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15세 때 정규 교육을 그만두고 포목상에서 일을 해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환경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고, 독학으로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공부해 나중에는 성경을 원문으로 읽을 정도의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이 어려움 속에서 길러진 전문성으로 인해 그는 나중에 정부기관에 취직해 중요 직책을 맡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자수성가한 엘리트가 된 것이다.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사람들은 많진 않지만 사실 그리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는 아니다. 샤프 또한 평범하진 않지만 특별하진 않았던 이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런 그를 역사에 남는 특별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
어느날 샤프는 의사인 자기의 형을 방문하였다가 치료를 받으러 온 가난한 흑인 조나단 스트롱(Jonathan Strong)을 만난 일이 있었다. 이 흑인은 자신이 서인도 제도에서 리즐이라는 변호사에게 팔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주인이 그가 병들었다는 것을 알고 길거리에 버렸다는 딱한 사정을 얘기하였고, 샤프는 이 노예를 불쌍히 여겨 돌봐 주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조나단은 길거리에서 전 주인인 리즐에 의해 발견되었고, 리즐은 악랄하게도 조나단에게 도망노예라는 누명 씌워 감옥에 보내버렸다. 이 소식에 분노한 샤프는 즉각 고등법원에 찾아가 항의하였지만 리즐은 오히려 상대방이 불법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보유하려 했다고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 재판은 곧 노예제도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되었다.
당시 영국은 재산소유권이 가장 먼저 발달된 나라답게 재산권을 불가침의 권리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법률가들은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샤프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 법리를 개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법률적 지식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제에 관한 영국과 유럽 여러 나라의 법률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이렇게 열정과 헌신으로 길러진 지식은 노예제가 마그나 카르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영국 헌법의 자유 정신에 결코 합치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그의 논리는 세간의 관심을 끌었으며 결국 법원의 판결에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막상 ‘리즐 대 샤프’ 소송이 개시되었을 때(1772) 어떤 변호사도 리즐의 변호를 맡으려 하지 았고, 결국 리즐은 소송을 취하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성공에 고무되어서 그렌빌은 1775년 유사한 소송을 맡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어떤 노예든지 영국 영토에 발을 딛자마자 그는 자유”라는 기념비적인 판결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약 30년이 지난 1807년, 영국 의회에서는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통과되었다. 세계 노예무역의 1/3 이상을 차지했던 국가가 이 핵심 산업을 폐기하기까지 복음주의 정치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필요하였지만, 그렌빌 샤프가 얻어낸 판결이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무역 폐지 운동을 위해 일어나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얼마 전, 인권법(Human Right Act)을 수정하라는 야당의 요구에 맞서,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가 반박 연설을 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의 논리 중 하나는 인간의 자유는 영국의 핵심 가치이며 그것은 노예무역 폐지 운동이 증명해 준다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한 수많은 전문인들 중, 몇몇 사람들이 남긴 결과만이 역사에 남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그 사람들의 전문성에 시대를 초월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숭고한 도덕성이 더해졌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포목상 점원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길렀던 전문지식이 200년이 지난 지금 총리의 연설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은 그 전문성이 Morality라는 가치로 닦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전문성을 빛나게 하는 것은...
(노예무역 폐지 법안 통과를 기념하는 2파운드 동전)
*
약 200년 전 영국에 그랜빌 샤프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15세 때 정규 교육을 그만두고 포목상에서 일을 해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환경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고, 독학으로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공부해 나중에는 성경을 원문으로 읽을 정도의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이 어려움 속에서 길러진 전문성으로 인해 그는 나중에 정부기관에 취직해 중요 직책을 맡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자수성가한 엘리트가 된 것이다.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사람들은 많진 않지만 사실 그리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는 아니다. 샤프 또한 평범하진 않지만 특별하진 않았던 이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런 그를 역사에 남는 특별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
어느날 샤프는 의사인 자기의 형을 방문하였다가 치료를 받으러 온 가난한 흑인 조나단 스트롱(Jonathan Strong)을 만난 일이 있었다. 이 흑인은 자신이 서인도 제도에서 리즐이라는 변호사에게 팔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주인이 그가 병들었다는 것을 알고 길거리에 버렸다는 딱한 사정을 얘기하였고, 샤프는 이 노예를 불쌍히 여겨 돌봐 주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조나단은 길거리에서 전 주인인 리즐에 의해 발견되었고, 리즐은 악랄하게도 조나단에게 도망노예라는 누명 씌워 감옥에 보내버렸다. 이 소식에 분노한 샤프는 즉각 고등법원에 찾아가 항의하였지만 리즐은 오히려 상대방이 불법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보유하려 했다고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 재판은 곧 노예제도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되었다.
당시 영국은 재산소유권이 가장 먼저 발달된 나라답게 재산권을 불가침의 권리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법률가들은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샤프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 법리를 개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법률적 지식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제에 관한 영국과 유럽 여러 나라의 법률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이렇게 열정과 헌신으로 길러진 지식은 노예제가 마그나 카르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영국 헌법의 자유 정신에 결코 합치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그의 논리는 세간의 관심을 끌었으며 결국 법원의 판결에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막상 ‘리즐 대 샤프’ 소송이 개시되었을 때(1772) 어떤 변호사도 리즐의 변호를 맡으려 하지 았고, 결국 리즐은 소송을 취하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성공에 고무되어서 그렌빌은 1775년 유사한 소송을 맡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어떤 노예든지 영국 영토에 발을 딛자마자 그는 자유”라는 기념비적인 판결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약 30년이 지난 1807년, 영국 의회에서는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통과되었다. 세계 노예무역의 1/3 이상을 차지했던 국가가 이 핵심 산업을 폐기하기까지 복음주의 정치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필요하였지만, 그렌빌 샤프가 얻어낸 판결이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무역 폐지 운동을 위해 일어나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얼마 전, 인권법(Human Right Act)을 수정하라는 야당의 요구에 맞서,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가 반박 연설을 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의 논리 중 하나는 인간의 자유는 영국의 핵심 가치이며 그것은 노예무역 폐지 운동이 증명해 준다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한 수많은 전문인들 중, 몇몇 사람들이 남긴 결과만이 역사에 남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그 사람들의 전문성에 시대를 초월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숭고한 도덕성이 더해졌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포목상 점원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길렀던 전문지식이 200년이 지난 지금 총리의 연설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은 그 전문성이 Morality라는 가치로 닦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지니지 않는 사람의 실력은 결코 영향력을 남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