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그것은 꿈이었을까

노성래2007.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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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자



해안도로를 달릴 때 창밖을 빈번히 힐금거리거나 소리를 내지르는 사람은 바다를 많이 닮은 사람이다. 옴팡지게 꼬집어도 아야 소리 한번 제대로 낼 줄 모르는 사철 퍼렇게 멍든 바다는 어눌한 아이일까. 해갑청(蟹甲靑)을 풀어놓은 바다가 너울너울 손짓 하면 지평의 끝에서 춤추듯 밀려드는 추억들이 혼을 들깨운다. 목이 쉬도록 부르는 소리로 고열은 터지고 순정의 회고록을 뒤적인다. 바다와 엉긴 남자는 세상이 자기에게 뛰어드는 은빛 날치인 냥, 물 위 허공을 향해 발광을 한다. 이러한 적요의 때. 시작도 끝도 없는 공간을 당신은 미로(迷路)라고 부르는가.


분명 막힘이 없는 벽이었다. 출렁거리는 물의 입구였다. 말랑말랑한 흙으로 다져진 길이라 뚫을 필요도 없는 바닥이었다. 헤매다 몇 번이고 되뇌며 기억해내야 할 그런 길이 아니었다. 걷는 만큼 시원스레 열려야 하고 깜깜하지 않은 대낮처럼 훤히 보여야만 했다. 그러나 눈이 먼 까닭일까. 발부리 닿는 데로 걷고 또 걸어도 끝나지 않는 길은 낯선 막다름. 예기치 않는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 기대어 쉴 쉼터조차 보이지 않는 길. 끝없는 길은 즐비하게 늘어진 퍼즐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아, 지금 내가 길을 잃었구나. 그제야 깨닫는다. 행여 나침반이나 지도책이라도 찾아볼까.


꿈속에라도 바람의 향방을 살펴 깃털이 날리는 쪽으로 걸어가야 하는지,


꼬깃꼬깃 접으려는 애달픔이 없었으므로 어떠한 의도를 둔 적이 별로 없었다. 기억의 저 편 겪지 않은 일들에 까지 욕심을 내지도 않았다. 하루치의 배급으로 만족스런 공기와 바람처럼 앙가슴의 호흡 한 모금으로 살아 낸 세월. 조각난 시간들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무의식에 잠긴 뿌리가 그리 깊었던 것일까. 회오리바람 보다 강한 해일이 일어 송두리째 집 터 자리를 쓸어가 버린 듯 사라진 기억들은 메아리도 형체도 없었다. 길에서 영영 길을 잃는다는 것은 그물코에 걸린 물고기처럼 반송장이 되어가는 기분. 죽음은 그 모든 옛된 기억들이 뇌에서 아롱지다 숨지는 찰라 일 뿐.


숨차게 쫓고 쫓아도 도시 한 복판을 짓누르던 핏물 괸 저녁놀의 얼굴처럼 길은 사라졌다. 나는 이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다. 남의 뒷다리를 힐그머니 쳐다보다 얼른 지나쳐 나와 다시 길을 걸었다. 포대기처럼 얹힌 옷가지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어지럽혀진 방. 그 곳도 외면하며 돌아서 나왔다. 여기가 아니다. 나의 집 나의 길은 어디로 향하여 있는가. 두리번두리번. 빈 손 빈 가방 아무것도 들려져 있지 않은 양 손. 열손가락은 왜 달렸는지,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구호신호를 보내기 위해 필요했었는지, 잊었다. 까맣게 잊어 버렸다. 망각이 망각의 꼬리를 물고 행진을 한다. 자기들만의 길을 따로 내기라도 할 모양으로,


핸드백 핸드폰도 잃어버렸다. 부드러운 손 달싹대던 입술이 한 때 누군가의 간절한 기다림에 살았다는 기억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다시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과 잃은 것들을 찾으러 왔던 길로 돌아가 봐야 한다는, 기억을 더듬는 것조차 포기해선 안 된다는, 의식이다. 부르르 몸에 붙은 환영들을 털어낸다. 남겨진 것은 공포와 습습한 물기 뿐.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기만을 바라며 한 순간 길마저 포기하려 했을까.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는 빠져 나올 수 없는 길. 기차 한 대 정거하지 않는 그 곳은, 미로였다. 기억 상실증. 밤새 어려운 남의 나라말을 번역해 놓고서는 새벽 즈음 뿌연 화면에 뜬 덮어쓸까요 하는 컴퓨터의 물음에, 홀린 듯 예라는 키를 탁 눌렀을 때의 그 전율감.


배신의 이면에도 짜릿한 진동은 있는 법. 다시 복구할 수 없는 자료들은 제 몸을 날려 상실의 낭떠러지로 떠나가고 기억의 주체자도 말없이 증발해 버린다. 수면 아래로 깊이 떨어진다. 기억이란 그렇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휴면(休眠)의 먼지처럼 부유하는 허상. 어젯밤의 꿈을 기록해 보았다.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가 꿈인지 돌아온 지금인지를 아직도 모르겠다. 방황하던 어제는 다 꿈이었을까. 어제의 상실을 두드리고 있는 이 나의 손끝이 혹시 꿈은 아닐까. 달빛이 환하다. 옥토끼의 절구통에서 방아 찧는 소리가 들린다. 늦가을 싸늘한 바람 새로 떨어지는 검은 별들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꿈의 단편에 깃든 희부윰한 의문들이 먼 곳에서 출발하여 내 집에 당도한 아침. 나는 꿈에서 깨어 꿈을 더듬거린다. 지난 밤 미로 속을 한없이 헤맬 때 그토록 찾았던 숫자 하나를 돌비에 꼼꼼히 새겨 넣는다. 나의 모든 기억을 다 잊어도 나 하나 기억하여 먼 바다에서 달려 올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기다림은 단독자(憺者)의 행보로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