷을까 생각하면 우사는 하늘이 키운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입니다.
본시 우사는 봉건 조선 왕조의 명문의 후예였지만 허물어져가는 대한 제국을 인해서는 그 역시 역사의 회오리 바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사는 우리 현대사를 재조명해 주는 역사적 인물입니다.
고아였던 그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돌봄으로 성장해서 경신학교를 거치고 17세 되던 해 버지니아의 로녹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미국에 와서 이미 의학 공부를 마친 서재필 박사의 도움이 컸습니다. 1904년 6년에 유학 생활을 마친 청년 김규식은 어엿한 당대의 선각적 지식인이 되었으며 조국은 그를 기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해 한반도는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발발하여 치열한 국제 권력 다툼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승리로 끝난 이 전쟁은 소위 일본의 통감 정치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을사 보호 조약의 의정서가 체결되는 속수무책의 비통한 국운이었습니다.
이를 목도한 우사는 생명의 은인인 언더우드 목사의 보좌역으로, 비서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 기간 조국을 구체적으로 섬길 수 있는 방도를 강구했습니다. 동시에 모교 경신학교의 학감으로 봉직하면서 새문안 교회의 장로로서 평신도 사역자 직분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YMCA와 몇몇 학교에서 강의가 쇄도했습니다. 이때 유석 조병옥도 연희 전문 학교의 학생이었습니다.
그 후에 조선 총독 데라우찌(寺內)가 압록강 철교 낙성식에 참가하기 위해 신의주를 들렀을 때 도중에서 그를 암살하려 했다는 날조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서 윤치호와 함께 비인격적 대우와, 육신적으로 처절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나라는 한 마디로 풍전등화의 상황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상해로 잠시 몸을 숨겨야 했는데 당시 중국은 손문에 의해 신해 혁명을 치르고 청나라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민족 운동이 일어 나던 시기입니다. 1944년 우사가 임시 정부 부주석이 되었을 무렵, 중국 유수의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했습니다. 특별히 그의 세익스피어 강의는 명성을 날리고 그 권위를 크게 인정 받았습니다.
일찍이 세계를 한 눈으로 내다보았던 그의 활동 무대는 몽고, 프랑스, 러시아, 미국 중국이 좁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8.15 해방이 되면서 환국한 우사 김규식 박사는 운남 이승만, 백범 김구와 더불어 민족의 향방을 붙들어주는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우사의 삶은 전 생애가 조국을 위한 헌신이었습니다. 투철한 기독교 신앙과 정신을 바탕으로 종횡무진 나라 사랑, 교회 사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1945년 11월 21일 새문안 교회의 강단에서 외친 그의 ‘교회도 통일 하자’는 연설은 오늘의 한국 교회가 되새겨 볼 시대의 진단이며 예언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인 담보였던 그의 좌, 우 합작 논의는 여러가지 해석이 따르겠지만 사리 사욕, 자기를 비웠던 기개가 높은 정치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마음껏 조국의 필요에 한 시대를 통해 쓰임받은 인물입니다. 어쩌면 그가 누린 최고의 행복의 부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연히도 우사의 셋째 아들 김진세 장로를 택사스 샌안토니오에서 만났습니다. 그 때는 샌안토니오 연합감리교회의 사경회 인도 차 갔었지만 그 후 여러 차례 서신, 전화로 왕래하면서 가족사의 일부를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가족마저 돌볼 수 없었던 아픔이 자식들에게 얼마간 스며 있었다는 고백은 우리 민족 전체의 아픔이며 고난이었기에 이길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인의 신념은 인격적 에너지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움직이는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의 사사로운 탐심은 민족을 품었었기에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찍이 시대를 읽었던 우사의 삶의 가치관에 기인합니다. 준비된 인물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한국 교회도 이제는 새시대를 감당할 인물을 양육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꿈나무들이 오고 고는 세대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희택(羲宅)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1867년(고종 4) 과거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서울에서 박정양(朴定陽)을 만나 문객(門客)으로 있으면서 나라의 움직임과 세계대세, 제국주의 세력이 우리나라로 밀려들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1881년 박정양이 신사유람단의 조사(朝士)로 일본을 시찰하게 되자 수원(隨員)으로 따라갔다. 이때 홍영식(洪英植)과 친교를 맺고, 1884년 홍영식이 우정국(郵政局) 총판(總辦)이 되자 인천에 파견되어 통신사무를 맡았다. 그해 12월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도 연루자로 몰렸으나 수색 책임자인 한규설(韓圭卨)을 만나 떳떳이 처신하고 고향으로 내려감으로써 처벌을 면했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갈 때 공사관 서기생(1등서기관)으로 동행했다. 워싱턴에서 청나라 공사가 국서(國書)의 봉정을 직접 하려 하자, 청나라 공사관 서기관과 담판하여 박정양이 단독으로 봉정하게 했다. 청의 압력으로 귀국한 뒤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주한외교관들의 친목단체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개화정책의 실천을 위해 군국기무처가 설치되고 박정양이 내무독판이 되자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에 임명되었다. 다시 박정양이 학부대신이 되자 학부아문참의로 학무국장을 겸하여 신교육령을 반포하고,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했다. 이때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가 외국어학교 교사는 일본인만을 고용하라고 강요했으나 단호히 거절했으며, 외국어학교 교장으로 청년들을 지도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무너지자 내각총서(內閣總書)가 되었다. 그해 7월 의정부 총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독립협회 위원이 되었다. 1898년 2월 러시아인 교련관과 탁지부고문의 철수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작성했으며, 5월 17일 서재필(徐載弼)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윤치호(尹致昊)와 함께 독립협회를 주도했다. 그해 10월 28일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개최하여 전제군주권을 제한하고 내각책임 행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헌의6조(獻議六條)를 결의하여 고종에게 건의하자 30일 고종이 이를 수락한 후 중추원을 개정하여 중추원 관제를 발표했으나, 조병식(趙秉式)·유기환(兪箕煥) 등의 반격으로 11월 4일 독립협회 해산령이 내리고 정교(鄭喬)·남궁억(南宮檍) 등 16명과 함께 구속되었다.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열어 시위항의를 함으로써 11월 10일 태(笞) 40대를 맞고 풀려났다. 이후 만민공동회를 지도하여 헌의6조의 실시를 요구하면서 황국협회에 맞섰으나 12월 25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당하자, 이듬해 1월 관직에서 쫓겨났다. 1902년 6월 정부의 무능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국체개혁의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아들 승인(承仁)과 함께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월남 이상재...
옥중에서 기독교를 접하게 되어 1903년 기독교도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사범들의 석방과 함께 풀려났다. 연동교회에 입교하고 황성 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고종의 부탁으로 의정부참찬이 되었으며, YMCA 교육부위원장이 되었다. 1907년 6월 만국평회회의 밀사 파견준비를 위하여 한규설과 이상설(李相卨)의 집을 왕래하던 중 통감부에 의해 구속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뒤 풀려났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자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민중시위를 전개했다. 1908년 황성 YMCA 종교부 총무가 되었다. 1910년 전국기독학생회 하령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학생운동을 일으켰다. 1913년 105인사건으로 YMCA 총무 질렛트가 국외추방을 당하자 총무에 취임하여 총독부의 매수공작과 유신회 등 YMCA를 일제에 예속시키려는 계획을 저지했다. 이후 조선중앙 YMCA를 비롯하여 재일조선 YMCA, 경신·배재·전주·신흥·광주·숭일 등 10개 YMCA를 규합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조직하고 명예총무로서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배후인물로 활약하다가 검거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해 6월 최규동(崔奎東)·김병로(金炳魯) 등과 함께 한국인의 민족적인 자각을 촉구하고, 교육을 통해서 착실한 민족적인 역량을 배양함으로써 장차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1922년 3월 민립대학기성회를 발기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WSCF)에 신흥우(申興雨)·이대위(李大偉)·김활란(金活蘭) 등 YMCA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하여 일본 YMCA 대표단과 담판하여 한국YMCA가 단독으로 세계 YMCA 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지 말고 상하이[上海]로 가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국내에 있는 동포들과 청년들을 위하여 민족과 함께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뜻에서 해외망명을 거절했다. 귀국 후 김활란·김필례(金弼禮) 등이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만드는 것을 후원했다. 1924년 연합 소년척후단(少年斥候團)의 초대총재가 되었고, 물산장려운동·절제운동·지방전도운동·창문사운동 등을 지도했다. 그해 9월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취임한 뒤 11월 1일부터 지방판 부록을 발행하고, 11월 23일부터는 조석간(朝夕刊) 6면체제를 확립했다. 1925년 4월 15일 제1회 전국기자대회가 열리자 의장을 지냈다. 1927년 2월 15일 기회주의를 부정하고 사상·이념을 초월해 민족적 단결을 목표로 하는 민족단일전선 신간회가 결성되자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병석에 있었으나 이를 수락했다. 그해 3월 죽은 뒤 4월 7일 최초의 사회장이 치러졌고, 한산 선영(先塋)에 안장되었다.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경기도 양주군 장흥명 삼하리로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교육구국사상이상재는 미국견문 등을 통해 일찍 서구문명과 국제정세에 눈을 떴고, 열강이 한반도를 침략하는 가운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을 통한 자주독립의 길을 모색했다. 그의 인격과 사상은 기독교 신앙과 YMCA 운동을 전개하면서도 전통적인 선비의 윤리적 가치관을 그대로 견지해 유교의 전통적인 인애(仁愛)의 윤리를 본(本)으로 하고 개항 이후 서구물질문명의 수용을 용(用)으로 하는 동도서기적(東道西器的)인 논리의 틀 속에 머물렀다. 1920년대 민족운동에 나타난 좌·우익 대립과 사상적 대결 속에서도 동양의 정신과 문화를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양무론적(洋務論的) 논리를 유지했다. 1910년 이후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신앙운동과 교육운동이 일치하는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고 그것은 YMCA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생각으로 청년회 일에 몰두했다. YMCA의 기능은 청년회가 스스로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청년·종교·사회운동체로서 자체사업을 해나가는 것이고, 청년회가 촉매공동체가 되어 언론·교육·사회·종교의 각 영역에 필요한 기초조직을 만드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항일의 방법으로 실력양성을 택하고, 이를 토대로 민족의 자주독립과 주체적 역량을 기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청년을 교육시켜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을 만들기 위해 모든 기성세대가 청년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모든 기성세대가 노인의 노인으로 있지 말고 노년의 청년이 되어 진취적인 자세로 모든 정열을 쏟아 하루빨리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주민족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각 개인의 마음이 변하고 혁신되면 사회적 혁신이 가능해지며, 따라서 사회교육을 통하여 각자 마음의 혁신을 일으켜 제도적 개선을 추구하자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는 전통적으로 체(體)보다 덕(德)을 기르는 것을 중요시했고 지(智)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아왔으나, 민족의 수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를 기름이 필수적이라며 농공상·의학·화학·천문학 및 제반 기술학 등을 길러야 학술을 발달시킬 수 있고, 학술이 발달해야 민족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지혜가 가능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가 생각한 교육은 단지 인간을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인간을 만들면서 사회를 재형성하는 것으로서, YMCA 회원뿐만 아니라 1910년부터 담배공장 직공과 상점 사환들을 대상으로 노동야학을 시작하는 등 사회교육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유관순열사...이화학당(梨花學堂) 재학 당시 3·1운동이 일어나자 아오내[竝川] 장터 시위를 주동하고 수감된 뒤에도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죽었다. 본관은 고흥(高興). 아버지는 중권(重權)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1916년 기독교감리교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5일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뒤 총독부 임시휴교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당하자 3월 8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고향에서는 이종성(李鍾成)이 주동이 되어 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구금당해 실행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3월 9일 밤 예배가 끝난 뒤 조인원(趙仁元)·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언니와 함께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여 즉석에서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오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안성·목천·연기·청주·진천 등의 마을 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기 위한 연락원으로 선출되어 20일 동안 수백 리를 왕복하며 시위운동에 참여할 것을 설득했다.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의 선도로 시위가 시작되자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시위 도중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주동자로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했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자 재판장에게 자신의 투쟁이 정당함을 역설하고 의자를 집어던져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인해 몸이 상했으나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에도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때문에 더욱 혹독한 형벌을 당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1920년 17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8·15해방 후 충청남도와 천안군의 협력으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현순...일명 송원상(宋元相). 1902년 하와이로 건너가 기독교회에서 공부한 뒤 1911년 귀국, 선교활동을 했다. 1919년 3·1운동 때 상하이[上海]에 체류하던 중 이승훈(李昇薰)·함태영(咸台永)이 김지환(金智煥) 편으로 보내온 독립선언서 및 독립탄원서를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과 파리 강화회의에 보냈다. 3·1운동 직후 상하이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임시정부 조직의 움직임이 있자,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에 임시사무소를 개설하고 총무로 활동했다. 그해 4월 10일 손정도(孫貞道) 등 29명과 함께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의결하고 외무차장으로 선임되었다. 또 서울에서 개최된 13도대표국민대회에서는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8월 내무차장에 임명되었으며, 9월에는 만주·노령 지역에 임시정부 특사로 파견되었고, 김병조(金秉祚)·손정도·조상섭(趙尙燮) 등과 함께 대한기독교연합회 대표로서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국제연맹에 제출했다. 11월 내무차장직을 사임한 뒤 대한적십자회 상의원(常議員)에 선출되었고 임시정부 서울지역 조사원에 임명되어 국내 사정을 조사·보고했다. 1920년 4월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안현경(安顯景)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구미위원부 위원장 서리로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21년 서재필(徐載弼)·정한경(鄭翰景) 등과 임시정부의 외교대표 자격을 놓고 갈등을 일으켜 사임했다.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의 주비회(籌備會)가 발족되면서 임시정부가 내분에 빠지자, 상하이로 돌아와 안창호(安昌浩)·여운형(呂運亨) 등이 조직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 가입해 단결을 모색했으나 대립이 심해 탈퇴했다. 그뒤 하와이에 거주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지원을 맡아 활동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서재필 선생...서재필 /서재필서재필 /서재필의 묘, 국립현충원갑신정변 주역의 한 사람이며, 〈독립신문〉의 발간과 독립협회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본관은 대구. 호는 송재(松齋). 미국 귀화명은 필립 제이슨.
일본유학과 갑신정변아버지는 광언(光彦)이다. 어렸을 때 친척인 광하(光夏)에게 입양되었고 7세 때에 상경하여 양모(養母)의 동생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배웠다. 1882년(고종 19)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교서관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김옥균·서광범 등과 사귀었다. 1883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서 6개월간 일본어 교육을 받은 후 도야마 육군학교[戶山陸軍學校]에 입학했다. 약 7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7월 귀국해 고종의 승락을 얻어 사관(士官)을 양성하는 조련국(操鍊局) 사관장(士官長)이 되었으나,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1884년 군대의 통솔권을 장악하고 군대의 훈련을 위해 청나라 장교를 부르자 군에서 쫓겨났다. 1884년 갑신정변에 적극 참여하여 정변계획중에는 일본유학의 경험을 토대로 김옥균과 조선주둔 일본군 무라가미[村上] 중대장 간의 연락을 담당했으며, 정변진행중에 사관생도를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정권장악 후 구성된 정부에서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에 임명되었다.
망명시기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일본이 갑신정변에 깊이 참여했다는 외국의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이들을 냉대하자 1885년 4월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1886년 9월에는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베어 시에 있는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해 1889년 6월 졸업했다. 1889년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전신으로 당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대학인 코크란대학에 입학하여 1893년 졸업하고, 그해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이때는 미국 육군의학박물관에서 동양서적을 번역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시민권을 얻었다. 1894년 6월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한 후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했으나 백인들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으로 생활이 어려워 조선으로 돌아올 때는 주미조선공사관에서 여비를 마련해주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활동1894년 갑오개혁이 이루어지면서 갑신정변으로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망명중 미국에 들른 박영효의 권유를 받아들여 1895년 12월에 귀국했다. 귀국 후 개화파정부는 서재필을 외부협판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서재필은 보수파로부터의 만약의 방해에 대비하기 위해 권력의 내부에 들어가기보다는 권력의 외부에서 안전한 미국시민으로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이에 개화파정부와 근대화운동의 한 방편으로 신문의 발간을 합의하고 신문창간의 자금과 생활비를 지원받는 한편, 1896년 1월에 중추원고문에 임명되었다. 국내 온건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 그리고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1896년 4월 7일 창간되어 1899년 12월 4일까지 발간된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주시경의 노력에 힘입어 순한글로 간행되었으며 영문판 〈The Independent〉로도 발행되었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후에는 이상재·남궁억·이완용·김가진·안경수 등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초기에 고급관료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독립협회는 이후 토론회·구국상소·만민공동회 등을 통해 민중의 계몽과 근대화에 노력했다. 또 서재필은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가면서 1896년 11월 13명의 회원으로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했는데 1년 만에 회원이 약 200명으로 증가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던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침투에 한계를 느낀 러시아는 군사적·정치적 압력을 확대하면서 만주와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폈다. 이에 서재필은 러시아의 대한정책과 동아시아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쓰는 한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 고문단의 철수를 요구했다. 친러정권과의 대립으로 중추원고문직에서 해고되자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일제시대와 해방 후의 활동그후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1924년까지 인쇄업과 각종 장부를 취급하면서 사무실용 가구를 파는 필립제이슨상회를 경영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재미한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이 되었다. 이 대회의 결과에 따라 상해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산하에 한인통신부를 설치하고 영문기관지로 〈한국평론 Korea Review〉을 월간으로 발간했으며 〈어린이〉·〈순난자〉·〈대한정신〉 등 영문 소책자를 발행하여 배부했다. 이 책들은 미국에 일본의 만행을 소개하고 독립의지를 표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으며, 지방순회강연의 홍보책자로 활용되었다. 또한 이 통신부에 한인연합대회에 연사로 초빙되었던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의 자유독립 원조 및 한일기독교도의 선교자유 보장과, 한인이 당하는 일본인의 악형을 영구히 방지하며 미국의 일반 국민에게 한국의 진상을 전파할 것을 목적으로 한 한국친우동맹(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이 결성되어 구미위원회의 활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한편 1920, 1921년에는 3·1운동 기념식을 뉴욕에서 열기도 했다. 1921~22년 워싱턴에서 일본의 해군력 팽창을 억제하고 중국침략을 견제하려는 취지에서 미국이 주최한 태평양회의가 열리자 임시정부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일본대표 도쿠가와[德川家達]에게 제출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각국 대표와 세계여론에 호소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조선문제가 전혀 논의되지 않자 실망하여 경제난으로 한인통신부와 한국친우동맹에 관한 사업을 정지한다는 보고를 구미위원회에 보냈다.
이후 양탄자를 취급하는 이탄뉴상회의 사장으로 사업에 종사했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송진우·백관수·신흥우 등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의 잔학함을 규탄하고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1926년 펜실베이니아의과대학의 특별학생으로 등록했으며 그후 여러 병원의 고용의사로 종사하는 한편, 몇 편의 병리학 관계논문을 썼다. 1936년부터는 필라델피아에서 개업의로 생활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징병검사관을 했다고 한다. 그동안 국내의 잡지에 대개 민족성 개조와 실력 양성을 주장하는 몇 편의 글을 기고했으며 〈동아일보〉에 〈회고갑신정변〉과 〈체미오십년〉이라는 글을 영문으로 적어 보내어 번역·수록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정청 장관 하지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귀국했다. 1948년 국회에서 행해진 대통령선거에서 1표를 얻기도 했으나 외국국적을 가졌기 때문에 무효로 처리되었다. 194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백범 김구...본관은 안동. 아명(兒名)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구(龜)·구(九)로 개명했다. 자는 연상(蓮上), 호는 연하(蓮下)·백범(白凡). 아버지는 순영(淳永)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887년 11세 때 아버지가 집안에 세운 서당에서 한문과 한글을 익혔다. 15세에는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당시(唐詩)와 〈대학〉을 공부하고 과문(科文) 등을 익혔다. 17세때 우리나라 마지막 과거인 경시(慶試)에 응시하기 위해 해주에 갔으나, 매관매직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와 풍수지리서·관상학·병서 등을 읽으며 훈장을 지냈다.
동학교문활동과 의병활동1893년 동학의 평등주의에 감화되어 입도한 뒤 포덕(布德)에 힘을 기울여 접주(接主)가 되었다. 1894년 황해도 도유(都儒)로 뽑혀 보은집회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손병희(孫秉熙)를 만났으며,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라는 첩지를 받는 등 북접계열로 동학교문활동을 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친일정권은 일본군과 연합하여 농민군을 공격하는 한편, 동학교도 전체를 비적(匪賊)으로 몰아 탄압했다. 귀향길에 농민전쟁을 목도한 그는 그해 9월 삼남에서 올라온 경통(敬通:通文)에 호응하여 해주 죽산장(竹山場)에서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깃발 아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뒤 배신한 우군(友軍) 이동엽(李東燁) 부대의 습격을 받아 대패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학군 토벌에 나선 신천(信川) 진사 안태훈(安泰勳:安重根의 아버지)의 집에 은거했으며, 위정척사계열인 유인석(柳麟錫)과 동문인 고능선(高能善)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한 명분론적인 세계관에 몰입하였다.
1895년에는 남만주로 건너가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참패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살해되자 충격을 받고 1896년 2월 귀국하여 안악(安岳)으로 오는 도중 치하포(河浦)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 를 때려 죽인 뒤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었다. 1897년 사형이 확정되어 집행되기 직전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정지되었으나,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했다. 1898년 탈옥하여 삼남일대를 떠돌다 하동 쌍계사(雙溪寺)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그해 가을 공주 마곡사(麻谷寺)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서울의 새절을 거쳐 평양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방주가 되었으나 1899년 환속하였다.
애국계몽활동기1900년 강화도로 건너가 개화인사들과 교유하고 교육과 계몽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 사고의 틀을 벗어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해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 백남훈(白南薰)에게 인계하고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 1905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한 뒤, 대한문 앞에서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가두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 1906년 종산 서명의숙(西明義塾)의 교원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안악 양산학교(楊山學校)의 교원이 되었다. 1909년에는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을 겸했다. 1909년에는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를 조직하여 학무총감(學務總監)이 되어 도내 각지 강습소를 다니며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강연 주제는 "한인이 배일(排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것 등이었다. 이때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사건이 발생하자, 사건관련자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불기소로 풀려났다. 안창호(安昌浩)가 주도하는 비밀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이 되었으며, 1910년 양기탁(梁起鐸)이 소집한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국내에서는 무력 항쟁을 하고 만주에는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일제와 투쟁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1911년 안악(安岳) 부호들을 협박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빼앗아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 했다는 소위 안명근(安明根:안중근의 종제)사건의 관련자로 5월에 체포당했다(→ 안악사건). 김홍량(金鴻亮) 등 양산학교 관계자들도 서울에 압송되었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7년형을 선고받아 복역중 감형되어 1914년 7월 가출옥되었다. 그뒤 양산학교장인 김홍량의 동산평농장(東山坪農場) 농감(農監)이 되어 학교를 세우고 소작인을 교육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활동기상해로 망명한 그는 안창호의 추천으로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으며, 1923년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진로를 둘러싸고 제기된 창조론(創造論)과 개조론(改組論) 등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마련된 국민대표회가 분열로 치닫자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하였다. 1924년 국무총리대리를 거쳐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27년 약체화된 당시 임정의 처지와 구성원상 국무령제로는 내각 구성조차 어려워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 겸 주석이 되었다.
이러한 임정활동에서 그는 사회주의를 배척 반대했으며,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에 대하여는 별다른 비판을 하지 않았다. 1928년 사회주의계열을 제외한 민족주의계열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동녕·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했다. 1932년에는 청년들을 모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침략주의자들의 암살사건을 지휘했다.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의거가 대표적인 성공사례이다. 이 사건으로 일경의 탄압이 강화되자 상해를 탈출했다. 1933년 난징[南京] 에서 장제스[蔣介石]을 만나 광복군 무관양성소 설치와 항일전투방략을 협의했다. 1934년 국무위원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으나,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의정원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의 폭격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를 장쑤 성[江蘇省]의 전장[鎭江], 후난 성[湖南]의 창사[長沙]로 옮기는 한편, 임정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6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했다. 이는 공세를 강화해가는 일본과 최후 결전을 앞두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민족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고 결전태세를 갖추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1940년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정당조직으로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 등 3당을 한국독립당의 이름아래 통합하여 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1월 25일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의 이념적 통합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공포했다. 이것은 통합된 단일정당조직이 단순한 물리적인 결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념적인 융합차원으로까지 진전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체였다. 한국의 건국정신은 정치 경제·교육의 평등을 보장하는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있으며, 3·1독립선언에 입각하여 수립된 정부는 민족자력으로 이민족의 전제를 물리치고 5천년 군주정치의 낡은 껍질을 벗겨 새로운 민주제도를 확립하고 사회계급을 타파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이 건국강령은 사회주의적 이념을 도입한 좌우합작 타협의 소산물이었다. 이 좌우합작은 전민족적 차원에서 결성된 것이 아닌 김구와 김원봉(金元鳳)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좌우연합전선상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다. 또한 이는 이들을 주체로 민족해방을 쟁취한 뒤 추진할 새로운 국가건설의 가늠자로서 임시정부의 진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해 가을 충칭[重慶]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고 일제를 무력으로 몰아낼 계획을 추진했다. 1941년 12월 9일 5개항의 대일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임전태세에 돌입했다. 1942년 7월에는 중국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정식협정을 체결하여 연합군과 더불어 항일공동작전에 나설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되었으며,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朴贊翊)을 선출하고 결전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나온 학도병을 광복군에 편입시켰으며, 미육군전략처(OSS)와 제휴하여 국내침투를 위한 특수부대로 광복군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세우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전격적으로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참전하지 못한 채 8·15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정국기의 활동<script type=text/javascript>dic_flash(','http://file.dic.daum.net/dic100/brit/files/media/swf/k03g000101v1.swf','180','136','dcFlashBox57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