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뱀은 내 상식대로라면 독사가 분명하다. 누구나 배우지 않는가. 머리가 삼각형이라면 독사라고. 불행히도 저 놈의 대가리는 각이 살아 있는 삼각형이다. 나는 이렇게 밧줄이 아니면 한시도 못 버티는데, 저 놈은 너무도 자유롭게 수직의 벽을 타고 다닌다. 불공평하다. 혀를 날름거리는 표정이 나를 비웃는 게 분명하다. 그저 비웃기만 하면 다행이겠는데, 밧줄이라는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을 마중 오는 거미와도 같이, 여유롭지만 표독한 몸짓으로 나를 향해 천천히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숭고한 정신적 고뇌는 한낱 미물인 뱀 따위 앞에서 철저히 유린당한다. 뱀은 나를 비웃는다. 앞서, 제이슨에게서도 느낀 감정이다. 인간의 본질은 질문으로 되어 있다. 저것들의 본질과는 다르다. 내가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웃음거리가 될 순 없다. 그런데도 뱀은 멈추질 않는다. ‘너의 생명이 달아날 기회는 많다. 그건 너의 밧줄이 끊어져서 생길 수도 있고, 나에게 물려서 생길 수도 있다. 저 덩굴 줄기를 잡으면 죽을 지도 모르고, 어쩌면 잡으려 점프하다가 허망하게 떨어질 수도 있다. 이렇게 죽음의 위협이 너를 에워싸고 있는데, 너는 어떻게 한가로이 그런 허섭한 딜레마에서 허우적거리느냐. 게으르면 죽어야 한다. 숭고한 정신적 고뇌? 설마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오냐, 그 따위 것, 내가 숨통을 끊어서 멈추어주마!’
이것은 실로 농담 같은 이야기다. 그 점을 이제서야 밝혀두는 바이다. 다가오는 뱀을 보며 정말 이 모든 건 하나의 우스꽝스러운 농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 나처럼 이런 밧줄 하나 정도는 갖고 있을 거라는, 거짓말 같은 메타포의 농담. 농담은 흘려 보내면 그만이다. 가치의 무게를 떠나서 농담이 내 안에 항상 머물러 있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최고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입에서 미소가 흘러나왔다. 나는 웃으며 저 뱀을 죽일 것이다. 이유 없는 적의로 (이유는 내가 만든 것이지 뱀의 것이 아니다.) 나에게 어슬렁 다가오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다. 나는 왼발을 틈에서 천천히 빼내었다. 상대적으로 무게가 더욱 실린 밧줄에 미안한 감정을 느끼면서, 조금만 견뎌달라고 애원하는 마음으로 밧줄을 단단히 잡았다. 단 한번의 기회이다. 한번의 간결한 발길질로 뱀의 머리를 찍어야만 한다. 실패한다면 뱀은 무방비의 왼발에 역공을 가할 것이다. 안이하게 발로 툭툭 쳐서 절벽에서 떼어내려고만 한다면, 둔한 움직임 탓에 오히려 내가 당할 지도 모른다. 망설일 틈이 없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단 한번의 일격을 가해야 한다. 익숙한 오른발이 아니기에 불안해졌다. 지칠 대로 지쳤기에 온 몸이 후들거렸다.
뱀이 천천히 기어오는 것에 감사했다. 나는 집중해서 거리를 잴 수 있었고, 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나는 있는 힘껏 왼발을 휘둘러 발끝으로 놈의 대가리를 찍었다. 다행히 탈진상태에서도 소중한 내 왼발은 정확히 사명을 다했고, 계산대로 한번의 발길질에 뱀을 물리칠 수 있었다. 물리칠 수 있었다는 건 죽이지는 못했다는 얘기다. 나의 움직임은 한치의 오차도 없었지만, 벽이 내 힘을 견딜 만큼 단단하지 못해서 움푹 파여 들어갔던 것이다. 그 바람에 뱀의 머리는 짓이겨지지 않았고,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별 다를 바 없다.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뱀이 절벽 밑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승리했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왼발에 감사하면서, 아직 발끝에 남아있는 물컹한 이물감에 잔인한 쾌감을 느끼면서 나는 서둘러 밧줄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 상한 곳이 조금 더 벌어져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밧줄에 상처를 보탰다. 그러나 상처가 심해지면 내가 죽는다. 이 역학 관계가 무척 미안하게 느껴진다. 잘못했어, 다시는 상처주지 않을게.
내 직업은 대리운전 기사이다. 나는 술에 취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밧줄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운전을 할 수 없으면 모두 나를 찾았고, 상처가 난 밧줄인지, 싱싱한 덩굴 줄기인지는 모르지만, 다들 나를 단단히 잡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나는 불행하게도 해가 뜰 때 잠이 들어 해가 지면 일어났다. (나는 매일 해가 뜨는 것에 감사하지 못했었다.) 저녁이 되면 도심가로 출근해 주차되어 있는 차마다 전단지를 끼워 넣었다. 다른 업체보다 더 일찍, 더 눈에 잘 띄는 곳에 전단지를 붙이기 위해 매일 사투를 벌였다. 초벌 작업이 끝나면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고 동료들과 공원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첫 콜이 오후 9시쯤 터진다. 순번대로 일을 나가고 내 차례가 아니면 남아서 재벌 작업에 들어간다. 새로 주차된 차에 전단 작업을 하고, 행여나 다른 업체가 내 전단지를 뺀 것을 확인한 날엔 곧바로 전화를 걸어 따져대는 것도 내 임무이다. 대부분 10시쯤 되면 손님들의 콜을 받고 일을 나가게 된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손님에게서 돈을 받고 다시 내 도심지로 복귀한다. 몇 번 이 과정을 반복하다가 해가 뜨면 퇴근하는 것이 나의 업무이다. 간혹 서울에서 다소 떨어진 곳으로 운행을 나가게 되면 (돌아올 방법이 막막하므로) 다른 날보다 일찍 업무를 마감하기도 한다. (업계에선 속된 말로 ‘죽는다’는 표현을 쓴다. 종종 많은 돈을 받고 먼 곳으로 운행 나가, 거기서 빨리‘죽는’날도 있는 것이다.) ‘일찍 죽고 다른 사람을 살려 집에 보낸다.’나는 이런 묘한 ‘견인의 아이러니’를 즐겼다. 희생의 유사체험.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 역시 그저 모자란 농담일 뿐이다. 내가 살겠다고 독사를 죽이다가 밧줄을 상하게 했던 좀 전의 일을 떠올리면, 즐거운 아이러니는커녕 미안함만 물씬 느껴진다. 아이를 체벌하고 뒤늦게 울며 연고를 발라주는 어머니처럼, 연민과 자괴감이 동시에 밀려온다.
때때로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농사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우선 열심히 (전단지를) 뿌리고 기다리면 수확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중간중간 정성스럽게 재벌작업등으로 보살펴줘야 농사를 망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가장 뼈저리게 느껴지는 때는 비가 심하게 내리는 날이다. 폭우는 농사꾼이나 대리기사에겐 똑같이 재앙에 가깝다. 기껏 작업했던 전단지가 물에 젖고 찢어지면 그 날은 얻는 것 없이 돌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비가 싫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비가 너무도 필요하다. 갈증이 심해져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이미 탈진상태에 이르렀고, 정신도 차츰 혼미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내가 여태껏 성실히 그래왔던 것처럼, 나를 끌고 무사히 집에 데려다 주었으면 좋겠다. 아니, 물이라도 몇 모금 마시게 해주었음 고맙겠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에게 필요했던, 손수건에 적신 물 몇 방울. 한 모금이라도 좋으니 나에게도 떨어뜨려주었으면! 애타는 절망이 어긋난 에너지로 바뀌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벽의 파인 부분에 발길질을 계속 해대고 있었다. 제이슨의 몸뚱아리쯤 되려나? 제길, 눈알이 아니라 뱃속을 파버려야지.
무의미한 발길질을 계속 해대면서, 나에게 닥친 이 농담이야말로 여러 경우 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종자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웃어 넘겼던 모든 의문이 불공평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아무리 인간의 본질이 질문으로 이루어져있다 할지라도,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은 때때로 인간에게 불평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다. 왜 여기 이유도 없이 매달려 있는 걸까, 왜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가, 버티기도 힘든데 독사까지 달려드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더욱 세부적으로 이 농담의 악독함을 따져보자.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임을 입증할 근거를 얼마든지 나열할 자신이 있다. 저 줄기만 해도 그렇다. 갑자기 생긴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기왕이면 내가 잡을만한 거리에 있어서, 충분히 튼튼한지 바로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것 아닌가. 아니면 아예 발견할 수도 없을 만큼 떨어져있든지 말이다. 누군가의 장난이라면 너무도 심술궂다. 제이슨 같은 놈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최고의 농담’은 가상의 타인에서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서 발견된다. 큰 열정을 가지고 위로 오르겠다고 마음 먹었던 초반, 가장 큰 열정에 가장 큰 실패, 쓰라린 손바닥의 상처처럼 잘려나간 밧줄. 기운 백배했다가 나락 없는 절망감을 맛보게 되고, 주변 상황에 따라 울고 웃던 내 모습이 아마도 최고의 우스개거리일 것이다. 아, 발로 디딘 벽이 약해서 부스러지지만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무의미한 발길질에도 조금씩 파여가는) 이런 허약한 벽 따위를 지지하려 했으니……어? 그런데 잠깐! 뭣이라? 벽이 단단하지 않다고? 발로 차면 파인다고? 이럴 수가! 벽이 파이면 딛고 올라갈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 맙소사! 왜 그 사실을 미리 인식하지 못했을까. 애초에 올라가려고 했을 때 벽이 부스러져서 실패했던 사실, 뱀을 잡으려 발로 벽을 찼을 때 뱀은 죽지 않았지만 벽은 흠집이 났다는 사실, 이 평범한 사실을 왜 나는 여태껏 간과하고 있었을까. 밧줄의 상태를 확인하고 실패에 눈물짓느라 무심코 지나치지만 않았더라도 나의 실패는 곧바로 성공과 직결될 수 있었다. 벽이 단단하지 못해서 실패했지만, 벽이 단단하지 못해서 올라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하, 그리 생각하니 이거야말로 최고의 농담이다!
내 사투는 여기까지이다. 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지만, 농담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정확히 여기까지만 나에게 머무른다. 아, 나는 어서 흘려 보내야만 한다. 그래서 내가 우습지 않게, 정말 시리도록 눈물 나게, 내일의 해가 뜸과 함께 다시금 나의 눈도 떠야만 한다. 어서 흘려 보내리라.
[창작소설] 밧줄에 매달리기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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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뱀은 내 상식대로라면 독사가 분명하다. 누구나 배우지 않는가. 머리가 삼각형이라면 독사라고. 불행히도 저 놈의 대가리는 각이 살아 있는 삼각형이다. 나는 이렇게 밧줄이 아니면 한시도 못 버티는데, 저 놈은 너무도 자유롭게 수직의 벽을 타고 다닌다. 불공평하다. 혀를 날름거리는 표정이 나를 비웃는 게 분명하다. 그저 비웃기만 하면 다행이겠는데, 밧줄이라는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을 마중 오는 거미와도 같이, 여유롭지만 표독한 몸짓으로 나를 향해 천천히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숭고한 정신적 고뇌는 한낱 미물인 뱀 따위 앞에서 철저히 유린당한다. 뱀은 나를 비웃는다. 앞서, 제이슨에게서도 느낀 감정이다. 인간의 본질은 질문으로 되어 있다. 저것들의 본질과는 다르다. 내가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웃음거리가 될 순 없다. 그런데도 뱀은 멈추질 않는다. ‘너의 생명이 달아날 기회는 많다. 그건 너의 밧줄이 끊어져서 생길 수도 있고, 나에게 물려서 생길 수도 있다. 저 덩굴 줄기를 잡으면 죽을 지도 모르고, 어쩌면 잡으려 점프하다가 허망하게 떨어질 수도 있다. 이렇게 죽음의 위협이 너를 에워싸고 있는데, 너는 어떻게 한가로이 그런 허섭한 딜레마에서 허우적거리느냐. 게으르면 죽어야 한다. 숭고한 정신적 고뇌? 설마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오냐, 그 따위 것, 내가 숨통을 끊어서 멈추어주마!’
이것은 실로 농담 같은 이야기다. 그 점을 이제서야 밝혀두는 바이다. 다가오는 뱀을 보며 정말 이 모든 건 하나의 우스꽝스러운 농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 나처럼 이런 밧줄 하나 정도는 갖고 있을 거라는, 거짓말 같은 메타포의 농담. 농담은 흘려 보내면 그만이다. 가치의 무게를 떠나서 농담이 내 안에 항상 머물러 있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최고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입에서 미소가 흘러나왔다. 나는 웃으며 저 뱀을 죽일 것이다. 이유 없는 적의로 (이유는 내가 만든 것이지 뱀의 것이 아니다.) 나에게 어슬렁 다가오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다. 나는 왼발을 틈에서 천천히 빼내었다. 상대적으로 무게가 더욱 실린 밧줄에 미안한 감정을 느끼면서, 조금만 견뎌달라고 애원하는 마음으로 밧줄을 단단히 잡았다. 단 한번의 기회이다. 한번의 간결한 발길질로 뱀의 머리를 찍어야만 한다. 실패한다면 뱀은 무방비의 왼발에 역공을 가할 것이다. 안이하게 발로 툭툭 쳐서 절벽에서 떼어내려고만 한다면, 둔한 움직임 탓에 오히려 내가 당할 지도 모른다. 망설일 틈이 없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단 한번의 일격을 가해야 한다. 익숙한 오른발이 아니기에 불안해졌다. 지칠 대로 지쳤기에 온 몸이 후들거렸다.
뱀이 천천히 기어오는 것에 감사했다. 나는 집중해서 거리를 잴 수 있었고, 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나는 있는 힘껏 왼발을 휘둘러 발끝으로 놈의 대가리를 찍었다. 다행히 탈진상태에서도 소중한 내 왼발은 정확히 사명을 다했고, 계산대로 한번의 발길질에 뱀을 물리칠 수 있었다. 물리칠 수 있었다는 건 죽이지는 못했다는 얘기다. 나의 움직임은 한치의 오차도 없었지만, 벽이 내 힘을 견딜 만큼 단단하지 못해서 움푹 파여 들어갔던 것이다. 그 바람에 뱀의 머리는 짓이겨지지 않았고,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별 다를 바 없다.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뱀이 절벽 밑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승리했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왼발에 감사하면서, 아직 발끝에 남아있는 물컹한 이물감에 잔인한 쾌감을 느끼면서 나는 서둘러 밧줄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 상한 곳이 조금 더 벌어져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밧줄에 상처를 보탰다. 그러나 상처가 심해지면 내가 죽는다. 이 역학 관계가 무척 미안하게 느껴진다. 잘못했어, 다시는 상처주지 않을게.
내 직업은 대리운전 기사이다. 나는 술에 취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밧줄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운전을 할 수 없으면 모두 나를 찾았고, 상처가 난 밧줄인지, 싱싱한 덩굴 줄기인지는 모르지만, 다들 나를 단단히 잡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나는 불행하게도 해가 뜰 때 잠이 들어 해가 지면 일어났다. (나는 매일 해가 뜨는 것에 감사하지 못했었다.) 저녁이 되면 도심가로 출근해 주차되어 있는 차마다 전단지를 끼워 넣었다. 다른 업체보다 더 일찍, 더 눈에 잘 띄는 곳에 전단지를 붙이기 위해 매일 사투를 벌였다. 초벌 작업이 끝나면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고 동료들과 공원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첫 콜이 오후 9시쯤 터진다. 순번대로 일을 나가고 내 차례가 아니면 남아서 재벌 작업에 들어간다. 새로 주차된 차에 전단 작업을 하고, 행여나 다른 업체가 내 전단지를 뺀 것을 확인한 날엔 곧바로 전화를 걸어 따져대는 것도 내 임무이다. 대부분 10시쯤 되면 손님들의 콜을 받고 일을 나가게 된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손님에게서 돈을 받고 다시 내 도심지로 복귀한다. 몇 번 이 과정을 반복하다가 해가 뜨면 퇴근하는 것이 나의 업무이다. 간혹 서울에서 다소 떨어진 곳으로 운행을 나가게 되면 (돌아올 방법이 막막하므로) 다른 날보다 일찍 업무를 마감하기도 한다. (업계에선 속된 말로 ‘죽는다’는 표현을 쓴다. 종종 많은 돈을 받고 먼 곳으로 운행 나가, 거기서 빨리‘죽는’날도 있는 것이다.) ‘일찍 죽고 다른 사람을 살려 집에 보낸다.’나는 이런 묘한 ‘견인의 아이러니’를 즐겼다. 희생의 유사체험.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 역시 그저 모자란 농담일 뿐이다. 내가 살겠다고 독사를 죽이다가 밧줄을 상하게 했던 좀 전의 일을 떠올리면, 즐거운 아이러니는커녕 미안함만 물씬 느껴진다. 아이를 체벌하고 뒤늦게 울며 연고를 발라주는 어머니처럼, 연민과 자괴감이 동시에 밀려온다.
때때로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농사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우선 열심히 (전단지를) 뿌리고 기다리면 수확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중간중간 정성스럽게 재벌작업등으로 보살펴줘야 농사를 망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가장 뼈저리게 느껴지는 때는 비가 심하게 내리는 날이다. 폭우는 농사꾼이나 대리기사에겐 똑같이 재앙에 가깝다. 기껏 작업했던 전단지가 물에 젖고 찢어지면 그 날은 얻는 것 없이 돌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비가 싫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비가 너무도 필요하다. 갈증이 심해져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이미 탈진상태에 이르렀고, 정신도 차츰 혼미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내가 여태껏 성실히 그래왔던 것처럼, 나를 끌고 무사히 집에 데려다 주었으면 좋겠다. 아니, 물이라도 몇 모금 마시게 해주었음 고맙겠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에게 필요했던, 손수건에 적신 물 몇 방울. 한 모금이라도 좋으니 나에게도 떨어뜨려주었으면! 애타는 절망이 어긋난 에너지로 바뀌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벽의 파인 부분에 발길질을 계속 해대고 있었다. 제이슨의 몸뚱아리쯤 되려나? 제길, 눈알이 아니라 뱃속을 파버려야지.
무의미한 발길질을 계속 해대면서, 나에게 닥친 이 농담이야말로 여러 경우 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종자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웃어 넘겼던 모든 의문이 불공평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아무리 인간의 본질이 질문으로 이루어져있다 할지라도,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은 때때로 인간에게 불평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다. 왜 여기 이유도 없이 매달려 있는 걸까, 왜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가, 버티기도 힘든데 독사까지 달려드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더욱 세부적으로 이 농담의 악독함을 따져보자.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임을 입증할 근거를 얼마든지 나열할 자신이 있다. 저 줄기만 해도 그렇다. 갑자기 생긴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기왕이면 내가 잡을만한 거리에 있어서, 충분히 튼튼한지 바로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것 아닌가. 아니면 아예 발견할 수도 없을 만큼 떨어져있든지 말이다. 누군가의 장난이라면 너무도 심술궂다. 제이슨 같은 놈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최고의 농담’은 가상의 타인에서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서 발견된다. 큰 열정을 가지고 위로 오르겠다고 마음 먹었던 초반, 가장 큰 열정에 가장 큰 실패, 쓰라린 손바닥의 상처처럼 잘려나간 밧줄. 기운 백배했다가 나락 없는 절망감을 맛보게 되고, 주변 상황에 따라 울고 웃던 내 모습이 아마도 최고의 우스개거리일 것이다. 아, 발로 디딘 벽이 약해서 부스러지지만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무의미한 발길질에도 조금씩 파여가는) 이런 허약한 벽 따위를 지지하려 했으니……어? 그런데 잠깐! 뭣이라? 벽이 단단하지 않다고? 발로 차면 파인다고? 이럴 수가! 벽이 파이면 딛고 올라갈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 맙소사! 왜 그 사실을 미리 인식하지 못했을까. 애초에 올라가려고 했을 때 벽이 부스러져서 실패했던 사실, 뱀을 잡으려 발로 벽을 찼을 때 뱀은 죽지 않았지만 벽은 흠집이 났다는 사실, 이 평범한 사실을 왜 나는 여태껏 간과하고 있었을까. 밧줄의 상태를 확인하고 실패에 눈물짓느라 무심코 지나치지만 않았더라도 나의 실패는 곧바로 성공과 직결될 수 있었다. 벽이 단단하지 못해서 실패했지만, 벽이 단단하지 못해서 올라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하, 그리 생각하니 이거야말로 최고의 농담이다!
내 사투는 여기까지이다. 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지만, 농담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정확히 여기까지만 나에게 머무른다. 아, 나는 어서 흘려 보내야만 한다. 그래서 내가 우습지 않게, 정말 시리도록 눈물 나게, 내일의 해가 뜸과 함께 다시금 나의 눈도 떠야만 한다. 어서 흘려 보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