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하늘이 너무 파래---

최영호2007.12.07
조회76
여보, 하늘이 너무 파래---    


                            [여보, 하늘이 너무 파래--]


늙은 할아버지가 무슨 김장 타령이냐 하겠지만

원래 김장할 때는 아내를 도와주던 습관 때문에 지나치기가 어려운 일이라

출근을 미루고 실장갑을 끼었습니다.


배추를 반으로 잘라 내는 것도 요령인지라 무턱대고 자르면 안 됩니다.

조금 칼집을 내고 양쪽으로 벌리면 잘라지는데 그래야 속잎이 제대로 남아있게 되지요

물론 갓이나 파 또는 잡다한 양념거리는 아내가 준비 합니다.


예전 같으면 150포기가 보통이었습니다.

손이 큰 아내는 김장을 많이 해서 나누는 재미를 느껴 여러 사람을 불러 정말 잔치하듯 김장을 담갔습니다.


이제는 나이 들어 힘에 부친다며 줄이자고 간청을 한 결과 아내의 마음이 좀 누그러들었습니다.

그래서 25포기를 준비했습니다.


집에 김장거리로 심은 배추는 잦은 비로 인해 별로 모양새가 없어 고향 형에게 갔습니다.

미리 전화를 해놓고 갔습니다만, 어느새 형수는 배추를 뽑아 다 다듬어 놓고 내가 주문한 수량 보다 훨씬 많이 준비해주었습니다.


파와 무 그리고, 마늘까지 가을빛 잘 드는 형네 마당에서 작은 멍석을 깔고 널브러져 앉았습니다.

밭에서 직접 뽑아놓은 파와 무는 흙이 묻어있어 아무래도 집에 가면 환영받기 어려울 듯해서입니다.


파의 껍질을 벗기며 오랜만에 형과 형수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어머니 살아 계시지 않으니 형네 집에도 자주 가지 못하였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별 이야기가 아닌데도 가슴 따듯하게 밀려오는 게 있습니다.

나이 칠십이 넘은 늙은 형이 농사를 지어 준 농작물을 가지러 가서 오랜만에 마당에 앉아 고향의 가을 햇살을 쪼이며 크게 웃습니다.


형은 뭐 더 줄 게 없나 하며 형수와 같이 창고를 뒤집니다.


땅콩도 조금 더, 청국장도... 콩, 깨, 쌀. ...

형수에게 더 주라고 닦달합니다.


일년 내내 농사를 지으며 얼굴이 검게 그을려 주름이 깊어도 형은 피붙이인 동생이 찾아간 게 기분이 좋은가봅니다.

서울 형들 것도 준비해두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꽤 많은 것들을 밭에 잘 보관해 둔 모양입니다.


어렸을 때 우리 칠남매는 옹기종기 모여 살았습니다.


나이 들어 각각 가정을 꾸리고 흩어져 살다가 겨우 명절 때만 만날 수 있었지만, 그나마 나이가 들어가고 작고한 형들이 생기면서 뜸했던 관계인 고향의 형네 집


가까이 사는 내가 자주 들리는 편이지만, 그래도 형은 동생이 온 것이 좋은 모양입니다.


"더 가져가라..."


우리도 아내와 둘뿐이니 많은 게 필요 없지만, 형이 기분 좋아 차에 실어주는 것을 웃으며 싣고 왔습니다.


무를 깨끗이 닦고 채칼로 채를 칩니다.

그래도 아내보다야 내 힘이 낫지요.


"내가 당신보다 다섯 살이나 많지만 아직은 힘이 당신보다는 좋지...."

"맨 날 그 소리는..."


아내는 나보다 어리지만 여자라서 큰 힘을 쓰기는 제가 좀 더 낫습니다.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운동도 하고, 작은 역기도 자주 들고, 내가 마련한 운동을 꾸준히 합니다.


병원의 수술대에 올랐을 때는 김장같은 것을 다시 할 수 있을까?

걱정도 했지만 몸도 마음도 정상인처럼 돌아가고 있습니다.


큰 함지박 안에 양념을 넣고 두 팔로 힘껏 버무립니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남자 아닙니까?


아주 맛깔나게 비벼 젓습니다.

이제 내 역할은 좀 후에 이어집니다.

김장 속을 넣는 것은 아내랑 처형 조카가 도와주러 왔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삶의 언저리를 줄여가면서 적게 적게 살고 있습니다.


서울의 형에게 전화를 걸어 쉬는 날 내려오라 하였습니다.

고향에서 형과 같이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려 합니다.


김장이 끝나면 겨울준비는 다 되기에 이제 건강이나 생각하면서 마음을 편하게 먹고 긍정적인 생각만 하면서 살기로 했습니다.

그래야 이쁜 손자가 커가는 것도 보고 새로운 세상이 다가와 변해가는 것 역시 볼 수 있으니까요.....


올해 단풍은 비가 많이 와 너무너무 고와서 몇 번이고 집안을 둘러보았습니다.


김장 속을 넣는 아내에게 말을 겁니다.


"여보 저기 좀 봐.... 하늘이 너무 파래...."

"그렇네요.... 아주 파란네요... 티끌 한 점 없이...."


가을이 깊어갑니다.

깊어가는 가을처럼 파란 하늘 바라보며, 맑고 고운 마음으로 남은 삶을 채우기보다는 비우며 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마당에 마로니에 잎이 모두 떨어져 노란 융단을 깔아놓은 듯합니다.


가을.....  참 멋진 계절입니다.

가슴가득 돌아볼 세월을 남겨주기도 하고, 그리운 사람도 많이 만들어줍니다.


돌아보고 후회하지 말고

돌아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며 살라던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


위 글은 구흥서님의 블로그 “월송정 달빛”에 실린 “김장 담구는 날”이라는 글입니다.

(http://blog.naver.com/sonkoos/50024442606)


몇 년전 화갑을 넘기신 님은

평생을 정열적으로 일하시다가 불의에 찾아온 병마로 큰 수술을 마치셨음에도

아내와 두 분이 월송정 옆의 산자락에 살면서


아내와 멀리 있는 손녀를 끔찍이 사랑하는

전형적인 우리들의 아버지입니다.


엊그제 이 못난 사람이 아내와 한 이불을 덮은 지 26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하루종일 쓸데없는 일에 매달리다가 아뿔싸!

아내에게 전화 한 번, 아니 휴대전화 메시지 한 번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하기는 군에 가 있는 아들의 휴가와

멀리 공부하러 간 딸의 방학을 기다리는 아내에게

이 못난 놈의 전화나 문자 메시지가 대수일까 마는


그것마저 잊어버린 못난이는 퇴근 무렵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가슴이 아파옵니다.


단 것을 싫어하는 아내

둘이 먹을 수 있는 제일 작은 케이크를 하나 사서

26에 맞추어 초를 달라고 한 다음

추운 날 열심히 일하고 있는 꽃집 아줌시에게 갑니다.


노란 장미, 빨간 장미, 하얀 장미 합하여 스물여섯 송이를 삽니다.

꽃집 아줌시가 누구 줄 것이냐고 물어봅니다.


우리 마누래가 시물여섯이라우....

안개꽃을 싸비쑤로 섞어 꽃다발을 만드는 아줌시가 씨익 웃습니다.

ㅋㅋㅋ....


진종일 전화 한 번 없더니 뭘 또 씰 데 엄는 걸 사오슈?

이봐, 연초에 어디 무제한골프나 갈까?

칫, 또 그 소리....


이렇게 해서 결혼기념일을 무사히(?) 때우고 맙니다.

또 한 해가 가고 맙니다.

어떻게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을까요?


아니 저 어여쁜 내 각시에게만이라도

오는 세월의 멱살을 한 번 잡아볼 수 없을까요?


구선생님! 저도

네가 애비의 이름도 당당하게 만들어다오

라고 말씀하시던 아버님이 그립습니다.


너무도 그립습니다....

(‘07. 12. 7. 최영호변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