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有. 영화 보실 분은 패스하세요) 오늘을 사는 여자와, 내일을 준비하는 남자의 조건부적 연애. 허진호 영화에 너무 많은 기대는 말자- 라고 다짐했지만, 임수정의 포스에 밀려 결국 부푼 기대를 안고 보고 말았다. (아..같은 여자가 봐도, 그녀는 정말 인형처럼 예쁘지 않은가) 감독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를 기점으로, 변해버린 사랑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싶었노라 말했지만, 나는 영화에서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보다는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를 보았다. (다만, 이 영화에서 물리적, 심리적으로 아파하는 사람은 남자가 아닌 여자 주인공이다) 은희(임수정)와 영수(황정민)의 파국은, "8월의 크리스마스"의 두 남녀가 극간을 좁혔더라면, 역시나 발생했을 법한 불가피한(그래서 좀 뻔한) 결말이다. 은희가 영수에게 헌신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폐가 40 퍼센트 밖에 남지 않은 불쌍한 이 여자에게 영수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선은 그저, "함께 살아주고, 함께 밥 먹어주는 것"이다. (그녀가 밥을 먹는데 두 시간이 걸릴 지언정, 끝까지 밥상에 함께 앉아있어주는 예의는 기본)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은희에게는 내일이나 모레가 아닌 "오늘의 행복"이 전부이고, 따라서 노후자금이 얼마나 필요한지, 남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하는 것들은 의미가 없다. 둘 다 병자일 때는 성립되던 이 소박한 연애가, 한 쪽(황정민)의 병이 나으면서 깨져버린다. 건강해진 영수는 필연적으로 오늘의 노동을 통해 내일의 행복을 비축해두고자 하고, 건강을 무기로 세상적인 것 - 술, 여자, 쾌락- 을 다시 탐하게 된다. 내일을 준비하고자 하는 사람과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그 둘 사이의 연애는 성립될 수 없다. "우리 같이 살래요?"라고 말할 때, 은희는 영수에게 암묵적인 계약을 걸어온 것이다. "너의 오늘을 내게 할애해. 내가 너의 미래(건강)를 되찾아줄게." 그럼에도 영수는 은희에게 "개새끼"가 된다. 조건부적 계약이었을 지언정, 인간은 감정의 노예. 덜 사랑한 쪽이, 더 사랑한 쪽에겐 언제나 죄인일 수 밖에 없다. 세상으로 복귀한 영수는, 반복되는 일상으로 다시 건강을 잃고, 은희의 죽음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만, 되돌아간다해도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 미래가 있는 사람과 미래가 없는 사람의 제한적 행복. 영화는 그 조건부적 소통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가, 자신의 병을 마지막까지 심은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당연하고도 현명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 오늘이 전부인 한석규(=은희)가 아닌 내일을 가진 심은하(=영수)가 약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영화의 끝까지 유지된 둘 사이의 간극때문일지니.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한석규를 원망하며 심은하는 그의 사진관 유리에 돌을 던지며 아파하지만, 한석규는 은희의 아픔을 모른채 눈을 감는다. 아빠뻘은 족히 되어 보이는 제비족 영수를 끝까지 무시했다면, 은희 역시 편하게 눈 감을 수 있었을텐데. 서울 제비족과의 일 년 연애가 과연, 땅바닥을 뒹굴 정도의 아픔과 교환가치가 있었을까. 덧. 영화 자체는 볼만하지만, 허진호의 영화는 역시나 내겐 너무 쓸쓸하고 궁상 맞아- 라고 생각했다.
행복
(스포일러 有.
영화 보실 분은 패스하세요)
오늘을 사는 여자와,
내일을 준비하는 남자의
조건부적 연애.
허진호 영화에 너무 많은 기대는 말자-
라고 다짐했지만,
임수정의 포스에 밀려 결국 부푼 기대를 안고 보고 말았다.
(아..같은 여자가 봐도,
그녀는 정말 인형처럼 예쁘지 않은가)
감독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를 기점으로,
변해버린 사랑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싶었노라 말했지만,
나는 영화에서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보다는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를 보았다.
(다만, 이 영화에서 물리적, 심리적으로 아파하는 사람은
남자가 아닌 여자 주인공이다)
은희(임수정)와 영수(황정민)의 파국은,
"8월의 크리스마스"의 두 남녀가 극간을 좁혔더라면,
역시나 발생했을 법한 불가피한(그래서 좀 뻔한) 결말이다.
은희가 영수에게 헌신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폐가 40 퍼센트 밖에 남지 않은 불쌍한 이 여자에게
영수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선은 그저,
"함께 살아주고, 함께 밥 먹어주는 것"이다.
(그녀가 밥을 먹는데 두 시간이 걸릴 지언정,
끝까지 밥상에 함께 앉아있어주는 예의는 기본)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은희에게는 내일이나 모레가 아닌
"오늘의 행복"이 전부이고,
따라서 노후자금이 얼마나 필요한지,
남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하는 것들은 의미가 없다.
둘 다 병자일 때는 성립되던 이 소박한 연애가,
한 쪽(황정민)의 병이 나으면서 깨져버린다.
건강해진 영수는 필연적으로
오늘의 노동을 통해 내일의 행복을 비축해두고자 하고,
건강을 무기로 세상적인 것 - 술, 여자, 쾌락- 을 다시 탐하게 된다.
내일을 준비하고자 하는 사람과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그 둘 사이의 연애는 성립될 수 없다.
"우리 같이 살래요?"라고 말할 때,
은희는 영수에게 암묵적인 계약을 걸어온 것이다.
"너의 오늘을 내게 할애해.
내가 너의 미래(건강)를 되찾아줄게."
그럼에도 영수는 은희에게 "개새끼"가 된다.
조건부적 계약이었을 지언정,
인간은 감정의 노예.
덜 사랑한 쪽이,
더 사랑한 쪽에겐 언제나 죄인일 수 밖에 없다.
세상으로 복귀한 영수는,
반복되는 일상으로 다시 건강을 잃고,
은희의 죽음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만,
되돌아간다해도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
미래가 있는 사람과 미래가 없는 사람의 제한적 행복.
영화는 그 조건부적 소통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가,
자신의 병을 마지막까지 심은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당연하고도 현명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
오늘이 전부인 한석규(=은희)가 아닌
내일을 가진 심은하(=영수)가 약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영화의 끝까지 유지된 둘 사이의 간극때문일지니.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한석규를 원망하며
심은하는 그의 사진관 유리에 돌을 던지며 아파하지만,
한석규는 은희의 아픔을 모른채 눈을 감는다.
아빠뻘은 족히 되어 보이는 제비족 영수를 끝까지 무시했다면,
은희 역시 편하게 눈 감을 수 있었을텐데.
서울 제비족과의 일 년 연애가 과연,
땅바닥을 뒹굴 정도의 아픔과 교환가치가 있었을까.
덧.
영화 자체는 볼만하지만,
허진호의 영화는 역시나 내겐 너무 쓸쓸하고 궁상 맞아- 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