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관용이 나라도 구한다는 것을 3초만 생각하자

이진경200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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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은 남을 존중하는 것이다. 남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한다면 개인주의이며 더 나아가서 이기주의일 것이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창작과비평사 펴냄) 라는 책이 한때 베스트셀라가 되었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똘레랑스'라는 단어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 책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똘레랑스에 대해 저자가 강조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저자 홍세화는 우리 사회가 똘레랑스가 있는 나라가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럼 똘레랑스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야 그 말의 의미가 파악된다. '똘레랑스(tolerance,라틴어 toleare)' 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무엇을 '지탱한다'혹은 '감수한다(supporter)'라는 뜻에서 유래한 외래어로, 우리말 '관용'이라는 단어로 번역 할 수 있다. 의미를 좀 더 세부적으로 파악하면, '(남을)존중하여 (남으로 하여금 자신을)존중하게 하는 것'이 바로 똘레랑스 정신이라고 한다.

 

 

결국 똘레랑스는 간단하게 말해, 관용을 베풀어서 자신에게도 타인이 관용을 베풀게 하라는 뜻쯤으로 풀이된다. 홍세화 선생님이 강조했듯이 관용은 매우 중요하다. 관용은 남을 존중하는 것이다. 남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한다면 개인주의이며 더 나아가서 이기주의일 것이다.

 

이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사회를 멍들게 한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개개인이 스스로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더욱 고립되어 사람간의 소통이 더욱 힘들어진다. 물론 이런 관용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지켜져야 한다. 작은 관용이 얼마나 큼 힘이 되어 돌아오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궁궐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왕과 신하가 흥겨운 마음으로 잔치를 즐기고 있을 즈음, 느닷없이 불이 모두 꺼져버렸다. 깊은 밤이라 주위는 그대로 암흑이었고, 이때를 틈타 누구가가 왕이 가장 총애하는 애첩에게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애첩은 엉겹결에 그 사람의 갓끈을 잡아 뗐고, 곧이어 분한 목소리로 왕에게 고했다.

 

그러자 이 말에 왕은 노발대발, 당장에라도 그 놈을 잡아 죽일 듯이 노기등등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왕의 입에서 나온 명령은 좀 이상한 것이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갓끈을 떼지 않는 자가 있으면 용서치 않겠다!" 이러한 왕의 호령에 신하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모두 서둘러 갓끈을 데어냈다. 이후 불을 켜 주위는 밝아졌으나 다 갓끈을 떼어냈는지라 무례한 작자를 가려낼 방도가 없었다. 다시 왕이 말했다.

 

"나의 애첩에게 입을 맞춘 무례한 놈은 살려둘 수 없다. 하나 그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으니 이번만은 없던 일로 하겠다. 더 이상 그 일에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잔치를 즐겨라." 그리하여 풍악은 다시 울렸고,  왕과 신하는 또다시 흔쾌한 마음으로 밤새도록 흥겹게 놀았다.

 

 

그 후 몇년이 지나 나라에 위급한 일이 닥쳤다. 이웃의 강대국이 군사를 이끌고 침범해온 것이다. 나라의 존립이 위태롭게 된 마음에 왕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웃나라의 대병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였다. 별안간 어떤 장수 하나가 날렵한 군사를 이끌고 비호처럼 나타나 적군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적군은 마침내 패퇴하고야 말았다.

 

"이럴 수가! 이게 도대체 어찌된 영문이오? 장군은 도대체 누구요?" 놀라서 묻는 왕에게, 그러나 그 장수는 왕 앞에 무릎을 끓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페하께서 저에게 베푼 은혜를 오늘에야 조금 갚았을 뿐입니다. 몇 년 전 궁에서 베푼 연회를 기억하시는지요? 제가 바로 그날 폐하의 애첩에게 불측한 짓을 저지른 무뢰한입니다. 하오나 폐하의 은혜를 입어 무사하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하여 언제고 폐하께 목숨을 바칠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남 몰래 군사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순간의 작은 관용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일화다.

 

이렇듯 조그마한 관용을 베풀면 그것이 태산보다 더한 보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사실을 통찰하고 홍세화 선생님은 그렇게 똘레랑스를 강조했는지 모른다. 누구나 베푼 관용이 다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관용을 베풀면 위급할 때 관용을 베풂을 받을 것이지만, 관용을 베풀지 않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관용을 바라지 못할 것이다.

 

 

관용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자신이 베푼 작은 관용이 이 사회를 아름답게 할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믿을 수 없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3초의 여유를 갖고 자신을 위해, 자신의 가족을 위해, 자신이 소속된 사회를 위해, 자신의 나라를 위해 베푸는 관용이 자신을 위해 베푸는 관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