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술, 오래 놔두기만 하면 맛 좋아지나

오석원2007.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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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술, 오래 놔두기만 하면 맛 좋아지나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1008is@chosun.com
술 종류·보관 여건따라 맛 달라져 장기보관 하는 증류주도 한계 있어

“술은 오래될수록 좋습니까?” 자주 듣는 질문이다. 이럴 때마다 나는 “사람은 오래될수록 좋습니까?”라고 되묻는다. 풋내기 소년이 노련한 중년이 되듯이, 세월이 흐를수록 술도 노련해진다. 하지만 오래 산다고 모든 사람이 노련해지는 게 아니듯이, 오래되었다고 모든 술이 좋아지는 게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이 영원히 존재할 수 없듯이, 술도 영원히 빛날 수 없다. 인생의 절정기가 있듯이, 술에도 절정기가 있다.

최근에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2400년 된 술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술향이 풍겨서 어떤 성분인지 분석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오래된 미라 한 구가 발견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2400년 동안 무덤의 주인을 위로해주었던 그 술의 충정에 찬사를 보냈을망정 맛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1980년에는 중국에서 기원전 1300년에 빚어진 술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그 술을 분석해보았더니, 알코올 기운이 거의 증발되어 그 원료가 과실인지 곡물인지조차 판정할 수 없었다고 한다.

오래될수록 좋다고 하여, 무작정 술을 보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술 따라, 보관 여건 따라 상태가 달라진다. 술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는 산소를 철저히 차단해야 한다. 청주나 와인은 공기와 접촉하면 술 빛이 엷은 벽돌색으로 변하고, 맛도 시어져 마침내는 형편없는 술이 되고 만다. 그래서 오크통에 와인을 숙성시킬 때는 산소 접촉으로 인한 변질을 방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아황산을 보충해준다. 아황산은 와인보다 먼저 산소와 반응하기 때문에 와인의 산화를 막아준다. 고급 와인이라 하더라도 오크통에서 2년 정도만 보관한 뒤에, 병에 담아 10~15년, 특별한 경우는 20~30년 숙성시키면 최상의 맛에 도달한다. 이때도 연중 섭씨 15도에 60~80% 습도를 유지하면서, 진동 없는 그늘에서 와인병을 눕힌 채 보관해야 좋은 맛을 지니게 된다. 무작정 세월을 보낸다고 좋은 술이 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세월과 잘 동행할 수 있는 술은 증류주다. 알코올 도수 25%가 넘으면 미생물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장기보관이 가능하다. 세계적인 명주로 꼽히는 증류주들은 40% 안팎이니, 미생물들이 술을 변화시킬 여지가 전혀 없다. 증류주는 숙성 기간에 따라, 그 품격이 달라진다. 처음 증류한 소주나 위스키는 그 향이 독하고 눈물이 핑 돌만큼 맛이 자극적이다. 옹기에서든 나무통에서든 숙성된 증류주는 알코올과 물이 잘 섞여 맛이 부드러워지고, 알코올과 산의 반응으로 향기 성분이 생겨나 원숙해진다.

대체로 증류주는 3년 정도까지는 눈에 띄게 좋아지지만, 그 뒤로는 아주 미세하게 좋아진다. 예컨대 술맛 50점짜리가 3년에 걸쳐 80점까지 올라가는 것은 쉽지만, 그 뒤로 80점에서 85점이 되기란 쉽지 않고, 95점짜리가 96점이 되기란 더 긴 세월이 필요하고 그 경지에 오르기도 어렵다.

증류주라 하여 무한정으로 세월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항아리나 술춘(내린 술을 받아두는 저장기구)에 담긴 소주는 용기에 스며들어 조금씩 양이 줄어든다. 오크통에 담긴 위스키는 1년에 2%씩 증발된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오래 숙성되어 상품화된 위스키는 62년산으로 알려져 있다. 62년산 위스키는 처음에 오크통에 담길 때 알코올 65%였는데 증발되어, 병입할 무렵에는 알코올 40% 정도였다고 한다. 법적으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알코올 40% 이하로 내려가면 스카치위스키라 부를 수 없으니 병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오래된 증류주가 비싼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술이 증발하고, 증발한 만큼 술 속에 담긴 다른 성분의 농도도 진해져 맛이 깊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희소성까지 더해지면 값은 다락같이 올라간다.

세월을 논하는 우리 술로, ‘백일주’를 꼽을 수 있다. 백일 동안 발효와 숙성을 거친 고급 술로, 백일주라는 명칭은 우리 술에 보내는 찬사다. 대표적인 술로 한산소곡주, 경주교동법주, 면천두견주 등을 꼽을 수 있다.

백일주를 발 아래로 굽어보는 술로 천일주가 있다. 빚은 지 1000일이 지나야 마시고, 한 번 취하면 1000일을 지나야 깬다는 전설적인 술이다. 중국 서진시대(265~317)의 장화가 저술한 ‘박물지’에 나오는 술인데, 그 풍취 때문에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 이래로 조선시대 문장가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던 술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오래 보존된 술에 대한 기록이 없다. 질그릇이나 도자기 술병이 고분에서 발견되긴 했지만, 그 안에 술이 담겨있었다는 보고는 없었다. 술을 오래도록 숙성시키고 있다고 자랑하는 양조장도 찾아보기 어렵다. 세월을 실어 파는 술로 보해 ‘매취순’ 정도를 꼽을 수 있다. 5년 숙성시킨 매실주를 가장 먼저 내놓았으며, 명절 선물용으로 10년 숙성시킨 매취순도 내놓고 있다.

그나마 오래 묵힌 술을 찾아보면, 1975년 9월 국회의사당이 준공될 때에 해태상 밑의 지하 10m에 묻은 백포도주 노블와인이 있다. 해태제과가 3000만원을 들여 해태상을 제작 기증하면서, 해태주조에서 빚은 와인을 묻은 것이다. 100년이 지나서 캐기로 한 그 술병들은 석회로 밀봉하여 항아리에 담아 좌우 해태상 밑에 36병씩 모두 72병을 묻었다고 한다. 지금 태어난 아이들 정도가 노년에 맛볼 수 있는 술이다.

잘 익은 술을 만나면, 친구가 그리워진다. 술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고 세월이 만든다. 사람이 술을 빚으면, 세월이 술을 완성한다.

[허시명 여행작가·‘주당천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