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여름 어느 날, 영풍문고에서 소설 코너를 뒤지다가 뭔가 흥미로워 보이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제목은 , 작가는 한유주라고 되어 있었다. 제 3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 그리고 까만색 배경에에 낙엽이 매달려있는 약간은 스산한 표지 일러스트에 끌려서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항상 책을 읽으러 가던 시청 근처의 어느 커피가게에 가서 이 책을 펼쳐들고 읽기 시작하면서 나의 얼굴은 조금씩 일그러졌다. "무슨 문장이 이래!" 그리고 1년도 더 넘은 지금 세 번째로 이 책을 잡고 다시 읽어보았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신경세포의 집중이 요구된다. 그녀의 문장은 어렵다. 특히 소설집의 가장 앞에 수록되어있는 단편소설 '달로'와 마지막에 수록된 '암송'은 적어도 내게는 매우 어려운 작품이다. 그녀의 문장은 쉼표와 말줄임표로 대표된다, 고 말하면 심한 비약일지도 모르겠으나, 일단 그녀의 문장에 쉼표와 말줄임표가 많이 들어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쉼표는, 단절의 표현이다. 말줄임표는……침묵이며 숨김이다. 그녀는 단절과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 쉼표들로 인해서 하나의 문장은 여러개의 의미 단위로 파편화된다. 그녀는 어구 하나하나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와의 소통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과연 그녀가 독자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그녀는 말을 줄임으로써 더 내밀한 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을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문장을 보면 프루스트가 잠깐 떠오른다. '그리고 음악'에서 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녀는 분명 프루스트에서 영향을 받긴 한 듯 하다. 프루스트에서 느낄 수 있는 끊임없는 쉼표와 독창적인 표현("느낌.끄적임."에 올려진 '상투어의 문제' 참고) 사용을 한유주의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의 독창적인 표현은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라는 오래되고 낡은 은유"('지옥은 어디일까'196p)라는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전 세대의 은유를 거부한다. 그녀의 소설들은 분명 이전 세대의 한국 소설과는 다르다.
하지만 프루스트와 그녀에게는 차이점이 있다. 프루스트의 만연체의 문장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그 길이가 방대하여 쉼표를 사용할 수 밖에 없던 문장이다. 하지만 그녀의 문장에서 쉼표의 사용은 프루스트의 그 것과는 조금 다른 양식으로 나타나는데, 그녀의 쉼표는 문장의 길이에 비해 불필요할 정도로 과다하게 사용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다시말해 프루스트의 문장은 짧은 문장으로 끊어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굳이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하기 위해 쉼표가 사용된 것이며, 한유주의 문장은 어쩔 수 없이 한 문장으로 쓸 수 밖에 없던 것을 의미 단위로 끊어서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 굳이 쉼표를 사용한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공격의 대상이다. 기존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그녀의 소설을 비판하는데 이것은 기존 시인들이 최근의 미래파 시인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들은 최근 작가들에 대해 최근 소설들은 형식만 새로우며 자의식의 과잉이고 삶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수업시간에 어떤 학우가 송하춘 교수에게 들었던 비판을 빌리자면 이들의 작품은 ㅡ그들 세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ㅡ 불필요한 수사로 도배되었으며, 최동호 교수의 미래파 시에 대한 비판을 빌리자면 그것들은 시(혹은 소설)가 아닌 것이다. 단순한 세대차이일까. 어쩌면 이전 세대들이 틀에 갇히고 아집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도 든다. 최근 세대의 작품들도 분명 고쳐야 할 점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소설이 우리나라에서 히트를 치고 있는 것 처럼 ㅡ물론 일본소설은 너무 가벼워서 소설이 아니라 수필같다고 비판을 받지만ㅡ 무엇인가 달라져야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언제까지고 기존의 형식만 답습하고 기존의 내용만을 답습하면서 과연 무엇이 바뀔 것인가. 언제까지 독자 탓만 해야 하는 것인가. 당연히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말은 하나의 고착화된 이데올로기의 발현일 뿐이다.
어쨌든 한유주의 소설은 독특한 소설임에 분명하다. 필자는 이 소설집을 세번이나 읽었음에도 아직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특히 '달로'와 '암송'은 몇번은 더 읽어봐야 할 듯하다.) 평론가 엄병희 씨의 황병승 시에 대한 평가를 보면"황병승 시는 보기 드물게 집요한 재독(再讀)을 요구하는 텍스트"라며 "문제는 그의 시가 재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독서의 과정이 얼마만큼의 보람을 독자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가에 있다"고 비판했다. 이것은 한유주의 소설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소한 두 세번의 독서를 요구하는 이 책을 쉬운 소설만 찾는 이들에게는 절대 권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서라도 이해를 하고 보람을 얻고 싶어하는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권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그것이 단점이고, 장점이다.
우리의 세대는 수사학이 선인 세대다. 수사를 제외하면 우리에게 대체 무엇이 남을까? 우리에게 언어는 다만 치장일 뿐이다. 치장된 언어는 윤리적으로 거짓말보다 더 나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지 않다. 가상의 세대에 걸맞은 가상의 언어 ㅡ 우리는 닥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한유주 ,'그리고 음악' 중에서
덧_)개인적으로 추천하는 단편은 '죽음의 푸가', '세이렌 99', '그리고 음악',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이 네 작품은 비교적 읽기 수월한 편이다. '세이렌 99' 같은 경우는 이상의 시를 보는 것 처럼 초현실적 기법을 사용한 문장 파괴가 이루어져 있는데 그리 어렵지는 않다. 단연 수작으로는 '죽음의 푸가'를 뽑고 싶다.
평점 ★★★☆
For :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어 하는 사람, 시간이 많은 사람, 인내심이 많은 사람, 뭔가 이해하는 보람을 얻고 싶은 사람
Against : 인내심이 없는 사람, Easy-Reading 소설에 길들여진 사람, '소설이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
파편화된 문장들은 모두 <달로>
달로
한유주 소설집|문학과지성사|248쪽|9000원
2006년 여름 어느 날, 영풍문고에서 소설 코너를 뒤지다가 뭔가 흥미로워 보이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제목은 , 작가는 한유주라고 되어 있었다. 제 3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 그리고 까만색 배경에에 낙엽이 매달려있는 약간은 스산한 표지 일러스트에 끌려서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항상 책을 읽으러 가던 시청 근처의 어느 커피가게에 가서 이 책을 펼쳐들고 읽기 시작하면서 나의 얼굴은 조금씩 일그러졌다. "무슨 문장이 이래!" 그리고 1년도 더 넘은 지금 세 번째로 이 책을 잡고 다시 읽어보았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신경세포의 집중이 요구된다. 그녀의 문장은 어렵다. 특히 소설집의 가장 앞에 수록되어있는 단편소설 '달로'와 마지막에 수록된 '암송'은 적어도 내게는 매우 어려운 작품이다. 그녀의 문장은 쉼표와 말줄임표로 대표된다, 고 말하면 심한 비약일지도 모르겠으나, 일단 그녀의 문장에 쉼표와 말줄임표가 많이 들어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쉼표는, 단절의 표현이다. 말줄임표는……침묵이며 숨김이다. 그녀는 단절과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 쉼표들로 인해서 하나의 문장은 여러개의 의미 단위로 파편화된다. 그녀는 어구 하나하나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와의 소통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과연 그녀가 독자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그녀는 말을 줄임으로써 더 내밀한 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을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문장을 보면 프루스트가 잠깐 떠오른다. '그리고 음악'에서 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녀는 분명 프루스트에서 영향을 받긴 한 듯 하다. 프루스트에서 느낄 수 있는 끊임없는 쉼표와 독창적인 표현("느낌.끄적임."에 올려진 '상투어의 문제' 참고) 사용을 한유주의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의 독창적인 표현은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라는 오래되고 낡은 은유"('지옥은 어디일까'196p)라는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전 세대의 은유를 거부한다. 그녀의 소설들은 분명 이전 세대의 한국 소설과는 다르다.
하지만 프루스트와 그녀에게는 차이점이 있다. 프루스트의 만연체의 문장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그 길이가 방대하여 쉼표를 사용할 수 밖에 없던 문장이다. 하지만 그녀의 문장에서 쉼표의 사용은 프루스트의 그 것과는 조금 다른 양식으로 나타나는데, 그녀의 쉼표는 문장의 길이에 비해 불필요할 정도로 과다하게 사용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다시말해 프루스트의 문장은 짧은 문장으로 끊어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굳이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하기 위해 쉼표가 사용된 것이며, 한유주의 문장은 어쩔 수 없이 한 문장으로 쓸 수 밖에 없던 것을 의미 단위로 끊어서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 굳이 쉼표를 사용한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공격의 대상이다. 기존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그녀의 소설을 비판하는데 이것은 기존 시인들이 최근의 미래파 시인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들은 최근 작가들에 대해 최근 소설들은 형식만 새로우며 자의식의 과잉이고 삶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수업시간에 어떤 학우가 송하춘 교수에게 들었던 비판을 빌리자면 이들의 작품은 ㅡ그들 세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ㅡ 불필요한 수사로 도배되었으며, 최동호 교수의 미래파 시에 대한 비판을 빌리자면 그것들은 시(혹은 소설)가 아닌 것이다. 단순한 세대차이일까. 어쩌면 이전 세대들이 틀에 갇히고 아집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도 든다. 최근 세대의 작품들도 분명 고쳐야 할 점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소설이 우리나라에서 히트를 치고 있는 것 처럼 ㅡ물론 일본소설은 너무 가벼워서 소설이 아니라 수필같다고 비판을 받지만ㅡ 무엇인가 달라져야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언제까지고 기존의 형식만 답습하고 기존의 내용만을 답습하면서 과연 무엇이 바뀔 것인가. 언제까지 독자 탓만 해야 하는 것인가. 당연히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말은 하나의 고착화된 이데올로기의 발현일 뿐이다.
어쨌든 한유주의 소설은 독특한 소설임에 분명하다. 필자는 이 소설집을 세번이나 읽었음에도 아직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특히 '달로'와 '암송'은 몇번은 더 읽어봐야 할 듯하다.) 평론가 엄병희 씨의 황병승 시에 대한 평가를 보면"황병승 시는 보기 드물게 집요한 재독(再讀)을 요구하는 텍스트"라며 "문제는 그의 시가 재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독서의 과정이 얼마만큼의 보람을 독자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가에 있다"고 비판했다. 이것은 한유주의 소설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소한 두 세번의 독서를 요구하는 이 책을 쉬운 소설만 찾는 이들에게는 절대 권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서라도 이해를 하고 보람을 얻고 싶어하는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권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그것이 단점이고, 장점이다.
우리의 세대는 수사학이 선인 세대다. 수사를 제외하면 우리에게 대체 무엇이 남을까? 우리에게 언어는 다만 치장일 뿐이다. 치장된 언어는 윤리적으로 거짓말보다 더 나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지 않다. 가상의 세대에 걸맞은 가상의 언어 ㅡ 우리는 닥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한유주 ,'그리고 음악' 중에서
덧_)개인적으로 추천하는 단편은 '죽음의 푸가', '세이렌 99', '그리고 음악',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이 네 작품은 비교적 읽기 수월한 편이다. '세이렌 99' 같은 경우는 이상의 시를 보는 것 처럼 초현실적 기법을 사용한 문장 파괴가 이루어져 있는데 그리 어렵지는 않다. 단연 수작으로는 '죽음의 푸가'를 뽑고 싶다.
평점 ★★★☆
For :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어 하는 사람, 시간이 많은 사람, 인내심이 많은 사람, 뭔가 이해하는 보람을 얻고 싶은 사람
Against : 인내심이 없는 사람, Easy-Reading 소설에 길들여진 사람, '소설이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