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이면 될까

김종훈2007.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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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처음 만난 건 오래 되어서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녀가 처음 내 마음에 들어온 건 기억 난다. 지하철 안에서 그리 친하지 않던 그녀와 나는 어색하게 앉아있었고 그녀의 아이팟을 나는 구경하고 있었다. 난 아이팟을 실제로 본건 그때가 처음이었기에 무척 신기하게 보고있었는데 반짝이는 아이팟의 외관보다 더욱 신기한건 그 안에 들어있던 음악들이었다. 물론 유행가라는게 그렇고 인기 팝이란게 그렇지만 그녀의 아이팟에 들어있는 음악과 내 싸구려 엠피쓰리에 들어있는 음악의 대부분이 일치하고 있었고 그 중 상당수는 나만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던 곡들이었다. 나는 들뜬 마음에 내 얄팍한 음악지식들을 쏟아 내었고 그녀도 맞장구를 치며 대꾸를 했다. 그녀는 내가 천 번쯤 들었던 머라이어캐리의 마이올을 알았고 윌스미스를 알았고 데미언 라이스를 알았고 그의 음악이 어떤 영화에 쓰였는지를 알았다.

말이란게 그렇다. 지금 귀에 들리는 데미언 라이스의 The blowers daughter가 좋아서 감독이 줄리아 로버츠,주드로가 출연하는 클로저(Closer)의 주제곡으로 쓰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데미언 라이스가 누구인지 클로저가 뭔지 심지어 주드로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에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다.

 

싸움을 해도 왜 싸우고 있는지 내가 무엇 때문에 기분이 나쁘고 서로 무엇을 잘못했는지 대화로 풀어보려고 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것.내가 여자들과 오래 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다.

그런데 그녀는 내 이상형인 말이 통하는 여자였다. 어떤 분야의 주제로 대화를 해도 그녀는 적절한 대답을 내놓았고 설령 몰라도 설명을 해주면 곧잘 이해하고 대답하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아니 그걸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고 해야 옳겠다.(가끔 엉뚱한 대답을 늘어놓기도 했거든ㅋㅋ)

 

이건 좀 다른 에피소드 하나.그녀와 만난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소한 실랑이가 없지 않았다. 뻔한 일에 은근히 고집이 센 그녀. 나 또한 웬만해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각을 세운 적이 많아졌다. 내가 그녀보다 똑똑하다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내가 그녀보다 몇 년을 더 살아봤으니 정답이 눈에 보이는데도 고집을 굽히지 않는 그녀. 그런 뻔한 결과가 나올 때마다 신기하다며 어떻게 알았냐고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어느날 시사회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내가 영화 괜찮다고 천만정도 들지도 모르겠다고 하자 그녀는 그럴 거 같지는 않다는 거다. 그냥 ‘그럴까?’ 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절대 그러지 않을 거 라는 그녀의 말에 우리는 내기를 하게 되었다. 이 영화가 천만이 넘으면 앞으로 내가 하는 말에 토를 달지 않기로. 당연히 그녀는 수락했고 그 해 그 영화는 천만을 가뿐히 넘기며 한국 흥행 역대 1위를 했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그녀가 실토한 바로는 희한하게도 내가 하는 말들이 다 맞는데 자존심이 상해서 자꾸 더 오기를 부리게 된다는…그 말이 또 귀여워서 그 후로는 웬만해선 내가 져주게 되었다ㅋㅋ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대생이었다. 게다가 집안도 화목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 없이 넉넉하여 구김살도 없고 마냥 밝고 순수했다. 비록 그녀는 명품가방과 시계를 하고 다녔지만 1인분에 3천원짜리 삼겹살, 맥도날드 햄버거,종로 길거리 떡볶이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아주었다. 요즘같이 조건만 따지는 시대에 그녀는 정말 천사 같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녀의 친구들 역시 그녀와 비슷하여 같은 학교에 명품족이었고 나를 보고,또 나의 조건을 보고 다시 생각해보라고 한적이 있었다. 그녀의 친구를 만나고 온 후 꼬치꼬치 캐물어서 얻은 대답이었지만 나는 기분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격지심에서인지 불같이 화를 내었다. 지금 우리가 결혼전제로 만나는 거냐고 그리고 자기가 뭔데 사람을 평가하냐고. 그런 모습에 그녀는 무척 당황스럽고 미안해 했지만 내가 화를 계속 내자 사실은 사실 아니냐는 듯 말하며 화를 냈고 나는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던 그녀의 본심인 것 같아서 더 실망하고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헤어지자고 말하자 그녀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잘못했다며 우는 그녀를 매정히 뿌리치고 돌아서는데 울면서 집까지 따라온 그녀…차마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몇 시간을 달래서 돌려 보냈다.

 

그 후로 공식적으로 그녀와 난 친구와 연인의 중간이 되었다(그녀의 친구들에게는 투명인간으로..).

그러나 그녀는 현명하게도 그 거리를 억지로 좁히려고도 또 쉽게 물러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시간을 두고 속 좁은 나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어느덧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시간인줄 알았던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그렇게 오랜 시간 어쩌면 가장 어두웠을지도 모르는 시간을 내 곁을 지켜주었고 내게 힘이 되어 주었다. 또 그렇게 힘이 되어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녀가 어느날 내가 너무 큰 잘못을 했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돼버린 나. 나는 한번 사람에게 실망을 하면 두 번 다시 그 사람은 보질 않는다. 그녀는 수신거부가 되어버린 내 전화에 한 달 동안 꼬박꼬박 전화와 안부음성을 남겼고 한 달 동안 기다리겠다던 집 앞 역을 지켰다.그러나 난 쉽게 용서가 되질 않았고 그렇게 그녀를 안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예전부터 말해오던 유학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번 만나기는 해야지 싶어

그녀에게 온 전화를 받았다. 울먹이는 그녀. 전화를 받아줘서 고맙다는. 떠나기 전에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는 그녀. 그 후 보름 정도 만에 그녀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녀가 미웠기에,그녀를 용서하지 않았기에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그렇게 옆에 있었던 그녀….허전함이겠거니…

 

사람을 잊는 데는 만나온 시간의 두 배 만큼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3년이면 될까?그런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