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복음주의 개신교(나는 기독교라는 넓은 범주를 대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의 조류를 알 수 있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그 중 두 가지가만 소개하자면 첫째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고 둘째는 신앙서적이다. 이 두 가지를 보면 현재 무엇이 복음주의 개신교를 대표하는 주제인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주의점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분별력이다. 분별력은 올바른 교리와 많은 독서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분별력이 중요한 이유는 복음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하여 신앙을 올바르게 성장시키는데 있다. 또 다른 주의 점은 시대의 조류를 위에서 볼 수 있는 관점(perspective)이다. 이것은 현 시대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할뿐만 아니라 복음주의적인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시대를 해석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준다.
그런데 나는 현 시대를 사는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의 신앙을 지속적으로 핥고 있는 사탄의 혀가 바로 긍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결코 ‘긍정’자체가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이 복음주의 개신교인이라는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다.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 20세기 최고의 강해 설교자이자 복음주의 지도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설교집을 조금 인용해보도록 하자.
그는 복음주의 개신교인의 특징을 크게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하고 있는데 첫째는 복음을 보존함이요 둘째는 역사에서 배움, 셋째는 부정적인 점을 견지함, 그리고 마지막 넷째는 빼지도 말고 더하지도 말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 그의 말을 들어보자.
“신자가 복음주의자이기를 포기하는 첫 번째 징후의 하나는, 부정적인 점에 관심을 갖지 않고 항상 긍정적인 점만 강조하는 것입니다 ... 복음주의자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것은 믿어서는 안 되고 저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마틴 로이드 존스
이것은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의 세 번째 특징에 해당하는데 이런 ‘부정적인 점을 견지함’의 문제는 성경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이 성전을 찾으셔서 상인들의 회를 둘러엎으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치시며 상인들을 향해 분노하신 일이 있다. 이때 예수님은 그 중에서도 성전을 거룩하게 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하셔서 긍정의 힘을 맘껏 발휘하시지 않는다. 그 분은 부패한 사람들을 정확하게 정죄하신다. 좀 더 시간을 당겨 마틴 루터를 생각해보라, 루터는 교황의 권위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95개조 반박문를 비텐 베르크 교회에 붙였다. 루터는 지금도 성경을 믿고(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그들의 신앙을 고수함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를 인정한다고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의 현재 복음주의 개신교와 비슷한 점에 집중한 것이 아니다.(물론 반박문을 쓸 당시는 개신교회가 생기기 전이지만) 그는 전혀 올바르지 않은 로마 가톨릭의 문제에 대항했다. 뿐만 아니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에 소개되는 것처럼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가 충분히 개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개신교인들을 이야기 할 때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는 ‘(로마 가톨릭에 대한)저항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기본적으로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의 베이스는 ‘부정적인 점은 견지함’에 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은 개혁을 마친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복음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전하기 위해 개혁하는 교회에 속해있다고 말해야 옳다. 그리고 그런 견지에서 에큐메니컬 무브먼트(Ecumenical Movement: 가톨릭과 개신교가 하나 되자는 운동)를 주장하는 기독교인들(특별히 스스로를 복음주의 노선에 있는 개신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이 시대의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은 그렇게도 긍정을 좋아하는가? 왜 지도자들은 심리학과 경영의 툴을 사용하기를 즐겨하는가? 당장 효과가 있는 듯 보이며 그것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진한 휴머니즘을 물씬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패의 문제는 다뤄지지 않는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진리만을 이야기 하되 반드시 말해야 할 모든 진리를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맘에 드는 것을 선별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관계였다는 골로새서의 말씀은 이미 잊혀진지 오래다. 그저 긍정, 긍정을 외치며 내 귀와 마음에 좋은 메시지를 향해 더 달라고 갈구한다. 그러면 교회는 캠페인이나 세미나를 통해 성도들의 갈증을 채워주려고 노력한다. 습관을 바꾸자고 이야기 한다. 세미나를 통해 우리의 이성을 채우란다. 구도자는 오자마자 죄에 대한 인식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무가치하게 신도로부터 떠넘겨 받는다. 그러나 기억하라, 종교개혁 정신의 네 가지 모토는 지금도 유효하다.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latia),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a Doe Gloria)"
현대 복음주의 개신교의 문제는 비단 긍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주의를 특정 짓는 빼지도 더하지도 않음에 주목하라. 로마 가톨릭의 문제 중 하나는 무엇인가? 그들은 구원의 조건에 예수님 포함해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덧붙인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성경의 증거는 그들에게 무의미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항상 모든 죄와 형벌을 사해주시며 또 고해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속죄하셨다고 믿는 믿음으로 속죄를 받는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로마카톨릭 트렌트 공회, SessionⅩⅣ, Canon 12) 출처: [마틴 로이드존스의 천주교 사상 평가]
로마 가톨릭은 성경 위에 교황의 권위를 두고 교황의 무오류성을 교리로 제정했다. 그 결과 현재 로마 가톨릭은 기독교 내에서 뿐 아니라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법으로 인정해버렸다. 교황이 오류투성이의 인간일 뿐이라는 것은 시대의 역사가 증거 한다. 누가 교황을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리는가? 누가 로마 가톨릭을 성경에 근거한 종교로 보는가?
누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피 뭍은 십자가를 품고 있는 사람인가? 누가 복음의 순수성과 완전하게 성경에 근거한 믿음을 가진 사람인가? 누가 그리스도께서 몸 찢으시고 생명 바쳐 사신 교회를 지키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추는 사람인가?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지 말고 시대를 꿰뚫는 영적 안목을 키우자. 그리고 올바른 복음주의 개신교의 리더를 찾아서 따르라.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은 신도를 가졌다고 해서 바른 교리를 가진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대가 낳은 그럴듯한 오류다.
마지막으로 신앙을 올바른 교리 위에 세우자. 이 시대는 교리가 사라졌다. 교회 앞에도 요즘에는 교파를 쓰기 보다는 ○○교회라는 식으로 교리나 교파에 대해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설교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올바른 교리가 없기 때문에 ‘성경적’인 신앙을 외치지만 정작 ‘무엇이 성경적인가?’를 물으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성경을 올바로 보게 해주는 렌즈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렌즈가 바로 교리다. 물론 신학이라는 범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교리가 없는 성도의 마음이 사상이나 선동에 휩쓸리기 쉽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늘 앞으로 다시 교리가 중요해질 것이라고 주장 한다. 그런데 얼마 전 마틴 로이드 존스의 글을 통해 나는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서둘러 살펴봐야 할 다음 사항은, 복음주의자는 언제나 교회의 교리에 관심을 둔다는 것입니다 ... 수세기에 걸쳐 복음주의자들은 교회의 교리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들이 교회의 다른 부분이나 다른 단체나 교단들을 떠난 이유가 대체로 이 점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주의자는 순수한 교회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의 교회관은 교회가 회집된 성도들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국가 교회를 믿지 않습니다. 기독교 교회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지대한 관심을 갖습니다."[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마틴 로이드 존스
또한 성경은 말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옥성호씨가 쓴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보면 디모데 후서 말씀의 ‘교훈’은 원어적으로 ‘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초대교회에도 이단문제나 신앙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파생의 문제가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교리가 필요했다. 구원의 정수인 로마서는 바울이 그저 보고 싶은 로마의 신도들을 향해 안부나 전하려고 쓴 편지가 아니다.
당신은 누구인가? 그냥 뭉뚱그려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겠는가? 다시 묻겠다.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문득 자신은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스스로 증언하는(그러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의 수호성인으로 받아들여지는)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서문이 떠오른다. 그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의 역할이 현관 마루와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의도대로다. 언젠가는 어떤 방을 선택해서 들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왕 들어가는 방인데, 올바른 방, 성경에 근거한 방, 철저히 믿음에 근거한 방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나는 결론적으로 그 방이 복음주의 개신교라고 단언한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왜곡된 복음과 개혁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왜곡된 복음과 개혁
현대 복음주의 개신교(나는 기독교라는 넓은 범주를 대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의 조류를 알 수 있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그 중 두 가지가만 소개하자면 첫째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고 둘째는 신앙서적이다. 이 두 가지를 보면 현재 무엇이 복음주의 개신교를 대표하는 주제인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주의점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분별력이다. 분별력은 올바른 교리와 많은 독서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분별력이 중요한 이유는 복음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하여 신앙을 올바르게 성장시키는데 있다. 또 다른 주의 점은 시대의 조류를 위에서 볼 수 있는 관점(perspective)이다. 이것은 현 시대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할뿐만 아니라 복음주의적인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시대를 해석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준다.
그런데 나는 현 시대를 사는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의 신앙을 지속적으로 핥고 있는 사탄의 혀가 바로 긍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결코 ‘긍정’자체가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이 복음주의 개신교인이라는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다.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 20세기 최고의 강해 설교자이자 복음주의 지도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설교집을 조금 인용해보도록 하자.
그는 복음주의 개신교인의 특징을 크게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하고 있는데 첫째는 복음을 보존함이요 둘째는 역사에서 배움, 셋째는 부정적인 점을 견지함, 그리고 마지막 넷째는 빼지도 말고 더하지도 말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 그의 말을 들어보자.
“신자가 복음주의자이기를 포기하는 첫 번째 징후의 하나는, 부정적인 점에 관심을 갖지 않고 항상 긍정적인 점만 강조하는 것입니다 ... 복음주의자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것은 믿어서는 안 되고 저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마틴 로이드 존스
이것은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의 세 번째 특징에 해당하는데 이런 ‘부정적인 점을 견지함’의 문제는 성경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이 성전을 찾으셔서 상인들의 회를 둘러엎으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치시며 상인들을 향해 분노하신 일이 있다. 이때 예수님은 그 중에서도 성전을 거룩하게 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하셔서 긍정의 힘을 맘껏 발휘하시지 않는다. 그 분은 부패한 사람들을 정확하게 정죄하신다. 좀 더 시간을 당겨 마틴 루터를 생각해보라, 루터는 교황의 권위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95개조 반박문를 비텐 베르크 교회에 붙였다. 루터는 지금도 성경을 믿고(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그들의 신앙을 고수함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를 인정한다고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의 현재 복음주의 개신교와 비슷한 점에 집중한 것이 아니다.(물론 반박문을 쓸 당시는 개신교회가 생기기 전이지만) 그는 전혀 올바르지 않은 로마 가톨릭의 문제에 대항했다. 뿐만 아니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에 소개되는 것처럼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가 충분히 개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개신교인들을 이야기 할 때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는 ‘(로마 가톨릭에 대한)저항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기본적으로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의 베이스는 ‘부정적인 점은 견지함’에 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은 개혁을 마친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복음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전하기 위해 개혁하는 교회에 속해있다고 말해야 옳다. 그리고 그런 견지에서 에큐메니컬 무브먼트(Ecumenical Movement: 가톨릭과 개신교가 하나 되자는 운동)를 주장하는 기독교인들(특별히 스스로를 복음주의 노선에 있는 개신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이 시대의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은 그렇게도 긍정을 좋아하는가? 왜 지도자들은 심리학과 경영의 툴을 사용하기를 즐겨하는가? 당장 효과가 있는 듯 보이며 그것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진한 휴머니즘을 물씬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패의 문제는 다뤄지지 않는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진리만을 이야기 하되 반드시 말해야 할 모든 진리를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맘에 드는 것을 선별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관계였다는 골로새서의 말씀은 이미 잊혀진지 오래다. 그저 긍정, 긍정을 외치며 내 귀와 마음에 좋은 메시지를 향해 더 달라고 갈구한다. 그러면 교회는 캠페인이나 세미나를 통해 성도들의 갈증을 채워주려고 노력한다. 습관을 바꾸자고 이야기 한다. 세미나를 통해 우리의 이성을 채우란다. 구도자는 오자마자 죄에 대한 인식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무가치하게 신도로부터 떠넘겨 받는다. 그러나 기억하라, 종교개혁 정신의 네 가지 모토는 지금도 유효하다.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latia),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a Doe Gloria)"
현대 복음주의 개신교의 문제는 비단 긍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주의를 특정 짓는 빼지도 더하지도 않음에 주목하라. 로마 가톨릭의 문제 중 하나는 무엇인가? 그들은 구원의 조건에 예수님 포함해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덧붙인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성경의 증거는 그들에게 무의미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항상 모든 죄와 형벌을 사해주시며 또 고해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속죄하셨다고 믿는 믿음으로 속죄를 받는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로마카톨릭 트렌트 공회, SessionⅩⅣ, Canon 12) 출처: [마틴 로이드존스의 천주교 사상 평가]
로마 가톨릭은 성경 위에 교황의 권위를 두고 교황의 무오류성을 교리로 제정했다. 그 결과 현재 로마 가톨릭은 기독교 내에서 뿐 아니라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법으로 인정해버렸다. 교황이 오류투성이의 인간일 뿐이라는 것은 시대의 역사가 증거 한다. 누가 교황을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리는가? 누가 로마 가톨릭을 성경에 근거한 종교로 보는가?
누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피 뭍은 십자가를 품고 있는 사람인가? 누가 복음의 순수성과 완전하게 성경에 근거한 믿음을 가진 사람인가? 누가 그리스도께서 몸 찢으시고 생명 바쳐 사신 교회를 지키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추는 사람인가?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지 말고 시대를 꿰뚫는 영적 안목을 키우자. 그리고 올바른 복음주의 개신교의 리더를 찾아서 따르라.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은 신도를 가졌다고 해서 바른 교리를 가진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대가 낳은 그럴듯한 오류다.
마지막으로 신앙을 올바른 교리 위에 세우자. 이 시대는 교리가 사라졌다. 교회 앞에도 요즘에는 교파를 쓰기 보다는 ○○교회라는 식으로 교리나 교파에 대해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설교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올바른 교리가 없기 때문에 ‘성경적’인 신앙을 외치지만 정작 ‘무엇이 성경적인가?’를 물으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성경을 올바로 보게 해주는 렌즈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렌즈가 바로 교리다. 물론 신학이라는 범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교리가 없는 성도의 마음이 사상이나 선동에 휩쓸리기 쉽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늘 앞으로 다시 교리가 중요해질 것이라고 주장 한다. 그런데 얼마 전 마틴 로이드 존스의 글을 통해 나는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서둘러 살펴봐야 할 다음 사항은, 복음주의자는 언제나 교회의 교리에 관심을 둔다는 것입니다 ... 수세기에 걸쳐 복음주의자들은 교회의 교리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들이 교회의 다른 부분이나 다른 단체나 교단들을 떠난 이유가 대체로 이 점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주의자는 순수한 교회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의 교회관은 교회가 회집된 성도들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국가 교회를 믿지 않습니다. 기독교 교회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지대한 관심을 갖습니다."[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마틴 로이드 존스
또한 성경은 말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옥성호씨가 쓴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보면 디모데 후서 말씀의 ‘교훈’은 원어적으로 ‘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초대교회에도 이단문제나 신앙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파생의 문제가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교리가 필요했다. 구원의 정수인 로마서는 바울이 그저 보고 싶은 로마의 신도들을 향해 안부나 전하려고 쓴 편지가 아니다.
당신은 누구인가? 그냥 뭉뚱그려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겠는가? 다시 묻겠다.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문득 자신은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스스로 증언하는(그러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의 수호성인으로 받아들여지는)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서문이 떠오른다. 그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의 역할이 현관 마루와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의도대로다. 언젠가는 어떤 방을 선택해서 들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왕 들어가는 방인데, 올바른 방, 성경에 근거한 방, 철저히 믿음에 근거한 방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나는 결론적으로 그 방이 복음주의 개신교라고 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