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신 숭배자도 아니면서, 나는 읽던 페이지를 표시하기 위해 한쪽 귀퉁이를 접을 수가 없다. - 장서표 난 단지 내 소중한 책이 접히는게 견딜 수가 없다. 하다못해 겉표지의 선전문구조차도 훼손되게 놔둘수가 없다. 그래서 늘 책갈피를 사용한다. 하지만 간사하게도, 빌린책은, 한쪽 귀퉁이를 소심하게 접어서 읽던 곳을 표시하고는 한다. 책을 빌려주는 일은 심각한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 그 책 맘에 들었던 모양이네. 그거 이제 돌려주지 않을래?""아, 맞아, 그거 네 책이었지. 그런데 그거 마리한테 빌려줬는데 어떡하지?"- 빌려주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 책을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는 사람. 책을 더럽히고, 찢고, 심하게는 커버와 속지를 분리해서 돌려주는 사람. 그래서 나 또한 책을 빌려주는게 너무 무서워. 여행을 해야 한다면, 죽은 당나귀만큼 무겁더라도 그 책만은 자동차 트렁크나 비행기 화물칸에 방치하지 않고 손가방 속에 곱게 넣어 품에 안고 다닌다. - 빌리기 다른건 잡동사니처럼 가방에 쑤셔박아도, 내가 산 책만은 품에 고이 안고 다니는 내모습.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책장 선반을, 혹은 늙은 고참병들 사이에서 벼락출세한 촌놈처럼 눈에 거슬리는 번지르르한 곁표지 속의 새 책을 원망의 눈길로 바라보느니, 빌려주거나 거의 뺏기다시피 하느니, 나는 아예 주고 만다. - 선물 책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심하게 훼손된채로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때, 나는 같은 책을 하나 더 사고 만다. 고상하고 견딜만한 것은 책과 와인 병에 쌓인 먼지 뿐이다. - 냄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는 오래된 책에서 나는 종이냄새. 그래서 미친듯이 도서관을 좋아하는지도. 몇만명의 사람이 밟았는지도 모르는 더러운 카펫위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책장과 책 사이에 기대서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게 나의 가장 커다란 낙. 각각의 책은 연주자의 손가락에 따라 다르게 울리는 독특한 악기다. 플레이아드의 플루트에서 프티 로베르의 바순에 이르기까지, 그 음색은 기악가의 영감에 따라 다양하다. - 음악 에쿠니 가오리는 잔잔한 유키구라모토의 뉴에이지처럼, 요시모토 바나나는 조금은 극적인 베르디의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무리 들어도 난해한 헤비메탈처럼, 괴테는 장중한 베토벤의 소나타, 츠지 히토나리는 달콤달콤 팝발라드, 아멜리 노통은 생각많은 이적의 노래 가스통 르루는 다이나믹한 뮤지컬 음악, 파울로 코엘류는 세상사를 담고있는 통기타 포크송처럼. 이게 내 책과 음악에 대한 접근법. 누가 나에게 "최근에 읽은 것 중에 뭐가 좋았어?" 라고 질문을 하면 무슨 조화인지 나는 완전한 건망증속을 헤매게 된다....그래서 나는 시내에서 저녁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복습을 하기에 이르렀고, 한 달 동안 날 살아가게 만든 책 목록 작성을 게을리하는 나의 나태한 성격과 싸우고 있다 - 입소문 그래서 나는 할게 산더미같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시험기간에 이렇게 감상문을 쓰고 있는거지. 포르트 드 슈와지와 이브리 사이의 도시 순환도로를 잇는 다리에서 얻는 영감은 그보다는 못하다. 하지만 한쪽은 노란빛, 다른 쪽은 붉은빛으로 이어지는 차의 물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회전 경보등의 인디고빛(평화를 사랑하는 나는,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거나 불이 나 건물 한 채가 몽땅 타고 있다고 상상하기보다는 어떤 엄마가 출산을 하고 있다고, 사랑에 빠진 구급차 운전사가 급히 약속장소로 달려가고 있다고 치부한다) 앞에서 갈라지는 밤에는 그 다리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지하철, 잠, 일 어쩜 저렇게 예쁘게 색을 볼 수 있는지, 어쩜 저렇게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독서광은 아니더라도 책을 즐겨 읽던 사람이 책 읽기를 마다하면 그건 분명 어떤 병의 징후다. "책 읽을 마음조차 안 생겨." 이 말은 신경쇠약, 피곤, 슬픔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는 것을 뜻한다. - 신경쇠약 전적으로 동감. 책이 읽기 싫을땐, 세상을 살아가는게 싫을때. 공구 서적과 사전을 아령처럼 사용하는 웨이트 트레이닝 덕분에 운동선수처럼 단단한 근육과 맑은 정신을 갖게 되면, 나는 가끔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들을 정돈할 엄두를 낸다. - 정돈 내 법대 전공서적들과 논문뭉치들, 판례집들은 언제나 내 이두근을 튼튼하게 만들어주곤 하지. 책을 가지고 다니는 일만으로도 독서광은 부두 노동자로 변하고 만다. 간단히 말해, 적어도 3킬로그램을 어깨에 메거나 등에 짊어지고 다니다 보면, 제 2경추부터 미저골에 이르기까지 척추가 변형되어 망가진다. 고개를 숙이고 책을 들여다보는 모든 독서광을 호시탐탐노리는 경부 관절통이나 책을 읽을 때면 대부분 어딘가에 괴고 있는 팔꿈치에 생기는 까끌까끌한 못이나 접촉성 피부병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열정적인 책 읽기는 나름대로 위험도 있고 일상생활에 장애를 주기도 한다. 그것은 귀를 약간 멀게 만든다 ("그거 다 읽고 나서 샐러드 좀 사다줄래?" "......"). 끓기 시작한 주전자의 분노에 찬 날카로운 외침만이 독서광을 선택성 청각 장애에서 끄집어낼 수 있다 당근이야 타든 말든 그는 아무냄새도 못 맡는다(일시적 후각상실증).독서는 잠을 못 자게 만든다. 독서광은 일곡 있던 책을 덮기보다는 '잠의 열차'(두 시간마다 지나가는)를 고의적으로 놓치고 만다.독서광은 감정이 풍부하다. 웃다가도 금세 눈물을 흘린다.독서광은 기억상실증 환자다. 새것이 옛것을 대신한다.독서광은 손전등, 가로등, 깜빡이는 네온등, 자동차 미등, 촛불의 가물가물한 빛 아래에서도 눈을 비벼가며 책을 읽을 수 있다. 대부분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안경을 쓴다. - 독서광 일반병리학 난 책을 못읽게 하는 엄마때문에 늘 화장실 백열등 아래에서 쪼그리고 앉아 책을 봤고,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안경을 썼으며, 풍부한 감정때문에 조울증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아직도 비행기 지하철 버스안 가리지 않고 열심히 책을 보고, 라식수술 이후 악화된 안구건조증에도 이를 악물고 안약을 넣으면서 책을 읽어. 경부관절통과 거북이 목은 이제 내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렸지. 척추측만증은 S라인이 되어야 할 내 바디라인을 제쳐두고 척추부터 목뼈까지 예쁘고 완벽하게 S라인으로 만들고 말았어. 가방에 책 여러 권을 - 나머지 소지품도 함께 - 늘 넣고 다닐 정도로 체력이 튼튼하면서도 독서광은 어떤 심리적인 허약함, 병적일 정도의 예민함을 보인다. - 무례함 내 병적일정도의 편집증. 책에 있는 글자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야해. 저자 약력, 소개, 에필로그, 프롤로그는 물론이고, 실려있는 동일 출판사의 타 서적 광고까지 한글자도 빠짐없이. 나는 데이고, 찔리고, 베이고, 부딪히고, 열쇠, 약속, 사람 이름을 까먹는다. 물건들도 - 그들도 영혼을 가지고 있다 - 한 몫을 하려고 끼어든다. 식기세척기, 컴퓨터, 자동차, 다리미, 배기 후드, 커피 메이커, 인터폰, 모든 것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장난다.온 우주가 짜고 날 곯리려는 것만 같다. 대형 할인매장 계산원이 바로 내 차례에서 금전등록기 종이를 바꿔 끼우고, 차가 고장 나 지하철을 타려고 하면 운전사들이 파업을 하고, 여름 옷가지들을 정리해 장롱 속에 넣고 나면 날씨가 예외적으로 더워진 거리는 일기 예보다 나온다. - 실수 누구나 이렇게 심한 머피의 법칙을 겪을때가 있지. 그 책들은 그야말로 두껍다. 권 보다는 톤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만하다. 그 책들은 내 가방을 축 늘어지게 만들고, 내 어깨에 톱질을 해대고, 내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게 만들고, 게처럼 걷게 한다.침대에 누워 읽을 때에도 손에서 자꾸 떨어진다. 그래서 이두박근에 무리를 주지 않은 채 눈높이에 맞게 유지하려면 배 위에 베개를 겹쳐 받치는 수밖에 없다. 앉아서 읽을 때는 무릎 위에 올려 놓고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다.목 통증과 관절 통증은 따 놓은 당상이다 - 두꺼운 책 그래서 나는 배 위에 판도라를 올려두고 미안하지만 판도라의 머리위에 책을 올리고, 등 뒤에 베개를 받힌 채로 책을 읽고는 해. 고령화 사회가 도래한 지금, 광학 산업이 세상을 똑바로 보기 위해 안경에 의존하지 않는, 자신이 근시인 것에 만족하는 근시들을 위한 안경을 만들기로 결심한다면 성공할 거라고 나는 예상한다.특히 7세부터 77세까지의 독자가 읽는 책을 문학적 난이도가 아니라 노안의 정도에 따라 분류하여 제안하는 총명함을 가진 출판사의 앞날은 무척이나 밝을 것이다.... 물류 보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눈이 나쁜 노인들 각각은 출판중앙센터에 자신의 컴퓨터를 연결해 서점에 12 포인트 크기로 나와있는 책들을 3 6포인트 크기로 직접 프린트해 볼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독서 후에는 다시 인쇄지로 쓰기 위해 종이에서 잉크를 빼거나 아니면 셀룰로스 팩으로 재활용 할 수 있게 해주는 기계도 나올 것이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기만 한다면. - 근시 걱정하지마, 네가 글을 읽을 수 없게 되면 내가 널 위해 저 시스템을 개발할꺼야. :) 나는 내가 왜 이 마지막 장을 쓰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내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 당했던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지우기 위해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는 주제가 주어졌던 작문 시간에 모서리가 닳아 둥글게 변한 겉표지,압지처럼 부드러운 종이등을 심혈을 기울여 묘사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여백에 흘려 쓴 붉은 글씨로 이렇게 써놓으셨다. '주제에서 벗어남.' 가끔 교사들은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또래에 비해 감수성이 풍부하고 성숙한 아이들을 면박주는 법이지. 자신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그 감정의 깊이를 질투라도 하듯. 나도 겪어봤는걸. 아니, 프랑수와는 잘 있나요? 당신은 정말 행복하겠어요. 책을 사랑하는 남편이라니. 같은 곳을 보고 있잖아요 :)
책과 바람난 여자 - 아니 프랑수아
물신 숭배자도 아니면서,
나는 읽던 페이지를 표시하기 위해 한쪽 귀퉁이를 접을 수가 없다.
- 장서표
난 단지 내 소중한 책이 접히는게 견딜 수가 없다. 하다못해 겉표지의 선전문구조차도 훼손되게 놔둘수가 없다. 그래서 늘 책갈피를 사용한다. 하지만 간사하게도, 빌린책은, 한쪽 귀퉁이를 소심하게 접어서 읽던 곳을 표시하고는 한다.
책을 빌려주는 일은 심각한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 그 책 맘에 들었던 모양이네. 그거 이제 돌려주지 않을래?"
"아, 맞아, 그거 네 책이었지.
그런데 그거 마리한테 빌려줬는데 어떡하지?"
- 빌려주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 책을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는 사람.
책을 더럽히고, 찢고,
심하게는 커버와 속지를 분리해서 돌려주는 사람.
그래서 나 또한 책을 빌려주는게 너무 무서워.
여행을 해야 한다면, 죽은 당나귀만큼 무겁더라도
그 책만은 자동차 트렁크나 비행기 화물칸에 방치하지 않고
손가방 속에 곱게 넣어 품에 안고 다닌다.
- 빌리기
다른건 잡동사니처럼 가방에 쑤셔박아도,
내가 산 책만은 품에 고이 안고 다니는 내모습.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책장 선반을,
혹은 늙은 고참병들 사이에서
벼락출세한 촌놈처럼
눈에 거슬리는 번지르르한 곁표지 속의
새 책을 원망의 눈길로 바라보느니,
빌려주거나 거의 뺏기다시피 하느니,
나는 아예 주고 만다.
- 선물
책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심하게 훼손된채로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때,
나는 같은 책을 하나 더 사고 만다.
고상하고 견딜만한 것은 책과 와인 병에 쌓인 먼지 뿐이다.
- 냄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는 오래된 책에서 나는 종이냄새.
그래서 미친듯이 도서관을 좋아하는지도.
몇만명의 사람이 밟았는지도 모르는 더러운 카펫위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책장과 책 사이에 기대서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게 나의 가장 커다란 낙.
각각의 책은 연주자의 손가락에 따라 다르게 울리는 독특한 악기다. 플레이아드의 플루트에서 프티 로베르의 바순에 이르기까지,
그 음색은 기악가의 영감에 따라 다양하다.
- 음악
에쿠니 가오리는 잔잔한 유키구라모토의 뉴에이지처럼,
요시모토 바나나는 조금은 극적인 베르디의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무리 들어도 난해한 헤비메탈처럼,
괴테는 장중한 베토벤의 소나타,
츠지 히토나리는 달콤달콤 팝발라드,
아멜리 노통은 생각많은 이적의 노래
가스통 르루는 다이나믹한 뮤지컬 음악,
파울로 코엘류는 세상사를 담고있는 통기타 포크송처럼.
이게 내 책과 음악에 대한 접근법.
누가 나에게 "최근에 읽은 것 중에 뭐가 좋았어?" 라고 질문을 하면 무슨 조화인지 나는 완전한 건망증속을 헤매게 된다.
...
그래서 나는 시내에서 저녁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복습을 하기에 이르렀고,
한 달 동안 날 살아가게 만든 책 목록 작성을 게을리하는
나의 나태한 성격과 싸우고 있다
- 입소문
그래서 나는 할게 산더미같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시험기간에 이렇게 감상문을 쓰고 있는거지.
포르트 드 슈와지와 이브리 사이의 도시 순환도로를 잇는
다리에서 얻는 영감은 그보다는 못하다.
하지만 한쪽은 노란빛, 다른 쪽은 붉은빛으로 이어지는 차의 물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회전 경보등의 인디고빛
(평화를 사랑하는 나는,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거나
불이 나 건물 한 채가 몽땅 타고 있다고 상상하기보다는
어떤 엄마가 출산을 하고 있다고,
사랑에 빠진 구급차 운전사가
급히 약속장소로 달려가고 있다고 치부한다)
앞에서 갈라지는 밤에는 그 다리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 지하철, 잠, 일
어쩜 저렇게 예쁘게 색을 볼 수 있는지,
어쩜 저렇게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독서광은 아니더라도 책을 즐겨 읽던 사람이 책 읽기를 마다하면
그건 분명 어떤 병의 징후다.
"책 읽을 마음조차 안 생겨."
이 말은 신경쇠약, 피곤, 슬픔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는 것을 뜻한다.
- 신경쇠약
전적으로 동감. 책이 읽기 싫을땐, 세상을 살아가는게 싫을때.
공구 서적과 사전을 아령처럼 사용하는 웨이트 트레이닝 덕분에
운동선수처럼 단단한 근육과 맑은 정신을 갖게 되면,
나는 가끔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들을 정돈할 엄두를 낸다.
- 정돈
내 법대 전공서적들과 논문뭉치들, 판례집들은
언제나 내 이두근을 튼튼하게 만들어주곤 하지.
책을 가지고 다니는 일만으로도
독서광은 부두 노동자로 변하고 만다.
간단히 말해, 적어도 3킬로그램을 어깨에 메거나
등에 짊어지고 다니다 보면,
제 2경추부터 미저골에 이르기까지 척추가 변형되어 망가진다.
고개를 숙이고 책을 들여다보는 모든 독서광을 호시탐탐노리는
경부 관절통이나
책을 읽을 때면 대부분 어딘가에 괴고 있는 팔꿈치에 생기는
까끌까끌한 못이나 접촉성 피부병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열정적인 책 읽기는 나름대로 위험도 있고
일상생활에 장애를 주기도 한다. 그것은 귀를 약간 멀게 만든다
("그거 다 읽고 나서 샐러드 좀 사다줄래?" "......").
끓기 시작한 주전자의 분노에 찬 날카로운 외침만이
독서광을 선택성 청각 장애에서 끄집어낼 수 있다
당근이야 타든 말든
그는 아무냄새도 못 맡는다(일시적 후각상실증).
독서는 잠을 못 자게 만든다.
독서광은 일곡 있던 책을 덮기보다는
'잠의 열차'(두 시간마다 지나가는)를 고의적으로 놓치고 만다.
독서광은 감정이 풍부하다. 웃다가도 금세 눈물을 흘린다.
독서광은 기억상실증 환자다. 새것이 옛것을 대신한다.
독서광은 손전등, 가로등, 깜빡이는 네온등, 자동차 미등,
촛불의 가물가물한 빛 아래에서도
눈을 비벼가며 책을 읽을 수 있다.
대부분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안경을 쓴다.
- 독서광 일반병리학
난 책을 못읽게 하는 엄마때문에
늘 화장실 백열등 아래에서 쪼그리고 앉아 책을 봤고,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안경을 썼으며,
풍부한 감정때문에 조울증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아직도 비행기 지하철 버스안 가리지 않고 열심히 책을 보고,
라식수술 이후 악화된 안구건조증에도
이를 악물고 안약을 넣으면서 책을 읽어.
경부관절통과 거북이 목은 이제 내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렸지.
척추측만증은 S라인이 되어야 할 내 바디라인을 제쳐두고
척추부터 목뼈까지 예쁘고 완벽하게 S라인으로 만들고 말았어.
가방에 책 여러 권을 - 나머지 소지품도 함께 -
늘 넣고 다닐 정도로 체력이 튼튼하면서도
독서광은 어떤 심리적인 허약함, 병적일 정도의 예민함을 보인다.
- 무례함
내 병적일정도의 편집증.
책에 있는 글자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야해.
저자 약력, 소개, 에필로그, 프롤로그는 물론이고,
실려있는 동일 출판사의 타 서적 광고까지 한글자도 빠짐없이.
나는 데이고, 찔리고, 베이고, 부딪히고,
열쇠, 약속, 사람 이름을 까먹는다.
물건들도 - 그들도 영혼을 가지고 있다 - 한 몫을 하려고 끼어든다.
식기세척기, 컴퓨터, 자동차, 다리미, 배기 후드, 커피 메이커,
인터폰, 모든 것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장난다.
온 우주가 짜고 날 곯리려는 것만 같다.
대형 할인매장 계산원이 바로 내 차례에서
금전등록기 종이를 바꿔 끼우고,
차가 고장 나 지하철을 타려고 하면 운전사들이 파업을 하고,
여름 옷가지들을 정리해 장롱 속에 넣고 나면
날씨가 예외적으로 더워진 거리는 일기 예보다 나온다.
- 실수
누구나 이렇게 심한 머피의 법칙을 겪을때가 있지.
그 책들은 그야말로 두껍다.
권 보다는 톤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만하다.
그 책들은 내 가방을 축 늘어지게 만들고, 내 어깨에 톱질을 해대고,
내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게 만들고, 게처럼 걷게 한다.
침대에 누워 읽을 때에도 손에서 자꾸 떨어진다.
그래서 이두박근에 무리를 주지 않은 채 눈높이에 맞게 유지하려면 배 위에 베개를 겹쳐 받치는 수밖에 없다.
앉아서 읽을 때는 무릎 위에 올려 놓고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다.
목 통증과 관절 통증은 따 놓은 당상이다
- 두꺼운 책
그래서 나는 배 위에 판도라를 올려두고
미안하지만 판도라의 머리위에 책을 올리고,
등 뒤에 베개를 받힌 채로 책을 읽고는 해.
고령화 사회가 도래한 지금, 광학 산업이 세상을 똑바로 보기 위해 안경에 의존하지 않는,
자신이 근시인 것에 만족하는
근시들을 위한 안경을 만들기로 결심한다면
성공할 거라고 나는 예상한다.
특히 7세부터 77세까지의 독자가 읽는 책을
문학적 난이도가 아니라 노안의 정도에 따라 분류하여
제안하는 총명함을 가진 출판사의 앞날은 무척이나 밝을 것이다.
... 물류 보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눈이 나쁜 노인들 각각은 출판중앙센터에
자신의 컴퓨터를 연결해
서점에 12 포인트 크기로 나와있는 책들을 3
6포인트 크기로 직접 프린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독서 후에는 다시 인쇄지로 쓰기 위해
종이에서 잉크를 빼거나 아니면 셀룰로스 팩으로
재활용 할 수 있게 해주는 기계도 나올 것이다.
...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기만 한다면.
- 근시
걱정하지마, 네가 글을 읽을 수 없게 되면
내가 널 위해 저 시스템을 개발할꺼야. :)
나는 내가 왜 이 마지막 장을 쓰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내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 당했던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지우기 위해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는 주제가 주어졌던 작문 시간에
모서리가 닳아 둥글게 변한 겉표지,
압지처럼 부드러운 종이등을 심혈을 기울여 묘사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여백에 흘려 쓴 붉은 글씨로 이렇게 써놓으셨다.
'주제에서 벗어남.'
가끔 교사들은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또래에 비해 감수성이 풍부하고 성숙한 아이들을
면박주는 법이지.
자신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그 감정의 깊이를 질투라도 하듯.
나도 겪어봤는걸.
아니, 프랑수와는 잘 있나요?
당신은 정말 행복하겠어요. 책을 사랑하는 남편이라니.
같은 곳을 보고 있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