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우습게도 해가 뜨고 있었다. 잠시 눈을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고단했던지 꽤 오랜 시간 잠들었나 보다.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 못 해내는 것만큼 불쾌한 것도 없다. 깨고 나서 이유 없이 계면쩍다. 게다가 나는 지금 각종 신기록들을 갈아치우고 있는 중이다. 밧줄에 오래 매달려있기, 벽에 바짝 붙어서 잠들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기고 있는데, 역시 종목이 어쭙잖아서인지 멋쩍음이 더해진다. 그리고 곧 가슴이 덜컹하는 체험이 이어진다. 이토록 긴 시간 동안 정신을 놓았다니! 만약 자는 사이에 몸이 뒤로 젖혀지거나, 그로 인해 밧줄의 상처가 더 깊어졌으면 어쩔 뻔 했을까. 놀람에서 안도로 전이되는 신경세포의 파도 때문에 흉부로부터 코 끝까지 콕 찌르는 청량감이 전달된다. 잠과 깸이란 (너무도 쉽게) 죽음과 삶으로 치환되고, 그것의 간극은 ‘고함과 고요’만큼이나 생소해서 전환이 용이치 않다. (그래서 아기들이 잠을 깨면 우나 보다.) 이 점은 나에게 평범한 이치를 다시금 환기해준다. 해가 뜨면 잠을 깨고, 해가 지면 잠이 든다는 것. (해의) 상승과 삶이, 하강과 죽음이 맞물려 짝을 이룬다는 교훈.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잠이 깬 것은 나에게 아주 기본적인 메타포를 심겨주었다. 뜨거운 태양, 뜨거운 열정. 해가 다시 떴으니 나의 열정도 다시 ‘살아날’것이다. (매일 아침 해가 뜨는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이와 동시에 나에게 또 다른 행운이 찾아왔다. 내 오른쪽, 1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덩굴 줄기가 하나 드리워져 있었다. 지금 붙잡고 있는 밧줄처럼 낭떠러지 위로부터 시작된 줄기였다. 초록색 밧줄처럼 초록색 덩굴 줄기였고, 겉에는 푸른 잎사귀들이 무성하게 달려있었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른다. 이젠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이 곳에서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근원을 설명하기 어렵다. 아마도 내가 자고 있는 사이, 위에서 누가 내려놓고 간 모양이다. 아니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마구 자란 것일 수도 있다. 아무렴 어때. 신경 쓸 일이 아니잖은가.
정작 신경이 쓰이는 것은, 이 행운이 다소 걸쩍지근한 성질을 지녔다는 점이다.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더 열렸는데도, 엄밀히 말하자면 ‘틈’에 비해 그다지 만족스러운 선물은 아니다. 우선 줄기와의 거리가 애매하다. 나와 다소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손으로 낚아채기가 어렵다. 응모함에 들어있는 수많은 제비 쪽지처럼 손으로 쉬이 저어 건질 수 있는 행운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바른 목적지로 가기 위해 지하철 노선을 갈아타는 것과 같다. 종로에 가려면 1호선을 타야 하듯이, 저 줄기를 잡으려면 이 밧줄을 놓아야 한다. 거리는 그렇다 치자. 어떡해서든 밧줄을 흔들어 점프를 하면 충분히 잡을만한 거리에 있으니 말이다. 거리보다 더 애매한 것은 과연 저 줄기가 얼마나 튼튼할 것이냐는 점이다. 잡아보지 않은 나는 그것을 꿰뚫어 볼 방도가 없다. 그렇다고 간단한 시험을 해볼 수도 없는 처지다. 그저 눈으로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더없이 튼튼해 보인다. 잎사귀가 무성하고 줄기 색이 투명한 초록빛인 걸로 보아, 죽은 덩굴의 줄기는 아님이 확실하다. 낭떠러지 밑으로 드리워진 한 갈래의 줄기가 저토록 싱싱한 것이라면, 지상에 있는 저 놈의 본체는 더욱 무성할 것일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나의 밧줄은 어떠한가. 위를 보니 밧줄의 파손된 정도가 조금 더 심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틈을 찾아 몸을 고정했다고는 하나, 매달려 내려오고 잠을 자는 일련의 과정 속에 밧줄의 상처가 더욱 깊어진 것이다. (그리고 더 악화될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유심히 보니, 내가 있는 쪽의 벽은 제이슨의 얼굴을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밋밋한 데 비해, 저쪽의 벽은 입체적이다. 틈은 없지만 벽 이곳 저곳에 울퉁불퉁한 작은 바위들이 나와 있어서, 잘만 하면 딛고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엄밀히 말하자면, 줄기보다는 그쪽의 벽이 더 유혹적이다. 보이는 대로 줄기만 튼튼하다면 그것은 곧바로 내가 이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과 직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분명 보암직하지만 그것만으론 저 실체의 본질을 다 알 수 없기에, 내 전부를 내던지는 모험을 감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력을 다해 점프해서 줄기를 잡았는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끊어진다면? 행여나 고정되어 있지 않은 거라면? 역시 저 줄기는 걸쩍지근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생각에 나는 한참 동안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때때로 사람은 ‘분류’라는 항목에서 오류를 범할 때가 많다. 자기 합리화를 자신감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평소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은 양심에 비추어 큰 이상이 없을 정도의 잘못 정도는 합리화라는 세탁기에 쑤셔 넣은 후 전원을 넣고 돌려버린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감을 갖는 쪽으로 생각하려 하는) 자신의‘성향’이라고 느끼게 된다. ‘성향’이라는 것은 잘못된 분류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인자이다. 자신은 그러하다라고 믿어버리는 것. 어쩌면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복잡한 존재이기에, 두려움을 가지고 간단히 분류해버리고자 하는 것. 자신을 단정짓는 틀을 맞춤으로서, 내가 모르는 ‘나’를 없애고 익숙한 몇 가지 패턴에 안정하려 하는 것. 이렇듯 분류의 오해는 의식이 가능한 ‘나’를 끔찍이 사랑하는 행동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어떠한가. 진정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성향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정확히는 ‘소심함’과 ‘신중함’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나의 성향대로라면 거의 같은 부류로 취급될 수 있다. 내가 이 밧줄에 매달린 것을 처음 인식하게 되었던 때를 상기해보자. 남들은 (물론 드라마나 영화에선)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아무 생각 없이 잘도 밑을 바라보던데, 나는 부끄럽게도 온갖 잡다한 생각 끝에야 겨우 밑을 바라볼 용기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소심함이다.) 그리고 지금은 어떠한가. 저 싱싱한 줄기를 놔두고도 이토록 위태로운 밧줄에 매달린 채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이것은 신중함이다.) 소심함과 신중함은 과연 내 성향 안에서 같은 항목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들인가. 분류의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밑을 보는데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과 줄기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는 것은 얼핏 보면 비슷한 성향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비참하게도) 지금 내 신중함이 저 줄기로 옮겨가는 것을 단순히 지체하는 소심함에 불과하다면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마는 것이다. 무엇의 문제인가. 성향의 문제인가. 분류의 문제인가. 열정-방법의 문제인가. 아니면 나의 이분법적 사고가 문제인가.
확실히 나의 사고체계는 문제가 있다. 생사절명의 위기 때문인지, 나의 논리는 억측과 도약이 난무하고, 이것이 옳으면 저것은 틀리다, 라는 망측한 함정 속에 빠져있다. (그리고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언어도단의 올무에 한창 젖어있자니 참기 어려운 갈증이 느껴졌다. 확실히 나는 나약하다. 졸음의 욕구를 해소했더니 이제는 목이 마르다. 나는 쉬고 싶은데, 정신도 육체도 도무지 쉬질 않는다. 그냥 밧줄만 놔버리면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그 행동이 전혀 사치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점점 지쳐갔고, 올라가는 것보다 물을 마시고 싶다는 욕구가 조금 앞선다는 생각이 들자, 그만 손을 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떨어져서 다신 올라오지 않으면 그만이다. 마치 머리 속을 뚫고 지렁이가 지나가는 느낌을 받아서 속이 개욱거렸다. 그리고 일련의 생각들을 잠시 멈춰준 건 (역시 내가 아니라) 벽을 타고 나에게 스물거리며 기어오고 있는 독사 한 마리였다.
[창작소설] 밧줄에 매달리기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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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보니 우습게도 해가 뜨고 있었다. 잠시 눈을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고단했던지 꽤 오랜 시간 잠들었나 보다.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 못 해내는 것만큼 불쾌한 것도 없다. 깨고 나서 이유 없이 계면쩍다. 게다가 나는 지금 각종 신기록들을 갈아치우고 있는 중이다. 밧줄에 오래 매달려있기, 벽에 바짝 붙어서 잠들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기고 있는데, 역시 종목이 어쭙잖아서인지 멋쩍음이 더해진다. 그리고 곧 가슴이 덜컹하는 체험이 이어진다. 이토록 긴 시간 동안 정신을 놓았다니! 만약 자는 사이에 몸이 뒤로 젖혀지거나, 그로 인해 밧줄의 상처가 더 깊어졌으면 어쩔 뻔 했을까. 놀람에서 안도로 전이되는 신경세포의 파도 때문에 흉부로부터 코 끝까지 콕 찌르는 청량감이 전달된다. 잠과 깸이란 (너무도 쉽게) 죽음과 삶으로 치환되고, 그것의 간극은 ‘고함과 고요’만큼이나 생소해서 전환이 용이치 않다. (그래서 아기들이 잠을 깨면 우나 보다.) 이 점은 나에게 평범한 이치를 다시금 환기해준다. 해가 뜨면 잠을 깨고, 해가 지면 잠이 든다는 것. (해의) 상승과 삶이, 하강과 죽음이 맞물려 짝을 이룬다는 교훈.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잠이 깬 것은 나에게 아주 기본적인 메타포를 심겨주었다. 뜨거운 태양, 뜨거운 열정. 해가 다시 떴으니 나의 열정도 다시 ‘살아날’것이다. (매일 아침 해가 뜨는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이와 동시에 나에게 또 다른 행운이 찾아왔다. 내 오른쪽, 1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덩굴 줄기가 하나 드리워져 있었다. 지금 붙잡고 있는 밧줄처럼 낭떠러지 위로부터 시작된 줄기였다. 초록색 밧줄처럼 초록색 덩굴 줄기였고, 겉에는 푸른 잎사귀들이 무성하게 달려있었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른다. 이젠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이 곳에서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근원을 설명하기 어렵다. 아마도 내가 자고 있는 사이, 위에서 누가 내려놓고 간 모양이다. 아니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마구 자란 것일 수도 있다. 아무렴 어때. 신경 쓸 일이 아니잖은가.
정작 신경이 쓰이는 것은, 이 행운이 다소 걸쩍지근한 성질을 지녔다는 점이다.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더 열렸는데도, 엄밀히 말하자면 ‘틈’에 비해 그다지 만족스러운 선물은 아니다. 우선 줄기와의 거리가 애매하다. 나와 다소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손으로 낚아채기가 어렵다. 응모함에 들어있는 수많은 제비 쪽지처럼 손으로 쉬이 저어 건질 수 있는 행운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바른 목적지로 가기 위해 지하철 노선을 갈아타는 것과 같다. 종로에 가려면 1호선을 타야 하듯이, 저 줄기를 잡으려면 이 밧줄을 놓아야 한다. 거리는 그렇다 치자. 어떡해서든 밧줄을 흔들어 점프를 하면 충분히 잡을만한 거리에 있으니 말이다. 거리보다 더 애매한 것은 과연 저 줄기가 얼마나 튼튼할 것이냐는 점이다. 잡아보지 않은 나는 그것을 꿰뚫어 볼 방도가 없다. 그렇다고 간단한 시험을 해볼 수도 없는 처지다. 그저 눈으로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더없이 튼튼해 보인다. 잎사귀가 무성하고 줄기 색이 투명한 초록빛인 걸로 보아, 죽은 덩굴의 줄기는 아님이 확실하다. 낭떠러지 밑으로 드리워진 한 갈래의 줄기가 저토록 싱싱한 것이라면, 지상에 있는 저 놈의 본체는 더욱 무성할 것일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나의 밧줄은 어떠한가. 위를 보니 밧줄의 파손된 정도가 조금 더 심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틈을 찾아 몸을 고정했다고는 하나, 매달려 내려오고 잠을 자는 일련의 과정 속에 밧줄의 상처가 더욱 깊어진 것이다. (그리고 더 악화될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유심히 보니, 내가 있는 쪽의 벽은 제이슨의 얼굴을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밋밋한 데 비해, 저쪽의 벽은 입체적이다. 틈은 없지만 벽 이곳 저곳에 울퉁불퉁한 작은 바위들이 나와 있어서, 잘만 하면 딛고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엄밀히 말하자면, 줄기보다는 그쪽의 벽이 더 유혹적이다. 보이는 대로 줄기만 튼튼하다면 그것은 곧바로 내가 이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과 직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분명 보암직하지만 그것만으론 저 실체의 본질을 다 알 수 없기에, 내 전부를 내던지는 모험을 감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력을 다해 점프해서 줄기를 잡았는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끊어진다면? 행여나 고정되어 있지 않은 거라면? 역시 저 줄기는 걸쩍지근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생각에 나는 한참 동안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때때로 사람은 ‘분류’라는 항목에서 오류를 범할 때가 많다. 자기 합리화를 자신감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평소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은 양심에 비추어 큰 이상이 없을 정도의 잘못 정도는 합리화라는 세탁기에 쑤셔 넣은 후 전원을 넣고 돌려버린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감을 갖는 쪽으로 생각하려 하는) 자신의‘성향’이라고 느끼게 된다. ‘성향’이라는 것은 잘못된 분류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인자이다. 자신은 그러하다라고 믿어버리는 것. 어쩌면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복잡한 존재이기에, 두려움을 가지고 간단히 분류해버리고자 하는 것. 자신을 단정짓는 틀을 맞춤으로서, 내가 모르는 ‘나’를 없애고 익숙한 몇 가지 패턴에 안정하려 하는 것. 이렇듯 분류의 오해는 의식이 가능한 ‘나’를 끔찍이 사랑하는 행동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어떠한가. 진정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성향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정확히는 ‘소심함’과 ‘신중함’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나의 성향대로라면 거의 같은 부류로 취급될 수 있다. 내가 이 밧줄에 매달린 것을 처음 인식하게 되었던 때를 상기해보자. 남들은 (물론 드라마나 영화에선)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아무 생각 없이 잘도 밑을 바라보던데, 나는 부끄럽게도 온갖 잡다한 생각 끝에야 겨우 밑을 바라볼 용기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소심함이다.) 그리고 지금은 어떠한가. 저 싱싱한 줄기를 놔두고도 이토록 위태로운 밧줄에 매달린 채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이것은 신중함이다.) 소심함과 신중함은 과연 내 성향 안에서 같은 항목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들인가. 분류의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밑을 보는데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과 줄기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는 것은 얼핏 보면 비슷한 성향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비참하게도) 지금 내 신중함이 저 줄기로 옮겨가는 것을 단순히 지체하는 소심함에 불과하다면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마는 것이다. 무엇의 문제인가. 성향의 문제인가. 분류의 문제인가. 열정-방법의 문제인가. 아니면 나의 이분법적 사고가 문제인가.
확실히 나의 사고체계는 문제가 있다. 생사절명의 위기 때문인지, 나의 논리는 억측과 도약이 난무하고, 이것이 옳으면 저것은 틀리다, 라는 망측한 함정 속에 빠져있다. (그리고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언어도단의 올무에 한창 젖어있자니 참기 어려운 갈증이 느껴졌다. 확실히 나는 나약하다. 졸음의 욕구를 해소했더니 이제는 목이 마르다. 나는 쉬고 싶은데, 정신도 육체도 도무지 쉬질 않는다. 그냥 밧줄만 놔버리면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그 행동이 전혀 사치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점점 지쳐갔고, 올라가는 것보다 물을 마시고 싶다는 욕구가 조금 앞선다는 생각이 들자, 그만 손을 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떨어져서 다신 올라오지 않으면 그만이다. 마치 머리 속을 뚫고 지렁이가 지나가는 느낌을 받아서 속이 개욱거렸다. 그리고 일련의 생각들을 잠시 멈춰준 건 (역시 내가 아니라) 벽을 타고 나에게 스물거리며 기어오고 있는 독사 한 마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