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으로서 결혼 2

엄태오2007.12.01
조회72
언약으로서 결혼 2


 지난 시간에는 창조 과정 중에 남녀의 관계에 관한 고찰을 해보았습니다.
남녀의 창조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있는 질서 정연한 일임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이 시간은 하나님의 주신 남녀의 관계 속에 타락이 미친 영향을 알아볼 것입니다.


-


 물론 인간에게는 타락은 잊고 싶은 일이지만, 인간의 본성과 일반적인 속성을 정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이정표는 타락임을 성경은 제시하고 있기에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굳이 하와라는 말을 안쓰고 인간이라고 단어를 선택하는 이유는,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누가 먼저 시작했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부부가 된 순간부터 그들은 연대입니다. 남녀 선후를 따지는 것은 편협한 주도권 싸움에나 있는 것입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룬 순간부터 이것은 연대 책임이며, 둘이 한몸을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이 이미 창조하신 그 시점부터 남녀는 객체로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동체로 취급되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후에도 언급되는 집안의 가장이 누구냐, 누군가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 문제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될 것입니다.


 


-


 그러나  죄의 법 아래 있는 세상은 서로가 다스리려 주도권을 잡으려 합니다. 
 여성은 여성성을 무기로 남자를 다스리려 합니다. 아프리카의 내전을 멈추게 한 일화가 있습니다. 내전의 당사자들의 부인들이 내전을 하는 남편들과 잠자리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남편들이 하나둘 총을 내려놓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성을 무기로 남자를 다스리려는 인간의 본성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 입니다.
 또한 남성은 남성대로 남성성을 무기로 여자를 다스리려 합니다. 그들의 힘과 권력을 이용해 여성을 제한했던 것이 불과 금세기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남녀 관계를 일그러뜨렸다는 것입니다.로맨스를 외쳐가며 서로를 지극히 갈망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서로를 지배하려는 교묘한 눈속임에 불과한 남녀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타락 후 징벌을 선고를 봅시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 3장 16절
 
 여기서 ‘여성은 남성을 사모해야 한다.’라는 선고가 내려집니다. 한글 본문에서 이 선고는 크게 오용되는데, 남성 주도권의 옹호 본문으로 쉽게 이해됩니다. 그러나 BHS본문을 보게되면 사모한다는 단어 ‘hq;WvT(테슈카)’는 ‘갈망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남편을 조종한려고 손을 뻗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본문은 이것을 desire(욕망)으로 표현 합니다. 좋지않은 부정적인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남녀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려고 하는 참혹한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본래의 창조 속에서 남자와 여자는 창조의 순서로 주도권을 쥐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서로 간에 주도권 싸움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시대를 지내면서 교묘하게 변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남자가 주도권을 쥐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이 전혀 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서 가부장적인 제도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일방적으로 누군가 어디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는 벗어나야할 구습입니다만, 그렇다고 그 무게 중심이 한꺼번에 여성으로 옮겨가는 것도 바람직한 성경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현 시대는 여성 중심의 세대입니다. 남성성은 천대받고 버려지고 있는 세대입니다. 남성은 숫개미와 같은 세대임을 보게 됩니다. 숫개미는 자신의 역할이 끝나면 자연유기됩니다. 오늘날의 많은 남성성도 돈이라는 목적외에서는 도태되는 것을 보게됩니다. 지금은 남자아이를 낳으면 손해가 되는 시대이고, 남자는 기러기 아빠가 되어 외롭게 죽어가는 세대입니다.
 물론 인류 역사상 수 천년의 세월을 여성성이 압박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니들도 한번 당해봐라’라는 식으로 나가는 것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여성의 해방이 아닙니다. 또한 남성 중심 헤게모니의 재구축도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일그러진 남녀의 관계를 ‘동반자의 관계’로 되돌려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싸움이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동반자의 모습은 어디서 찾을까요? 하나님의 모습으로 부터 찾아야합니다.
‘하나님처럼 신성해라? 하나님처럼 거룩해라?  하나님의 사랑처럼 서로 사랑해라?’를 말하자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이런 종교적인 담론의 차원이 아닙니다. 정확한 성경신학적인 의미를 찾아야합니다.


 


-


 창세기의 초두부터 삼위일체는 지속적으로 언급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장 26절


 


'우리가 우리 모양을 따라'는 바로 삼위일체 교리의 근거입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인간의 이론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 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려다 많은 사람이 타락의 길로 빠집니다. 조직신학으로 신론을 정리한 것은 그분의 속성을 다 명시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을 벗어나는 방대한 존재의 하나님’이시라는 기본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고, 조직신학적 고찰이라는 도구를 통해 인간이 그분을 이해하는데 쉽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뿐 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이라는 접점은 하나님 실체 중에 작은 일부분일 뿐입니다.
 삼위의 신비한 속성을 인간의 머리에 집어넣다 타락에 빠지는 것, 그 방법을 우리는 하님의 속성을 연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 반대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삼위께서 서로 협력하고 갈등없이 창조에 참여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전인을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삶의 원리의 올바른 해법과 실마리는 삼위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삼위의 존재 방식을 가정에 대입하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남녀는 똑같은 피조물로서 한몸 이지만, 또한 다른 몸으로 나눠져 있으면서, 그 나뉘어진 몸이 ‘가정을 통해 다시 한몸을 이룬다‘라는 신비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삼위가 갈등없이 연합하시는 것처럼, 남녀도 갈등없이 연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타락의 영향은 서로를 지배하려 하지만 적어도 그 타락의 본성을 알고, 그 본성이 바로 ‘너도 죽고 나도 죽자’라는 본성인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낮춤으로 연합을 이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을 베필과 조화함으로 연합을 이뤄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