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락의 역사(퍼온 글)

최중호200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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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락의 역사(퍼온 글)

1990년대 초반 - 새로운 조류 (이현석,H2O,NexT,서태지,안치환,강산에)

80년대식 헤비메틀은 90년 결성된 '아시아나'와 ' 카리스마'라는 슈퍼밴드의 앨범작업으로 끝을 맺는다.

이들은 80년대를 호령하던 쟁쟁한 멤버들로 구성되었지만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단발적인 작업으로만 만족해야만 했다.

이후 90년대에는 헤비메틀의 2세대들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밴드가 스트레인져, 디오너서스, 아마게돈, 더 클럽, 제로지등이다.

그리고 이들 밴드의 대표주자들인 서안상,이시영,안회태 등이 만든 미스테리와 몽키헤드까지가 헤비메틀2세대로 보면 좋을듯 싶다.

그렇지만 이들의 활동은 80년대 중반 1세대들의 모습에 비해 그다지 좋은 활동을 보이지는 못했다.

이미 서구의 팝도 헤비메틀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음에도 LA메틀 중심의 활동을 했고 디젤,터보,나티,아발란쉬 등 스래쉬 메틀을 구사하는 밴드들도 메탈리카에 필적할 만한 사운드를 생산하고 있었음에도 대중의 이해부족으로 답보상태에 머물러야만 했다.

어찌되었든 이 당시 실력파로 활동하던 서안상,안회태,이시영,김병삼,배재범,임덕규,김동규 등이 현재 회자되는 인물들이 아닌것을 보면 90년대 초반 한국 록의 모습은 매우 상황이 좋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비록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여전히 7-80년대 뮤지션들이 추앙받고 있는 현실을 볼 때 말이다.

그러나 92년말에 발매된 이현석의 음반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미스테리 1집과 함께 메틀마니아의 주목을 받았던 음반으로 기타리스트 이현석의 솔로 프로젝트 앨범이다.

이현석은 80년대 후반 손무현,오태호와 함께 고교 스쿨밴드의 최고 기타리스트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손무현은 김완선의 작곡자로 오태호는 이승환의 파트너로 모두 제도권으로 흡수되어 버린뒤, 이현석만이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표현해 내었다. 이현석 1집은 국내에서는 보기드문 기타연주 음반이다.

(비록 기획사의 상업적 의도 때문에 몇곡의 노래가 가사를 붙여 이현석의 목소리로 불려지고는 있지만) 특히 잉베이 맘스틴의 주도아래 범주화된 바로크 메틀을 구사한 국내 최초의 음반이기도 하다. 기타라는 악기의 각종 이펙터들이 발전하면서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유럽의 기타리스트들을 중심으로 한 기타연주 음반이 많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기타리스트들의 실력을 가름하는 잣대는 다름아닌 스피드였다. 얼마나 빨리 기타를 연주할 수 있느냐가 바로 기타리스트의 실력이 되곤 했던 것이다.

이현석은 1집에서 속주기타연주의 전형을 보여준다. 'Sky hihg'나 'Child play' 그리고 'Life cycle'등에서의 프레이즈는 압권이었다. 이현석 1집은 밴드를 구성하지 못해 기타와 베이스는 직접연주하고 드럼머쉰과 프로그래밍으로 나머지 부분을 채웠다고 한다.

그래서 사운드면에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기타연주 하나만으로도 멋진 음반이었다. 1집의 반응이 괜찮았는지 2,3집이 계속 제작되었는데 이미 시대는 속주기타를 떠나 얼터너티브 쪽으로 변하고 있어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현석은 90년대 후반에 김경호의 솔로음반에 세션으로 참가하고 최근에 '이현석 프로젝트'라는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H2O 2집은 사실상 헤비메틀 시대가 끝나고 모던록의 시대를 알리는 최초의 완성도 높은 음반이었다. 김준원을 중심으로 한 하드록 밴드였던 H2O가 카리스마의 박현준, 김민기와 시나위 출신으로 베이스와 신디사이저에 모두 능한 강기영을 새로 영입하여 변신을 꾀하였다. 앨범 자켓에서 짧게 정돈된 머리를 보면 이들에게서 80년대 헤비메틀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다.(헤비메틀의 근원지에 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강기영,김민기는 봄여름가을겨울의 라이브에 세션으로 참여하면서부터 이미 헤비메틀 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어졌음을 알 수 있었지만 박현준의 세련된 기타연주는 다소 의외였다.

U2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깔끔한 리듬기타는 매우 훌륭했다.

(사실 박현준은 카리스마에서 베이스 주자였다) 그리고 1집에서 샤우팅을 하던 김준원도 절제된 보컬을 선보이고 있다. H2O는 경쾌한 하모니커 사운드가 인상적인 '걱정하지마'의 빅히트로 90년대 초반 TV쇼에 자주 출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Hey remember me'와 '변함없는 하늘가' 등에서 김준원의 보컬과 박현준의 기타가 잘 어울렸다. 전반적으로 볼 때 U2와 폴리스의 스타일을 추구한 듯 싶다. 이후 H2O는 듀스 2집에 참여하고 듀스 공연에 세션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기영,박현준이 여러가지 이유로 탈퇴하고(이후 삐삐밴드 결성), 김민기도 솔로로 독립하면서 해체되고 만다. 해체직전 H2O는 제작사의 계약관계 때문에 3집 '오늘 나는'을 발표하지만 3집에 대한 활동은 없이 해체된다.(Sub의 전 편집장 박준흠씨는 이 음반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을 한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현재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여러모로 볼 때 90년대는 80년대보다 이전 세대에 대한 정통성이 뒤떨어지는 시대임에 틀림없다. 80년대 그 뜨거웠던 헤비메틀의 주역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제도권으로 흡수되고(김종서,임재범,이근형,손무현,오태호 등) 이 땅의 록음악은 90년대식으로 새로이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성공한 케이스인 '넥스트'를 보더라도 그렇다. 물론 리더인 신해철은 80년대 후반 대학가요제를 통해 등장을 한 뮤지션이기는 하지만 그가 몸담았던 '무한궤도' 역시 정통성에는 거리가 멀었다.

신해철은 참 독특한 뮤지션이다. 분명 그는 록에 대한 이해가 보통 뮤지션보다는 월등히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해철은 근본적으로 테크노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뮤지션으로 넥스트의 2집에서 4집까지의 활동은 그의 전체 음악 활동에 비춰 본다면 다소 의외성이 강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여름사냥 출신의 기타리스트 정기송과 함께 만든 다소 모던록에 가까웠던 1집 음반과는 달리 스트레인져의 임덕규와 정기송이 번갈아가며 연주하는 2집은 스래쉬 메틀을 선보여 충격을 주었다.

'이중 인격자'에서의 메가데스 스타일은 놀라웠다.

발라드나 댄스 뮤지션으로 알려져있던 신해철이 샤우팅을 할 줄은 누구도 몰랐다.

더군다나 이렇게 완성도 높은 스래쉬를 그가 연출해 낼줄은 정말 몰랐다.

헬로윈 사운드를 연상시키는 '껍질의 파괴'의 대곡 스타일도 무척 인상이 깊었고 신디사이져 연주와 철학적인 노랫말이 좋은 '불멸에 관하여'는 베스트 트랙이다.

인지도 높은 신해철이 완성도 높은 스래쉬 매틀을 선보이면서 90년대 록은 장르의 확산을 경험할 수 있었다. 90년대 초반 여러 밴드가 실패한 스래쉬 메틀을 넥스트가 완성하면서 이 땅에는 '크래쉬'라는 대형 밴드가 탄생할 터를 만들수 있었다.

넥스트는 2집의 성공에 힘입어 록밴드로서는 최초로 수많은 지지자를 확보하였고 3집과 4집에는 다운타운 출신 기타리스트 김세황과 감각적인 김영석을 영입하여 안정된 사운드를 선보였다.(3집은 넥스트 앨범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 4집 라젠카 이후 신해철은 모노크롬으로 그리고 나머지 멤버는 패닉 출신의 김진표와 노바소닉을 결성하여 활동 중이다.

90년대 주류음악을 거론할때 서태지를 빼놓을 수는 없다.

서태지는 엔터네이너로서 90년대식 표본을 설정해 주었고 랩과 댄스에 대한 새로운 시류를 개척하기도 했다.

사실상 90년대 주류 음악의 처음과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서태지의 영향력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주류 시장을 보라. 모두 서태지의 아류다.)

그런데 록을 이야기할 때 랩과 댄스의 귀재인 그가 거론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그는 랩퍼이기전에 록커였기 때문이다.

시나위 4집에서 베이스를 담당하면서 서태지의 프로 음악세계는 시작되었다.

무슨 이유에서 그가 솔로 음반을 준비하면서 비박스와 랩을 첨가하며 백댄서를 거느린 댄싱음악을 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분명 그의 음악은 보통 댄스하고는 달랐다.

그의 랩은 힙합의 그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데뷰곡 '난 알아요'에서 헤비기타 리프는 분명 혁명이었다. '하여가'에서 이태섭의 기타 솔로는 스래쉬 메틀의 그것과 일치하였고 3집에서는 마침내 록커의 위치로 돌아서고 만다. '교실 이데아'에서 안흥찬의 목소리를 빌어온 외침이나 '내 맘이야'의 거침없는 지껄임은 록의 저항성과 파괴력을 모두 갖추고 있다.

서태지는 궁극적으로 '발해를 꿈꾸며'나 '널 지우려고 해'에서와 같은 얼터너티브 성향을 추구한 듯 하다. 그것은 4집의 '시대유감'과 '필승'에서처럼 하드코어적인 이미지와 함께 완성되어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 헤체이후 발매된 솔로 음반에서는 '컴백홈'같은 힙합요소는 완전히 거세되고 완성도 높은 모던록을 보여주고 있다.

서태지의 수많은 공적중에 가장 위대한 점은 록의 제도권화일 것이다.

서태지 이후 대중의 귀(특히 10대)는 록에 관대해졌다. 일부 메니아에 국한되었던 록음악이 공중파를 탈수 있었고 90년대 중반이후 시나위의 재결성과 윤도현 밴드의 활동이 가능했으며 인디록의 탄생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서태지로 인해 주류의 음악이 천편일률적으로 댄스화가 되었다는 지적도 있지만 결코 서태지의 음악은 '댄스를 위한' 음악이 아닌 근본적인 록의 정신을 갖춘 음악이었다.

넥스트와 서태지의 열풍에 90년대의 록은 자극적인 성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는 70년대부터 면면히 이어온 포크계의 침체로 작용했고 결과적으로 90년대 초반의 포크는 김광석이 혼자 짊어지다시피 했다. 그와중에 강산에 등장은 신선하고 작은 충격을 주었다.조용히 발매된 강산에 1집은 소비성향이 짙던 90년대 주류의 정서와는 다소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목소리는 김현식 분위기에 음악 스타일은 들국화의 전인권과 많이 닮아있었다. 한마디로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정서를 제대로 표현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와 수박'과 '에럴랄라'에서 거침없이 내뱉어내는 보컬은 '그래 노래란 이런것이야'를 느끼게 한다. 특히 '라구요'의 노랫말과 멜로디는 성인취향에 맞아떨어져 라디오 리퀘스트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강산에는 90년대식 포크록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이 땅의 록은 그저 강하고 직선적으로만 발전했을 것이다.

강산에의 포크 사운드는 매우 소박하고 정겨웠다. 1집의 성공으로 기획사의 의도가 많이 반영된 두번째 앨범에서 '너라면 할 수 있어'가 성공하지만 강산에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기엔 너무나 아쉬운 졸작이었다. 그러나 강산에는 3집 '삐따기'와 4집 '연어'를 통해 여전히 훌륭하고 완성도 높은 포크록을 생산하고 있다. 최근엔 자신의 음악적 모태인 한대수의 음악을 위주로 한 리메이크 앨범까지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80년대식 모던포크는 조동진, 시인과 촌장류의 서정적인 부류와 노찾사를 중심으로 한 메세지 송으로 양분되었다. 그중 메세지송의 대부는 싱어송라이터 안치환이었다. 노찾사의 주옥같은 곡을 작곡하면서 음악활동을 시작한 안치환은 1,2,3집에서이전 노찾사의 분위기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다. 물론 '소금인형'이나 '귀뚜라미'식의 서정적 멜로디도 있었지만 그것은 일부였을 뿐 여전히 안치환은 '철의 노동자'가 어울렸었다.

그러던 중 그의 네번째 앨범에서는 확연히 사운드를 일신하여 포크로커로서 대변신에 성공한다.

여전히 가사는 사회참여적인 메세지가 주를 이루었지만 통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고 목소리도 힘차게 바뀌었다. '수풀을 헤치며'와 '당당하게'는 포크록으로서 완성도가 매우 높았다. 안치환의 음악의 영원한 화두는 시인 김남주이다.

물론 80년대 대학생중 김남주의 시를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겠지만 안치환은 김남주의 시에 노래를 붙이는 작업을 여전히 좋아한다. 특히 5집에서 '희망은 있다'에 일렉기타 사운드를 입혀 멋진 녹을 만들어냈다. 안치환은 현재 여섯장의 정규음반을 만들었는데, 4,5,6집은 음악적 성향으로 볼 때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것이 좋다.

4집의 포크록 성향이 점진적으로 완성해 나가는 단계인 셈이다.

특히 5집에서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워'같은 대중성과 음악성을 겸비한 명곡을 생산하기도 했다.

90년대 한국록을 거론할 때 넥스트와 서태지 중심의 강렬한 사운드를 거론하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인데, 강산에와 안치환의 포크록 사운드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포크는 이 땅의 대중음악의 한 축으로 포크를 90년대식으로 발전시킨 강산에와 안치환 역시 한국록 역사에 한 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후반 - 그리고 새로운 대안

서태지의 등장은 이 땅의 록이 주류 문화속에 자리잡을 수 있는 원동력을 주었다.

'하여가'의 대히트는 이태섭의 화려한 기타솔로를 이 시대 대중(특히 10대)의 귀에 적응시킬수 있었고 '교실이데아'를 통해 안흥찬의 동물적인 보컬도 라디오 전파에 어울림을 주었다. 덕분에 대기업 라이센스인 SKC에서는 헤비메틀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고 전문 메탈 레이블인 메탈포스를 만들었다.

메탈포스는 소위 2세대 메탈 연주인들에 관심을 기우리면서 그 첫번째 작품으로 수도권 등지에서 독자적인 라이브 활동을 펼치던 신예 '크래쉬'를 발굴한다.

물론 메탈리카나 메가데스가 국내에 수많은 메니아를 거느리고는 있었지만 사실 크래쉬의 성향은 국내 환경에 그다지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멜로디를 전혀 무시하는 스래쉬 메틀 보다 한 층 더 과격한 데쓰메탈을 추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이 좋았는지 서태지의 '교실이데아'에 크래쉬가 참여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서태지 라이브 콘서트에 세션을 참여해서 '교실이데아'를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정말 멋지게 연출하기도 했다.) 또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콜린 리차드슨이라는 프로듀서를 영입하여 녹음 자체의 질적 향상을 꾀하기도 했다.

데뷰앨범의 'Scream', 'Smoke on the water'와 유일한 우리말 노래인 '최후의 날에' 등은 정말이지 혁명적인 사운드였다. 2집에서는 실험적으로 하드코어를 하기도 했고 3집은 1집의 콜린 리차드슨을 재영입하고 영국에서 녹음을 하여 완성도를 매우 높였다. 특히 안흥찬의 음산하고 퇴폐적인 보컬에 스래쉬 기타리듬이 돋보이는 '무상'은 압권이다. 비록 94년 데뷔당시에는 애송이에 불과하고 운이 좋아 메탈포스와 서태지의 영향으로 성공한 케이스로 절하되기도 했지만 이젠 크래쉬의 안흥찬은 국내 최고의 뮤지션으로 성장했다.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스래쉬/데스 메탈 뿐만아니라 하드코어와 테크노까지 장르 확장을 꿈꾸고 있는 안흥찬의 노력이 있는 한 크래쉬의 혁명은 계속될 것이다.

90년대 후반 가장 완전한 헤비사운드를 구사하는 밴드를 꼽는다면 단연 노이즈가든이다. 윤병주의 화려한 테크닉과 박건의 파워보컬은 단연코 현존 밴드중 최고이다. 사운드가든이나 엘리스 인 체인 등의 카피밴드에 불과했던 노이즈가든은 톰보이 록페스티벌에 참가해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프로 음악세계에 데뷰했다고 한다.

노이즈가든 사운드의 핵은 역시 윤병주의 기타에 있다. 윤병주 기타의 매력은 물론 화려한 테크닉에도 있겠지만 독특한 톤에 있다. 기타리스트의 능력중에는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사운드 메이킹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지미페이지를 보라. 테크닉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레드제플린의 10년 역사속에 일정한 기타 톤은 제플린 음악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었다)

그런 면에서 윤병주는 국내 몇 안되는 독창적인 톤을 지는 연주가이다.

개인적으로 볼 때 기타연주만 놓고 볼 때 노이즈 가든의 1집과 시나위 6집이 90년대 음반중 최고작으로 뽑는다. 1집에는 90년대를 대표할 만한 명곡들이 많이 실려있는데, 특히 점층적인 구성이 돋보이는 '유혹'이 베스트이다.(레드 제플린의 케시미어를 연상시킨다.) 물론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타협의 비','말해봐' 등도 훌륭했다.

최근 발매된 2집은 윤병주 기타 톤을 더욱 확고히 했고 새로운 시도로 세기말 최고의 화두인 테크노에 대한 접근이 눈에 띈다. 이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제발이지 지속적인 활동이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이미 밴드의 이합집산으로 인한 음악의 붕괴를 80년대 헤비메틀에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모던록의 새로운 시도로는 델리 스파이스와 이한철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김민규, 윤준호로 구성된 델리스파이스는 1집을 통해 모던록의 가능성을 충분히 시험해

보았다. '노캐리어'와 '차우차우'가 FM전파를 탈 수 있었고 또 완성도도 매우 높은 성공작이었다. 또 이들에게서 중요한 점은 한국식 모던록의 완성이다.

물론 H2O 2집에서부터 모던록 스타일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서태지와 넥스트를 거치면서 다소 모던록의 대중적 이해가 크지 않았는데 델리 스파이스의 완성도 높은 음반작업으로 인해 후배 밴드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후 등장하는 인디록 밴드들에게 음악적 방법론을 제시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델리 스파이스는 99년 두번째 앨범을 발표하는데 녹음의 완성도에서 1집을 압도한다.

단연코 99년 최고 음반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꽉찬 기타 사운드와 뛰어난 편곡력이 보인다. '원한다면','종이비행기','회상' 등 좋은 곡이 많이 있다.

반면 이한철은 델리스파이스보다 먼저 등장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철저히 무시된 안타까운 뮤지션이다. 대학가요제를 통해 등장했고 걸죽한 사투리의 입담으로 토크쇼에 출연하면서 음악성이 평가절하된 불운아이기도 하다.

영화제목을 이용한 1집은 당시 유행하던 얼터너티브를 차용하였으나 '델마와 루이스'가

조금 주목받다 말았다. 96년에는 두번째 앨범'되는 되는거야'라는 걸작을 발표했지만 왠일인지 대중매체는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이한철 2집은 90년대 베스트 앨범중 하나이다. 신해철이 참여하기도 한 2집은 레게와 테크노를 기반으로 한 훌륭한 펑크록 음반이다.

특히 '애니멀'에서의 변박과 레게의 조화에서 보이는 이한철의 리듬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두통','아야' 등에서의 감각도 훌륭했다.

그의 음악 파트너 장기영과 최근에 '지퍼'를 조직해서 역시 훌륭한 음악을 선보이고 있지만 왠일인지 미디어는 자꾸만 그를 외면한다. (유일한 히트곡은 지퍼의 발라드 '내가 사랑한 그녀는' 뿐)

언니네 이발관의 아마추어리즘은 90년대 최대의 성과물인 인디록의 탄생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노이즈가든의 윤병주가 프로듀싱해서 완성한 언니네 이발관 1집은 유치한 팀이름에 재켓디자인까지 아마추어 냄새가 많이 난다.

'푸훗'으로 시작되는 음악도 기타를 조금만 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저건 나도 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보컬은 어떤가)

그러나 그들은 '할 줄 알면 해봐'라고 대답할 줄 아는 뮤지션들이었다.

경력 1년 미만의 멤버들이 창작한 열두트랙의 곡들은 테크닉에서 유치할지는 몰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경'의 기타 아르페지오나 '쥐는 너야'의 베이스 드러밍 그리고 '산책끝 추격전'의 사이킬릭적인 이미지 등은 곡 구성의 승리였다.

각각의 곡들도 작사,작곡 식의 일률적인 명시가 아니라 각각 파트의 구성을 담당한 사람을 명시함으로써 앨범작업이 멤버의 공동작업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음악적인 완성도를 떠나 참으로 곡들의 구성만큼은 신선했다.

'푸훗'이 인기를 얻고 네티즌을 중심으로 세인의 관심을 받자 두번째 음반을 제작하지만 1집에서의 신선도는 많이 사라졌다.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려고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마추어 정신으로 무장했던 1집의 구성력은 사라지고 솔로연주가 늘어 2집은 개인적으로 실망을 많이 했다. 아마도 이러한 아마추어적인 음반은 단발적인 작업을 끝을 맺는 것이 더 좋았을 것만 같다.

90년대 이 땅의 록음악에서 최대의 화두는 역시 인디록이다.

저예산 독립음반을 의미하는 인디록은 홍대앞의 록카페 '드럭'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드럭의 고정출연 밴드인 크라잉 넛과 옐로우 키친의 녹음작업을 저예산으로 하고 거창한 홍보나 마케팅 없이 공연장 등지에서 앨범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인디록의 시작이되었다. 인디록의 주된 장르는 펑크록이다.

아무래도 저예산이기 때문에 앨범제작에 있어 걸림돌이 많이 없기 때문에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기 때문에 아마추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펑크가 인디록의 주류 장르로 정착할 수 있었다.

드럭이 '아워 네이션'이란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음반작업을 하면서 크라잉 넛이나 노 브레인 같은 밴드 대중에게 익숙하게 되었고 재머스,S&H,블루데빌 등 많은 클럽에서 수많은 실력파 아마추어가 등장하게 되었다.

단군이래 가장 많은 밴드가 결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홍대앞 클럽가는 호황을 누렸다. 이들 인디밴드들 중에 주목할 만한 밴드를 꼽으면 허클 베리핀, 노브레인, 레인리 선, 미선이, 토스트, 새드 리전드 등이 있다.

특히 최근들어서는 메이져 레이블을 통해 '인디파워 1999'라는 컴필리언 음반이 제작되는 등 메이저로의 등극도 눈에 띈다. 그리고 장르도 펑크에서 테크노와 하드코어 심지어 힙합으로 까지 확장되면서 점차 인디록도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정착되는 느낌이다.

이는 상당히 바람직한 것으로 아마추어들의 무대와 음반작업을 적은 예산으로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은 향후 이 땅의 대중음악에 질적 향상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90년대 후반에 기존 뮤지션들의 활동으로는 시나위와 봄여름가을겨울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은 10주년 기념음반에서 기존의 재즈와 블루스 위주의 음악에서 복고적인 록 사운드를 선사하는데, 많은 후배 뮤지션이 참여해서 완성도를 높여 주었다.

신대철이 이끄는 시나위의 활동 재개는 상당히 의미있는 행보였다.

시나위의 재결성은 신대철이 손성훈의 솔로 음반을 프로듀싱하면서 알게된 뮤지션들과 의기투합해서 재결성되었다.

4집의 실패와 함께 80년대 헤비메틀 시대가 끝나면서 시나위도 함께 사라졌다.

블루스 록 밴드 '자유'를 결성하기도 한 신대철은 결국 자신의 음악의 본류인 시나위의 이름으로 다시 컴백했다. 손성훈과 함께 한 5집은 시대적 영향으로 그런지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화려한 신대철의 테크닉이 없어 아쉽기는 했지만, 당시 그런지 스타일의 연주도 거의 독보적이었다. 비록 손성훈의 개성없는 보컬이 아쉬웠지만 '매맞는 아이'와 '상심의 계단'등은 괜찮았다. 그뒤, 김바다를 새로운 보컬로 영입하고 제작한 6집은 시나위 2집이후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명반이다.

노이즈가든 1집과 더불어 90년대 최고의 록 음반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예전 시나위에 비해 현실 참여적인 가사가 일단은 눈에 띄고 블루스 필을 기반으로 한 얼터너티브 사운드는 잘 다듬어져 있다.

김바다의 보컬도 걸죽하고 퇴폐적으로 매력이 있었다.

'죽은나무', '서커스' ,'해랑사' 등이 베스트 트랙이다.

현재는 70년대 사운드를 재현하는 7집 '사이키델로스'를 발표하고 80년대 이루지 못한 일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잦은 멤버 교체로 시나위의 정통성을 본다면 오히려 김종서 밴드(김종서,김영진,김민기 등 기타를 제외한 부분이 모두 전 시나위 멤버들이다.)

보다 현 시나위가 처질지는 모르지만 시나위의실질적인 주체인 신대철이 이끄는 시나위는 분명 80년대부터 이어저오는 한국 록의 역사임에 틀리없다.

이런 전통있는 밴드가 우리에게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