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여자를 윤간 한 뒤 음부에 칼을 찔러 넣은 모습.. 사람을 죽인 뒤 목을 자르고 그 입에 담배를 물려놓는 장난을 하는 일본인들 수많은 사람들의 두개골 목을 베어 전시하는 악취미적 장난 사람을 죽인 뒤 목을 자르고 웃고있는 일본 군인 보란듯이 목을 전시해놓는 일본 군인들 여성을 윤간하고 폭행하여 내장이 다 터져나온 모습 수많은 시체들 생매장 준비중인 모습 나무장대에 목을 걸어놓는 악질적인 짓 일본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의 처참한 시체 수많은 어린아이들의 시체 왜 죄없는 어린아이들까지 이렇게.. 여성을 윤간한 뒤 폭행해 내장이 다 튀어나온 모습과 성희롱을 하는 모습 정신대 할머니들의 이야기 어릴 때부터 남의 집 일을 해주며 나는 1925년 5월 24일(음력) 경상도 감포 정골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우리집은 매우 가난하였고 농토가 없어 아버지가 품팔이로 생활을 연명했다. 어머니는 생선을 가공처리하는 일본인 공장에서 일했는데 일본인에게 자주 학대 당하다가 내가 일곱살이 되던 해에 죽었다. 오빠는 아버지와 함게 지주집의 농사를 돕거나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임시공으로 일을 했고 나는 나보다 어린 동생을 돌보며 집안일을 주로 하였다. 내가 아홉살 때, 아버지의 병 때문에 지주한테 빌려쓴 약값을 갚기위해 그 지주집 하인으로 일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온갖 일을 다 했다. 어느 때는 지주가 나에게 건너편에 있는 일본인 공장에 몰래 철조망을 뚫고 들어가 쌀을 훔쳐오도록 했다. 이것은 정말 위험을 무릅쓰고 해야되는 일인데 지주가 시키니 반드시 할 수 밖에 없었다. 한번은 도둑질하다가 들켜서 급히 도망나오다가 철조망에 찍혀서 피를 철철 흘리기도 했다. 남의 집에서 일을 해주었을 때 부채에 그려진 태극기를 보았기 때문에 우리 국기를 기억한다. 어느날, 밖에서 나를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화장실 갔다온다는 핑계로 나와보니 아버지와 형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그 길로 우리들은 감포를 떠났다. 우리는 포항, 울산을 거쳐 밥을 구걸하기도 하고 품팔이도 하면서 부산으로 도망갔다. 이런 어린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학교 문턱에도 가 볼 기회가 없었다. 다른 집 아이들이 즐겁게 학교 다니는 것을 보고 나는 가슴아팠던 기억이 난다. 내가 열두살쯤 되었을 때는 우리 식구들이 모두 부산에 있게 되었지만, 각자 흩어져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했다. 어느 곳에서 일을 하나 힘들었고 희망은 없었다. 일본군인에게 붙잡혀 그러던 어느날 내가 일해주던 주인집 아들이 나를 강간하려 해서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반항하여 겨우 빠져나왔다. 정신없이 빠져나와 혼자 몸으로 부산 바닷가에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연락선은 떠나가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내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몇명의 일본군인들이 나타났다. 나는 반항하지 못하고 입과 눈을 틀어막힌 채로 군용트럭에 실렸다. 그 때 나는 열네살(1938년)이었다. 바로 부산역으로 와서 군용열차에 실렸다. 기차 안에는 대부분이 군인이었고 우리칸에는 많은 조선여자들이 있었다. 화장실 가는 것까지도 군인들이 따라다니면서 감시를 했으며 기차 안에서 밖을 내다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기차 안에서 조선여자들끼리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채 스스로의 처지를 한탄하며 며칠을 보냈다. 식사는 하루에 3번 주었는데 간단한 주먹밥이었다. 마침내 기차는 어느 곳에선가 멈추었고, 내릴 때 그곳 사람들이 만주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내가 지금 도착한 곳이 만주지역 하얼빈인것을 알았다. 당시 함께 온 여자들은 열네살부터 스물한살 사이로 그 중에서 나는 어린편에 속하였다. 많은 여자들이 대구, 경주, 부산지역에서 잡혀왔다. 부대를 따라다니며 한 위안부 생활 내가 있던 하얼빈 위안소는 군대 내에 있었으며 1층짜리의 막사같은 곳으로 조그만 방에 이불과 이불장, 대야가 있었다. 위안소에는 20여명의 위안부가 있었는데 전부 조선인이었다. 머리를 강제로 잘리우고 일본옷을 입었으며 일본어와 일본어 노래를 익혔다. 주인은 일본인 부부로 우리들을 관리했다. 군인들은 위안소로 들어올 때 주인에게 돈을 냈기 때문에 군인들이 돈을 얼마나 냈는지는 잘 모른다. 나는 주로 장교들을 상대했다. 하루에 2~3명의 장교를 상대할 때도 있고 더 많을 때도 있었다. 군인들은 대부분 콘돔을 사용했다. 내가 처음으로 상대했던 장교는 이름이 '마모루'였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내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무서워 할 것 없어. 별것 아니니까"라는 차가운 말을 남긴 채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나는 무서워서 구석에 쳐박혀 있는데 군인이 다가와 강간하려고 하여 나는 그의 얼굴과 팔뚝을 물어뜯으며 저항했다. 그러나 더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어느 장교는 말을 듣지 않는다 하여 묶어놓고 자기들이 하고 싶은대로 욕심을 채웠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자기 욕심을 채우는 야수같은 군인을 보며 치를 떨었다. 나는 반항을 많이 했기 때문에 많이 맞았다. 내가 맞다가 기절하면 주인은 찬물을 뿌려서 깨운 다음 한동안 가두어 밥도 주지 않았다. 식사는 3번을 주었으나 제대로 먹을 때가 드물었다. 휴일은 없었다. 일요일도 외출이 금지되어서 나가지 못했으나 가끔 군인들 연회가 있을 때 연회장소에 따라가 술을 따라주거나 노래부르고 춤을 추면서 흥을 돋구었다. 가끔 어떤 군인들은 잔돈을 던져주기도 했는데 그런 돈으로 주로 화장품이나 일용품을 샀다. 주인으로부터 월급이나 돈을 받아본 적은 없다. 우리는 자주 반항했고 기회만 있으면 도망나갔기 때문에 어느날 주인은 우리를 전부 집합시켰다. 우리를 하얼빈의 어느 공장 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조금 있다가 일본군인들이 많은 중국여자들을 묶어서 데리고 나왔다. 중국여자들의 옷을 벗긴 후 사지를 판자에 묶어 놓고 흉악한 일본병들이 윤간하였다. 많은 병사들이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온갖 방법으로 윤간한 후 중국여자들에게 고문을 주었다. 고추가루 물 등을 하반신에 뿌리기도 하고 긴칼로 아무곳이나 찌르기도 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즐겼다. 어떤 이들은 석유를 뿌려서 불을 지르기도 하고....,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고문하여 중국여자들은 하나둘씩 죽어갔다. 이 광경을 바라본 우리는 더이상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채 매일의 생활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위안소 생활 중 일주일에 한번씩 병원에 가서 성병 검사를 받았으며 성병이 있는 사람은 606주사를 맞아야 했다. 사병들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성병에 많이 걸려서 고생하였다. 우리는 손님을 받기 전에 액체로 된 피임약을 한사발씩 마셔야 했다. 그러나 어떤 여자는 잘못해서 임신이 되어 아이를 분만했는데 아기는 이미 성병으로 인해 부패되어 죽어 있었다. 아이를 낳은 여자는 어느날 행방불명이 되었다. 위안소 생활은 어떤 이는 죽어서 나가고 어떤이는 팔려서 나가고, 또 어떤이는 부대를 따라 이동되었기 때문에 자주 위안부가 바뀌어서 친구들을 사귈 겨를도 없었다. 단지 매번 똑같은 운명에 처한 다른 위안부들을 만났다. 당시 나의 일본이름은 '모레야마 스즈코' 후에는 '가네코'라고 불렸다. 위안소에서 특별이 친한 친구도 없었고 매일 혼자서 나의 신세를 한탄하며 고향을 그리며 아버지를 원망했다. "우리가 부산에 가지 않고 감포에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텐데 아버지가 왜 우리를 데리고 부산에 갔던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행위를 원망하다못해 아버지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이렇게 슬픔에 쌓여있을 때는 고향의 노래를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복남아 울지마라, 고향을 떠나갈 적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 잘하오니 어머님 작벽하고 안심하소서. 기차는 떠나간다 검은 연기와 남은 연기가 나를 울린다. 언제나 갈 수 있을까 고향을.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어디 있어요. 오빠 동생아! 언니는 만주에 있단다. 정에 속고 돈에 우는 내 신세야. 아 못오나요 다시 한번 못오나요 1940년 어느날 아침 나는 군대를 따라 이동하여 산동성에 있는 조장으로 갔다. 기본적인 환경과 생활은 하얼빈에서와 마찬가지였다. 이곳도 군대 안에 있는 위안소에서 머물렀다. 주인도 일본인 부부였다. 나는 틈만 있으면 도망가려고 했다. 여전히 반항했다는 이유로 많이 맞았고 숱한 고문을 당했다. 하루는 얼굴을 제대로 다듬지도 않고 일본군에게 반항했다는 이유로 독살스럽게 맞은 후 조그만 감옥같은 곳에 갇혔다. 평상시 조장위안소에서 잡일을 도와주던 중국노인 이씨가 나의 처지가 너무 불쌍해서 내가 도망가는 것을 도와주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딸그락 딸그락 하는 소리가 들려서 나는 처음에는 쥐가 돌아다니나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벽돌이 빠지면서 노인의 소리가 들렸다. "얘야 빨리 나와라. 내가 너를 도와주러 왔단다." 할아버지는 나를 민가에 데려가 잠시 숨겨놓고 옷을 갈아입힌 후, 중국돈 조금을 주고 이름을 이천영이라고 지어주었다. 나는 이 노인에게 감사하기 위해 아직도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산쪽으로 도망가라고 했다. 그래서 산쪽으로 도망가다 2명의 여자들을 만났다. 나는 너무 놀래고 또 경계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신분을 물었는데 그들도 조선인 위안부로서 도망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같은 처지에 있었으므로 계속 함께 도망갔는데 오래지 않아 출동안 일본군들이 우리들을 추격해 왔다. 2명의 여자는 사살되고 나는 수류탄 파편을 맞고 다시 붙잡혔다. 아직도 나의 왼쪽 종아리에 당시 수류탄에 맞았던 상처 자국이 남아있다. 나는 또다시 붙잡혀서 고문을 당한 후 한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나를 팔아버리자는 군인들도 있었으나 일본군의 필요에 의해 나를 또 석가장으로 데려갔다. 석가장에서의 생활환경도 하얼빈과 비슷했다. 석가장에서 몇개월을 보낸 후, 부대의 이동에 따라 임분이라는 곳으로 갔다. 임분에서 2년정도 생활한 후, 정주, 무한, 향항을 거쳐 대만으로 가려했다. 그러나 미군이 대만을 공격하였으므로 내가 있던 부대는 대만으로 가지 못하고 향항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임분으로 돌아왔다. 내가 향항에 있었을 때 처음으로 동경과 북해도에서 온 일본인 위안부들을 만났다. 국민당, 공산당 부대에서 간호원으로 일하며 1944년 말, 미군이 임분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밀리는 일본군 전세로 인해 일본 군인들과 위안부들은 비관적인 나날들을 보냈으며 자주 방공호 속에 숨어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서를 쓰기도하고 닥치는 대로 먹기도 하며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혼란의 틈을 타서 나는 또 도망나가는 모험을 택했다. 구사일생으로 겨우 도망나와 어느 조그만 냇가에서 낚시를 하고있는 50세 정도의 사람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그 분의 설명대로 찾아가니 젊은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나으 ㅣ옷을 갈아입힌 후 부대가 있는 산쪽으로 올라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것이라고 했다. 그 산으로 올라가보니 그곳은 뜻하지않게 국민당 군벌부대중의 하나인 염석산부대였다. 일본인 주구(앞잡이) 부대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나는 이 부대를 알고있었다. 이 부대에서 나는 위안부 시절 배웠던 간단한 간호 기술로 간호원 생활을 하였다. 1945년 일본군이 항복한 후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 부대가 팽팽하게 대치되는 상태로 접어들었다. 내가 있던 염부대가 공산당 팔로군 부대에 패하면서 나는 다시 공산당 부대에서 간호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후에 후방부대로 수송되어 '투쟁'병원에서도 얼마간 간호원 생활을 하였다. 1946년 봄 무렵, 중국 공산당과 조선 공산당의 협상으로 인해 조선인은 조국에 돌아가 국가에 충성하라는 구호아래 조선인에게 조국에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 때 나는 공산당이 써준 소개장과 은전을 들고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하남성 안양에 갔다. 당시 나는 공산당의 복장을 입고 있었으며 가슴에 모택동 훈장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안양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국민당 32군에 간첩혐의로 붙잡혔다. 내가 지녔던 모든 것은 몰수 당했고 잠시나마 꿈구었던 귀국의 희망은 사라졌다. 국민당 군인은 나를 고문했으나 특별한 정보를 얻을 수 없어서 석방 시킨 후 신향에 있는 일본인 구류소에 보내 잡일을 돕도록 했다. 어느날, 내가 국민당 32군의 운송 부대에 갔을 때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몇명의 조선인을 만났다. 그 때 나는 고국에 가고 싶었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너 지금 나가면 밖에 있는 사람들이 너를 팔아버릴것이다"라고 말해서 나는 나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겪어온 일을 생각하며 공포감에 어떻게 해야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결국 세상이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그냥 그 곳에 머물기로 작정했다. 평탄치 않은 결혼 생활 국민당 부대의 이동을 따라 하남성 정주에 도착했다. 군대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나날을 보내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32군 포병대 운전사를 소개해 주어 그와 결혼했다. 그 전보다는 안정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잠시나마 신혼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1948년 경, 점점 중국 국민의 지지를 얻었던 공산당과 전투력이 쇠퇴해 가고 있는 국민당 32군이 서주에서 대항했으나, 마침내 공산당 부대가 우세를 점하였다. 나의 남편도 이 전쟁에 참가했었다. 당시 공산당의 너그러운 정책 덕분에 비록 국민당 부대의 운전사였던 나의 남편은 큰 고문은 당하지 않고 풀려나와 일반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49년 후, 우리는 나의 남편 고향인 안휘성 서역현에 정착했다. 이 때 공산당의 토지개혁정책으로 인해 차를 가꿀 수 있는 조그만 땅이 분배되어 얼마간 평온한 생활을 하였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되었을 때 나는 간호원 자격으로 자원 참전하여 나의 고국을 가보고 싶었으나 식구들의 반대로 나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밤새도록 울었다. 얼마 후 나의 남편은 직업때문에 육안시로 갔고 나는 그 집 식구들을 봉양하며 살았다. 육안시로 간 남편은 얼마 후 바람을 피웠다. 내가 그것을 알고나서 우리 사랑에 금이 갔다. 그 후 얼마지나 나는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강제 이혼당했다. 이혼 후 혼자 몸으로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일을 하였다. 한동안은 건축장에서 막노동을 했는데 생활태도불량이라는 죄명으로 노동교양소에 들어갔다. 노동교양소는 강제집단 노동 수양소 같은 곳인데 그 곳에서 나는 돼지와 소를 키웠다. 나는 그곳에서 나의 인생이 비참하게 느껴질 때마다 고향의 노래를 불렀다. 일반 중국인들은 내가 중국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별로 주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불렀던 고향의 노래와 내가 평상시에 물건을 머리에 이는 습관을 눈여겨 보던 한 여간부가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이 여간부는 한국전쟁에 참전했었기 때문에 대충 조선인의 습관을 알고 있었다. 이 때 처음으로 나의 내력을 조사당했으며 나의 개인 기록카드에 조선인이라는 사실과 위안부 생활을 했었다는 것이 기록되었다. 나는 노동교양소에서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20인 노동조의 조장역할을 하기도 했다. 1961년 쯤, 노동교양소에서 한 중국 남자를 알게되어 1964년 경에 결혼했다. 나는 세상 생활에 지쳐있었고 인간 불신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서 몸은 고될지라도 마음이라도 편한 농촌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남편의 고향인 안휘성 태화현 농촌으로 들어가자고 고집했다. 농촌에서의 생활이 쉽지는 않았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나가야 했다. 내가 노동교양소를 갔다 온 사실을 안 남편의 친척들은 나에게 몹시 쌀쌀맞게 대했으며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해 더욱 더 심하게 구박을 했다. 이런 생활의 어려움과 더불어 위안부 시절 많이 맞고 고생을 했던 것 때문에 병이 나서 수술을 몇번 해야 했다. 나를 쫓아내려는 친척들 때문에 그곳에 머물러 있기가 너무 힘들어 나는 혼자 다른 지역으로 가서 노동하였다. 그 곳에서 큰 병이 들어 노동도 못하고 밥만 축내며 같은 노동자에게 부담을 준다는 비난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갈 곳도 없고 해서 다시 남편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으나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꿋꿋하게 버텼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계속된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그전에 분배되었던 토지는 전부 인민공사로 넘어가 국유화되었다. 그나마 있던 조금의 토지도 없어지고 인민공사에서 하루종일 일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내가 외국인 신분이라서 행동상의 제약을 많이 받았으며, 정기적으로 정부 사람이 나와서 나의 사상과 태도를 기록했다. 잘못하면 공개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내가 살았던 집은 비가 오면 비가 새고 눈이 오면 방에서 눈을 맞았으며 바람이 불면 지붕이 날아갈 것 같은 창문도 없는 그러한 초가집이었다. 침대도 없이 얼어붙은 바닥에 솜도 없는 이불을 펴고 앉아서 추운 겨울을 지내야 했다. 눈이 쏟아지듯 내리는 추운 겨울 어느날, 땔감을 구하기 위해 맨발로 나갔다가 동상에 걸려서 발뒤꿈치가 2cm정도 갈라져 겨울내내 고생하기도 했다. 1971년 경 중국에서 북한 영화 '꽃파는 처녀'가 상영되었는데 그 때 나는 합비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휴식하고 있을때 였다. 의사는 나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으나 나는 그 영화가 너무 보고 싶어서 몰래 빠져나가 그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를 본 후 나는 정신착란증이 생겨 들판으로 뛰어나가 "조국으로 돌아갈래, 조국으로 돌아갈래" 하면서 울부짖었으며 마침내 의식을 잃었다. 우연히 이 소식을 알게 된 중국 청년이 나를 찾아와서 자기가 나의 아들이 되겠으니, 서로 의지하고 살자고 해서 우리는 그 날로 모자관계를 맺고 계속 연락하며 살아왔다. 현재는 국가보호대상자로서 국가에서 나오는 한달에 25원(한국돈 2,500원)이 나의 생활비 이다. 25원으로 남편과 나는 한달을 생활해야 되기 때문에 먹고싶은것도 제대로 못먹고 아파도 병워을 제대로 못간다. 이렇게 박절한 생활 가운데서도 나의 양아들이 한달에 120원 월급으로 나를 봉양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생활하고 있다. 양아들이 한국과 중국이 수교된 사실을 알고 서류 등을 준비해서 우리는 북경 한국대사관에도 갔다왔다. 이후에 나의 이런 상황이 세상에 알려졌다. 남경에 있는 한국, 일본 유학생들의 모금으로 그동안 빌려쓴 약값도 갚을 수 있었다. 그 후 한국에 가볼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서울 상도교회의 초청으로 1994년 6월10일부터 21일가지 한국을 방문해서 나의 고향도 가보았고 친척들도 만나보았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러나 남은 여생동안 정말 나의 조국에서 친척들과 생활하다가 일생을 마쳤으면 한다. 나는 일본때문에 일생을 어둡고 비참하게 지냈고 지금은 시베리아 같은 안휘성 농촌에서 병투성인 채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일본 정부는 왜 아직도 자기들이 저지른 죄를 인정치 않고 있는가.. 내가 이렇게 살아서 증인이 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부인하려 하는가 나는 엄연한 한국인이다. 한국정부는 나를 한국에서 살 수 있도록 해야한다. 나의 호적도 한국에 있고 나의 친척도 모두찾았는데 왜 나는 아직도 중국에서 살아야만 하는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 나의 발전된 조국에서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 일본군과 위안부 (우측 임산부가 당시의 박영심 할머니다) 성노예 희생자로 끌려갔다가 현재 북에 생존해 있는 방영심 할머니. 강제 성행위로 임신된 아이를 수술로 유산시킨 후 배에 남은 자국을 보여주고 있다. 4
마루타와 일본 종군 위안부 이야기
위안부 여자를 윤간 한 뒤
음부에 칼을 찔러 넣은 모습..
사람을 죽인 뒤 목을 자르고
그 입에 담배를 물려놓는 장난을 하는 일본인들
수많은 사람들의 두개골
목을 베어 전시하는 악취미적 장난
사람을 죽인 뒤 목을 자르고 웃고있는 일본 군인
보란듯이 목을 전시해놓는 일본 군인들
여성을 윤간하고 폭행하여
내장이 다 터져나온 모습
수많은 시체들
생매장 준비중인 모습
나무장대에 목을 걸어놓는 악질적인 짓
일본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의 처참한 시체
수많은 어린아이들의 시체
왜 죄없는 어린아이들까지 이렇게..
여성을 윤간한 뒤 폭행해 내장이 다 튀어나온 모습과
성희롱을 하는 모습
정신대 할머니들의 이야기
어릴 때부터 남의 집 일을 해주며
나는 1925년 5월 24일(음력) 경상도 감포 정골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우리집은 매우 가난하였고 농토가 없어 아버지가 품팔이로 생활을 연명했다.
어머니는 생선을 가공처리하는 일본인 공장에서 일했는데
일본인에게 자주 학대 당하다가 내가 일곱살이 되던 해에 죽었다.
오빠는 아버지와 함게 지주집의 농사를 돕거나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임시공으로 일을 했고 나는 나보다 어린 동생을 돌보며 집안일을 주로 하였다.
내가 아홉살 때, 아버지의 병 때문에 지주한테 빌려쓴 약값을 갚기위해
그 지주집 하인으로 일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온갖 일을 다 했다.
어느 때는 지주가 나에게 건너편에 있는 일본인 공장에 몰래 철조망을 뚫고
들어가 쌀을 훔쳐오도록 했다. 이것은 정말 위험을 무릅쓰고 해야되는 일인데
지주가 시키니 반드시 할 수 밖에 없었다.
한번은 도둑질하다가 들켜서 급히 도망나오다가 철조망에 찍혀서
피를 철철 흘리기도 했다.
남의 집에서 일을 해주었을 때 부채에 그려진 태극기를 보았기 때문에
우리 국기를 기억한다.
어느날, 밖에서 나를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화장실 갔다온다는 핑계로
나와보니 아버지와 형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그 길로 우리들은 감포를 떠났다.
우리는 포항, 울산을 거쳐 밥을 구걸하기도 하고 품팔이도 하면서
부산으로 도망갔다.
이런 어린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학교 문턱에도 가 볼 기회가 없었다.
다른 집 아이들이 즐겁게 학교 다니는 것을 보고 나는 가슴아팠던 기억이 난다.
내가 열두살쯤 되었을 때는 우리 식구들이 모두 부산에 있게 되었지만,
각자 흩어져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했다.
어느 곳에서 일을 하나 힘들었고 희망은 없었다.
일본군인에게 붙잡혀
그러던 어느날 내가 일해주던 주인집 아들이 나를 강간하려 해서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반항하여 겨우 빠져나왔다.
정신없이 빠져나와 혼자 몸으로 부산 바닷가에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연락선은 떠나가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내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몇명의 일본군인들이 나타났다.
나는 반항하지 못하고 입과 눈을 틀어막힌 채로 군용트럭에 실렸다.
그 때 나는 열네살(1938년)이었다.
바로 부산역으로 와서 군용열차에 실렸다.
기차 안에는 대부분이 군인이었고 우리칸에는 많은 조선여자들이 있었다.
화장실 가는 것까지도 군인들이 따라다니면서 감시를 했으며
기차 안에서 밖을 내다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기차 안에서 조선여자들끼리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채
스스로의 처지를 한탄하며 며칠을 보냈다.
식사는 하루에 3번 주었는데 간단한 주먹밥이었다.
마침내 기차는 어느 곳에선가 멈추었고,
내릴 때 그곳 사람들이 만주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내가 지금 도착한 곳이
만주지역 하얼빈인것을 알았다.
당시 함께 온 여자들은 열네살부터 스물한살 사이로
그 중에서 나는 어린편에 속하였다.
많은 여자들이 대구, 경주, 부산지역에서 잡혀왔다.
부대를 따라다니며 한 위안부 생활
내가 있던 하얼빈 위안소는 군대 내에 있었으며
1층짜리의 막사같은 곳으로 조그만 방에 이불과 이불장, 대야가 있었다.
위안소에는 20여명의 위안부가 있었는데 전부 조선인이었다.
머리를 강제로 잘리우고 일본옷을 입었으며 일본어와 일본어 노래를 익혔다.
주인은 일본인 부부로 우리들을 관리했다.
군인들은 위안소로 들어올 때 주인에게 돈을 냈기 때문에
군인들이 돈을 얼마나 냈는지는 잘 모른다.
나는 주로 장교들을 상대했다.
하루에 2~3명의 장교를 상대할 때도 있고 더 많을 때도 있었다.
군인들은 대부분 콘돔을 사용했다.
내가 처음으로 상대했던 장교는 이름이 '마모루'였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내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무서워 할 것 없어. 별것 아니니까"라는
차가운 말을 남긴 채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나는 무서워서 구석에 쳐박혀 있는데 군인이 다가와 강간하려고 하여
나는 그의 얼굴과 팔뚝을 물어뜯으며 저항했다.
그러나 더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어느 장교는 말을 듣지 않는다 하여 묶어놓고 자기들이 하고 싶은대로
욕심을 채웠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자기 욕심을 채우는 야수같은 군인을 보며
치를 떨었다.
나는 반항을 많이 했기 때문에 많이 맞았다.
내가 맞다가 기절하면 주인은 찬물을 뿌려서 깨운 다음 한동안 가두어
밥도 주지 않았다.
식사는 3번을 주었으나 제대로 먹을 때가 드물었다. 휴일은 없었다.
일요일도 외출이 금지되어서 나가지 못했으나 가끔 군인들 연회가 있을 때
연회장소에 따라가 술을 따라주거나 노래부르고 춤을 추면서 흥을 돋구었다.
가끔 어떤 군인들은 잔돈을 던져주기도 했는데 그런 돈으로 주로 화장품이나
일용품을 샀다. 주인으로부터 월급이나 돈을 받아본 적은 없다.
우리는 자주 반항했고 기회만 있으면 도망나갔기 때문에
어느날 주인은 우리를 전부 집합시켰다.
우리를 하얼빈의 어느 공장 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조금 있다가 일본군인들이 많은 중국여자들을 묶어서 데리고 나왔다.
중국여자들의 옷을 벗긴 후 사지를 판자에 묶어 놓고
흉악한 일본병들이 윤간하였다.
많은 병사들이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온갖 방법으로 윤간한 후 중국여자들에게 고문을 주었다.
고추가루 물 등을 하반신에 뿌리기도 하고
긴칼로 아무곳이나 찌르기도 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즐겼다.
어떤 이들은 석유를 뿌려서 불을 지르기도 하고....,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고문하여 중국여자들은 하나둘씩 죽어갔다.
이 광경을 바라본 우리는 더이상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채
매일의 생활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위안소 생활 중 일주일에 한번씩 병원에 가서 성병 검사를 받았으며
성병이 있는 사람은 606주사를 맞아야 했다.
사병들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성병에 많이 걸려서 고생하였다.
우리는 손님을 받기 전에 액체로 된 피임약을 한사발씩 마셔야 했다.
그러나 어떤 여자는 잘못해서 임신이 되어 아이를 분만했는데
아기는 이미 성병으로 인해 부패되어 죽어 있었다.
아이를 낳은 여자는 어느날 행방불명이 되었다.
위안소 생활은 어떤 이는 죽어서 나가고 어떤이는 팔려서 나가고,
또 어떤이는 부대를 따라 이동되었기 때문에 자주 위안부가 바뀌어서
친구들을 사귈 겨를도 없었다.
단지 매번 똑같은 운명에 처한 다른 위안부들을 만났다.
당시 나의 일본이름은 '모레야마 스즈코' 후에는 '가네코'라고 불렸다.
위안소에서 특별이 친한 친구도 없었고 매일 혼자서 나의 신세를 한탄하며
고향을 그리며 아버지를 원망했다.
"우리가 부산에 가지 않고 감포에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텐데
아버지가 왜 우리를 데리고 부산에 갔던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행위를 원망하다못해 아버지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이렇게 슬픔에 쌓여있을 때는 고향의 노래를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복남아 울지마라, 고향을 떠나갈 적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 잘하오니
어머님 작벽하고 안심하소서.
기차는 떠나간다 검은 연기와 남은 연기가 나를 울린다.
언제나 갈 수 있을까 고향을.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어디 있어요. 오빠 동생아! 언니는 만주에 있단다.
정에 속고 돈에 우는 내 신세야.
아 못오나요 다시 한번 못오나요
1940년 어느날 아침 나는 군대를 따라 이동하여 산동성에 있는 조장으로 갔다.
기본적인 환경과 생활은 하얼빈에서와 마찬가지였다.
이곳도 군대 안에 있는 위안소에서 머물렀다. 주인도 일본인 부부였다.
나는 틈만 있으면 도망가려고 했다.
여전히 반항했다는 이유로 많이 맞았고 숱한 고문을 당했다.
하루는 얼굴을 제대로 다듬지도 않고 일본군에게 반항했다는 이유로
독살스럽게 맞은 후 조그만 감옥같은 곳에 갇혔다.
평상시 조장위안소에서 잡일을 도와주던 중국노인 이씨가 나의 처지가
너무 불쌍해서 내가 도망가는 것을 도와주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딸그락 딸그락 하는 소리가 들려서 나는 처음에는
쥐가 돌아다니나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벽돌이 빠지면서 노인의 소리가 들렸다.
"얘야 빨리 나와라. 내가 너를 도와주러 왔단다."
할아버지는 나를 민가에 데려가 잠시 숨겨놓고 옷을 갈아입힌 후,
중국돈 조금을 주고 이름을 이천영이라고 지어주었다.
나는 이 노인에게 감사하기 위해 아직도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산쪽으로 도망가라고 했다.
그래서 산쪽으로 도망가다 2명의 여자들을 만났다.
나는 너무 놀래고 또 경계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신분을 물었는데
그들도 조선인 위안부로서 도망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같은 처지에 있었으므로 계속 함께 도망갔는데 오래지 않아
출동안 일본군들이 우리들을 추격해 왔다.
2명의 여자는 사살되고 나는 수류탄 파편을 맞고 다시 붙잡혔다.
아직도 나의 왼쪽 종아리에 당시 수류탄에 맞았던 상처 자국이 남아있다.
나는 또다시 붙잡혀서 고문을 당한 후 한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나를 팔아버리자는 군인들도 있었으나 일본군의 필요에 의해 나를 또
석가장으로 데려갔다. 석가장에서의 생활환경도 하얼빈과 비슷했다.
석가장에서 몇개월을 보낸 후, 부대의 이동에 따라 임분이라는 곳으로 갔다.
임분에서 2년정도 생활한 후, 정주, 무한, 향항을 거쳐 대만으로 가려했다.
그러나 미군이 대만을 공격하였으므로 내가 있던 부대는 대만으로 가지 못하고
향항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임분으로 돌아왔다.
내가 향항에 있었을 때
처음으로 동경과 북해도에서 온 일본인 위안부들을 만났다.
국민당, 공산당 부대에서 간호원으로 일하며
1944년 말, 미군이 임분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밀리는 일본군 전세로 인해 일본 군인들과 위안부들은 비관적인 나날들을
보냈으며 자주 방공호 속에 숨어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서를 쓰기도하고 닥치는 대로 먹기도 하며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혼란의 틈을 타서 나는 또 도망나가는 모험을 택했다.
구사일생으로 겨우 도망나와 어느 조그만 냇가에서 낚시를 하고있는
50세 정도의 사람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그 분의 설명대로 찾아가니 젊은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나으 ㅣ옷을 갈아입힌 후 부대가 있는 산쪽으로 올라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것이라고 했다.
그 산으로 올라가보니 그곳은 뜻하지않게 국민당 군벌부대중의 하나인
염석산부대였다.
일본인 주구(앞잡이) 부대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나는 이 부대를 알고있었다.
이 부대에서 나는 위안부 시절 배웠던
간단한 간호 기술로 간호원 생활을 하였다.
1945년 일본군이 항복한 후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 부대가 팽팽하게
대치되는 상태로 접어들었다.
내가 있던 염부대가 공산당 팔로군 부대에 패하면서 나는 다시 공산당
부대에서 간호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후에 후방부대로 수송되어 '투쟁'병원에서도 얼마간 간호원 생활을 하였다.
1946년 봄 무렵, 중국 공산당과 조선 공산당의 협상으로 인해
조선인은 조국에 돌아가 국가에 충성하라는 구호아래 조선인에게 조국에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 때 나는 공산당이 써준 소개장과 은전을 들고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하남성 안양에 갔다.
당시 나는 공산당의 복장을 입고 있었으며 가슴에 모택동 훈장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안양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국민당 32군에 간첩혐의로 붙잡혔다.
내가 지녔던 모든 것은 몰수 당했고
잠시나마 꿈구었던 귀국의 희망은 사라졌다.
국민당 군인은 나를 고문했으나 특별한 정보를 얻을 수 없어서 석방 시킨 후
신향에 있는 일본인 구류소에 보내 잡일을 돕도록 했다.
어느날, 내가 국민당 32군의 운송 부대에 갔을 때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몇명의 조선인을 만났다.
그 때 나는 고국에 가고 싶었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너 지금 나가면 밖에 있는 사람들이 너를 팔아버릴것이다"라고 말해서
나는 나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겪어온 일을 생각하며 공포감에 어떻게 해야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결국 세상이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그냥 그 곳에 머물기로 작정했다.
평탄치 않은 결혼 생활
국민당 부대의 이동을 따라 하남성 정주에 도착했다.
군대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나날을 보내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32군 포병대 운전사를 소개해 주어 그와 결혼했다.
그 전보다는 안정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잠시나마 신혼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1948년 경, 점점 중국 국민의 지지를 얻었던 공산당과 전투력이
쇠퇴해 가고 있는 국민당 32군이 서주에서 대항했으나,
마침내 공산당 부대가 우세를 점하였다.
나의 남편도 이 전쟁에 참가했었다. 당시 공산당의 너그러운 정책 덕분에
비록 국민당 부대의 운전사였던 나의 남편은 큰 고문은 당하지 않고
풀려나와 일반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49년 후, 우리는 나의 남편 고향인 안휘성 서역현에 정착했다.
이 때 공산당의 토지개혁정책으로 인해 차를 가꿀 수 있는
조그만 땅이 분배되어 얼마간 평온한 생활을 하였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되었을 때 나는 간호원 자격으로 자원 참전하여
나의 고국을 가보고 싶었으나 식구들의 반대로 나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밤새도록 울었다.
얼마 후 나의 남편은 직업때문에 육안시로 갔고 나는 그 집 식구들을
봉양하며 살았다. 육안시로 간 남편은 얼마 후 바람을 피웠다.
내가 그것을 알고나서 우리 사랑에 금이 갔다.
그 후 얼마지나 나는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강제 이혼당했다.
이혼 후 혼자 몸으로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일을 하였다.
한동안은 건축장에서 막노동을 했는데 생활태도불량이라는 죄명으로
노동교양소에 들어갔다.
노동교양소는 강제집단 노동 수양소 같은 곳인데
그 곳에서 나는 돼지와 소를 키웠다.
나는 그곳에서 나의 인생이 비참하게 느껴질 때마다 고향의 노래를 불렀다.
일반 중국인들은 내가 중국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별로 주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불렀던 고향의 노래와 내가 평상시에 물건을 머리에
이는 습관을 눈여겨 보던 한 여간부가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이 여간부는 한국전쟁에 참전했었기 때문에 대충 조선인의
습관을 알고 있었다.
이 때 처음으로 나의 내력을 조사당했으며 나의 개인 기록카드에
조선인이라는 사실과 위안부 생활을 했었다는 것이 기록되었다.
나는 노동교양소에서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20인 노동조의
조장역할을 하기도 했다.
1961년 쯤, 노동교양소에서 한 중국 남자를 알게되어 1964년 경에 결혼했다.
나는 세상 생활에 지쳐있었고 인간 불신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서 몸은 고될지라도 마음이라도 편한 농촌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남편의 고향인 안휘성 태화현 농촌으로 들어가자고 고집했다.
농촌에서의 생활이 쉽지는 않았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나가야 했다. 내가 노동교양소를 갔다 온 사실을 안
남편의 친척들은 나에게 몹시 쌀쌀맞게 대했으며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해 더욱 더 심하게 구박을 했다.
이런 생활의 어려움과 더불어 위안부 시절 많이 맞고 고생을 했던 것 때문에
병이 나서 수술을 몇번 해야 했다.
나를 쫓아내려는 친척들 때문에 그곳에 머물러 있기가 너무 힘들어
나는 혼자 다른 지역으로 가서 노동하였다.
그 곳에서 큰 병이 들어 노동도 못하고 밥만 축내며 같은 노동자에게
부담을 준다는 비난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갈 곳도 없고 해서 다시 남편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으나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꿋꿋하게 버텼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계속된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그전에 분배되었던
토지는 전부 인민공사로 넘어가 국유화되었다.
그나마 있던 조금의 토지도 없어지고 인민공사에서 하루종일 일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내가 외국인 신분이라서 행동상의 제약을 많이 받았으며,
정기적으로 정부 사람이 나와서 나의 사상과 태도를 기록했다.
잘못하면 공개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내가 살았던 집은 비가 오면 비가 새고 눈이 오면 방에서 눈을 맞았으며
바람이 불면 지붕이 날아갈 것 같은 창문도 없는 그러한 초가집이었다.
침대도 없이 얼어붙은 바닥에 솜도 없는 이불을 펴고 앉아서 추운 겨울을
지내야 했다. 눈이 쏟아지듯 내리는 추운 겨울 어느날, 땔감을 구하기 위해
맨발로 나갔다가 동상에 걸려서 발뒤꿈치가 2cm정도 갈라져
겨울내내 고생하기도 했다.
1971년 경 중국에서 북한 영화 '꽃파는 처녀'가 상영되었는데
그 때 나는 합비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휴식하고 있을때 였다.
의사는 나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으나 나는 그 영화가 너무 보고 싶어서
몰래 빠져나가 그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를 본 후 나는 정신착란증이 생겨 들판으로 뛰어나가
"조국으로 돌아갈래, 조국으로 돌아갈래"
하면서 울부짖었으며 마침내 의식을 잃었다.
우연히 이 소식을 알게 된 중국 청년이 나를 찾아와서
자기가 나의 아들이 되겠으니, 서로 의지하고 살자고 해서
우리는 그 날로 모자관계를 맺고 계속 연락하며 살아왔다.
현재는 국가보호대상자로서 국가에서 나오는 한달에 25원(한국돈 2,500원)이
나의 생활비 이다. 25원으로 남편과 나는 한달을 생활해야 되기 때문에
먹고싶은것도 제대로 못먹고 아파도 병워을 제대로 못간다.
이렇게 박절한 생활 가운데서도 나의 양아들이 한달에 120원 월급으로
나를 봉양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생활하고 있다.
양아들이 한국과 중국이 수교된 사실을 알고 서류 등을 준비해서
우리는 북경 한국대사관에도 갔다왔다.
이후에 나의 이런 상황이 세상에 알려졌다.
남경에 있는 한국, 일본 유학생들의 모금으로 그동안 빌려쓴 약값도
갚을 수 있었다.
그 후 한국에 가볼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서울 상도교회의 초청으로 1994년 6월10일부터 21일가지 한국을 방문해서
나의 고향도 가보았고 친척들도 만나보았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러나 남은 여생동안 정말 나의 조국에서 친척들과 생활하다가
일생을 마쳤으면 한다.
나는 일본때문에 일생을 어둡고 비참하게 지냈고 지금은 시베리아 같은
안휘성 농촌에서 병투성인 채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일본 정부는 왜 아직도 자기들이 저지른 죄를 인정치 않고 있는가..
내가 이렇게 살아서 증인이 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부인하려 하는가
나는 엄연한 한국인이다.
한국정부는 나를 한국에서 살 수 있도록 해야한다.
나의 호적도 한국에 있고 나의 친척도 모두찾았는데
왜 나는 아직도 중국에서 살아야만 하는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
나의 발전된 조국에서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
일본군과 위안부
(우측 임산부가 당시의 박영심 할머니다)
성노예 희생자로 끌려갔다가
현재 북에 생존해 있는 방영심 할머니.
강제 성행위로 임신된 아이를 수술로 유산시킨 후
배에 남은 자국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