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계(色 戒)

김은미2007.11.01
조회71

 

너무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영화에 대해 당장 말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

 

영화 '색, 계'를 보고난 후 내가 이러했다.

 

뭐라고 말하고 싶어 머리 속이 뒤죽박죽인데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머리 밖으로 그 생각을 끄집어내지 못했다.

 

2시간이 넘는 기나긴 영화...

 

하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정적인 긴장감으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이 안 감독의 연출력과

 

자신이 맡은 역할에 완전히 동화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친일파임에도 불구하고 동정심을 유발하게 만드는 양조위,

 

그리고 영화 전체를 끌고 가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신인인데도

 

불구하고 감정선을 잘 살려낸 탕웨이의 연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배경은 일본의 지배 하에 놓인 1945년 상해.

 

그리고 주인공은 친일파 정보부 대장 '이선생'과

 

그에게 정보를 빼내기 위해 파견된 스파이 '왕치아즈'.

 

하지만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시대적 상황과

 

그들의 입장이 아니다.

 

바로 '이 선생과 왕치아즈의 처절하게 슬픈 사랑'이다.

 

처음엔 그냥 정보를 빼내기 위해 그를 유혹하기 시작했던 왕치아즈,

 

하지만 그녀는 느낀다.

 

그와 만나면 만날수록 그녀의 머리와 마음 속이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녀는 혼란을 느낀다.

 

그러한 혼란스러움을 동료인 광위민과 상사에게 소리쳐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 선생' 또한 뒤늦게 나타난 이 사랑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그는 그녀와 섹스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눈을 집요하도록

 

바라본다.

 

그녀가 진심인지 아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확인하는 것이다.

 

끝내 그녀가 자신의 진정한 사랑임을 믿었을 때

 

그는 자신의 사랑에게 배신당한다.

 

다들 알겠지만 이 영화에는 꽤나 과격한 섹스씬이 나온다.

 

이것으로 흥행의 재미를 보려고 연신 마케팅의 수단으로 사용하니

 

모르진 않을 것이다.

 

이 섹스씬이 삭제되지 않고 상영되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약 이 장면들이 삭제된 채 이 영화를 본다면

 

영화의 80% 이상은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내 장담한다.

 

그 둘은 섹스를 통해 서로를 정복하고 정복당하고

 

의심하고 의심당하고 믿기 위해 노력하고 믿기 시작한다.

 

서로를 향한 혼란스러움, 격정적인 사랑, 미움...

 

이 모든 것이 섹스를 통해 표현된다.

 

단순히 그 행위만을 바라보면 안된다.

 

그들의 눈빛과 하는 동안 변화하는 행동과 심리...

 

그 모든 것을 보고 느낀다면 이 영화가 얼마나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열정적인 한국 관객들을 향해 수더분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던 그 중년의 감독이 만든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영화 '색, 계'.

 

왕치아즈가 떠난 침대에 홀로 앉아

 

'그대로 내버려둬'라고 아내에게 되내이던 '이선생'의 모습이

 

계속해서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