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물고, 비열한 거리의 네온 사인들이 제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는 7시. 대학가의 저녁 풍경은 번잡하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지겨운 강의를 듣느라 수고한 학생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학교 앞 술집을 향해 쏟아져 나온다. 일과가 끝난 저녁의 대학가 풍경은 어느 학교 앞이나 대부분 비슷하다. 독창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윤식은 건널목 앞에 서 있다. 하얀 바탕에 녹색 가로 줄무늬가 여러 번 놓인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이다. 그의 반듯한 검정 뿔 테 안경이 뻔한 풍경의 대학가와 닮아 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건널목에 나란히 서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인상을 찡그린다. 삼삼오오 뭉쳐 큰 소리로 떠드는 배낭 학우들이 시끄럽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자신은 결코 저들과 같지 않음에 감사한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고, 일제히 길을 건너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이 흰 선을 밟을 때 윤식은 검은 바닥을 밟으려고 애를 써본다. 그것이 구별법이라고 굳게 믿으며 미소 짓는다.
가미로 향하는 골목에 들어서자, 소음이 조금 감소한 느낌이다. 솔직히 윤식은 이 골목에 가미 말고는 뭐가 있는지 잘 모른다. 다른 가게들에는 관심이 없다. 과장을 보태자면, 이 동네에서 윤식의 관념 안에 들어와 있는 장소는 음식점 가미와 학교 앞 서점 밖에는 없을 것이다. 가미에 다가갈수록 그는 안도감과 더불어 공복감을 느낀다. 참을성 없는 자신의 육체를 나무라며 가미의 안으로 들어선다. 저녁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 그것이 가미의 장점이다. 안락한 식사를 할 수 있어서 좋다. 언제나 그랬듯, 구석 자리에 앉아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인 철판낙지덮밥을 주문한다. 철판에 올라오는 음식은 쉽게 식지 않는 뜨거운 열기 때문에 수분이 금방 닳아버리는 것이 흠이지만, 이 집의 낙지덮밥은 주인 아주머니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다 먹을 때까지 촉촉하다. 과다한 수분으로 질퍽거리지도, 중간에 다 말라버리지도 않는 오묘한 조절이 이 집의 노하우이다. 실로 분식집 치고는 훌륭한 솜씨기에, 그는 인터뷰하러 온 사람들이 이 집의 음식을 맛보지 못한 게 안타깝다고 느낀다. 그러나 안타까움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지글거리는 소리를 뽐내며 철판에 낙지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는 숟가락으로 낙지볶음과 그 밑에 있는 하얀 밥을 한꺼번에 떠서 입에 넣는다. 절대 섞지는 않는다. 비빔밥은 비벼야 하고 덮밥은 있는 그대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들은 다 하나씩 들고 다닐 법한 핸드폰 조차 그에게는 없다. 사실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 그는 친구도 거의 없는데다가 애인도 없다. 가끔 부모님이나 출판사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집 전화로도 충분하다. 자동 응답기가 알아서 용건을 맡아준다. 녹음된 목소리를 듣고, 추후에 연락하면 그만이다. 혼자 생활하는 것은 별 다른 어려움이 없다. 되려 삶의 본질을 모르는 경박한 타인들과 말을 섞는 것이야 말로 곤욕이다. 종종 안타까움에 핏대를 세우고 그들에게 설교를 하지만,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은 드물다. 책이 잘 팔리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역시 여러모로 혼자가 편하다. 그렇지만 이런 윤식도 아주 가끔씩 홀로 밥을 먹을 때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낙지덮밥을 반쯤 먹었을 때, 윤식은 고개를 들고 주변을 쳐다보기 시작한다. 커플끼리 온 사람들도 있고, 친구들과 여럿이 온 테이블도 있다. ‘혼자 온 사람은 나뿐이로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창가에 홀로 앉아있는 진주를 발견하게 된다! 알탕을 먹고 있는데, 모습이 범상치 않다. ‘어쩜 저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밥을 먹고 있을까, 저러다가는 피가 얼굴로 쏠려 테이블 색깔과 비슷해지고 말겠어.’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다! 가끔 고개를 들어 보이는 얼굴은 너무나 깨끗하고 꾸밈없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친숙한 인상이 그의 마음속 벽을 한꺼번에 부순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얼굴로 쏠렸던 피가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가지만, 미쳐 다 가시지 않은 채 볼에 남아있는 선홍 빛 둥근 원이 마치 그의 심장과도 같음을 느낀다. 미련하게 쿵쾅쿵쾅 뛰어대는 심장은 분명 그의 육체이다. 하지만 그는 망각하고 있다. 그런 것 따윈 잊은 지 오래다. 그는 그저 자기 눈 앞에 보이는 그녀가 무척 궁금할 뿐이다. 다가가고 싶다! 만지고 싶다! 관념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실제로 손끝에서 느껴지는 촉감을 경험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는 긴 시간 동안, 절반이나 남은 낙지덮밥은 이미 그 촉촉함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진주만 바라보던 그는, 기어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간다.
윤식은 다가가는 내내 마음으로 침착, 침착을 외친다. 그녀가 당황하지 않게 최대한 점잖게 이야기를 하리라 마음 먹는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지. 그녀에게 향하는 몇 걸음 내내, 머리는 최고의 처리속도를 뽐낸다. 용기를 내서 그는 진주에게 말을 건넨다.
“저어…”
“네?”
윤식이 기척을 보이자, 진주가 고개를 들고 윤식을 바라본다.
“저 쪽에서 보고 있자니, 뭔가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이죠. 아, 이런 거 조금 불편하긴 한데, 괜찮으시면 무언가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편하게 말씀해보세요.”
진주의 미소에 윤식의 마음이 녹는다. 그녀는 무슨 말이든 친절히 들어줄 것 같다. 갑자기 자신감이 샘솟기 시작한다. 진주는 온화한 얼굴로 단답형 대답을 한다.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요.”
“아, 그러셨어요.”(웃음)
“어디서였을까요……혹시 아침 운동 같은 거 하시나요? 그 때 뵌 것 같기도 하고……”
“낙산 공원 벤치가 좋아요.”
“아, 거기서 봤었나 보네요. 보통 몇 시에 운동 하시나요?”
“아침 8시 30분이요.”
“네……그럼 저,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일 아침 운동할 때 만날 수 있을까요. 사실, 아까 볼 때부터 줄곧 그러고 싶었거든요.”
“그래요. 원하신다면요.”(지체 없이 대답한다.)
“아, 감사합니다. 믿기질 않는군요.”
“믿으셔도 됩니다.”
“솔직히 제가 운동은 젬병이라, 걱정이 좀 되긴 하네요. 우스워도 좀 이해해주세요.”
“네, 괜찮아요.” (웃음)
“그럼 내일 뵙죠. 전 이만 들어가볼게요. 일찍 자고 내일 만나야 하니까요.”
“대신 부탁이 있어요.”
“아, 그렇군요. 말씀해보세요, 뭐든 들어드릴 테니까. 부탁이 뭔가요?”
“네, 예쁘게 단장하고 나와주세요.”
“음, 생각 외로 어렵지만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죠.”
가미를 나선 윤식은 뛸 듯이 기쁜 맘이다. 참새가 총총거리듯, 그는 앞으로라기 보단 위로 걷는다. 마치 영화의 점프컷처럼, 몇 번의 비연속적 도약을 하면 이 골목을 벗어날 듯싶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여전히 시끄러운 저녁 대학가의 소음이 이제는 알레그로 콘 브리오로 연주되는 소나타처럼 느껴진다. 그 리듬에 맞춰 그는 춤을 추고 있다. 흥겹게 몸으로 시를 쓰는 그에게 갑자기 주변의 광경이 낯설게 느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던 안경점, 옷 가게, 편의점, 술집, 당구장, PC방, 신발 가게, 아이스크림 전문점, 은행 CD기 코너, 비디오방, 화장품 가게, 스티커 사진기, 가판점, 노래방, 실내 야구연습장, 패스트푸드점, 꽃 가게, 여행사, 레스토랑, 오락실, 만화방 등이 마치 처음 생겨난 듯 그의 눈 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는 피곤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은행 CD기 코너로 들어선다. 생전 처음 자신의 책으로 번 돈에 손을 대기로 한다. 옷과 신발을 사고, 콘택트렌즈도 새로 맞추어야겠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면서 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이내 미소를 짓는다. 맞은 편 거울을 통해 자기를 비춰보며, 평소 하지도 않던 운동을 핑계로 그녀에게 허락을 얻어낸, 뛰어난 거짓말을 한 자신의 기지에 아찔할 만큼 감사하다. 윤식은 운동도 하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 교활함과도 거리가 멀고 대담함은 그 단어 뜻 조차 모를 정도다. 그런데 어떻게……말 그대로 점프컷이다. 비연속적인 삶의 도약이다. 왠지 비밀번호를 제대로 입력하지 않아도 돈이 마구 쏟아져나올 것만 같다. 50개의 지폐를 손에 쥐고 윤식은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간다.
10
다음날, 오전 6시.
핸드폰의 알람이 울림과 동시에 도연이 눈을 번쩍 뜬다. 몸을 반사적으로 일으킨 그는 황급히 핸드폰을 집어 들고 알람을 끈다. 불과 수 초 만에 이루어진 이 모든 동작이 어찌나 날렵했던지, 날아가는 벌의 날개라도 잡을 태세이다. 화장실로 들어간 도연은 칫솔에 치약을 듬뿍 묻힌다. 오늘은 이빨도 닦고 머리도 감는, 말하자면 기념일이다. 거울을 통해 볼에 조그만 뾰루지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도 자세히 봐야 발견할 수 있는 정도의 흠은 남들은 모르는 법이다. 도연은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혹이나 진주가 발견하게 될 까봐 마음이 초조해진다. 화장실을 나온 그는 잘 때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버린다. ‘오늘은 이동국도 버리고 모자도 버리자! 가장 좋은 것을 입고 나가자.’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화병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어제 저녁에 꽃집에 들러 사온 꽃다발이 꽂혀있다. 다행히 꽃잎 하나 시들지 않은 채, 어제 그대로의 자태를 유지해주고 있다. 고맙다.
같은 시각, 김윤식의 집.
윤식은 느긋하게 얼굴에 스킨을 바르고 있다. 어제의 노곤한 쇼핑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 여유롭게 일어나 차분한 맘으로 화장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킨 다음에 에센스, 로션, 크림, 마무리로 메이크업 베이스가 첨가된 썬크림을 바르면 되는 것이다. 아니, 되는 것이라고 한다. 어제 화장품 가게에 들러 몽땅 구입하면서 들은 친절한 점원의 설명에 의하면 그렇다. 다음은 렌즈 차례. 어젯밤에 수 차례 넣었다 뺐다 연습했지만, 역시 처음이라 익숙하지가 않다. 벽에 걸려있는 옷을 본다. 그는 오늘 흰 색 와이셔츠에 감색 넥타이를 헐렁하게 맬 것이다. 그 위로 진분홍의 가디건을 걸칠 것이며, 고급스럽게 워싱 처리가 된 그레이진을 입는다. 거기에 가디건 색과 동일한 캔버스화를 신는다. 머리는 왁스로 적당히 비벼대고 ‘운동은 핑계였어요.’의 멘트도 준비해본다. 어서 갈 것이다. 마음은 분주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차분하게 렌즈를 맞춰본다.
오전 7시.
도연이 집을 나선다. 카고 바지에 하늘색 티셔츠 차림으로 한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있다. 낙산 공원을 가기 위한 몇 가지 방법 중 지하철을 택한다. 4호선을 타고 혜화 역에 내려서 걸어 올라갈 작정이다. 집 앞 도로는 한적하다. 그렇지만 지하철을 타러 큰 도로에 나가면 여러 사람들이 그를 쳐다볼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꽃다발을 든 채 생글하며 만개한 그의 표정을 볼 것이다. 이런 상상에 벌써 흐뭇하다. 약간 벌어진 입으로 행복의 향기를 뿜으며 집 앞 골목을 도는 순간,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윤식과 부딪혀 넘어진다. 다행히 옷에 별로 묻은 건 없고, 꽃다발도 무사하다. 툭툭 털고 일어나며 상대를 살펴보니, 그도 역시 넘어졌다가 일어난다. 그 행동을 빤히 쳐다보던 도연은 얼굴에 낯익은 미소를 띤 채 윤식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아, 이제야 만나게 되네요.”
“그러게요. 겨우 이제서야 처음 만나게 되는 거로군요.”
“내가 당신을 다치게 하진 않았나요?”
“네, 그렇지만 이젠 괜찮은 걸요. 오히려 내가 당신을 힘들게 하진 않았나 싶어서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맞아요, 왜 이렇게 세게 부딪히지 않으면 모르는 걸까요. 부끄럽게 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서로 알게 된 것이 어딥니까. 그나마 다행인 거죠.”
“아무튼 새삼스럽게 하는 말이지만, 그 동안 어디 계셨던가요, 정말 반갑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반갑습니다.”
도연이 내미는 손에 윤식이 화답하며 악수를 한다. 마치 다시는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손을 꼭 잡은 채로.
오전 8시 20분, 낙산 공원.
아침이지만 봄의 특유한 싱그러운 냄새가 벌써부터 공원을 감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아침이다. 벚나무 아래 벤치에 진주가 앉아 있다. 그녀는 가슴이 깊게 패인 흰 색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다. 원피스 안으로 보이는 그녀의 새하얀 피부는 평면적으로나 입체적으로나 나무랄 데가 없이 아름답고 고혹적이다. 어제의 진주가 부드러우면서도 은근한 누룽지탕 맛이었다면, 오늘의 진주는 극명한 불닭 맛이다. 어디든 불닭 집에 가면 이 두 메뉴를 모두 맛볼 수 있다. 벚나무와 어우러진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조화롭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큼 그녀를 발견하거나 쳐다보는 사람은 없다. 주변이야 어쩌든, 그녀는 느긋하게 앉아 내려다보이는 아침의 서울 풍경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얼마 후, 공원의 입구로 한 남자가 올라온다. 그는 윤식의 옷을 입고 도연의 꽃다발을 들고 있다. 그는 두리번거리다 벤치에 앉은 진주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든다. 그녀도 그를 발견하고 가볍게 미소 짓는다.
맑은 봄날이다. 햇살은 푸르고,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공기의 냄새는 싱그럽다. 진주를 보고 점잖은 걸음으로 다가오는 그가, 그제서야 멋지게 보이기 시작한다.
[창작 소설] - 음식점 가미 (5) 완결!
드디어 완결편을 올려봅니다. 처음 썼던 [숲의 내부]에 비해선 전체적으로 가볍고 재밌는 느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섣부른 재주지만 역시 소설을 쓴다는 건 너무 재밌는 일이네요.
지금 저는 장편 소설을 시작했고, [밧줄에 매달리기]라는 단편도 쓰고 있습니다. 장편은 알맞지 않지만, 단편은 완성하는대로 또 올려보겠습니다. 완결편 재밌게 읽어주세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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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해가 저물고, 비열한 거리의 네온 사인들이 제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는 7시. 대학가의 저녁 풍경은 번잡하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지겨운 강의를 듣느라 수고한 학생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학교 앞 술집을 향해 쏟아져 나온다. 일과가 끝난 저녁의 대학가 풍경은 어느 학교 앞이나 대부분 비슷하다. 독창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윤식은 건널목 앞에 서 있다. 하얀 바탕에 녹색 가로 줄무늬가 여러 번 놓인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이다. 그의 반듯한 검정 뿔 테 안경이 뻔한 풍경의 대학가와 닮아 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건널목에 나란히 서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인상을 찡그린다. 삼삼오오 뭉쳐 큰 소리로 떠드는 배낭 학우들이 시끄럽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자신은 결코 저들과 같지 않음에 감사한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고, 일제히 길을 건너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이 흰 선을 밟을 때 윤식은 검은 바닥을 밟으려고 애를 써본다. 그것이 구별법이라고 굳게 믿으며 미소 짓는다.
가미로 향하는 골목에 들어서자, 소음이 조금 감소한 느낌이다. 솔직히 윤식은 이 골목에 가미 말고는 뭐가 있는지 잘 모른다. 다른 가게들에는 관심이 없다. 과장을 보태자면, 이 동네에서 윤식의 관념 안에 들어와 있는 장소는 음식점 가미와 학교 앞 서점 밖에는 없을 것이다. 가미에 다가갈수록 그는 안도감과 더불어 공복감을 느낀다. 참을성 없는 자신의 육체를 나무라며 가미의 안으로 들어선다. 저녁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 그것이 가미의 장점이다. 안락한 식사를 할 수 있어서 좋다. 언제나 그랬듯, 구석 자리에 앉아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인 철판낙지덮밥을 주문한다. 철판에 올라오는 음식은 쉽게 식지 않는 뜨거운 열기 때문에 수분이 금방 닳아버리는 것이 흠이지만, 이 집의 낙지덮밥은 주인 아주머니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다 먹을 때까지 촉촉하다. 과다한 수분으로 질퍽거리지도, 중간에 다 말라버리지도 않는 오묘한 조절이 이 집의 노하우이다. 실로 분식집 치고는 훌륭한 솜씨기에, 그는 인터뷰하러 온 사람들이 이 집의 음식을 맛보지 못한 게 안타깝다고 느낀다. 그러나 안타까움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지글거리는 소리를 뽐내며 철판에 낙지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는 숟가락으로 낙지볶음과 그 밑에 있는 하얀 밥을 한꺼번에 떠서 입에 넣는다. 절대 섞지는 않는다. 비빔밥은 비벼야 하고 덮밥은 있는 그대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들은 다 하나씩 들고 다닐 법한 핸드폰 조차 그에게는 없다. 사실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 그는 친구도 거의 없는데다가 애인도 없다. 가끔 부모님이나 출판사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집 전화로도 충분하다. 자동 응답기가 알아서 용건을 맡아준다. 녹음된 목소리를 듣고, 추후에 연락하면 그만이다. 혼자 생활하는 것은 별 다른 어려움이 없다. 되려 삶의 본질을 모르는 경박한 타인들과 말을 섞는 것이야 말로 곤욕이다. 종종 안타까움에 핏대를 세우고 그들에게 설교를 하지만,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은 드물다. 책이 잘 팔리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역시 여러모로 혼자가 편하다. 그렇지만 이런 윤식도 아주 가끔씩 홀로 밥을 먹을 때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낙지덮밥을 반쯤 먹었을 때, 윤식은 고개를 들고 주변을 쳐다보기 시작한다. 커플끼리 온 사람들도 있고, 친구들과 여럿이 온 테이블도 있다. ‘혼자 온 사람은 나뿐이로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창가에 홀로 앉아있는 진주를 발견하게 된다! 알탕을 먹고 있는데, 모습이 범상치 않다. ‘어쩜 저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밥을 먹고 있을까, 저러다가는 피가 얼굴로 쏠려 테이블 색깔과 비슷해지고 말겠어.’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다! 가끔 고개를 들어 보이는 얼굴은 너무나 깨끗하고 꾸밈없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친숙한 인상이 그의 마음속 벽을 한꺼번에 부순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얼굴로 쏠렸던 피가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가지만, 미쳐 다 가시지 않은 채 볼에 남아있는 선홍 빛 둥근 원이 마치 그의 심장과도 같음을 느낀다. 미련하게 쿵쾅쿵쾅 뛰어대는 심장은 분명 그의 육체이다. 하지만 그는 망각하고 있다. 그런 것 따윈 잊은 지 오래다. 그는 그저 자기 눈 앞에 보이는 그녀가 무척 궁금할 뿐이다. 다가가고 싶다! 만지고 싶다! 관념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실제로 손끝에서 느껴지는 촉감을 경험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는 긴 시간 동안, 절반이나 남은 낙지덮밥은 이미 그 촉촉함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진주만 바라보던 그는, 기어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간다.
윤식은 다가가는 내내 마음으로 침착, 침착을 외친다. 그녀가 당황하지 않게 최대한 점잖게 이야기를 하리라 마음 먹는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지. 그녀에게 향하는 몇 걸음 내내, 머리는 최고의 처리속도를 뽐낸다. 용기를 내서 그는 진주에게 말을 건넨다.
“저어…”
“네?”
윤식이 기척을 보이자, 진주가 고개를 들고 윤식을 바라본다.
“저 쪽에서 보고 있자니, 뭔가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이죠. 아, 이런 거 조금 불편하긴 한데, 괜찮으시면 무언가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편하게 말씀해보세요.”
진주의 미소에 윤식의 마음이 녹는다. 그녀는 무슨 말이든 친절히 들어줄 것 같다. 갑자기 자신감이 샘솟기 시작한다. 진주는 온화한 얼굴로 단답형 대답을 한다.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요.”
“아, 그러셨어요.”(웃음)
“어디서였을까요……혹시 아침 운동 같은 거 하시나요? 그 때 뵌 것 같기도 하고……”
“낙산 공원 벤치가 좋아요.”
“아, 거기서 봤었나 보네요. 보통 몇 시에 운동 하시나요?”
“아침 8시 30분이요.”
“네……그럼 저,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일 아침 운동할 때 만날 수 있을까요. 사실, 아까 볼 때부터 줄곧 그러고 싶었거든요.”
“그래요. 원하신다면요.”(지체 없이 대답한다.)
“아, 감사합니다. 믿기질 않는군요.”
“믿으셔도 됩니다.”
“솔직히 제가 운동은 젬병이라, 걱정이 좀 되긴 하네요. 우스워도 좀 이해해주세요.”
“네, 괜찮아요.” (웃음)
“그럼 내일 뵙죠. 전 이만 들어가볼게요. 일찍 자고 내일 만나야 하니까요.”
“대신 부탁이 있어요.”
“아, 그렇군요. 말씀해보세요, 뭐든 들어드릴 테니까. 부탁이 뭔가요?”
“네, 예쁘게 단장하고 나와주세요.”
“음, 생각 외로 어렵지만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죠.”
가미를 나선 윤식은 뛸 듯이 기쁜 맘이다. 참새가 총총거리듯, 그는 앞으로라기 보단 위로 걷는다. 마치 영화의 점프컷처럼, 몇 번의 비연속적 도약을 하면 이 골목을 벗어날 듯싶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여전히 시끄러운 저녁 대학가의 소음이 이제는 알레그로 콘 브리오로 연주되는 소나타처럼 느껴진다. 그 리듬에 맞춰 그는 춤을 추고 있다. 흥겹게 몸으로 시를 쓰는 그에게 갑자기 주변의 광경이 낯설게 느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던 안경점, 옷 가게, 편의점, 술집, 당구장, PC방, 신발 가게, 아이스크림 전문점, 은행 CD기 코너, 비디오방, 화장품 가게, 스티커 사진기, 가판점, 노래방, 실내 야구연습장, 패스트푸드점, 꽃 가게, 여행사, 레스토랑, 오락실, 만화방 등이 마치 처음 생겨난 듯 그의 눈 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는 피곤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은행 CD기 코너로 들어선다. 생전 처음 자신의 책으로 번 돈에 손을 대기로 한다. 옷과 신발을 사고, 콘택트렌즈도 새로 맞추어야겠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면서 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이내 미소를 짓는다. 맞은 편 거울을 통해 자기를 비춰보며, 평소 하지도 않던 운동을 핑계로 그녀에게 허락을 얻어낸, 뛰어난 거짓말을 한 자신의 기지에 아찔할 만큼 감사하다. 윤식은 운동도 하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 교활함과도 거리가 멀고 대담함은 그 단어 뜻 조차 모를 정도다. 그런데 어떻게……말 그대로 점프컷이다. 비연속적인 삶의 도약이다. 왠지 비밀번호를 제대로 입력하지 않아도 돈이 마구 쏟아져나올 것만 같다. 50개의 지폐를 손에 쥐고 윤식은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간다.
10
다음날, 오전 6시.
핸드폰의 알람이 울림과 동시에 도연이 눈을 번쩍 뜬다. 몸을 반사적으로 일으킨 그는 황급히 핸드폰을 집어 들고 알람을 끈다. 불과 수 초 만에 이루어진 이 모든 동작이 어찌나 날렵했던지, 날아가는 벌의 날개라도 잡을 태세이다. 화장실로 들어간 도연은 칫솔에 치약을 듬뿍 묻힌다. 오늘은 이빨도 닦고 머리도 감는, 말하자면 기념일이다. 거울을 통해 볼에 조그만 뾰루지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도 자세히 봐야 발견할 수 있는 정도의 흠은 남들은 모르는 법이다. 도연은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혹이나 진주가 발견하게 될 까봐 마음이 초조해진다. 화장실을 나온 그는 잘 때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버린다. ‘오늘은 이동국도 버리고 모자도 버리자! 가장 좋은 것을 입고 나가자.’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화병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어제 저녁에 꽃집에 들러 사온 꽃다발이 꽂혀있다. 다행히 꽃잎 하나 시들지 않은 채, 어제 그대로의 자태를 유지해주고 있다. 고맙다.
같은 시각, 김윤식의 집.
윤식은 느긋하게 얼굴에 스킨을 바르고 있다. 어제의 노곤한 쇼핑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 여유롭게 일어나 차분한 맘으로 화장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킨 다음에 에센스, 로션, 크림, 마무리로 메이크업 베이스가 첨가된 썬크림을 바르면 되는 것이다. 아니, 되는 것이라고 한다. 어제 화장품 가게에 들러 몽땅 구입하면서 들은 친절한 점원의 설명에 의하면 그렇다. 다음은 렌즈 차례. 어젯밤에 수 차례 넣었다 뺐다 연습했지만, 역시 처음이라 익숙하지가 않다. 벽에 걸려있는 옷을 본다. 그는 오늘 흰 색 와이셔츠에 감색 넥타이를 헐렁하게 맬 것이다. 그 위로 진분홍의 가디건을 걸칠 것이며, 고급스럽게 워싱 처리가 된 그레이진을 입는다. 거기에 가디건 색과 동일한 캔버스화를 신는다. 머리는 왁스로 적당히 비벼대고 ‘운동은 핑계였어요.’의 멘트도 준비해본다. 어서 갈 것이다. 마음은 분주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차분하게 렌즈를 맞춰본다.
오전 7시.
도연이 집을 나선다. 카고 바지에 하늘색 티셔츠 차림으로 한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있다. 낙산 공원을 가기 위한 몇 가지 방법 중 지하철을 택한다. 4호선을 타고 혜화 역에 내려서 걸어 올라갈 작정이다. 집 앞 도로는 한적하다. 그렇지만 지하철을 타러 큰 도로에 나가면 여러 사람들이 그를 쳐다볼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꽃다발을 든 채 생글하며 만개한 그의 표정을 볼 것이다. 이런 상상에 벌써 흐뭇하다. 약간 벌어진 입으로 행복의 향기를 뿜으며 집 앞 골목을 도는 순간,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윤식과 부딪혀 넘어진다. 다행히 옷에 별로 묻은 건 없고, 꽃다발도 무사하다. 툭툭 털고 일어나며 상대를 살펴보니, 그도 역시 넘어졌다가 일어난다. 그 행동을 빤히 쳐다보던 도연은 얼굴에 낯익은 미소를 띤 채 윤식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아, 이제야 만나게 되네요.”
“그러게요. 겨우 이제서야 처음 만나게 되는 거로군요.”
“내가 당신을 다치게 하진 않았나요?”
“네, 그렇지만 이젠 괜찮은 걸요. 오히려 내가 당신을 힘들게 하진 않았나 싶어서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맞아요, 왜 이렇게 세게 부딪히지 않으면 모르는 걸까요. 부끄럽게 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서로 알게 된 것이 어딥니까. 그나마 다행인 거죠.”
“아무튼 새삼스럽게 하는 말이지만, 그 동안 어디 계셨던가요, 정말 반갑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반갑습니다.”
도연이 내미는 손에 윤식이 화답하며 악수를 한다. 마치 다시는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손을 꼭 잡은 채로.
오전 8시 20분, 낙산 공원.
아침이지만 봄의 특유한 싱그러운 냄새가 벌써부터 공원을 감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아침이다. 벚나무 아래 벤치에 진주가 앉아 있다. 그녀는 가슴이 깊게 패인 흰 색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다. 원피스 안으로 보이는 그녀의 새하얀 피부는 평면적으로나 입체적으로나 나무랄 데가 없이 아름답고 고혹적이다. 어제의 진주가 부드러우면서도 은근한 누룽지탕 맛이었다면, 오늘의 진주는 극명한 불닭 맛이다. 어디든 불닭 집에 가면 이 두 메뉴를 모두 맛볼 수 있다. 벚나무와 어우러진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조화롭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큼 그녀를 발견하거나 쳐다보는 사람은 없다. 주변이야 어쩌든, 그녀는 느긋하게 앉아 내려다보이는 아침의 서울 풍경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얼마 후, 공원의 입구로 한 남자가 올라온다. 그는 윤식의 옷을 입고 도연의 꽃다발을 들고 있다. 그는 두리번거리다 벤치에 앉은 진주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든다. 그녀도 그를 발견하고 가볍게 미소 짓는다.
맑은 봄날이다. 햇살은 푸르고,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공기의 냄새는 싱그럽다. 진주를 보고 점잖은 걸음으로 다가오는 그가, 그제서야 멋지게 보이기 시작한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