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번째 예배이야기 - 예배와 감정

이왕구2007.11.04
조회86
예배와 감정    나는 한 동안 기독교 예배를 관찰하여 보았다. 사실 내 자신이 예배자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나는 줄곧 예배의 관찰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기독교 예배 뿐 아니라 타 종교의 예배도 참석해 보았다. 군 생활을 하면서 고참 쯤 되었을 무렵에 비교 종교학 차원에서 나는 귀중한 주일예배를 거르고 불교의 종교행사(?)와 천주교의 미사 등을 차례로 참석하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군대에서 경험한 이러한 것들이 나에겐 귀한 경험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경험을 통해 나는 타 종교인의 종교심을 엿볼 수 있었고 그들만의 예배를 통한 신경험 순간을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뒤돌아보면 그들의 예배와 신경험은 사실 그들의 종교에 심취한 자가 아닌 이상 뭐라 말할 수 있을 게제는 아니지만 나의 시야에 들어온 외적으로 들어나는 현상만 가지고 보면 불교는 불교대로 천주교는 또한 그들대로의 무언가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단지 그들이 경험한 신이 진정한 신이 아니란 것에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한 단계 나아가서 그들의 그들만의 예배시에 보여지는 태도에서 그들의 미묘한 감정적 변화들을 체감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야 어디가나 다 무표정한 것이 어느 자리에서나 최대한 지킬 수 있는 교양과 센스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타 종교인들의 예배 시 변화하는 감정의 굴곡들은 단지 나의 주관적인 선입견이라고 치부되어도 할말이 없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그들의 표정만 가지고 그들의 감정의 상태를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오류와 넌센스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커다란 결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주관적인 관찰 태도를 용납해준다면 얼마든지 나는 타 종교인들의 예배 시에 보여지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들을 묘사할 수 있다. 그들의 감정의 변화를 한 구절로 정의한다면 수 많은 감정들을 정리하여 하나의 단순하고 명료한 그 무엇(불교에서 말하는 무심, 혹은 욕심을 버림으로 얻는 평안, 속세 혹은 자신을 잠시 떠난 명상; 탈속, 탈아를 통한 감정의 沈深(침심)이 그것이다)이 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타 종교 예배에서의 인간의 감정은 차분히 가라앉힘의 대상이다. 그들에게서 종교적 희열은 감정을 극단적으로 절제하고 깊이 가라앉힘으로써 얻는 그래서 극절제의 상황으로부터 오는 어떤 면에서 자학적이다시피 한 양상을 띄는 것이다. 차설하고, 군대의 경험을 통해서 타종교인의 종교의례를 접해본 나는 군 제대 후에는 다시 신학생의 신분과 기독교의 종교적 제의(예배)를 책임져야하는 레위인으로서 다시 한번 기독교 예배에 대한 관찰에 들어갔었다. 매주 수요일에 신학교 근방의 무수한 교회들을 섭렵하며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두루 다리품 팔며 다녔던 경험들이 또한 나에겐 큰 수확이 되었다.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서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배와 감정의 관계는 과연 어떤 것인가를 파악할 수 있었던 시기가 바로 그 때였었던 것 같다. 아니 사실 그 때 당시에는 이런 생각 조차 해보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관찰자적 입장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했지만 어떤 뚜렸한 목표의식도 없었을 뿐더러 많은 교회에서의 수요 예배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배라기 보다는 수요 기도회 혹은 수요 성경공부 모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그 때의 경험과 기억들을 끄집어 내어 요긴하게 사용하게 되리라곤 그 때 당시에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많은 나라를 다니며 타 민족들의 예배를 관찰하고 함께 참여해 본 결과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나의 지적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은 너무 서론이 긴 거 같다. ^^ 여섯번째 예배이야기 - 예배와 감정
 그렇다면 본론에 들어가서 예배와 우리의 감정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또한 예배에서 우리의 감정 표현은 어떠해야 하는가?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감정의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가? 등등을 이야기 해보려 한다. 우선, 예배와 우리의 감정은 어떤 상관이 있겠는가? 결론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아주 아주 많은 관계가 있다. 그리고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리고 예배에 있어서 감정의 표현은 필수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앞서 타종교의 예배를 거론하며 그들에게 있어서 감정이란 것은 마음 저 밑바닥 심연으로 계속해서 가라앉혀야 만 하는 대상으로 파악되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예배에선 엄숙함이 강조되었다. 그들의 예배에선 웃음이 거의 없다. 아니 그 엄숙한 상황에서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으랴... 천주교의 미사에서도 비슷한 것을 목도했다. 미사의 엄숙함은 사찰에서 보았던 것보다도 오히려 더 무거움을 준다.

 

그런데 기독교의 예배는 어떠한가? 여기엔 웃음이 있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감정의 자연스러운 표출이 허용된다. 기쁠 때엔 기쁨의 웃음으로 슬플 때엔 슬픔의 눈물로 감정의 표현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예배이다. 이러한 진정한 기독교적 예배에 대해 이해함이 없는 경우에 사람들은 기독교를 싸구려 종교 보듯이 한다. 왠지 기독교 예배는 저질 코미디 프로와 비유하고 천주교나 불교의 예식은 제대로 된 영화에 비유할 수 있다고나 할까? 어찌 감정을 억제하고 잠잠히 가라앉히는 종교는 고등종교로 취급되고 감정을 표출하고 특히 그것이 상한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놓는 종교를 저급한 하등종교로 보게 되는가 말이다. 이는 분명 우리 민족의 정서에만 있음직한 사고방식이다.

 

나는 내가 경험한 각 대륙의 나라들과 민족들 안에서 드려지는 기독교 예배에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의 예식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또 하나 공통점도 발견했다. 독특함과 동시에 공통점은 각기 민족과 방언대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었다. 즉 예배 속에서의 감정표현은 공통점이요, 그들만의 방식대로 하는 것은 독특함이었다. 가령 브라질 민족은 상당히 춤사위와 노래에 능한데 이를 예배시에 잘 활용하여 이것을 통하여 감정을 표현한다. 또한 카자흐스탄은 역시 노래와 춤이 능한 민족이지만 이들에게는 한국적 정서에 가까운 “한”과 같은 슬픔을 머금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이들이 만들어내는 찬양곡들은 어딘지 모르게 슬픈 곡조가 스며들어있어서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비록 가사를 이해하지 못한다해도 말이다.

 

그렇다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 감정표현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 아니라 꼭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시편 51편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처나고 깨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것을 숨기거나 그 상처나 깨어짐을 가리거나 나을 때까지 기다려서 그 후에 건강한 마음을 회복한 후에 제사하러 나오라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런 깨어진 마음과 상한 심령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것들을 가지고 솔직하게 그것을 내어보이며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기대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렇게 솔직한 감정표현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상한 심령, 깨어진 마음을 숨길 필요도 없고 숨겨서도 안된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혼자 백팔번뇌하여 스스로 해결하고자 고민하고 염려하는 가운데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도록 하는 것이 불교다.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도 은연중에 불교적 관념론에 헤매고 있는 자들이 있는것 같다. 그러기에 자신의 상한 심령이 드러날까봐 감정을 표현하기를 거부하고 꽁꽁 싸매 놓은 후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한번 솔직하게 자신에 대해 돌아보자. 나는 얼마나 예배시에 나의 감정을 주님께 표현하는 일에 진실된가? 나는 주님을 향하여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어렵다고 느끼는가? 나는 다른사람이 자유롭게 주님앞에 자신의 감정표현을 하는 모습에 이상히 생각하거나 시기, 질투하거나 하고 있진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