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절부터인가 소설 읽기에 골몰하다보니 다른 장르들 시, 산문, 인문의 책들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대학 초년 시절에는 주로 시를 읽었고, 나머지 기간에는 인문서들에 빠져 있었는데, 어느 순간 달큰한 소설들을 읽는 재미에 빠졌고, 너무 심하게 빠져버렸다. 지금은 근근히 김영하의 영화평 모음집이나 장정일의 좌충우돌 시평 모음집을 읽는 정도라고나 할까.
인문서까지는 아니어도 간간히 산문을 읽는 재미가 만만치 않은데 가끔 잊고 지내는 것만 같다. 김영하의 과감한 명석함, 강준만의 뜨끔뜨금한 비릿함, 장정일의 날것 같은 펄떡임, 진중권의 뚝뚝 떨어지는 논리를 산문이 아니면 어디서 느끼겠는가. 그리고 여기 부드럽기 그지없는 문장을 사용하면서도 제대로 말할 줄 아는 고종석까지... (소설가로서의 고종석도 물론 굉장히 마음에 든다)
그렇게 고종석의 글들이 엮인 책을 읽는다. 별다른 일맥상통의 맥락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산문집이라 어느 곳을 먼저 봐도 상관없다. 책은 문화시평쯤이 되는 1부 ‘어스름의 감각’, 정치시평쯤이 되는 2부 ‘정치의 둘레’, 지인들을 위한 발문 모음인 ‘친구의 초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부분은 차치하고 1부에 실린 ‘섞인 것이 아름답다’의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들어 지루하기 그지없는 그 이후의 읽기마저 감미롭다.
2005년에 씌여진 글에서 작가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다양한 열정들, 그러나 잘못하여 광기로 흘러들어가고만 열정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종교에 대해서이다. 게다가 그의 글은 절묘하게 2007년 8~9월의 지금의 현상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소설이든 산문이든 명석한 글은 시기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래서 길지만 작가의 글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이렇다.
“... 모든 종교에는 적어도 잠재적으로나마 근본주의적 속성이 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두 집단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이 잠재적 근본주의는 즉각 현재화해 전쟁의 연료를 제공한다. 서로 다른 종교를 독실하게 믿는, 갈등하는 두 집단은 자신들의 뒷배를 봐줄 전지전능한 신이 있으므로 분쟁의 발걸음을 내딛는 데 주저함이 없다. 선교라는 것이 종교의 소명이기도 하므로, 이 경우 전쟁은 그야말로 종교적 의무, 도덕적 의무로까지 미화된다. 평화를 위해서 종교적 열정을 줄일 필요성이 이 지점에서 제기된다... 한국의 경우, 국내적으로 서로 다른 종교 집단이 전쟁 상태로까지 치닫지 않은 것은 매우 다행스럽다... 그러나 개신교 일파의 근본주의적 열정을 보면 우리 사회도 종교적 열정의 아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더 위험한 것은 선교의 열정이다.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며 옛 소련이 해체되자 한국의 많은 개신교회들이 그쪽으로 선교사를 보냈다... 이런 선교 열정은 아랍세계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지구에 남은 마지막 미선교지라며 아랍세계에 무작정 기독교회를 세우는 일은 어리석고 추한 일이다. 그것이 어리석은 것은 아랍세계에 (한국)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추한 것은 알량한 경제력을 이용해 믿음을 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진정 큰 문제는 한국 사회의 종교적 열정이 거의 온전히 기복과 관련돼 있다는 것, 그리고 특히 한국 기독교가 관용을 배우지 못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종교적 열정을 줄이는 것, 더 나아가 무신론을 확산시키는 것은 21세기의 긴요한 과제가 될 듯 싶다.”
애초에 냉전의 종식과 함께 또다른 세계적 내분의 불씨가 되고 있는, 어쩌면 냉전 기간 동안 잠시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것일 뿐인지도 모르는, 종교에 대한 그의 생각은 올바르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그러한 세계적 그리고 종교적인 세태를 우리의 현실로 되돌려 바라보는 시각 또한 올바르다.
작가가 전하는 이러한 비판의 전언을 개신교 단체가 좀더 빨리 받아들였다면 (물론 고종석만 이런 글을 썼을까. 우리나라 개신교에 대한 비판은 그들의 위세에 짓눌려 왔지만 계속해서 개진되어 왔다) 애꿏은 목숨을 버리지 않았어도, 극심하고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것들을 포함한 난장의 리플들을 경험하지 않고서도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은 나만의 안타까움일까. 여기에 더하여 작가는 많은 것들의 섞임을 주장한다. 그것이 종교이든 학문이든 과학이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고, 자신이 속한 곳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만을 고집하는 것의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그는 섞인 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 진리에 대한 사랑을 줄이는 것, 열정의 사슬을 자유로써 끊어내고 광신의 진국에 의심의 물을 마구 타는 것이다. 흩어져 싸우는 개인들이란 결국 세계시민주의자들이고, 세계시민주의의 실천 전략은 불순함의 옹호이다. 결론을 내리자. 섞인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20세기의 교훈이다. 아직 우리는 그 교훈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듯하지만.”
프랑스어로 ‘다채로움’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의 ‘버라이어티’에 해당하는) ‘바리에떼’를 제목으로 삼고 있는 책은 어쩌면 바로 이 부분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작가가 제발 읽어달라는) 복거일의 자유주의를 표방한 보수주의의 기만을 우려하는 글이나 강준만의 곧다못해 부러질 것 같은 태도를 은근슬쩍 우회하는 글도 좋지만 고종석의 부드럽되 정곡을 찌르는 첫 부분의 글들이 가장 좋다.
‘다채로움’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는 발전한 것처럼 보이되, 아름답게 발전하지 못한다. 그러한 발전은 번드르르한 외모를 갖춘 연쇄살인범처럼 오히려 우리들을 공포스럽게 만들뿐이다. 그런데 (작가의 말마따나) 20세기를 쭈욱 거치면서 얻어진 이러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들은 한참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인류의 더딘 발전을 생각해보면 까짓 백년은 시행착오를 그저 느끼기에도 모자란 시간이기는 하지만...
섞여야만 아름와질 수 있는 21세기를 위하여... <바리에떼:문화와 정치의 주변풍경>
어느 시절부터인가 소설 읽기에 골몰하다보니 다른 장르들 시, 산문, 인문의 책들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대학 초년 시절에는 주로 시를 읽었고, 나머지 기간에는 인문서들에 빠져 있었는데, 어느 순간 달큰한 소설들을 읽는 재미에 빠졌고, 너무 심하게 빠져버렸다. 지금은 근근히 김영하의 영화평 모음집이나 장정일의 좌충우돌 시평 모음집을 읽는 정도라고나 할까.
인문서까지는 아니어도 간간히 산문을 읽는 재미가 만만치 않은데 가끔 잊고 지내는 것만 같다. 김영하의 과감한 명석함, 강준만의 뜨끔뜨금한 비릿함, 장정일의 날것 같은 펄떡임, 진중권의 뚝뚝 떨어지는 논리를 산문이 아니면 어디서 느끼겠는가. 그리고 여기 부드럽기 그지없는 문장을 사용하면서도 제대로 말할 줄 아는 고종석까지... (소설가로서의 고종석도 물론 굉장히 마음에 든다)
그렇게 고종석의 글들이 엮인 책을 읽는다. 별다른 일맥상통의 맥락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산문집이라 어느 곳을 먼저 봐도 상관없다. 책은 문화시평쯤이 되는 1부 ‘어스름의 감각’, 정치시평쯤이 되는 2부 ‘정치의 둘레’, 지인들을 위한 발문 모음인 ‘친구의 초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부분은 차치하고 1부에 실린 ‘섞인 것이 아름답다’의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들어 지루하기 그지없는 그 이후의 읽기마저 감미롭다.
2005년에 씌여진 글에서 작가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다양한 열정들, 그러나 잘못하여 광기로 흘러들어가고만 열정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종교에 대해서이다. 게다가 그의 글은 절묘하게 2007년 8~9월의 지금의 현상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소설이든 산문이든 명석한 글은 시기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래서 길지만 작가의 글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이렇다.
“... 모든 종교에는 적어도 잠재적으로나마 근본주의적 속성이 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두 집단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이 잠재적 근본주의는 즉각 현재화해 전쟁의 연료를 제공한다. 서로 다른 종교를 독실하게 믿는, 갈등하는 두 집단은 자신들의 뒷배를 봐줄 전지전능한 신이 있으므로 분쟁의 발걸음을 내딛는 데 주저함이 없다. 선교라는 것이 종교의 소명이기도 하므로, 이 경우 전쟁은 그야말로 종교적 의무, 도덕적 의무로까지 미화된다. 평화를 위해서 종교적 열정을 줄일 필요성이 이 지점에서 제기된다... 한국의 경우, 국내적으로 서로 다른 종교 집단이 전쟁 상태로까지 치닫지 않은 것은 매우 다행스럽다... 그러나 개신교 일파의 근본주의적 열정을 보면 우리 사회도 종교적 열정의 아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더 위험한 것은 선교의 열정이다.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며 옛 소련이 해체되자 한국의 많은 개신교회들이 그쪽으로 선교사를 보냈다... 이런 선교 열정은 아랍세계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지구에 남은 마지막 미선교지라며 아랍세계에 무작정 기독교회를 세우는 일은 어리석고 추한 일이다. 그것이 어리석은 것은 아랍세계에 (한국)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추한 것은 알량한 경제력을 이용해 믿음을 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진정 큰 문제는 한국 사회의 종교적 열정이 거의 온전히 기복과 관련돼 있다는 것, 그리고 특히 한국 기독교가 관용을 배우지 못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종교적 열정을 줄이는 것, 더 나아가 무신론을 확산시키는 것은 21세기의 긴요한 과제가 될 듯 싶다.”
애초에 냉전의 종식과 함께 또다른 세계적 내분의 불씨가 되고 있는, 어쩌면 냉전 기간 동안 잠시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것일 뿐인지도 모르는, 종교에 대한 그의 생각은 올바르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그러한 세계적 그리고 종교적인 세태를 우리의 현실로 되돌려 바라보는 시각 또한 올바르다.
작가가 전하는 이러한 비판의 전언을 개신교 단체가 좀더 빨리 받아들였다면 (물론 고종석만 이런 글을 썼을까. 우리나라 개신교에 대한 비판은 그들의 위세에 짓눌려 왔지만 계속해서 개진되어 왔다) 애꿏은 목숨을 버리지 않았어도, 극심하고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것들을 포함한 난장의 리플들을 경험하지 않고서도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은 나만의 안타까움일까. 여기에 더하여 작가는 많은 것들의 섞임을 주장한다. 그것이 종교이든 학문이든 과학이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고, 자신이 속한 곳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만을 고집하는 것의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그는 섞인 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 진리에 대한 사랑을 줄이는 것, 열정의 사슬을 자유로써 끊어내고 광신의 진국에 의심의 물을 마구 타는 것이다. 흩어져 싸우는 개인들이란 결국 세계시민주의자들이고, 세계시민주의의 실천 전략은 불순함의 옹호이다. 결론을 내리자. 섞인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20세기의 교훈이다. 아직 우리는 그 교훈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듯하지만.”
프랑스어로 ‘다채로움’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의 ‘버라이어티’에 해당하는) ‘바리에떼’를 제목으로 삼고 있는 책은 어쩌면 바로 이 부분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작가가 제발 읽어달라는) 복거일의 자유주의를 표방한 보수주의의 기만을 우려하는 글이나 강준만의 곧다못해 부러질 것 같은 태도를 은근슬쩍 우회하는 글도 좋지만 고종석의 부드럽되 정곡을 찌르는 첫 부분의 글들이 가장 좋다.
‘다채로움’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는 발전한 것처럼 보이되, 아름답게 발전하지 못한다. 그러한 발전은 번드르르한 외모를 갖춘 연쇄살인범처럼 오히려 우리들을 공포스럽게 만들뿐이다. 그런데 (작가의 말마따나) 20세기를 쭈욱 거치면서 얻어진 이러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들은 한참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인류의 더딘 발전을 생각해보면 까짓 백년은 시행착오를 그저 느끼기에도 모자란 시간이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