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안식월

정권구2007.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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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사소한 욕심 하나로 상처를 주고 받고, 거친 호흡을 하고, 증오하고, 세상밖으로 밀려나고, 다시 링에 올라가고 X 365....
너무나도 길고 지루했던 고통의 나날, 300대1의 무모하고 엄청난 전투였다.
그러다가 충분히 예상가능했던 부비트랩을 건드려 심각한 내외상을 입고...
깊은 잠에 빠.지.다.

 

오랜 시간만에 눈을 떴다. 심각한 통증을 동반하며...

가슴을 만져보니 심장이 도려내어져 있다.

차츰 나아지겠지 생각해 본다.
치열했던 그 시기의 영상들이 가장 먼저 눈 앞을 스친다.
마치 꿈만 같다.
아니 꿈이다.
꿈속엔 내가 없었다.
벼랑에 서서 내 모든 걸 버리겠다는 각오로 임했던, 누군가를 위해 내 인생을 걸었던 그 길고도 엄청난 경험 속에 정작 자신이 없다는 것.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슬프지도, 억울하지도, 아프지도 않다. 조금 서운하기만 할뿐. (그 사이 나이를 먹었으니까. 쳇)
머리를 털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이 보인다.
일단 안심이다.
그것도 매우 견고하고 값나가는 마감재로 장식된 나름대로 외부와 차단된 안전한 공간이란 확신이 든다.
그런데 왜 이곳에서 잠이 들었을까...
아.. 드디어 생각이 났다. 내발로 찾아 온 곳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정신이 지정해준 마지막 '숨을 곳' 
다시 잠이 온다. 그런데 크게 안심이 되지 않으니 그래서는 안될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서 잠이 들면 다시 그 꿈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까 하는...

 

우선 몸을 추스려 밖을 나왔다.
불리한 상황으로 다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숨을곳이 필요했다.
많은 사람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K어르신 : "이런, 정신나간 사람! 꿈속으로 들어가 버려!"
L부동산사장 :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꼭 선금입금하셔야 합니다."

P부장 : "있습니다. 내게 영원한 안식처가 있지요.. 이 알약 두알만 먹으면..."

결과적으로 그런 곳은 없었다.
내편도 없다.
철저히 혼자가 된것이다.

할 수 없이 산속에 들어갔다. 적당한 동굴 속에 몸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세상과 단절된 깊은 곳이니 최소한 꿈속으로 다시 들어갈 걱정은 안해도 되는 곳 아니던가...

갑자기 추위가 밀려온다. 매서운 바람이 도려낸 심장 사이를 파고 들어 온몸을 헤집고 나가길 수십번, 맹수의 눈빛만이 번뜩거리는 공포의 어둠이 지속되길 수백밤.

무력한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찬바닥에 그대로 누워 날 포기할 수 밖에 없다.

그래. 받아들이자.

눈을 감았다.

사지가 뜯기고, 내안의 뜨거운 것들이 공기와 만나는 느낌이 내 마지막 인지였다.

두번을 죽었다.

 

아니 두번째 꿈을 꾼것이다.

 

이번에는 굳이 자리를 회피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에 맞서는것쯤 두려울게 없다는...
틀을 세우고 바람막이를 만들고 나뭇잎과 마른가지로 온기를 만들고, 틈틈이 체력을 연마하고...
산은 적당한 긴장을 준다.
추위가 거세질수록, 더 사나운 맹수를 만날수록 내공은 쌓여가고 큰 자신감이 생긴다.
게다가 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레벨15 수준의 신기한 능력까지 갖추게 된다.

 

이제 처절한 몸부림의 시간은 끝났다.

 

제일 먼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칼을 샀다.
처음엔 총을 사려 했지만, 총을 들면 경솔하여 아무나 죽이거나 누군가를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산 이 칼은 무엇이든 한칼에 벨 수 있단다.
정말정말정말 위험한 생애의 가장 큰 위기 때 이 칼을 딱 한번만 사용해보기로 작심해본다.
지니고 있다는 것만으로 내게 칼의 의미는 충분하기 때문.

 

내 예상은 적중했다.
벌써 소문이 난것이다.
적이 불안에 떨고 있단다.
이제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 정리만 하면...

 

과거 꿈속의 나는 양심과 선이라는 잘 포장된 소심함으로 공존을 꿈꾸거나 혹은 자리를 잃지 않기위해, 자신이 살기 위해서 그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둘 다 결과적으론 악을 통해 선을 구현한다는 명분.
그러나 결국 선을 지키기는 커녕 악의 존재감만 키워준 꼴이 되었었다.
내게 돌아온 것은 철저한 약자가 되어 비굴해져가는 모습뿐...
이 시점이야말로 악을 일거에 해소할 절호의 기회 아니던가!
칼집을 스윽- 만져본다.

 

이때 정신이 조용히 물어온다.
현상들에 대해 혼자서 값어치를 매기고 선과 악을 판단하고, 이거 지금 너가 그럴 자격있나.
난감하다. 그러나 극복할만한 가치가 있는 감정인건 확실한 것 같다.
정신은 내게 새로운 목표를 향해 가자고 달콤한 유혹을 한다.
"정신이 바로 당신이거든요~"

 

칼은 더욱 깊숙히 보관해 두기로 결정한다.(장기보관해도 날이 무뎌지지 않도록 핫토리 한조씨 칼가게에 유지관리를 위탁하는 센스)
그리고 진정으로 꿈에서 깨어날 계획을 세워본다.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맞이할 준비를 해 본다.
새로운 숨을곳을 찾다가 만난 P부장도 만나봐야겠다.

 

어쨌든 안식의 시간은 시작되었다.
훗날 누군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칼을 대여해줄수 있는 그날이 영원한 안식의 시작이라 느끼는 요즘,
그래서 12월은 안식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