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동시대인들이나 당대의 역사가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언급할 가치가 없는 인물로 평가된 것 같다. 현재 빌라도나 헤롯 등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의 생애와 관련된 자료들은 복수적 자료에 기록되어 예수에 비해 풍부히 남아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동시대 역사 학자들의 저서에 예수의 이름이 기록된 문서는 없다.
방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역사적 실체를 입증 할만 한 그 어떠한 고고학적 유물이나 문서가 발굴된 적이 없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4복음서를 증거물로 제시할 것이다.
물론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이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4 복음서가 예수의 가르침을 포함하고는 있으나, 역사적 행적에 대한 기록물로 보기에는 많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최근의 방대한 연구 실적들은 크게
(1)예수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신화설)하는 류와
(2) 예수의 실체는 인정하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예수와는 상치된 예수를 재구성해 내는 류(재구성파)로 구분 할 수 있다. 재구성파 안에서도 의견은 분분하여, 여러 모습의 예수를 그려내고 있다.
기독경 구절이 진짜로 예수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는지를, 학회 회원들의 투표로 결정, 발표하여 물의(?)를 빚는 예수학회(Jesus Seminar)가 이 재구성파의 대표 격이다.
어쩌면 "신성 모독"이 될 수도 있는 학설들이 자유로이 제시되고 있다. 이들을 우리가 무시할 수만 없는 것은 이들이 양심적인 학자들이며, 왜곡된 기복 신앙과 무지한 성경 지식에서 기인하는 맹목적인 믿음에서 파생되는 사회적 부작용에, 최소한도 예수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본보기가 된다는 것이다.
①그나마 예수의 기록이 전해지는 책들 중에는 타키투스Tacitus(AD 55~120)라는 로마의 역사가가 쓴 책에서 짤막히 예수라는 인물이 십자가 처형에 처해졌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예수의 처형이 있은 후 약 80년 정도 지난 AD112년 경에 기록된 것이다. 이미 예수 신화가 로마에도 널리 보급된 후의 일이므로, 그가 시중의 기독교도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적었을 확률이 매우 크다. 더구나 동시대 다른 역사가들은 Tacitus를 기독교도라고 언급하고 있다.
②또 하나 AD 93년에 출간된 요세푸스(AD 37년 출생)의 “유태인 연대기" (Jewish Antiquities)에도 예수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 두 군데(”증언“ 구절과 ”형제“구절) 있으나, 학자들 간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본글 아래 유세푸스의 기록은 사실인가 참조)
거의 모든 학자들이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위조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으며, 신화파에서는 전체가 다 위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1. 먼저 꺼림칙한 것은 "연대기"의 복사 본들이 전부 기독교인들의 관리 하에 전수되었다는 것이다.
2. 초대 교부들과 기독교 변증가들은 왜 "요세푸스"의 저술을 인용하지 않았는가?
초대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교리에 대하여 각 종파로부터 많은 도전을 받았다. 예수의 실존과 그의 놀라운 기적들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받았고, 이러한 과정은 본인들의 저술에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좋은 증거물을 제시하지 않았다.
"증언" 구절은 324년이 되어서야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처음으로 인용되었다.
"형제" 구절은 그전에 "오리겐"에 의해 230-250년 사이에 와서야 처음으로 인용되었다.
연대기가 발간된 게 93년 경이니까 거의 140-250년이 흐른 셈이다. 그 사이에 기독교 변증가들은 연대기를 읽지 않았을까?
연대기는 초대 기독교도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그 책을 읽었고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도, 무수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인용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읽었던 사본에는 문제의 구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백년이 넘도록, "요세푸스"의 저술을 잘 알고 있던 초대 교부들은 상기의 증언 구절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에 동 구절이 "요세푸스"의 저술에 있었다면 그들은 도전자들과의 논쟁에서 그것을 재빨리 인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동 구절은 그 저술에 없었다.
"요세푸스"의 책을 읽어 본 "오리겐"도 "요세푸스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고 서술했을 뿐이다. 동 구절은 기독교 최초 역사가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언급되었다. 동 구절은 그의 조작으로 사료된다.
"유세비우스"는 신앙의 명분 아래 문서 변조를 지원하였고
"요세푸스"외의 여러 저술가들의 책들도 변조시켰다."
- 마샬 거빈 (Marshall J. Gauvin).
3. "오리겐"은 "형제" 구절은 읽었는데 "증언" 구절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따라서 "증언" 구절은 그 후에 첨가되었다고 보인다.
4. "요세푸스"의 책 "유태인 전쟁"은 "안티오쿠스"의 예루살렘 점령부터 AD 70 년의 예루살렘 함락까지의 내용을 "유태인 연대기" 책에서 그대로 복사하고 있다.
"빌라도"가 군중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 등 다른 부분들은 거의 동일하게 서술되었는데
"유태인 전쟁"에서는 유독 상기의 예수 인용구들만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5. "유세비우스" 추기경이 처음으로 인용한 "증언"은 "조셉 웰레스"에 의하면 본인 스스로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조셉 웰레스"는 많은 연구 끝에 당시 교부들 사이에 유행하던 문서 변조의 행태를 캐어 낸 인물이다. 그는 문서 변조의 대표자로 "유세비우스" 추기경을 꼽았다.
유세비우스 본인의 말을 들어 보자.
"우리의 구세주에 관하여, 내가 이미 생산(?)해낸 이 증거들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유태인 "요세푸스"를 여분의 증인으로 이용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usebius, Evamgelical Demonstration, Book III. p.124)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솔직한 고백인 셈이다.
이래서 "조셉 윌레스"는, 기독교의 문서변조를 증명하기가 "예상 밖으로 쉬웠다."고 하였다. "문서변조의 증거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교부들 자신의 서술과 구교의 교회사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이었다.
▣ 유일한 역사적 예수증언 요세푸스증언은 거짓
문제의 첫구절
첫 번째의 구절이다.
"이 무렵 예수라고 하는 현자가 있었다. 만일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자였으며,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의 선생이었다. 다수의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헬라인들 중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구세주였다. 우리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고소하였고,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던 자들은 멈추질 않았다. 그는 3일 째 되는 날 다시 부활해서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는 하나님의 예언자들과 다른 많은 놀라운 일들이 그에 관해 선포했던 일이었다. 그를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명명된 무리들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유대고대사 18 권 63~64절]
-이 요세푸스의 예수 언급에 관한 원문과 기독교 신학적 견해는 맨 아래를 참조
▩표시가 있는 맨 아래부분 - 끊임없시 제기되어온 요세푸스 증언 조작사
두번째 구절
또 하나의 두 번째 구절을 보자, 유대고대사를 통 털어 예수 인용구는 이 두 구절뿐이다.
"그는 즉 구세주라 칭함 받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몇몇 다른 인물들을 산헤드린 앞에 소환한다. 그들을 정죄하여 돌에 맞아 죽게 한다."
[유대 고대사 20권 200절]
위에서 언급한 두 구절은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와 얼마나 정확히 부합되는 묘사인가?
마태,누가복음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구절들은 중세부터 현대에까지 끊임없는 조작시비를 불러일으킨 부분이다. 원래에 없었던 구절이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동안 덧붙여진 것이다.
이 구절들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의 역사적 배경을 골드버그의 서술로 먼저 간단히 훑어 보자.
AD 93년: 유대고대사가 로마에서 발간되다. 헬라어로 쓰여진 원본들의 권말에는 티투스 황제가 직접 서명을 해 주었고, 발간을 윤허 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이 원본들이 아니다. 원본들은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도 10 세기경의 것으로 추산 되고 있다.
220~250년경: 유명한 초기 기독교 변론자인 오리겐(Origenes : 오리게네스라고도 불림)은 헬라적 신화를 차용해서 예수신화를 만들어 냈다고 비판하는 이교도들에 대항해서 켈수스에 대한 반론(Contra Celsus)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그는 "요세푸스는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 아주 흔한 이름이었는데, 요세푸스의 저작물들 속에서도 여러 명의 예수들이 등장한다.
하나는 선원들을 선동했던 사피아스(Sapphias)의 아들 예수, 도적단의 두목으로 체포된 예수, 7년 동안 예루살렘 주변을 돌아다니며 "슬프다, 슬프다, 예루살렘이여 슬프다!"를 외치다가 여러 번에 걸쳐 두들겨 맞았지만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던 예수가 있다. (결국 이 예수는 예루살렘 함락 때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오리겐은 자기가 원하는 예수를 찾을 수 없어서 실망한 것 같다.
324년: 추기경 유세비우스가 처음으로 문제의 구절을 인용하는데, 이 내용은 현존하는 복사 본들의 내용과 거의 똑같다.
10 세기: 아랍 역사 학자이자, 아랍 기독교인이면서 추기경인 아가피우스가 두 번째 구절을 인용 한다. 그런데 그의 인용구는 유세비우스의 인용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유대인 통치에 관한 저술에서 유대인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즈음 예수라 불리는 현자가 있었다. 그의 행실은 의로웠으며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빌라도가 그를 처형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제자 직분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예수는 3일만에 부활 해 그들 앞에 나타내 보이셨다. 따라서 그는 아마도 선지자들이 예언 했던 구세주였던 것 같다"
16 세기: 1500여년 동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오다, 16 세기에 들어 와서야 조셉 스칼리거라는 인물이 18권에 등장하는 구절의 진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의 역사학적인 전체적 다른 기록어투와 달리 너무나도 기독교 색채가 짙다는 것이었다.
17 세기: 리차드 몬테규 추기경이 "그는 구원자 였다"라는 구절이 훗 날 기독교인이 복사 과정에서 덧붙여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1737년: 위스튼이 요세푸스의 저술들을 번역하면서 요세푸스가 유대인 기독교인이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두 번째 구절 전체가 원래 그에 의해 쓰여졌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18 세기~ 20 세기 초반: 많은 학자들이 상기 구절이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위조되었다고 주장한다.
1929년: 대커리가 위조설을 지지하면서, 또 누가 복음과 유대 고대사에 공통 점이 많음을 지적하고 누가와 요세푸스의 상면 가능성을 주장한다.
1931년: 아이슬러가 기독교 검열 하에 많은 부분의 삭제가 있었다며 그 나름대로 재 수정 복구된 구절을 제시한다.
1941년: 마틴이 부분적인 위조를 지적하고 나머지 부분은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1954년: 폴 윈터가 위조된 곳은 세 곳뿐이며 나머지는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세 군데 위조는 "그는 구원자였다",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의 두 구절과 뒷부분의 부활과 예언에 관한 구절이었다.
이 주장은 당시 많은 공감을 샀다.
1960년: 콘젤만이 누가 복음과 사도 행전에 내포된 신앙관과 문제의 두 번째 구절간에 공통성을 발견하고, 18권의 문제 구절 전체가 기독교인에 의해 위조 됐다고 주장한다.
1963년: 펠드만이 거의 모든 부분이 정확 하다고 단정한다.
1971년: 파인스가 9~10 세기 아랍 및 시리아 본을 (상기한 아가피우스의 구절)발견하고, 이들 사본에는 "구원자" 운운의 구절과 "인간이라 부를 수...." 두 구절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들어 이것이 위조되지 않은 원본 기록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1973~1983년: 렝스토푸가 요세푸스의 저술을 집대성 재구성하여 용어 색인 체계를 만듦으로 학자들의 연구에 편리한 도구로 쓰이게 한다.
1984년: 버즈올이 렝스토푸의 색인 체계를 이용하여 두 번째 구절의 문체를 분석하면서, 요세푸스의 문체와 너무 다르므로 구절 전체가 위조라고 주장 하다.
1991년: 마이어가 폴 윈터의 설을 지지 하다. 즉 세 군데 만 위조 됐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는 현재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 하고 있다.
1995년: 골드버그가 컴퓨터를 동원하고 통계학의 개념들을 이용 하여 두 번째 구절과 누가 복음의 엠마오 노상의 이야기(예수가 부활 해서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게 나타난 이야기)에 신기한 공통점을 발견한다. 따라서 두 번째 구절과 "엠마오 이야기"는 이제는 잃어 버린 어느 초대 기독교 문서에 공통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다.
결론으로 그는 "구원자" , "사람일수..." 구절 두 개만 빼고는 전부 원본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거의 모든 학자들이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위조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저술중의 예수에 대한 구절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로 유대교의 제사장인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자면 성경은 신의 영감으로 된 것이므로 일정한 계시의 기간에만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세로부터 아닥사스(Artaxerxes, BC 465 ~ 424)왕 때까지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한 철저한 유대인이었다. 그의 저술에 의하면 로마의 식민 통치하에 소작 농민들은 25%의 세금과 사원에서 부과하는 22%의 헌금 등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는 동족들 앞에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신탁을 알리는 자칭 선지자들이 득시글거렸다고 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 비유(譬喩)와 알레고리(寓話)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설교하며, 멀지 않아 전쟁이 일어나 메시아가 나타나서 세계를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퍼트리며 돌아다녔는데, 이 소문들을 이용하여 스스로 메시아라고 자처하며 게릴라 투쟁에 지도자로 나선 무리가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유대교를 신봉하면서, 동시에 매국노였던 요세푸스는 유대인의 무장독립투쟁을 모두 사기꾼, 강도등으로 간주했다.
"파두스가 유대의 총독이던 시대에, 테우다스라는 이름의 어떤 사기꾼이 많은 수의 대중을 선동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소유물을 가지고 요단강으로 그를 따라오라고 선동했다. 그는 그가 예언자이며, 그의 명령에 따라 그 강이 갈라지고 그들을 쉽게 건너게 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고대사 20권 97절]
"이집트에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와서 자기가 예언자라고 선언하고, 대다수의 대중들에게 그를 따라 예루살렘에서 5퍼얼롱(furlongs) 떨어져 있는 올리브 산으로 나가자고 선동했다. 그는 그곳에서 그의 명령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 줄 것이며, 그 때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대고대사 20권 169~70절, 유대전쟁사 2권 261~62절]
요세푸스는 당시 갈릴리의 유다, 페레아의 시몬, 톨로마이오스, 테우다스, 등 메시아를 사칭하여 폭동을 일으켰던 자들에 대해 모두 사기꾼들로 평가했다. 그런데, 예수와 관계된 문제의 구절은 그가 예수의 신성과 기적, 부활을 인정한 것으로, 요세푸스가 마치 기독교인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정도이다.
다시 말하자면, 독실한 유대인이 기독교를 믿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만약 요세푸스가 문제의 그 구절을 직접 기록했더라면, 예수도 사기꾼처럼 묘사했을 것이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예수의 실존성을 증거한 중요한 증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유대인의 매국노라고 볼 수 있는 요세푸스가 메시아라고 주장했던 사람은 바로 로마황제였다! 유대-로마 전쟁때 패배하여 베스파시안 앞으로 끌려간 요세푸스는 그가 바로 유대인이 학수고대하는 메시아이며, 곧 로마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요행인지 몰라도 그의 예언은 적중하여 베스파시안은 69년에 로마황제로 등극한다. 황제는 예언에 대한 보답으로 요세푸스를 로마에 데려가 측근의 한 사람으로 삼았다.
그를 가르키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라는 말도 '플라비우스 왕가의 요세푸스' 라는 뜻이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이야 말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소망하여 왔던 메시아이며, 그와 티투스는 멀지 않아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고 아첨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고대의 신탁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베스파시안과 티투스임을 주장하며, 메시아를 사칭하여 로마에 대해 무장투쟁을 일삼는 유대동족들을 비난했다.
자세하게 그의 삶을 돌아보면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의 귀족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14세에 유대교 율법문제를 놓고 대제사장들에게 자문을 해줄 정도로 조숙했다고 한다. 16세에는 은수자 반누스와 함께 광야로 나가 3년간 지냈는데, 반누스는 그리스도가 태어날 즈음 유대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유대교 금욕주의의 한 분파에 속해 있었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바리사이파에 가입했다. 이것은 그가 훗날 로마인들에게 협력한 일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바리사이파는 〈신약성서〉에서 비판적으로 묘사되었지만, 대부분 대단히 경건한 유대인들이었으며, 엄격하게 토라를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무장한 애국주의 집단인 열심당과 같은 강력한 유대교 민족주의에 공감하지 않았으며,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독립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로마의 통치에 순응하려고 했다.
64년 요세푸스는 로마의 수도에 갇혀 있던 수많은 유대인 동료 제사장들을 석방시키는 임무를 띠고 로마에 대사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네로 황제의 2번째 부인 포파이아 사비나에게 소개되었고, 그녀의 호의로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그는 로마를 방문하는 동안 그곳의 세련된 문화와 특히 강력한 군대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로마의 통치에 항거하는 대반란의 전야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66년 열광적인 열심당의 충동을 받은 유대인들은 로마 총독을 쫓아내고, 예루살렘에 혁명정부를 세웠다. 요세푸스는 많은 동료 제사장들과 함께 열심당에게 타협을 권고했으나 자신의 뜻과는 상관 없이 반란에 휩쓸려 들어갔다.
그는 온건한 입장을 취했으나 갈릴리 군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만일 신빙성이 없는 그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곳에서 타협을 위해 노력했으나 기스칼라의 요한이 이끄는 지역 반란군의 강력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무장 반란이 무모한 일임을 알고 있었지만, 밀려오는 로마 대군을 막기 위해 북방의 성들을 요새화했다.
로마군은 훗날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의 지휘하에 67년 봄 갈릴리에 도착하여 북방 유대인들의 저항을 신속히 무너뜨렸다. 요세푸스는 47일 동안 요타파타 요새를 지키려고 애썼지만, 이 요새가 함락되자 40명의 결사대원과 함께 주변에 있는 동굴에 숨었다. 그곳에서 결사대원들은 투표 끝에 항복하기보다는 자결하기로 결정했다. 크게 당황한 요세푸스는 자살의 부도덕성을 주장하면서, 각 사람이 제비를 뽑아 순서대로 곁에 있는 사람을 죽이자고 제의했다. 그는 모든 궁리를 다하여 마지막 제비를 뽑았으며, 동굴에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남았을 때 상대방을 설득하여 로마군에 항복했다.
쇠사슬에 묶여 베스파시아누스 앞에 끌려간 요세푸스는 예언자 행세를 하면서 베스파시아누스가 곧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은 68년 네로가 죽음으로써 신뢰를 얻었다. 그는 이 계략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그뒤 2년간 로마군 막사에서 포로로 지냈다. 69년이 저물어갈 무렵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로 선포되었다. 요세푸스는 자신의 예언이 실현됨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그때부터 그는 로마 편에 섰다.
이름을 플라비우스(베스파시아누스의 가문 이름)로 바꾸고, 후원자인 베스파시아누스를 따라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그곳에서 3번째 결혼을 했다(그의 첫번째 아내는 요타파타가 함락될 때 죽었고, 2번째 아내는 유대에서 그를 버렸음). 후에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이자 훗날 그를 계승하여 황제가 된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일원으로 70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 일에 가담했다.
그는 로마군과 반란군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려고 했으나, 그의 배교를 증오한 유대인들과 그를 믿지 못하는 로마군에게 배척을 받아 어떤 일도 이룰 수 없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뒤 요세푸스는 로마에 거주하면서 그곳에서 평생 황제의 후원을 받으며 글 쓰는 일에 전념했다.
그런 요세푸스가 '유대 고대사'에서 갑자기 그의 정치적 처세술을 모조리 부정하고, 예수를 메시아로 칭송하는 글을 남긴셈이다. 한술 더 떠서 티투스 황제가 그의 책에 서명을 하고 발간을 허락한 셈이 되니 더욱 어이없는 일이다.
세 번째로, 요세푸스는 장황설을 늘어놓는 작가로, 그는 보다 중요성이 적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썼다. 예수에 대한 부분만큼은 선행한 구절이나 뒤따르는 구절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문제의 구절은 다른부분과 문체까지도 다르다. 즉, 문제의 구절만 빼버린다면 완벽한 그의 문체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또, 그 구절은 유대인들에게 닥친 재앙에 관한 이야기들의 모음들 가운데에서 나오는데, 그 구절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 역사가의 글에 공간을 만들기 위한 개작의 손길에 의해 나뉘어졌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네 번째로, 요세푸스의 저술인 유대 전쟁사는 안티오코스의 예루살렘 점령부터 AD70 년의 예루살렘 함락까지의 내용을 유대 고대사책에서 그대로 복사하고 있다.
빌라도가 군중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 등 다른 부분들은 거의 동일하게 서술 되었는데 유대 전쟁사에서는 유독 상기의 예수 인용구들만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다섯 번째로 유대 고대사의 사본들이 전부 기독교인들의 관리 하에 전수 되었으며, 초대 교부들과 기독교 변증가들은 왜 요세푸스의 저술을 인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대고대사는 초대 기독도들에게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으며 그들은 열광적으로 그 책을 읽었고 소중히 여겼다.
초대 기독교도들은 예수의 실존과 그의 놀라운 기적들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받았고, 이러한 과정은 초대교부들의 저술에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렇게 좋은 증거물을 제시하지 않았다.
유대고대사가 발간된 것이 기원후 93 년경이었는데, 거의 140~250년이 흘러간 AD 324년이 되어서야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처음으로 문제의 구절이 처음 인용 되었다. 이것이 처음이다. 그렇다면 유세비우스 이전에는 이 구절을 아무도 인용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그 책은 열광적으로 읽혔고 질문은 쏟아졌는데도 말이다.
"유세비우스는 신앙의 명분 아래 문서 변조를 지원하였고 요세푸스외의 여러 저술가들의 책들도 변조 시켰다"
[마샬 거빈 (Marshall J. Gauvin)]
요셉 웰레스에 의하면 문제의 구절은 유세비우스의 위조작이었다고 한다. 요셉 웰레스는 많은 연구 끝에 당시 교부들 사이에 유행하던 문서 변조의 행태를 캐어 낸 인물이다. 그는 문서 변조의 대표자로 유세비우스 추기경을 꼽았다.
유세비우스 자신도 그의 저서 복음적 증명(Evangelical Demonstrat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구세주에 관하여, 내가 이미 생산(조작) 해낸 이 증거들 만으로도 충분 하다. 하지만 유대인 요세푸스를 여분의 증인으로 이용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usebius/ Evamgelical Demonstration, Book III. P.124]
유세비우스 자신도 그것이 조작이었음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이성의 모든 논증들은 그 구절이 염치없는 위조임을 증거한다. 이러한 이유로 정직한 기독교 학자들은 누구나, 그것을 첨삭된 것으로써 버려왔다.
Dean Milma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많은 추가적인 구절들과 함께 첨삭되었다."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을 쓰며, Dean Farra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세푸스가 현재 있는 것과 같은 구절을 전부 썼다는 것은, 제대로 된 정신의 비평가라면 절대 믿지 않는다."
예수는 날조되었다...
출처는 다음아고라입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7&articleId=102371
▣ 예수는 실존 인물인가? 신화 속의 인물인가?
예수는 동시대인들이나 당대의 역사가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언급할 가치가 없는 인물로 평가된 것 같다. 현재 빌라도나 헤롯 등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의 생애와 관련된 자료들은 복수적 자료에 기록되어 예수에 비해 풍부히 남아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동시대 역사 학자들의 저서에 예수의 이름이 기록된 문서는 없다.
방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역사적 실체를 입증 할만 한 그 어떠한 고고학적 유물이나 문서가 발굴된 적이 없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4복음서를 증거물로 제시할 것이다.
물론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이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4 복음서가 예수의 가르침을 포함하고는 있으나, 역사적 행적에 대한 기록물로 보기에는 많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최근의 방대한 연구 실적들은 크게
(1)예수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신화설)하는 류와
(2) 예수의 실체는 인정하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예수와는 상치된 예수를 재구성해 내는 류(재구성파)로 구분 할 수 있다. 재구성파 안에서도 의견은 분분하여, 여러 모습의 예수를 그려내고 있다.
기독경 구절이 진짜로 예수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는지를, 학회 회원들의 투표로 결정, 발표하여 물의(?)를 빚는 예수학회(Jesus Seminar)가 이 재구성파의 대표 격이다.
어쩌면 "신성 모독"이 될 수도 있는 학설들이 자유로이 제시되고 있다. 이들을 우리가 무시할 수만 없는 것은 이들이 양심적인 학자들이며, 왜곡된 기복 신앙과 무지한 성경 지식에서 기인하는 맹목적인 믿음에서 파생되는 사회적 부작용에, 최소한도 예수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본보기가 된다는 것이다.
①그나마 예수의 기록이 전해지는 책들 중에는 타키투스Tacitus(AD 55~120)라는 로마의 역사가가 쓴 책에서 짤막히 예수라는 인물이 십자가 처형에 처해졌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예수의 처형이 있은 후 약 80년 정도 지난 AD112년 경에 기록된 것이다. 이미 예수 신화가 로마에도 널리 보급된 후의 일이므로, 그가 시중의 기독교도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적었을 확률이 매우 크다. 더구나 동시대 다른 역사가들은 Tacitus를 기독교도라고 언급하고 있다.
②또 하나 AD 93년에 출간된 요세푸스(AD 37년 출생)의 “유태인 연대기" (Jewish Antiquities)에도 예수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 두 군데(”증언“ 구절과 ”형제“구절) 있으나, 학자들 간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본글 아래 유세푸스의 기록은 사실인가 참조)
거의 모든 학자들이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위조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으며, 신화파에서는 전체가 다 위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1. 먼저 꺼림칙한 것은 "연대기"의 복사 본들이 전부 기독교인들의 관리 하에 전수되었다는 것이다.
2. 초대 교부들과 기독교 변증가들은 왜 "요세푸스"의 저술을 인용하지 않았는가?
초대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교리에 대하여 각 종파로부터 많은 도전을 받았다. 예수의 실존과 그의 놀라운 기적들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받았고, 이러한 과정은 본인들의 저술에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좋은 증거물을 제시하지 않았다.
"증언" 구절은 324년이 되어서야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처음으로 인용되었다.
"형제" 구절은 그전에 "오리겐"에 의해 230-250년 사이에 와서야 처음으로 인용되었다.
연대기가 발간된 게 93년 경이니까 거의 140-250년이 흐른 셈이다. 그 사이에 기독교 변증가들은 연대기를 읽지 않았을까?
연대기는 초대 기독교도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그 책을 읽었고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도, 무수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인용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읽었던 사본에는 문제의 구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백년이 넘도록, "요세푸스"의 저술을 잘 알고 있던 초대 교부들은 상기의 증언 구절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에 동 구절이 "요세푸스"의 저술에 있었다면 그들은 도전자들과의 논쟁에서 그것을 재빨리 인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동 구절은 그 저술에 없었다.
"요세푸스"의 책을 읽어 본 "오리겐"도 "요세푸스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고 서술했을 뿐이다. 동 구절은 기독교 최초 역사가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언급되었다. 동 구절은 그의 조작으로 사료된다.
"유세비우스"는 신앙의 명분 아래 문서 변조를 지원하였고
"요세푸스"외의 여러 저술가들의 책들도 변조시켰다."
- 마샬 거빈 (Marshall J. Gauvin).
3. "오리겐"은 "형제" 구절은 읽었는데 "증언" 구절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따라서 "증언" 구절은 그 후에 첨가되었다고 보인다.
4. "요세푸스"의 책 "유태인 전쟁"은 "안티오쿠스"의 예루살렘 점령부터 AD 70 년의 예루살렘 함락까지의 내용을 "유태인 연대기" 책에서 그대로 복사하고 있다.
"빌라도"가 군중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 등 다른 부분들은 거의 동일하게 서술되었는데
"유태인 전쟁"에서는 유독 상기의 예수 인용구들만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5. "유세비우스" 추기경이 처음으로 인용한 "증언"은 "조셉 웰레스"에 의하면 본인 스스로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조셉 웰레스"는 많은 연구 끝에 당시 교부들 사이에 유행하던 문서 변조의 행태를 캐어 낸 인물이다. 그는 문서 변조의 대표자로 "유세비우스" 추기경을 꼽았다.
유세비우스 본인의 말을 들어 보자.
"우리의 구세주에 관하여, 내가 이미 생산(?)해낸 이 증거들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유태인 "요세푸스"를 여분의 증인으로 이용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usebius, Evamgelical Demonstration, Book III. p.124)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솔직한 고백인 셈이다.
이래서 "조셉 윌레스"는, 기독교의 문서변조를 증명하기가 "예상 밖으로 쉬웠다."고 하였다. "문서변조의 증거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교부들 자신의 서술과 구교의 교회사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이었다.
▣ 유일한 역사적 예수증언 요세푸스증언은 거짓
문제의 첫구절
첫 번째의 구절이다.
"이 무렵 예수라고 하는 현자가 있었다. 만일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자였으며,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의 선생이었다. 다수의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헬라인들 중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구세주였다. 우리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고소하였고,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던 자들은 멈추질 않았다. 그는 3일 째 되는 날 다시 부활해서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는 하나님의 예언자들과 다른 많은 놀라운 일들이 그에 관해 선포했던 일이었다. 그를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명명된 무리들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유대고대사 18 권 63~64절]
-이 요세푸스의 예수 언급에 관한 원문과 기독교 신학적 견해는 맨 아래를 참조
▩표시가 있는 맨 아래부분 - 끊임없시 제기되어온 요세푸스 증언 조작사
두번째 구절
또 하나의 두 번째 구절을 보자, 유대고대사를 통 털어 예수 인용구는 이 두 구절뿐이다.
"그는 즉 구세주라 칭함 받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몇몇 다른 인물들을 산헤드린 앞에 소환한다. 그들을 정죄하여 돌에 맞아 죽게 한다."
[유대 고대사 20권 200절]
위에서 언급한 두 구절은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와 얼마나 정확히 부합되는 묘사인가?
마태,누가복음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구절들은 중세부터 현대에까지 끊임없는 조작시비를 불러일으킨 부분이다. 원래에 없었던 구절이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동안 덧붙여진 것이다.
이 구절들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의 역사적 배경을 골드버그의 서술로 먼저 간단히 훑어 보자.
AD 93년: 유대고대사가 로마에서 발간되다. 헬라어로 쓰여진 원본들의 권말에는 티투스 황제가 직접 서명을 해 주었고, 발간을 윤허 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이 원본들이 아니다. 원본들은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도 10 세기경의 것으로 추산 되고 있다.
220~250년경: 유명한 초기 기독교 변론자인 오리겐(Origenes : 오리게네스라고도 불림)은 헬라적 신화를 차용해서 예수신화를 만들어 냈다고 비판하는 이교도들에 대항해서 켈수스에 대한 반론(Contra Celsus)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그는 "요세푸스는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 아주 흔한 이름이었는데, 요세푸스의 저작물들 속에서도 여러 명의 예수들이 등장한다.
하나는 선원들을 선동했던 사피아스(Sapphias)의 아들 예수, 도적단의 두목으로 체포된 예수, 7년 동안 예루살렘 주변을 돌아다니며 "슬프다, 슬프다, 예루살렘이여 슬프다!"를 외치다가 여러 번에 걸쳐 두들겨 맞았지만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던 예수가 있다. (결국 이 예수는 예루살렘 함락 때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오리겐은 자기가 원하는 예수를 찾을 수 없어서 실망한 것 같다.
324년: 추기경 유세비우스가 처음으로 문제의 구절을 인용하는데, 이 내용은 현존하는 복사 본들의 내용과 거의 똑같다.
10 세기: 아랍 역사 학자이자, 아랍 기독교인이면서 추기경인 아가피우스가 두 번째 구절을 인용 한다. 그런데 그의 인용구는 유세비우스의 인용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유대인 통치에 관한 저술에서 유대인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즈음 예수라 불리는 현자가 있었다. 그의 행실은 의로웠으며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빌라도가 그를 처형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제자 직분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예수는 3일만에 부활 해 그들 앞에 나타내 보이셨다. 따라서 그는 아마도 선지자들이 예언 했던 구세주였던 것 같다"
16 세기: 1500여년 동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오다, 16 세기에 들어 와서야 조셉 스칼리거라는 인물이 18권에 등장하는 구절의 진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의 역사학적인 전체적 다른 기록어투와 달리 너무나도 기독교 색채가 짙다는 것이었다.
17 세기: 리차드 몬테규 추기경이 "그는 구원자 였다"라는 구절이 훗 날 기독교인이 복사 과정에서 덧붙여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1737년: 위스튼이 요세푸스의 저술들을 번역하면서 요세푸스가 유대인 기독교인이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두 번째 구절 전체가 원래 그에 의해 쓰여졌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18 세기~ 20 세기 초반: 많은 학자들이 상기 구절이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위조되었다고 주장한다.
1929년: 대커리가 위조설을 지지하면서, 또 누가 복음과 유대 고대사에 공통 점이 많음을 지적하고 누가와 요세푸스의 상면 가능성을 주장한다.
1931년: 아이슬러가 기독교 검열 하에 많은 부분의 삭제가 있었다며 그 나름대로 재 수정 복구된 구절을 제시한다.
1941년: 마틴이 부분적인 위조를 지적하고 나머지 부분은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1954년: 폴 윈터가 위조된 곳은 세 곳뿐이며 나머지는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세 군데 위조는 "그는 구원자였다",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의 두 구절과 뒷부분의 부활과 예언에 관한 구절이었다.
이 주장은 당시 많은 공감을 샀다.
1960년: 콘젤만이 누가 복음과 사도 행전에 내포된 신앙관과 문제의 두 번째 구절간에 공통성을 발견하고, 18권의 문제 구절 전체가 기독교인에 의해 위조 됐다고 주장한다.
1963년: 펠드만이 거의 모든 부분이 정확 하다고 단정한다.
1971년: 파인스가 9~10 세기 아랍 및 시리아 본을 (상기한 아가피우스의 구절)발견하고, 이들 사본에는 "구원자" 운운의 구절과 "인간이라 부를 수...." 두 구절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들어 이것이 위조되지 않은 원본 기록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1973~1983년: 렝스토푸가 요세푸스의 저술을 집대성 재구성하여 용어 색인 체계를 만듦으로 학자들의 연구에 편리한 도구로 쓰이게 한다.
1984년: 버즈올이 렝스토푸의 색인 체계를 이용하여 두 번째 구절의 문체를 분석하면서, 요세푸스의 문체와 너무 다르므로 구절 전체가 위조라고 주장 하다.
1991년: 마이어가 폴 윈터의 설을 지지 하다. 즉 세 군데 만 위조 됐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는 현재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 하고 있다.
1995년: 골드버그가 컴퓨터를 동원하고 통계학의 개념들을 이용 하여 두 번째 구절과 누가 복음의 엠마오 노상의 이야기(예수가 부활 해서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게 나타난 이야기)에 신기한 공통점을 발견한다. 따라서 두 번째 구절과 "엠마오 이야기"는 이제는 잃어 버린 어느 초대 기독교 문서에 공통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다.
결론으로 그는 "구원자" , "사람일수..." 구절 두 개만 빼고는 전부 원본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거의 모든 학자들이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위조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저술중의 예수에 대한 구절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로 유대교의 제사장인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자면 성경은 신의 영감으로 된 것이므로 일정한 계시의 기간에만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세로부터 아닥사스(Artaxerxes, BC 465 ~ 424)왕 때까지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한 철저한 유대인이었다. 그의 저술에 의하면 로마의 식민 통치하에 소작 농민들은 25%의 세금과 사원에서 부과하는 22%의 헌금 등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는 동족들 앞에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신탁을 알리는 자칭 선지자들이 득시글거렸다고 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 비유(譬喩)와 알레고리(寓話)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설교하며, 멀지 않아 전쟁이 일어나 메시아가 나타나서 세계를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퍼트리며 돌아다녔는데, 이 소문들을 이용하여 스스로 메시아라고 자처하며 게릴라 투쟁에 지도자로 나선 무리가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유대교를 신봉하면서, 동시에 매국노였던 요세푸스는 유대인의 무장독립투쟁을 모두 사기꾼, 강도등으로 간주했다.
"파두스가 유대의 총독이던 시대에, 테우다스라는 이름의 어떤 사기꾼이 많은 수의 대중을 선동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소유물을 가지고 요단강으로 그를 따라오라고 선동했다. 그는 그가 예언자이며, 그의 명령에 따라 그 강이 갈라지고 그들을 쉽게 건너게 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고대사 20권 97절]
"이집트에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와서 자기가 예언자라고 선언하고, 대다수의 대중들에게 그를 따라 예루살렘에서 5퍼얼롱(furlongs) 떨어져 있는 올리브 산으로 나가자고 선동했다. 그는 그곳에서 그의 명령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 줄 것이며, 그 때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대고대사 20권 169~70절, 유대전쟁사 2권 261~62절]
요세푸스는 당시 갈릴리의 유다, 페레아의 시몬, 톨로마이오스, 테우다스, 등 메시아를 사칭하여 폭동을 일으켰던 자들에 대해 모두 사기꾼들로 평가했다. 그런데, 예수와 관계된 문제의 구절은 그가 예수의 신성과 기적, 부활을 인정한 것으로, 요세푸스가 마치 기독교인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정도이다.
다시 말하자면, 독실한 유대인이 기독교를 믿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만약 요세푸스가 문제의 그 구절을 직접 기록했더라면, 예수도 사기꾼처럼 묘사했을 것이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예수의 실존성을 증거한 중요한 증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유대인의 매국노라고 볼 수 있는 요세푸스가 메시아라고 주장했던 사람은 바로 로마황제였다! 유대-로마 전쟁때 패배하여 베스파시안 앞으로 끌려간 요세푸스는 그가 바로 유대인이 학수고대하는 메시아이며, 곧 로마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요행인지 몰라도 그의 예언은 적중하여 베스파시안은 69년에 로마황제로 등극한다. 황제는 예언에 대한 보답으로 요세푸스를 로마에 데려가 측근의 한 사람으로 삼았다.
그를 가르키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라는 말도 '플라비우스 왕가의 요세푸스' 라는 뜻이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이야 말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소망하여 왔던 메시아이며, 그와 티투스는 멀지 않아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고 아첨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고대의 신탁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베스파시안과 티투스임을 주장하며, 메시아를 사칭하여 로마에 대해 무장투쟁을 일삼는 유대동족들을 비난했다.
자세하게 그의 삶을 돌아보면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의 귀족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14세에 유대교 율법문제를 놓고 대제사장들에게 자문을 해줄 정도로 조숙했다고 한다. 16세에는 은수자 반누스와 함께 광야로 나가 3년간 지냈는데, 반누스는 그리스도가 태어날 즈음 유대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유대교 금욕주의의 한 분파에 속해 있었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바리사이파에 가입했다. 이것은 그가 훗날 로마인들에게 협력한 일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바리사이파는 〈신약성서〉에서 비판적으로 묘사되었지만, 대부분 대단히 경건한 유대인들이었으며, 엄격하게 토라를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무장한 애국주의 집단인 열심당과 같은 강력한 유대교 민족주의에 공감하지 않았으며,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독립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로마의 통치에 순응하려고 했다.
64년 요세푸스는 로마의 수도에 갇혀 있던 수많은 유대인 동료 제사장들을 석방시키는 임무를 띠고 로마에 대사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네로 황제의 2번째 부인 포파이아 사비나에게 소개되었고, 그녀의 호의로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그는 로마를 방문하는 동안 그곳의 세련된 문화와 특히 강력한 군대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로마의 통치에 항거하는 대반란의 전야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66년 열광적인 열심당의 충동을 받은 유대인들은 로마 총독을 쫓아내고, 예루살렘에 혁명정부를 세웠다. 요세푸스는 많은 동료 제사장들과 함께 열심당에게 타협을 권고했으나 자신의 뜻과는 상관 없이 반란에 휩쓸려 들어갔다.
그는 온건한 입장을 취했으나 갈릴리 군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만일 신빙성이 없는 그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곳에서 타협을 위해 노력했으나 기스칼라의 요한이 이끄는 지역 반란군의 강력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무장 반란이 무모한 일임을 알고 있었지만, 밀려오는 로마 대군을 막기 위해 북방의 성들을 요새화했다.
로마군은 훗날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의 지휘하에 67년 봄 갈릴리에 도착하여 북방 유대인들의 저항을 신속히 무너뜨렸다. 요세푸스는 47일 동안 요타파타 요새를 지키려고 애썼지만, 이 요새가 함락되자 40명의 결사대원과 함께 주변에 있는 동굴에 숨었다. 그곳에서 결사대원들은 투표 끝에 항복하기보다는 자결하기로 결정했다. 크게 당황한 요세푸스는 자살의 부도덕성을 주장하면서, 각 사람이 제비를 뽑아 순서대로 곁에 있는 사람을 죽이자고 제의했다. 그는 모든 궁리를 다하여 마지막 제비를 뽑았으며, 동굴에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남았을 때 상대방을 설득하여 로마군에 항복했다.
쇠사슬에 묶여 베스파시아누스 앞에 끌려간 요세푸스는 예언자 행세를 하면서 베스파시아누스가 곧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은 68년 네로가 죽음으로써 신뢰를 얻었다. 그는 이 계략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그뒤 2년간 로마군 막사에서 포로로 지냈다. 69년이 저물어갈 무렵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로 선포되었다. 요세푸스는 자신의 예언이 실현됨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그때부터 그는 로마 편에 섰다.
이름을 플라비우스(베스파시아누스의 가문 이름)로 바꾸고, 후원자인 베스파시아누스를 따라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그곳에서 3번째 결혼을 했다(그의 첫번째 아내는 요타파타가 함락될 때 죽었고, 2번째 아내는 유대에서 그를 버렸음). 후에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이자 훗날 그를 계승하여 황제가 된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일원으로 70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 일에 가담했다.
그는 로마군과 반란군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려고 했으나, 그의 배교를 증오한 유대인들과 그를 믿지 못하는 로마군에게 배척을 받아 어떤 일도 이룰 수 없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뒤 요세푸스는 로마에 거주하면서 그곳에서 평생 황제의 후원을 받으며 글 쓰는 일에 전념했다.
그런 요세푸스가 '유대 고대사'에서 갑자기 그의 정치적 처세술을 모조리 부정하고, 예수를 메시아로 칭송하는 글을 남긴셈이다. 한술 더 떠서 티투스 황제가 그의 책에 서명을 하고 발간을 허락한 셈이 되니 더욱 어이없는 일이다.
세 번째로, 요세푸스는 장황설을 늘어놓는 작가로, 그는 보다 중요성이 적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썼다. 예수에 대한 부분만큼은 선행한 구절이나 뒤따르는 구절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문제의 구절은 다른부분과 문체까지도 다르다. 즉, 문제의 구절만 빼버린다면 완벽한 그의 문체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또, 그 구절은 유대인들에게 닥친 재앙에 관한 이야기들의 모음들 가운데에서 나오는데, 그 구절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 역사가의 글에 공간을 만들기 위한 개작의 손길에 의해 나뉘어졌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네 번째로, 요세푸스의 저술인 유대 전쟁사는 안티오코스의 예루살렘 점령부터 AD70 년의 예루살렘 함락까지의 내용을 유대 고대사책에서 그대로 복사하고 있다.
빌라도가 군중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 등 다른 부분들은 거의 동일하게 서술 되었는데 유대 전쟁사에서는 유독 상기의 예수 인용구들만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다섯 번째로 유대 고대사의 사본들이 전부 기독교인들의 관리 하에 전수 되었으며, 초대 교부들과 기독교 변증가들은 왜 요세푸스의 저술을 인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대고대사는 초대 기독도들에게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으며 그들은 열광적으로 그 책을 읽었고 소중히 여겼다.
초대 기독교도들은 예수의 실존과 그의 놀라운 기적들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받았고, 이러한 과정은 초대교부들의 저술에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렇게 좋은 증거물을 제시하지 않았다.
유대고대사가 발간된 것이 기원후 93 년경이었는데, 거의 140~250년이 흘러간 AD 324년이 되어서야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처음으로 문제의 구절이 처음 인용 되었다. 이것이 처음이다. 그렇다면 유세비우스 이전에는 이 구절을 아무도 인용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그 책은 열광적으로 읽혔고 질문은 쏟아졌는데도 말이다.
"유세비우스는 신앙의 명분 아래 문서 변조를 지원하였고 요세푸스외의 여러 저술가들의 책들도 변조 시켰다"
[마샬 거빈 (Marshall J. Gauvin)]
요셉 웰레스에 의하면 문제의 구절은 유세비우스의 위조작이었다고 한다. 요셉 웰레스는 많은 연구 끝에 당시 교부들 사이에 유행하던 문서 변조의 행태를 캐어 낸 인물이다. 그는 문서 변조의 대표자로 유세비우스 추기경을 꼽았다.
유세비우스 자신도 그의 저서 복음적 증명(Evangelical Demonstrat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구세주에 관하여, 내가 이미 생산(조작) 해낸 이 증거들 만으로도 충분 하다. 하지만 유대인 요세푸스를 여분의 증인으로 이용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usebius/ Evamgelical Demonstration, Book III. P.124]
유세비우스 자신도 그것이 조작이었음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이성의 모든 논증들은 그 구절이 염치없는 위조임을 증거한다. 이러한 이유로 정직한 기독교 학자들은 누구나, 그것을 첨삭된 것으로써 버려왔다.
Dean Milma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많은 추가적인 구절들과 함께 첨삭되었다."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을 쓰며, Dean Farra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세푸스가 현재 있는 것과 같은 구절을 전부 썼다는 것은, 제대로 된 정신의 비평가라면 절대 믿지 않는다."
Chambers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세푸스의 유명한 그 구절은 일반적으로 첨삭임이 인정된다."
[The Chambers Encyclopedia]
왈버튼(Warburton)주교는 그것을
"비열한 위조이며 매우 어리석은 것이기도 하다"며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