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사과가 있는 국도/배수아

안현수2007.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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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과가 있는 국도/배수아

그도 나 때문에 슬퍼하지 않고 나 때문에 기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어느날 새벽 이슬이 축축하게 내린 강둑길이 내려다보이는호텔 창가에서 스타킹을 신다 말고 그에게,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이제 너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식으로는"

하고 말할 생각도 결코 없다. 대신에,

"난 외로워서 상처를 입었거든" 이렇게 언젠가 말하였다.

"나는 애정 속에서 질식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

"언제 그런 걸 느꼈니?" 그가 넥타이를 매면서 물었다.

"여섯살 때"

"조숙한 거니, 불쌍한 거니"

"양쪽 다 였을 거야, 아마"

"나는 섹스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

"그게 언제였는데?"

"고등학교 이학년 때"

나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그의 등을 보고 있다.

열어놓은 창으로는 젖은 새벽 풀잎 향기가 물결치면서 밀려온다.

서울로 향하는 국도에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있다.

그가 구두를 신으면서 한 손을 더듬어

테이블 위의 마시다 만 김빠진 맥주가 담긴 잔과 립스틱 묻은 담배꽁초,

어지럽혀진 냅킨들 사이에서 담뱃갑을 찾아내어 주머니에 넣는다.

 

섹스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고등학교 이학년의 남자아이와

애정결핍으로 영원한 불치병에 걸린 여섯살 여자아이가

손을 잡고 호텔방을 나선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 배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