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유산...??? 저 결혼 안 했어요! 애를 밴 적도 없는데 무슨 유산이예요???"
"임신한 걸 몰랐던 거겠죠. 결혼도 안 한 아가씨가... 몸 함부로 굴리지 말아요.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나중에 정말 나쁜 병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 성병이 없길 다행이네요."
"에...에에????"
"그럼, 가 볼게요. "
"저.. 저기.. 언니, 저 여기 지금 나가면 안 될까요???"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 '보호자'분의 부탁으로 계속 계셔야 겠네요."
"에??? 언니이!!!!!"
소녀는 뒤돌아서 가는 간호사를 불러 보았지만, 이미 그녀는 병실을 나가고 없었다.
오른팔에 달린 링거액 줄이 조금은 거추장스러웠다.
소녀는 걱정이 되긴 하였으나, 이내 병실에서의 시간에 적응해 나갔다.
"뭐야? 여기 TV도 있네???? 케이블도 나온다!"
해맑은 표정이었다. 그 나이 때의 호기심을 간직한. 하얀 방의 색깔과 잘 어울리는, 하얀 환자복의 소녀.
어젯밤 붉은 피를 철철 흘리며 병원에 온, 19세의 나이에 엄마가 될 뻔했던 소녀는 거기에 없었다.
* *
"일은 잘 처리했더군. 지금 뒷처리하러 호선이 보냈어."
방금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다.
남자의 눈 앞에는 그의 상관으로 보이는 육중한 체구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렇습니까."
졸린 눈을 비비며 말하는 남자.
"그런데 누구 습격당했어? 그 등 뒤의 핏자국은 뭐야?"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님."
"이상한 냄새가 좀 나는데..... 피비린내 비슷한....."
"아아, 그냥... 나비................."
"나비??? 술집 여자 사귀었어? 생전 여자는 관심도 없었잖아?
하긴. 나는 그런 면 때문에 너를 신뢰하기도 하는 거니까."
마치 무슨 느와르 영화에 나오는, 젊은 여자 애인을 끼고 다니는 보스처럼 말하긴 하지만, 그 형님이란 남자는 33년째 완벽한 솔로 인생을 즐기시는(?) 중이다. (발렌타인 데이나 화이트 데이에 유난히 조직원들에게 사건 처리를 많이 맡기는 것도 그 즐김의 방식이란다. 오호 통재라.)
"장가는 언제 드실 겁니까. 형님."
"모르겠다... 아직 나는 젊은 총각의 나이다.
암튼, 이번 일 아주 깔끔하게 처리했더군. 증거가 거의 남지 않았어.
죄를 의심받을 일은 없을 거야. 조직에서 이미 허수아비를 준비해서 경찰로 보냈으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너, 참 유능한 놈이야..... 개인적으로는... 가끔 부럽다...."
".......... 형님은... 적어도 자기 자신조차 이유를 모르는 행동은 안 하시지 않습니까...."
"뭐, 어떠냐. 니가 죽지만 않는다면 나쁠 건 없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더 맡기실 일은 없습니까?"
"위에서도 뭐 들어오는 건 없다. 그냥, 합주나 한 번 맞춰 보자. "
"좋지요. 그거."
* *
시간은 의외로 빠르게 흘러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환하게 웃던 해는 벌써 잠을 자러 들어갔고, 다시 하늘에는 어둠이 깔렸다.
가까이 보이는 산 위로 보름달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어어? 달이네???? 예쁘다!~"
소녀는 창문에 얼굴을 대었다. 차가운 유리의 느낌이 기대고 싶을 만큼 시원했다.
달은 아름다웠다. 전혀 이지러지지 않은 원래의 모양새다. 둥그런 보름달, 깨끗하고 하얀 빛이 소녀를 보고 웃는 듯했다. 소녀는 넋을 놓고 보름달이 뜨는 장면을 감상했다.
서너 시간 후. 점점 질리기 시작한 때다. 아무도 병실에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만난 사람이라곤 간호사 뿐이었다. 그 보호자라는 남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대우를 받았다면 약간의 각오는 해야 한다는 걸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하지만, 생각했다. 장기 밀매나 창녀촌만 아니라면 기꺼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녀에게는 큰 돈을 부담할 만한 재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돌아갈 곳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소녀는 재빨리 이불 속에 몸을 감췄다.
나름대로의 생존 전략이라고 생각되었는지,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끔씩 눈을 감으며 자는 척했다.
'설마.. 저 사람이...'
남자가 들어왔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 가방을 든 남자였다. 남자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환자는 무사합니까?"
"네. 좀전에 깨어났는데, 지금은 자고 있군요."
"따로 찾아온 보호자라던가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요??"
"예. 혹시 보호자분과 저 분의 관계는..????"
"면식 없는 사람입니다."
남자는 그러면서 소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아무런 경계심도 없는 듯한 자세로 소녀의 침대 옆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소녀는 남자가 잠시 나간 사이에 가방을 만지작거려 보았다.
잠금 장치가 단단히 채워져 있어야 할 가방은 그 날따라 이상하게도 열려 있다.
'이... 이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소녀는 가방 속의 물건을 재빨리 품 속에 챙겨 넣는다. 그것도 속옷 안에 단단히. 와이어와 컵이 있어서인지, 그 안에 넣은 물건은 거의 빠질 일이 없다. 그리고 웬만큼 간 큰 놈이 아닌 이상 거기까지 뒤지는 놈이 있을 확률은 극히 적다.
이윽고, 남자가 다시 다가왔다.
"가자."
"....???"
"자는 척하는 것쯤은 다 파악할 수 있어."
"네...??? 네에..."
"옷 갈아 입어. 퇴원 수속 할 거다."
"아, 예..."
옷을 던지듯이 건네는 남자. 소녀는 뭔가 불안하기도 하고 안심이 되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둘 다에게.
같이 병원 문을 나서는 길.
남자는 그 전처럼 붉은 담벼락이 있는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 길을, 소녀도 뒤따라 걷고 있었다.
"집에 안 가냐."
"집 없어요. 가출했거든요."
"부모님 보기 싫어?"
"돌아갈 생각 없어요. 집도 절도 없는 신세지만."
"너, 나이가 도대체 몇이야?"
"열아홉이요. 겉으론 어때 보일지 몰라도,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탰어요."
"도대체 몸을 어떻게 굴렸길래 자살 시도에 유산까지 한 거야?"
"그건 내 사정이에요. 아저씨가 상관할 일 아니잖아요?
근데 나, 유산한 거 맞대요?"
" 니 덕분에 오랜만에 세탁비라는 걸 내 봤다."
"진짜? 와아 - 잘됐다-! 적어도 자동으로 미혼모 신세는 면한 거네?"
" 너,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태아라도 생명이란 게 있는 거야. 그게 죽었으면 애엄마로써 슬퍼해야지, 그걸 왜 기뻐해? 낙태는 살인 행위야. 생명이 얼마나..."
철컥-
소녀는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는 팔을 뻗어 남자에게 겨누었다.
철컥-
남자 역시도 총을 장전해 소녀에게 겨눴다. 익숙한 폼이었다.
"너... 살려줬으면 얌전하게 니 소속으로 돌아가라."
"헤에 - 놀라신 눈치네?? 미리 말씀드리는 거지만,
지금 저는 조직 따위에 속해 있는 사람이 절대 아니랍니다♡"
"그럼 그 총은 왜 나한테 겨눈 거냐?"
"이거, 아까 아저씨 가방에서 꺼낸 거예요.
피묻은 손수건도 함께 있더라구요. 칼하고 같이."
"...!!!!!!!!!!!!!!!!!!!!!!!!!!!!!"
"가방에 이런 걸 넣고 다니는 사람이, 생명 어쩌고 운운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거 정도면, 사람 하나쯤 죽이는 건 일도 아니겠군요. 완전히.. 껌...이겠죠????
그러니까, 괜히 꼴통스런 어른들처럼 문자 쓰려고 하지 말아요. 도덕 교과서에 있는 그 정도의 내용은 중학교 때 나도 달달달 외워 놨으니까요.
아아, 게다가 그 피묻은 손수건, 변색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간호사 언니가 그랬는데, 제 옷에 피로 찍혀진 손자국이 있었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아까 낮에 뉴스를 보니까, 살인 사건이 하나 일어났대요. 붉은 담벼락에, 사람이 찔려 죽어 있었다고........."
Angel[ 01. 나비 ] - 제 3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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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입니다. 환자의 생명에는 별 지장 없습니다."
"그러면....."
"역시, 유산입니다. 자연 유산. 아아, 유산이 되면 원래 출혈이 있는 것이니, 별다른 병은 없습니다. 몸조리만 좀 신경써서 하면 되겠군요."
"감사합니다. 입원은 내일까지 정도로 하면 되겠습니까?"
"예. 그 정도면..."
산부인과 병실. 남자는 난생 처음 산부인과라는 곳에 와 본다.
여자는 수혈로 겨우겨우 위기를 넘기고 진찰을 받은 후에 입원시켰다.
진료비와 수혈받은 혈액 값은 이미 지불했다.
꽤 비싼 돈인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서슴없이 돈을 내었다.
그러면서도 바로 앞에 세상 모르고 누워 있는 여자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왜 그 여자를 구해 주었는지, 그렇게까지 살리려고 애썼는지, 그것도 하필 그런 날 그런 밤에, 빨갛게 피가 묻은 손으로...
그 자신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무엇엔가 이끌린 듯이 행동했을 뿐이다.
어쩌면 이 기억은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지워져 버릴 지도 모른다.
꿈일지도 몰라. 차라리 꿈이라면 나을까. 어느 철학자가 말했었던, 그 말도 안 되는 나비 꿈같은 거라면.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는 다시 어두운 골목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달은, 구름 속에 가려 더 이상 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날 밤, 아니 그 남자가 돌아간 새벽에는.
다음날-
"으... 으음...???"
소녀는 눈을 떴다.
좀전에 떠오른 새하얀 아침의 햇살이 피부를 간질였다.
"여긴... 어디지...????"
소녀는 주위를 돌아 보았다.
주위는 온통 흰색이었다. 방에 놓여 있는 것은 자기가 누워 있는 하얀 침대, 하얀 냉장고. 벽조차 새하얀 이 곳.
생전 처음 와 보는 낮선 풍경에 가늘게 뜨여져 있던 소녀의 눈이 순식간에 동그랗게 변했다.
"으아... 이거 뭐야...????"
"뭐긴... 병원이지요. 어서 식사하세요."
하얀 공간. 흰옷을 입은 간호사가 들어와 식판을 건넸다.
"벼... 병원이요..????"
"환자분께서는 아무 기억이 없으시군요. 저도 그 많은 환자들을 보았어도 기억하는데....
어제, 어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분께서 환자분을 업고 오시더라구요.
급히 수혈하고 진료하고 입원 수속을 했지요. 병원비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그분께서 다 지불하겠으니까요."
"에에???? 근데 여기 병실이...???"
"특실이예요. 혹시 아는 사람인가요? 젊은 사람인 것으로 보아 아버지 같지는 않고... 혹시..??"
"특실이라... 미쳤군 미쳤어.... 나같은 인간한테....."
소녀는 어리버리한 표정으로 내뱉듯이 말했다.
"아참, 그리고 간호사 언니, 저 그런 무서운 사람 몰라요. 검은 양복 입었다면서요....혹시 그분 이름은 아세요???"
"아뇨. 저도 몰라요. 그런데, 겉보기엔 좀 무서워 보였어도 착한 사람 같았어요. 당신의 피로 인해 등 뒤가 다 젖었거든요."
"피... 그러면.. 생리...???? 생리로 병원까지 올 리는 없는데...?"
"아가씨 몇 살이예요??"
"여... 열 여덟이요...."
"어린 나이에, 안됐군요. 아가씨 유산했어요. 다행히 피를 조기에 공급해서 지금처럼 깨어나긴 했지만."
"유... 유산...??? 저 결혼 안 했어요! 애를 밴 적도 없는데 무슨 유산이예요???"
"임신한 걸 몰랐던 거겠죠. 결혼도 안 한 아가씨가... 몸 함부로 굴리지 말아요.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나중에 정말 나쁜 병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 성병이 없길 다행이네요."
"에...에에????"
"그럼, 가 볼게요. "
"저.. 저기.. 언니, 저 여기 지금 나가면 안 될까요???"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 '보호자'분의 부탁으로 계속 계셔야 겠네요."
"에??? 언니이!!!!!"
소녀는 뒤돌아서 가는 간호사를 불러 보았지만, 이미 그녀는 병실을 나가고 없었다.
오른팔에 달린 링거액 줄이 조금은 거추장스러웠다.
소녀는 걱정이 되긴 하였으나, 이내 병실에서의 시간에 적응해 나갔다.
"뭐야? 여기 TV도 있네???? 케이블도 나온다!"
해맑은 표정이었다. 그 나이 때의 호기심을 간직한. 하얀 방의 색깔과 잘 어울리는, 하얀 환자복의 소녀.
어젯밤 붉은 피를 철철 흘리며 병원에 온, 19세의 나이에 엄마가 될 뻔했던 소녀는 거기에 없었다.
* *
"일은 잘 처리했더군. 지금 뒷처리하러 호선이 보냈어."
방금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다.
남자의 눈 앞에는 그의 상관으로 보이는 육중한 체구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렇습니까."
졸린 눈을 비비며 말하는 남자.
"그런데 누구 습격당했어? 그 등 뒤의 핏자국은 뭐야?"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님."
"이상한 냄새가 좀 나는데..... 피비린내 비슷한....."
"아아, 그냥... 나비................."
"나비??? 술집 여자 사귀었어? 생전 여자는 관심도 없었잖아?
하긴. 나는 그런 면 때문에 너를 신뢰하기도 하는 거니까."
마치 무슨 느와르 영화에 나오는, 젊은 여자 애인을 끼고 다니는 보스처럼 말하긴 하지만, 그 형님이란 남자는 33년째 완벽한 솔로 인생을 즐기시는(?) 중이다. (발렌타인 데이나 화이트 데이에 유난히 조직원들에게 사건 처리를 많이 맡기는 것도 그 즐김의 방식이란다. 오호 통재라.)
"장가는 언제 드실 겁니까. 형님."
"모르겠다... 아직 나는 젊은 총각의 나이다.
암튼, 이번 일 아주 깔끔하게 처리했더군. 증거가 거의 남지 않았어.
죄를 의심받을 일은 없을 거야. 조직에서 이미 허수아비를 준비해서 경찰로 보냈으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너, 참 유능한 놈이야..... 개인적으로는... 가끔 부럽다...."
".......... 형님은... 적어도 자기 자신조차 이유를 모르는 행동은 안 하시지 않습니까...."
"뭐, 어떠냐. 니가 죽지만 않는다면 나쁠 건 없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더 맡기실 일은 없습니까?"
"위에서도 뭐 들어오는 건 없다. 그냥, 합주나 한 번 맞춰 보자. "
"좋지요. 그거."
* *
시간은 의외로 빠르게 흘러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환하게 웃던 해는 벌써 잠을 자러 들어갔고, 다시 하늘에는 어둠이 깔렸다.
가까이 보이는 산 위로 보름달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어어? 달이네???? 예쁘다!~"
소녀는 창문에 얼굴을 대었다. 차가운 유리의 느낌이 기대고 싶을 만큼 시원했다.
달은 아름다웠다. 전혀 이지러지지 않은 원래의 모양새다. 둥그런 보름달, 깨끗하고 하얀 빛이 소녀를 보고 웃는 듯했다. 소녀는 넋을 놓고 보름달이 뜨는 장면을 감상했다.
서너 시간 후. 점점 질리기 시작한 때다. 아무도 병실에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만난 사람이라곤 간호사 뿐이었다. 그 보호자라는 남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대우를 받았다면 약간의 각오는 해야 한다는 걸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하지만, 생각했다. 장기 밀매나 창녀촌만 아니라면 기꺼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녀에게는 큰 돈을 부담할 만한 재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돌아갈 곳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소녀는 재빨리 이불 속에 몸을 감췄다.
나름대로의 생존 전략이라고 생각되었는지,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끔씩 눈을 감으며 자는 척했다.
'설마.. 저 사람이...'
남자가 들어왔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 가방을 든 남자였다. 남자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환자는 무사합니까?"
"네. 좀전에 깨어났는데, 지금은 자고 있군요."
"따로 찾아온 보호자라던가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요??"
"예. 혹시 보호자분과 저 분의 관계는..????"
"면식 없는 사람입니다."
남자는 그러면서 소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아무런 경계심도 없는 듯한 자세로 소녀의 침대 옆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소녀는 남자가 잠시 나간 사이에 가방을 만지작거려 보았다.
잠금 장치가 단단히 채워져 있어야 할 가방은 그 날따라 이상하게도 열려 있다.
'이... 이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소녀는 가방 속의 물건을 재빨리 품 속에 챙겨 넣는다. 그것도 속옷 안에 단단히. 와이어와 컵이 있어서인지, 그 안에 넣은 물건은 거의 빠질 일이 없다. 그리고 웬만큼 간 큰 놈이 아닌 이상 거기까지 뒤지는 놈이 있을 확률은 극히 적다.
이윽고, 남자가 다시 다가왔다.
"가자."
"....???"
"자는 척하는 것쯤은 다 파악할 수 있어."
"네...??? 네에..."
"옷 갈아 입어. 퇴원 수속 할 거다."
"아, 예..."
옷을 던지듯이 건네는 남자. 소녀는 뭔가 불안하기도 하고 안심이 되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둘 다에게.
같이 병원 문을 나서는 길.
남자는 그 전처럼 붉은 담벼락이 있는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 길을, 소녀도 뒤따라 걷고 있었다.
"집에 안 가냐."
"집 없어요. 가출했거든요."
"부모님 보기 싫어?"
"돌아갈 생각 없어요. 집도 절도 없는 신세지만."
"너, 나이가 도대체 몇이야?"
"열아홉이요. 겉으론 어때 보일지 몰라도,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탰어요."
"도대체 몸을 어떻게 굴렸길래 자살 시도에 유산까지 한 거야?"
"그건 내 사정이에요. 아저씨가 상관할 일 아니잖아요?
근데 나, 유산한 거 맞대요?"
" 니 덕분에 오랜만에 세탁비라는 걸 내 봤다."
"진짜? 와아 - 잘됐다-! 적어도 자동으로 미혼모 신세는 면한 거네?"
" 너,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태아라도 생명이란 게 있는 거야. 그게 죽었으면 애엄마로써 슬퍼해야지, 그걸 왜 기뻐해? 낙태는 살인 행위야. 생명이 얼마나..."
철컥-
소녀는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는 팔을 뻗어 남자에게 겨누었다.
철컥-
남자 역시도 총을 장전해 소녀에게 겨눴다. 익숙한 폼이었다.
"너... 살려줬으면 얌전하게 니 소속으로 돌아가라."
"헤에 - 놀라신 눈치네?? 미리 말씀드리는 거지만,
지금 저는 조직 따위에 속해 있는 사람이 절대 아니랍니다♡"
"그럼 그 총은 왜 나한테 겨눈 거냐?"
"이거, 아까 아저씨 가방에서 꺼낸 거예요.
피묻은 손수건도 함께 있더라구요. 칼하고 같이."
"...!!!!!!!!!!!!!!!!!!!!!!!!!!!!!"
"가방에 이런 걸 넣고 다니는 사람이, 생명 어쩌고 운운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거 정도면, 사람 하나쯤 죽이는 건 일도 아니겠군요. 완전히.. 껌...이겠죠????
그러니까, 괜히 꼴통스런 어른들처럼 문자 쓰려고 하지 말아요. 도덕 교과서에 있는 그 정도의 내용은 중학교 때 나도 달달달 외워 놨으니까요.
아아, 게다가 그 피묻은 손수건, 변색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간호사 언니가 그랬는데, 제 옷에 피로 찍혀진 손자국이 있었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아까 낮에 뉴스를 보니까, 살인 사건이 하나 일어났대요. 붉은 담벼락에, 사람이 찔려 죽어 있었다고........."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겨우 살린 목숨 다시 죽이고 싶지 않다. 돌아......"
"신고 안 할게요.
나도 살인자니까요.
아저씨처럼."
"....................................................................................................................."
잠시 동안의 정적.
"따라와. 어두우니까 조심해."
한참을 말없이 걸어가는 두 사람.
"아참, 제 이름은 홍지수예요. 아저씨 이름은요?"
"김혁건."
"멋진 이름이네요."
달빛이, 유난히도 환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