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2.0> 스타포커스

석다영2007.10.01
조회106

불가능 그 것은 아무것도 아닐까?     

 

 

 

 

강한 성격파 배우도 아니고 꽃미남은 더더욱 아니며,

그냥 코미디 배우라고 하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대한민국 남자 배우의 섬과 같은 존재’ 이범수가

‘꿈을 던진 패전 투수’ 감사용을 연기한다.

그의 작은 체구와 커다란 눈망울이 외로운 마운드 위에 섰다.

‘불가능, 그것은 나약한 사람들의 핑계에 불과하다.

  불가능,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불가능,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다.

  불가능, 그것은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불가능, 그것은 사람들을 용기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폴레옹의 명언‘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를

세련되게 번안한 모 스포츠 브랜드의 광고 카피다.

동서고금의 어떠한 격언보다 힘 있고 감동적인 이 카피는

동시에 수많은 불가능 앞에 무릎을 꿇고 마는 약자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10억 원을 모은

의지의 한국인들이 슬쩍 관심에서 사라질 무렵,

얼마 전 막을 내린 아테네올림픽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위대한 괴물들의 리포트를 대량으로 쏟아냈다.

핑계와 변명을 찾기 더더욱 어려워진 요즘 다시 한번 묻는다.

정말, 불가능은 아무것도 아닐까?

 

"아니예요. 불가능이란 분명히 있죠."

<슈퍼스타 감사용> 주인공 이범수가 말한다.

다행이다. 그에게 이런 '진솔한' 답변을 듣다니.

알려졌다시피 이범수는 입지전적인 배우다.

10여 년 동안 선글라스 깡패부터 온갖 작은 배역들을 전전하다

<몽정기>의 공병철 선생, <오! 브라더스>의 조로증 환자 오봉구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이범수는 꿈을 안고 오디션장에 선 무명 배우들의 우상과 같은 존재다.

그런 이범수가 배우 인생 15년만에 영화 포스터에 자기의 얼굴만을 올리는

‘진짜’ 주연을 맡은 영화는 <슈퍼스타 감사용>이다.

<수퍼스타 감사용>은 ‘슈퍼스타’라는 화려한 외래어와

‘네 가지 쓰임새’라는 깊은 뜻을 지닌

'감사용(甘四用)'이란 이름을 포개놓은 제목이지만

영화는 프로야구 원년 1982년, 최악의 전적을 남긴 꼴찌팀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최악의 기록을 남긴 무명 투수 감사용의,

잊혀졌다기보다는 알려지지조차 않은 그늘진 꿈을 그린다.

 

 

 

 

저를, 제발, 시켜주세요

 

감사용은 실패한 야구선수였다.

진해중학교와 마산고등학교 야구부였지만

모교가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4강에 들지 못하는 바람에

대학 야구팀에 스카우트되지 못했다.

인천체육전문대를 졸업하고 제대를 하면서 감사용은

‘야구로 먹고살 수 있는’ 실업 야구의 꿈을 접는다.

창원 공단에 있는 삼미특수강에 구매 관리 및 통관 업무 담당으로

취직한 감사용은 취미에 불과했지만 야구를 계속했다.

중고교 시절 야구선수로 뛰었던 그가 에이스로 나선 삼미특수강은

1981년 창원시 주최 직장야구대회에서 우승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아마추어는 아마추어다.

1982년 삼미특수강 계열사로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프로야구단이 부랴부랴 창단되었을 때,

공장 상무의 추천으로 동계 훈련차 진해로 내려온 선수단을 안내하기 위해

구단 버스에 오른 감사용은 다른 팀에는 다 있는데

삼미에만 없는 좌완 투수라는 이유 하나로 실력과 체력의 열세에도 불구,

프로야구 선수로 스카우트된다.

천운이었을까?

 

고난과 역경이 인간을 단련시키는 인간 승리 드라마라면

영화의 도입부로 이보다 더 좋은 시작은 없을 것이다.

실업 야구도 아니고 직장인 야구출신으로

프로야구단 버스에 안내원으로 탑승했던 한 남자가

프로야구 원년 ‘흙 속의 진주’처럼 발견된다.

어찌 멋지지 않은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현재 창원의 한 마트에서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는 감사용은

그때 자신이 "짐짝과 같았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미국 물’ 먹고 온 OB베어즈 투수 박철순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당시, 직장인 야구 출신의 감사용은

온 국민은 고사하고 꼴찌팀 삼미에서도 천덕꾸러기였다.

영화 속에서 승리가 아니라 등판이 간절하던 감사용이

화장실에 가던 감독을 불러 항변을 하는 장면이있다.

"감독님, 왜 저를 뽑으셨죠? 도대체 왜 절 뽑으셨어요?"

감독은 냉정하게 대답한다.

"처음부터 널 선발로 쓸 생각은 없었어."

 

"시나리오를 천천히 정독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특이 이 장면은 옛날에 오디션 보던 생각이 많이 나서

  감정 몰입이 잘됐던 장면이에요. 시켜주세요, 시켜주세요.

  공을 던져보고 싶어서 감독에게 대들기까지 하는 장면인데

  정말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지금 제가 스스로 성공했다는 말을 하긴 뭐하지만, 성공했건 아니건

  그 정서를 저만큼 잘 이해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거예요."

데뷔작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부터 21편의 영화에 출연해오는 동안

이범수의 꿈은 칭찬이 자자한 대배우도 아니었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스타도 아니었다.

그의 꿈은 "누군가 필요로 하는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이범수는 ‘시켜달라고’ 여기저기 조르고 다녔기에

기회의 절실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 브라더스>(2003)의 조로증 환자 오봉구,

<슈퍼스타 감사용>의 감사용으로

이범수가 아니면 안 된다고 졸랐던 감독들에게 그는 도리어 고마움을 느꼈다.

"제 스케줄 때문에 김종현 감독이 <슈퍼스타 감사용>을

  1년도 넘게 미뤄야 했어요. 신인이라 빨리 데뷔하고 싶었을 텐데

  2순위, 3순위 배우를 찾지 않고 기다려준 거죠.

‘대한민국에서 너 밖에 할 사람이 없다’는 말이 과찬인 거는 알지만

  굉장히 기분 좋은 사명감을 갖고 연기하게 됐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불가능을 부인하지 않는 이범수에게 불가능은 실패,

혹은 좌절 그 자체가 아니다.

"어차피 인생이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안 되도 내일 또 해볼 수 있는 거와 내일이 없는 거는 다르죠."

소시민의 페이소스를 얼굴에 담고 있는 이범수에게 감사용은

‘맞춤옷’과 같은 캐릭터였다지만

그는 그 맞춤 옷을 입기 위해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해야 했다.

야구를 해본 경험이 없던 이범수가

야구선수로 출연한다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들 이발사로 출연하면 이발 기술을 배우고,

권투 선수를 맡으면 권투를 배운다.

하지만 실존 인물 감사용은 왼손잡이.

서른 다섯 살의 이 배우는

35년 동안 써오던 오른손을 버리고 왼손을 써야 했다.

왼손으로 쓰고, 밥먹고, 공을 던져야 했다.

왼손으로 던진 공이 곧게 날아가야 했고,

스트라이크 존에 맞아야 했고, 스피드가 나와야 했다.

이범수의 야구 수업을 도운 쌍방울 좌완 투수 출신 이광섭 코치는

"맨 처음 이범수에게 왼손도 아니고 오른손으로 공을 던져보라고 했다.

  솔직히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열심히 하더라.

 결국 제구력과 스피드, 투구 폼이 그럴듯하게 나와

  아주 어려운 장면 빼놓고는 대역 없이 촬영했다."고 말한다.

노력 빼면 시체인 이범수에게

주변 칭찬이 자자하다는 말을 들려주자 한술 더 뜬다.

"보통 투수들이 하루 1백 개씩 던진다면 전 3백~4백 개를 던졌어요.

  그런데 그건 당연한 거예요. 외다리를 연기해야 한다면 하는 게 배우예요."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오! 브라더스>의 오봉구연기가 떠올라 아무 말 못했다. 본인은 오죽했으랴.

왼손으로 던진 공으로 작은 병과 캔을 연달아 맞춰야 하는

장면에서는 이범수 연기 역사상 가장 많은 NG가 나기도 했다.

"스케줄, 필름값 걱정 말고 편안하게 하라"는

감독의 격려에도 30~40번 NG가 거듭되자 오른손 생각이 간절했다.

오른손이라면 금방 맞출 수 있었지

그는 이범수가 아니라 감사용이어야 했다.

어렵게 어렵게 OK가 났다.

지난해 추석 시즌 개봉한 <오! 브라더스>와

올 추석 시즌 개봉 예정인 <슈퍼스타 감사용> 사이

이범수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15년 동안 월반도 유급도 없이 차곡차곡 학년을 올라온 우등생 이범수는

<안녕!유에프오>의 흥행 참패와 의혹을 남긴 결혼 생활로

흔히 정상에 올라 겪는다는 모진 바람을 맞았다.

"늘 드는 생각이고 흔한 말이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 같아요.

 최선을 다했는지 아닌지는 자기 자신은 알아요.

 배우의 길에 장인이 있다면 묵묵히 제 위치에서 그 길을 가고 싶어요.

 <슈퍼스타 감사용>은 그런 점에서 첫 발을 들여놓는 작품 같아요."

 

 

 

가능이든 불가능이든

 

이범수에게는 오뚝이 같은 이미지가 있다.

착한 남자, 웃기는 놈, 개구쟁이 모두 그의 것이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힐 것 같은 큰 눈은 결코 약해 보이지 않는다.

단단한 배우로 인정받기까지 그를 업어다준 유명한 감독도 없고,

그를 태워다준 대단한 매니저도 없었지만

이범수는 쓰러질 듯 일어나며 꿋꿋하게 걸어왔다.

그의 노력은 가능을 만만해 하지 않고,

불가능을 조롱하지도 않으면서 배우의 삶을 기쁜 마음으로 일궈간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고양이는 고양이의 씨가 있고, 호랑이는 호랑이 씨가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호랑이가 되어 있는 이범수를 보고 흠칫 놀란다.

호랑이가 된 이범수는 ‘불가능이란 아무것도 아니다’고 포효하는 대신

필요한 먹이감을 찾아 조용히 어슬렁거린다.

이게 바로 고양이 이범수가 호랑이가 된 비결이다.

그의 사전엔 불가능도 가능도, 성공도 실패도, 웃음도 눈물도 모두 들어 있다.

 

 

 

한승희 기자 / 사진 정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