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22대 임금 정조 이산입니다!

오주경200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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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22대 임금 정조 이산입니다!

조선 제 22대 왕 정조는 조선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왕입니다.

 

정조의 업적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영조의 정치 핵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영조는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합니다.

탕평책은 말 그대로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는 겁니다.

영조는 남인, 소론, 노론 어느 한 파에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합니다.

 

두 번째로 균역법을 실시했습니다.

이 균역법은 군대를 안가기 위해서 내야하는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여 주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습니다.

 

세 번째로 형벌을 약화시켰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조선시대의 형벌은 능지처참, 태형, 장형 등의

잔인하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형벌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영조는 죄수들도 인간답게 대해줘야 한다면서 형벌을

대폭 간소화 합니다.  그리고 가벼운 죄를 저지른 죄수들은 심문할

것도 없이 사령을 내려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말년에 엄청난 실수를 저지릅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인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인 것입니다.

이는 노론의 간계였지만 영조는 이에 말려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조선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왕을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세자의 어린

아들인 이산(훗날의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마음을 다 잡고

노론의 간계를 물리치고 오랫동안 장수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산은

왕위에 오르고 개혁군주 정조의 정치가 시작됩니다.

 

정조는 즉위한 후 규장각의 크기를 대폭 늘리고 세종 때의 집현전을

모방하여 그곳에 학자 등을 많이 배속시켜 학문을 연구하는 국립

기관으로 양성하고 경연도 자주 열었습니다.

 

영조 때에 시행되던 탕평책도 이어서 계속 시행합니다.

남인의 이름난 학자인 정약용등을 등용함으로써 실학자들을 양성했으며 수원 화성을 축조한 왕도 정조였습니다.

수원 화성은 정약용이 왕명을 받아 거중기를 개발하여 쌓은 조선

최초의 과학적인 성이며 화포를 이용하여 방어하는 근대적인

성입니다.   왕의 친위대인 장용영을 설치하고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이 장용영은 자신의 아버지인 장헌세자가 당쟁으로 희생되었기에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여 설치했으며 조선의 군비가 크게 증강되었기도 합니다.

 

정조는 수원 화성으로 행차하거나 자신의 아버지인 장헌세자 릉에

인사를 갈때 이 장용영을 근위대로 삼아 이끌고 갔는데 그 규모는

한번에 3~4천 정도가 된다고 하니 어마어마합니다.

 

하지만 정조는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이름 모를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맙니다.

 

정조가 양성한 실학자들의 기반이 확고히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조가 눈을 감으니 결국 정계는 시파와 벽파로 갈라져 혼란이 일고

결국 정조의 개혁정치의 기반이었던 시파(실학자)가 패배함으로써

정조의 개혁정치는 실패합니다.

 

일찍 세상을 뜸으로써 정조는 조선 역사에서 안타깝고 아까운

왕으로 꼽히는 왕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