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 : 1993~1994 스포르트 헤시피 (브라질) 1995~2001 바스코 다 가마 (브라질) 1999~ 브라질 국가대표 2001~ 올림피크 리옹 (프랑스) 2006~ 독일 월드컵 브라질 국가대표
경이적인 성공률을 자랑하는 악마같은 키커
분위기를 자신에게 쏠리게 하며 신중히 볼을 세팅하고 그로부터 바로 몇 발 물러선다. 골키퍼의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며 시선은 골을 계속 응시하는 상태다. 한순간 정적 후, 짧은 도움닫기로 오른발을 휘두르자 볼은 전방에 있는 벽을 훨씬 넘어 높이 올라가더니, 다음 순간, 급속히 낙하하며 골문을 향한다. 상대팀 골키퍼는 예측 불가능한 궤도의 변화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당연하다는듯이 골네트가 흔들린다ㅡ.
이같은 장면을 리옹의 서포터들은 몇 번이나 목격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호언한다.「우리들에게 프리킥을 주는건, 패널티킥을 주는거나 마찬가지야」. 이건 결코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리옹은 대략 두 번에 한 번이라는 경이적인 확률로 프리킥을 차는, 악마같은 키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닝요 페르남부카누. 리옹에서의 5년반동안 실로 30번을 넘는 프리킥으로 골을 넣었다.틀림없는 현시점에서 세계 최고의 프리키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프리킥만이 화제에 오르는 것이 싫다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프리킥은 분명 볼거리입니다. 현대축구에서는 득점의 30퍼센트 이상이 세트피스에서 나오니까, 전술적으로도 중요하죠. 하지만 프리킥만이 지나치게 주목받는 것 같습니다. 나는 프리킥 이외에도 팀에 공헌하고 있습니다」
그 말대로, 주닝요의 재능은 프리킥만에만 그치지 않는다. 공격적인 페인트를 구사한 드리블, 절묘한 타이밍으로 잇달아 나오는 쓰루패스. 그리고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넓은 시야와 고도의 전술안으로 입증된 적확한 패스이다. 그렇다, 그는 한순간의 아이디어나 번뜩이는 센스만으로 승부하는 판타지스타가 아니다. 전술을 완벽히 이해하고, 경기의 흐름을 읽으며 플레이하는, 지능적인 플레이메이커인 것이다.
풋살팀 창단에서부터 시작한 커리어
안토니오 아우구스토 히베이로 헤이스 쥬니오르, 통칭 주닝요 페르남부카누는 브라질 북동부의 페르남부쿠주 헤시페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린시절부터 주닝요라고 불리우던 그에게 페르남부카누라는 이름이 붙여진것은, 바스코 다 가마에서 플레이하던 시절이다. 이유는 팀 동료중에도 또 한명의 주닝요라는 이름의 선수가 있었기 때문. 페르남부카누는「페르남부쿠의」라는 의미로, 즉 그는「페르남부쿠의 주닝요」가 되는 것이다. 덧붙여, 또 한명은 주닝요 파우리스타. 이쪽은「상파울로의 주닝요」라는 의미다.
주닝요는 비교적 풍족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 안토니오는 해군장교로, 아이들을 엄하게 교육하는 한편, 성공하는 것, 일하는 것의 가치를 가르쳐주었다. 주닝요는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아버지는 엄한 분이셨어요. 맥주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죠. 10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으면, 8시에 이미 준비가 다 되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친구들로부터 자주 비웃음샀었어요.『니네 아빠는 되게 고지식해』라고. 하지만 나는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전부 아버지에게 배웠습니다. 나의 성공은 내 노력이 절반, 그리고 절반은 아버지 덕분이죠」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주닝요는 가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축구선수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브라질 선수들 중 많은 수가 거리에서 축구를 하며 테크닉을 닦지만, 그가 축구를 시작한 장소는 근처의 풋살코트. 그의 집은 상류층이 많이 사는 지역에 있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될만한 거리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성적우수, 성실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소년이었지만,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풋살에 열중했다. 그리고 11세때, 주닝요는 어떤 결심을 한다. 사이좋은 친구들을 모아, 자신이 중심이 된 풋살팀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보통 이상으로 열성적인 교육파였던 부모님은 아들의 자립심을 존중해주었다. 아들의 팀을 위해 지도자를 불러오고, 연습을 도와줄 스탭까지 준비해 주었다. 이런 지원을 받아 그가 만든 팀은 페르남부쿠주의 대회에서 우승. 중심선수였던 주닝요에게는 많은 스카우터로부터 뜨거운 시선을 받게 되었다.
학문의 길을 포기하고 명문 바스코의 일원으로
풋살에 두각을 보이던 주닝요에게 프로축구클럽으로부터 유혹이 온 것은 15세시절이었다. 고향 클럽 스포르토 헤시페 트라이얼에 불려진 것이다. 그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풋살도 즐거웠지만, 나는 계속 진짜 잔디가 있는 피치에서 축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트라이얼에 참가할 수 있다고 들어 기뻤다. 하지만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우선, 잔디용 축구화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자 클럽사람이 새로운 축구화를 사주었다. 경기가 끝나자, 코치가 나에게 말했다.『그 축구화는 가지고 가라. 내일부터 연습하러 나오고』라고. 그 한마디가 모든것의 시작이었다.」
사실 이때, 주닝요는 스포르토 헤시페의 유스팀에서 플레이하며 고등학교에 다니는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교육에 열심이었던 부모님 밑에서 자란 그는, 학업에 있어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학문의 길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덧붙여, 그는 5남매 중의 막내로, 누나나 형은 전원 대학에 진학하고 있었다. 주닝요도 그들처럼 그 후에도 축구와 학업을 병행하며 고등학교 졸업후에는 프로축구선수로서 플레이하면서 대학에 진학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학문의 길을 버리는 날이 온다. 리우데자네이루에 본거지를 둔 브라질 유수의 빅클럽, 바스코 다 가마에서 오퍼가 온것이다. 18세에 프로계약을 한 주닝요는, 데뷔 2년째가 되는 94년에 페르남부쿠주 선수권에서 우승. 다음해 95년에는 U-20브라질 대표로 선출되어, 투론국제대회에서 우승을 장식했다. 주닝요는 이미 옛날의 페르남부쿠주를 뛰어넘어, 브라질의 빅클럽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20세의 주닝요는 스스로의 장래를 학문이 아닌, 축구에 바칠 결의를 다짐한다. 바스코 다 가마에 입단한 그 때부터, 그는 일류선수로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또, 결혼해서 아이가 탄생한 것도 이 때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된 주닝요에게는 이미 강한 책임감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아빠가 된다는 의식은 나를 성장시켰습니다. 리우데자네이루는 헤시페와는 완전히 다른 거대한 도시였고, 여러 유혹도 있었죠. 하지만 나의 경우엔 그 어떤 걱정도 필요없었어요.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서 침착하게 살 수 있었으니까. 나는 아내와 레스토랑이나 영화관에 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만족이었어요. 정말 디스코라든가, 나이트클럽이라든가, 젊은이들같은 놀이에는 인연이 없었어요. 그래도 아내와 함께 있었던 것은 절대 옳은 일이었죠.」
바스코에서의 6년간 5개의 타이틀을 획득
아버지에게 성실하고 사려깊은 태도를 물려받은 주닝요였지만,『조낸 외곬수』인 성격까지는 물려받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밝은 성격의 소유자이다. 바스코 다 가마에 이적했을때도, 후에 리옹에 입단했을때도, 이 성격이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그가 바스코 다 가마의 팀 동료들에 어울려, 리더쉽을 발휘하게 되기까지, 그정도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정중하고 화려한 플레이는 팬들에게 사랑받고, 정확한 프리킥 테크닉도 높이 평가되었다.
입단한지 2년째가 되던 97년에는, 천재 포워드 에드문도를 거느리고 브라질 전국선수권에서 우승. 바스코 다 가마의 창립100주년이었던 98년에는 도니제티, 루이손이라는 브라질 대표팀 클래스 투 톱을 축으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제압, 남미 챔피언의 자리를 손에 넣었다. 이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아르헨티나의 영웅 리베르 플라테를 홈으로 불러들인 준결승일 것이다. 주닝요는 천둥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훌륭한 프리킥을 성공시켜 승리의 주역자가 되었다. 본인도 후에「리오를 지날때마다 그 골이 떠오른다」고 말하듯이, 팬들의 기억에 남는 멋진 결승골이었다. 또, 도쿄에서 개최된 인터컨티넨셜컵(도요타컵)에서는 레알 마드릿에 1-2로 아쉽게 패배했지만, 주닝요는 솜씨좋은 루프슛으로 팀에 유일한 득점을 올렸다. 2000년에 들어서자, 새로 가입한 주닝요 파우리스타와《주닝요 콤비》로 주원을 제압, 압도적인 실력으로 2번째 브라질 전국선수권 우승을 달성했다.
01년 리옹에 이적하기까지, 바스코 다 가마에서의 6기즌동안 출장한 경기는 300경기를 넘는다. 그동안 실로 5개나 되는 타이틀을 획득하고 주닝요는 브라질 대표팀에도 불려지게 되었다. 그런만큼, 02년 한일월드컵 최종멤버에 남지 못했을때에는 침울해했다. 특히 이적이 실현되기까지의 여러 트러블에 의해 컨디션을 하락시켜버린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고 한다.「리옹과 계약하기까지 6개월간, 매스컴이 상당히 떠들어대고, 한때는 인테르행이 정해졌다고까지 들었어요. 결국, 이적금을 인상하기위해 바스코가 교섭을 길게 끌었거든요. 그런 와중에 성실히 뛰는게 어려웠어요. 겨우 이적이 정해지자, 이번엔 리옹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반년이나 걸렸어요. 월드컵에 나갔으면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건 나의 커리어에서 제일 분한 일입니다」
입단 2시즌째가 되어 리옹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주닝요가 이적한 당시, 리옹은 한번도 리그를 제압하지 못한 중견클럽에 지나지 않았다. 또, 그 자신도 프랑스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존재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리옹에는 믿음직스러운 인물이 있었다. 브라질인 스트라이커, 소니 안데르손이다. 마르세유, 모나코, 바르셀로나를 거쳐 유럽 축구를 숙지한 안데르손은 막 프랑스에 온 주닝요를 공사(公私)에 걸쳐 지원해주었다. 프랑스 축구의 특징을 상세히 알려주고, 동료와 대화할 때는 통역을 해주기도 했다. 주닝요는 이 때를 지금도 감사해한다.「소니는 나를 지켜주었고, 귀중한 조언을 해주었어요. 예를 들어, 당시 나는 익숙하지 않은 라이트윙을 맡았죠. 하지만 소니는『포지션을 정하는 것은 네가 아니다. 클럽이다』라고 말해줬어요. 그가 옳았죠. 오른쪽 사이드를 해내고 나는 선수로서 크게 성장할 수 있었어요」
그 시즌, 리옹은 리그 앙에서 멋진 싸움을 보여준다. 전반에 랑스와 차가 벌어졌지만, 안정된 성적으로 차츰 차를 좁혀, 종반에 역전. 홈구장 스타드 제를랑에서의 최종라운드에서 극적인 첫우승을 장식한다. 주닝요는 말한다.「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숙적 랑스를 3대1로 무찌르고 우승했어요. 그 결승전은 평생 잊지 못할겁니다. 그건 클럽에 있어서 첫 리그 타이틀이었으니까요. 최종 라운드의 부담은 무시무시했어요. 하지만 우린 그 부담을 부수고 승리했죠」
리옹에서의 2 시즌째, 주닝요는 오른쪽 사이드, 왼쪽 사이드, 중앙과 여러 포지션을 해냈다. 젊은 지장(知將) 르구앙은 대전상대에 따라 유연한 시스템을 변경하는 어려운 전술을 채용했지만, 그것이 역으로, 주닝요의 높은 전술안을 두드러지게끔 한 결과가 되었다.
그는 어떤 포지션에서든 완전히 적응해,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특기인 프리킥도 갈고 닦아, 이 시즌에 넣은 골은 프리킥 5득점 포함 13득점. 이것은 포워드 안데르손을 빠진 클럽의 득점왕이 되는 숫자였다. 리옹은 당당히 2연패를 달성하고 주닝요는 팀에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함과 동시에 대전상대팀 골키퍼에게도 축구선수로서 최고의 평가를 얻게 되었다. 그렇다,「페르남부카누는 제일 대전하고 싶지 않은 선수입니다」라고.
커리어의 집대성으로서 유럽제패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03년 6월 팀 리더인 안데르손이 리옹에서 비야레알로 이적하고 리그3연패를 목표로 하던 팀에는 구멍이 생겼다. 그러자 르구앙 감독은 새로운 공격진의 리더로서 망설임 없이 주닝요를 지명. 왼쪽 사이드에 새로 가입한 플로랑 말루다를 배치해, 주닝요는 뛰어난 중앙미드필더로 고정되어, 같은 신인 마이클 에시앙과 콤비를 이뤄 중원을 날뛰어 다녔다.
이 시즌, 1월 시점에서 모나코에 최대 10포인트 차를 두게된 리옹은 그로부터 맹렬한 추격을 개시한다. 후반 19경기에 14승1무3패라는 성적을 남겨, 모나코를 역전하고 리그 앙 3연패를 해낸다.
그 후에도 기세좋게 04-05시즌, 그리고 새로운 감독 제라르 울리에를 맞아들인 05-06시즌, 리옹은 2위에 압도적인 큰 차를 두고 타이틀을 획득, 프랑스사상 최초의 5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즉 01년에 주닝요가 리옹에 나타난 이래, 그들은 한번도 리그 타이틀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리옹에 아무도 없다.
「나는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팀이 나를 필요로 해주고, 나를 성장시켜주었기 때문이죠. 리옹의 좋은 점은 선수들이 강한 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 지금도 트레이닝에서 매일 만나는 것이 즐거워요. 5연패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단결력 덕분입니다. 정말 굉장하죠」
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사상최강》이라 불리운 브라질 대표팀 멤버로 선발되어, 탈락했던 02년을 설욕한 주닝요. 하지만 브라질 대표팀이 월드컵 8강에서 탈락하자, 기자회견에서는「세계 최고는 되지 못했지만, 인생은 뭐든 생각대로 되는게 아니다」라고 코멘트하고, 대표팀을 은퇴할 의사를 표명. 이후에는 클럽에서의 플레이에 전념할 뜻을 말했다.
그는 지금 리옹의 상징적존재이다. 5연패를 달성, 리그 앙의 레벨을 넘어섰다고까지 듣는 리옹에 있어, 다음 목표는 3년 연속으로 8강에 진출하고 있는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우승뿐일것이다. 사실, 주닝요는 이번 시즌 개막전에「커리어의 집대성으로서 챔피언스 리그를 제패하고 싶다」라고 발언했다. 곧 32세가 되는 그는 리옹에서 커리어를 끝낼 것임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지금까지 밀란, 인테르, 레알 마드릿 등 수많은 클럽에서 오퍼가 왔지만, 주닝요는 결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빅클럽의 스카우터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어째서 이 정도의 인재가 리옹따위에 머물러 있는거냐」고. 그 이유는 간단하다.
「리옹의 선수는 다른 어떤 클럽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리옹은 정진정명의 빅클럽이니까요. 우리는 충분히 챔피언스 리그를 제패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나의 목표는 이 클럽에서 빅 타이틀을 획득하고, 클럽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레알 마드릿이나 밀란에서 조금도 플레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앞으로 20년후, 리옹의 사람들이 주닝요라는 이름을 기억해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주닝요 Special
주니뉴 페르남부카누 (Antônio Augusto Ribeiro Reis Junior)
신체사항 : 키 178cm 체중 72kg
경력 : 1993~1994 스포르트 헤시피 (브라질)
1995~2001 바스코 다 가마 (브라질)
1999~ 브라질 국가대표
2001~ 올림피크 리옹 (프랑스)
2006~ 독일 월드컵 브라질 국가대표
경이적인 성공률을 자랑하는 악마같은 키커
분위기를 자신에게 쏠리게 하며 신중히 볼을 세팅하고 그로부터 바로 몇 발 물러선다. 골키퍼의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며 시선은 골을 계속 응시하는 상태다. 한순간 정적 후, 짧은 도움닫기로 오른발을 휘두르자 볼은 전방에 있는 벽을 훨씬 넘어 높이 올라가더니, 다음 순간, 급속히 낙하하며 골문을 향한다. 상대팀 골키퍼는 예측 불가능한 궤도의 변화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당연하다는듯이 골네트가 흔들린다ㅡ.
이같은 장면을 리옹의 서포터들은 몇 번이나 목격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호언한다.「우리들에게 프리킥을 주는건, 패널티킥을 주는거나 마찬가지야」. 이건 결코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리옹은 대략 두 번에 한 번이라는 경이적인 확률로 프리킥을 차는, 악마같은 키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닝요 페르남부카누. 리옹에서의 5년반동안 실로 30번을 넘는 프리킥으로 골을 넣었다.틀림없는 현시점에서 세계 최고의 프리키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프리킥만이 화제에 오르는 것이 싫다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프리킥은 분명 볼거리입니다. 현대축구에서는 득점의 30퍼센트 이상이 세트피스에서 나오니까, 전술적으로도 중요하죠. 하지만 프리킥만이 지나치게 주목받는 것 같습니다. 나는 프리킥 이외에도 팀에 공헌하고 있습니다」
그 말대로, 주닝요의 재능은 프리킥만에만 그치지 않는다. 공격적인 페인트를 구사한 드리블, 절묘한 타이밍으로 잇달아 나오는 쓰루패스. 그리고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넓은 시야와 고도의 전술안으로 입증된 적확한 패스이다. 그렇다, 그는 한순간의 아이디어나 번뜩이는 센스만으로 승부하는 판타지스타가 아니다. 전술을 완벽히 이해하고, 경기의 흐름을 읽으며 플레이하는, 지능적인 플레이메이커인 것이다.
풋살팀 창단에서부터 시작한 커리어
안토니오 아우구스토 히베이로 헤이스 쥬니오르, 통칭 주닝요 페르남부카누는 브라질 북동부의 페르남부쿠주 헤시페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린시절부터 주닝요라고 불리우던 그에게 페르남부카누라는 이름이 붙여진것은, 바스코 다 가마에서 플레이하던 시절이다. 이유는 팀 동료중에도 또 한명의 주닝요라는 이름의 선수가 있었기 때문. 페르남부카누는「페르남부쿠의」라는 의미로, 즉 그는「페르남부쿠의 주닝요」가 되는 것이다. 덧붙여, 또 한명은 주닝요 파우리스타. 이쪽은「상파울로의 주닝요」라는 의미다.
주닝요는 비교적 풍족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 안토니오는 해군장교로, 아이들을 엄하게 교육하는 한편, 성공하는 것, 일하는 것의 가치를 가르쳐주었다. 주닝요는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아버지는 엄한 분이셨어요. 맥주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죠. 10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으면, 8시에 이미 준비가 다 되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친구들로부터 자주 비웃음샀었어요.『니네 아빠는 되게 고지식해』라고. 하지만 나는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전부 아버지에게 배웠습니다. 나의 성공은 내 노력이 절반, 그리고 절반은 아버지 덕분이죠」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주닝요는 가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축구선수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브라질 선수들 중 많은 수가 거리에서 축구를 하며 테크닉을 닦지만, 그가 축구를 시작한 장소는 근처의 풋살코트. 그의 집은 상류층이 많이 사는 지역에 있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될만한 거리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성적우수, 성실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소년이었지만,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풋살에 열중했다. 그리고 11세때, 주닝요는 어떤 결심을 한다. 사이좋은 친구들을 모아, 자신이 중심이 된 풋살팀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보통 이상으로 열성적인 교육파였던 부모님은 아들의 자립심을 존중해주었다. 아들의 팀을 위해 지도자를 불러오고, 연습을 도와줄 스탭까지 준비해 주었다. 이런 지원을 받아 그가 만든 팀은 페르남부쿠주의 대회에서 우승. 중심선수였던 주닝요에게는 많은 스카우터로부터 뜨거운 시선을 받게 되었다.
학문의 길을 포기하고 명문 바스코의 일원으로
풋살에 두각을 보이던 주닝요에게 프로축구클럽으로부터 유혹이 온 것은 15세시절이었다. 고향 클럽 스포르토 헤시페 트라이얼에 불려진 것이다. 그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풋살도 즐거웠지만, 나는 계속 진짜 잔디가 있는 피치에서 축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트라이얼에 참가할 수 있다고 들어 기뻤다. 하지만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우선, 잔디용 축구화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자 클럽사람이 새로운 축구화를 사주었다. 경기가 끝나자, 코치가 나에게 말했다.『그 축구화는 가지고 가라. 내일부터 연습하러 나오고』라고. 그 한마디가 모든것의 시작이었다.」
사실 이때, 주닝요는 스포르토 헤시페의 유스팀에서 플레이하며 고등학교에 다니는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교육에 열심이었던 부모님 밑에서 자란 그는, 학업에 있어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학문의 길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덧붙여, 그는 5남매 중의 막내로, 누나나 형은 전원 대학에 진학하고 있었다. 주닝요도 그들처럼 그 후에도 축구와 학업을 병행하며 고등학교 졸업후에는 프로축구선수로서 플레이하면서 대학에 진학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학문의 길을 버리는 날이 온다. 리우데자네이루에 본거지를 둔 브라질 유수의 빅클럽, 바스코 다 가마에서 오퍼가 온것이다. 18세에 프로계약을 한 주닝요는, 데뷔 2년째가 되는 94년에 페르남부쿠주 선수권에서 우승. 다음해 95년에는 U-20브라질 대표로 선출되어, 투론국제대회에서 우승을 장식했다. 주닝요는 이미 옛날의 페르남부쿠주를 뛰어넘어, 브라질의 빅클럽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20세의 주닝요는 스스로의 장래를 학문이 아닌, 축구에 바칠 결의를 다짐한다. 바스코 다 가마에 입단한 그 때부터, 그는 일류선수로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또, 결혼해서 아이가 탄생한 것도 이 때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된 주닝요에게는 이미 강한 책임감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아빠가 된다는 의식은 나를 성장시켰습니다. 리우데자네이루는 헤시페와는 완전히 다른 거대한 도시였고, 여러 유혹도 있었죠. 하지만 나의 경우엔 그 어떤 걱정도 필요없었어요.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서 침착하게 살 수 있었으니까. 나는 아내와 레스토랑이나 영화관에 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만족이었어요. 정말 디스코라든가, 나이트클럽이라든가, 젊은이들같은 놀이에는 인연이 없었어요. 그래도 아내와 함께 있었던 것은 절대 옳은 일이었죠.」
바스코에서의 6년간 5개의 타이틀을 획득
아버지에게 성실하고 사려깊은 태도를 물려받은 주닝요였지만,『조낸 외곬수』인 성격까지는 물려받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밝은 성격의 소유자이다. 바스코 다 가마에 이적했을때도, 후에 리옹에 입단했을때도, 이 성격이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그가 바스코 다 가마의 팀 동료들에 어울려, 리더쉽을 발휘하게 되기까지, 그정도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정중하고 화려한 플레이는 팬들에게 사랑받고, 정확한 프리킥 테크닉도 높이 평가되었다.
입단한지 2년째가 되던 97년에는, 천재 포워드 에드문도를 거느리고 브라질 전국선수권에서 우승. 바스코 다 가마의 창립100주년이었던 98년에는 도니제티, 루이손이라는 브라질 대표팀 클래스 투 톱을 축으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제압, 남미 챔피언의 자리를 손에 넣었다. 이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아르헨티나의 영웅 리베르 플라테를 홈으로 불러들인 준결승일 것이다. 주닝요는 천둥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훌륭한 프리킥을 성공시켜 승리의 주역자가 되었다. 본인도 후에「리오를 지날때마다 그 골이 떠오른다」고 말하듯이, 팬들의 기억에 남는 멋진 결승골이었다. 또, 도쿄에서 개최된 인터컨티넨셜컵(도요타컵)에서는 레알 마드릿에 1-2로 아쉽게 패배했지만, 주닝요는 솜씨좋은 루프슛으로 팀에 유일한 득점을 올렸다. 2000년에 들어서자, 새로 가입한 주닝요 파우리스타와《주닝요 콤비》로 주원을 제압, 압도적인 실력으로 2번째 브라질 전국선수권 우승을 달성했다.
01년 리옹에 이적하기까지, 바스코 다 가마에서의 6기즌동안 출장한 경기는 300경기를 넘는다. 그동안 실로 5개나 되는 타이틀을 획득하고 주닝요는 브라질 대표팀에도 불려지게 되었다. 그런만큼, 02년 한일월드컵 최종멤버에 남지 못했을때에는 침울해했다. 특히 이적이 실현되기까지의 여러 트러블에 의해 컨디션을 하락시켜버린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고 한다.「리옹과 계약하기까지 6개월간, 매스컴이 상당히 떠들어대고, 한때는 인테르행이 정해졌다고까지 들었어요. 결국, 이적금을 인상하기위해 바스코가 교섭을 길게 끌었거든요. 그런 와중에 성실히 뛰는게 어려웠어요. 겨우 이적이 정해지자, 이번엔 리옹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반년이나 걸렸어요. 월드컵에 나갔으면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건 나의 커리어에서 제일 분한 일입니다」
입단 2시즌째가 되어 리옹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주닝요가 이적한 당시, 리옹은 한번도 리그를 제압하지 못한 중견클럽에 지나지 않았다. 또, 그 자신도 프랑스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존재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리옹에는 믿음직스러운 인물이 있었다. 브라질인 스트라이커, 소니 안데르손이다. 마르세유, 모나코, 바르셀로나를 거쳐 유럽 축구를 숙지한 안데르손은 막 프랑스에 온 주닝요를 공사(公私)에 걸쳐 지원해주었다. 프랑스 축구의 특징을 상세히 알려주고, 동료와 대화할 때는 통역을 해주기도 했다. 주닝요는 이 때를 지금도 감사해한다.「소니는 나를 지켜주었고, 귀중한 조언을 해주었어요. 예를 들어, 당시 나는 익숙하지 않은 라이트윙을 맡았죠. 하지만 소니는『포지션을 정하는 것은 네가 아니다. 클럽이다』라고 말해줬어요. 그가 옳았죠. 오른쪽 사이드를 해내고 나는 선수로서 크게 성장할 수 있었어요」
그 시즌, 리옹은 리그 앙에서 멋진 싸움을 보여준다. 전반에 랑스와 차가 벌어졌지만, 안정된 성적으로 차츰 차를 좁혀, 종반에 역전. 홈구장 스타드 제를랑에서의 최종라운드에서 극적인 첫우승을 장식한다. 주닝요는 말한다.「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숙적 랑스를 3대1로 무찌르고 우승했어요. 그 결승전은 평생 잊지 못할겁니다. 그건 클럽에 있어서 첫 리그 타이틀이었으니까요. 최종 라운드의 부담은 무시무시했어요. 하지만 우린 그 부담을 부수고 승리했죠」
리옹에서의 2 시즌째, 주닝요는 오른쪽 사이드, 왼쪽 사이드, 중앙과 여러 포지션을 해냈다. 젊은 지장(知將) 르구앙은 대전상대에 따라 유연한 시스템을 변경하는 어려운 전술을 채용했지만, 그것이 역으로, 주닝요의 높은 전술안을 두드러지게끔 한 결과가 되었다.
그는 어떤 포지션에서든 완전히 적응해,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특기인 프리킥도 갈고 닦아, 이 시즌에 넣은 골은 프리킥 5득점 포함 13득점. 이것은 포워드 안데르손을 빠진 클럽의 득점왕이 되는 숫자였다. 리옹은 당당히 2연패를 달성하고 주닝요는 팀에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함과 동시에 대전상대팀 골키퍼에게도 축구선수로서 최고의 평가를 얻게 되었다. 그렇다,「페르남부카누는 제일 대전하고 싶지 않은 선수입니다」라고.
커리어의 집대성으로서 유럽제패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03년 6월 팀 리더인 안데르손이 리옹에서 비야레알로 이적하고 리그3연패를 목표로 하던 팀에는 구멍이 생겼다. 그러자 르구앙 감독은 새로운 공격진의 리더로서 망설임 없이 주닝요를 지명. 왼쪽 사이드에 새로 가입한 플로랑 말루다를 배치해, 주닝요는 뛰어난 중앙미드필더로 고정되어, 같은 신인 마이클 에시앙과 콤비를 이뤄 중원을 날뛰어 다녔다.
이 시즌, 1월 시점에서 모나코에 최대 10포인트 차를 두게된 리옹은 그로부터 맹렬한 추격을 개시한다. 후반 19경기에 14승1무3패라는 성적을 남겨, 모나코를 역전하고 리그 앙 3연패를 해낸다.
그 후에도 기세좋게 04-05시즌, 그리고 새로운 감독 제라르 울리에를 맞아들인 05-06시즌, 리옹은 2위에 압도적인 큰 차를 두고 타이틀을 획득, 프랑스사상 최초의 5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즉 01년에 주닝요가 리옹에 나타난 이래, 그들은 한번도 리그 타이틀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리옹에 아무도 없다.
「나는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팀이 나를 필요로 해주고, 나를 성장시켜주었기 때문이죠. 리옹의 좋은 점은 선수들이 강한 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 지금도 트레이닝에서 매일 만나는 것이 즐거워요. 5연패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단결력 덕분입니다. 정말 굉장하죠」
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사상최강》이라 불리운 브라질 대표팀 멤버로 선발되어, 탈락했던 02년을 설욕한 주닝요. 하지만 브라질 대표팀이 월드컵 8강에서 탈락하자, 기자회견에서는「세계 최고는 되지 못했지만, 인생은 뭐든 생각대로 되는게 아니다」라고 코멘트하고, 대표팀을 은퇴할 의사를 표명. 이후에는 클럽에서의 플레이에 전념할 뜻을 말했다.
그는 지금 리옹의 상징적존재이다. 5연패를 달성, 리그 앙의 레벨을 넘어섰다고까지 듣는 리옹에 있어, 다음 목표는 3년 연속으로 8강에 진출하고 있는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우승뿐일것이다. 사실, 주닝요는 이번 시즌 개막전에「커리어의 집대성으로서 챔피언스 리그를 제패하고 싶다」라고 발언했다. 곧 32세가 되는 그는 리옹에서 커리어를 끝낼 것임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지금까지 밀란, 인테르, 레알 마드릿 등 수많은 클럽에서 오퍼가 왔지만, 주닝요는 결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빅클럽의 스카우터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어째서 이 정도의 인재가 리옹따위에 머물러 있는거냐」고. 그 이유는 간단하다.
「리옹의 선수는 다른 어떤 클럽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리옹은 정진정명의 빅클럽이니까요. 우리는 충분히 챔피언스 리그를 제패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나의 목표는 이 클럽에서 빅 타이틀을 획득하고, 클럽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레알 마드릿이나 밀란에서 조금도 플레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앞으로 20년후, 리옹의 사람들이 주닝요라는 이름을 기억해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