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문제가 이야기될때마다 내마음속에 부담으로 남아있는 가슴아픈이야기가 있다. 북한에서 탈출하여 천신만고끝에 태국을 거쳐 미얀마국경까지 넘어온 한 젊은이를 한국으로 귀국시키지 못하고 미얀마의 감옥에 방치하고 왔던 기억이다.당시의 북한 젊은이와 그애인( 지숙이라고 했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양곤의 주미얀마한국대사관에 근무(1990-92)했을때의 일로서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지만 기억이 사라지기전에 이가슴아픈 일을 기록해두려고 한다.
지금은 모든 탈북자를 우리가 받아들여 한국내에 정착시키는것이 국가정책으로서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우리 헌법이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부속도서로 한다고 명기하고 있어 형식적이나마 북한주민도 한국국민으로 간주되고 있는점, 또 탈북자들에 대한 인도적고려등이 그 배경에 있을것이다.그렇지만 우리정부의 탈북자정책이 이렇게 된것은 사실은 그렇게 오래 된것이 아니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탈북자들을 선별하여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경우에만 받아들였다.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아직 우리가 탈북자를 선별해서 받았을때의 이야기다.
내가 주미얀마대사관에 참사관으로 근무하던 1991년 어느날이었던것으로 기억한다.대사관 경비실로 어떤 쪽지가 전달되었는데 한글로된 이쪽지에는 도무지 무슨말인지 알수없는 글들이 쓰여있었다.약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횡설수설한것 같은 짧은 글이었던것 같은데 그이후에도 한번 더 누군지모를 사람으로부터 정체불명의 쪽지가 왔었다.나는 도무지 해석할수없는 메모쪽지를 받아들고는 누가 장난을 하고 있는지( 혹시 북한?) 의아해 하면서도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후 미얀마외교부에서 우리대사관으로 연락이 왔다.미얀마의 수도인 양곤교외에 위치한 인세인형무소에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주장하는 청년 한사람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온 혐의로 수감되어있는데 대사관에서 와서 한번 확인해주었으면 하는 요청이었다.
나는 당시 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던 파견관과 함께 인세인형무소에 가서 문제의 청년을 만나게 됐다.아열대의 후덥지근한 더위속에 남루한 런닝셔츠차림으로 간수와 함께 나타난 이청년( 20대 중후반정도 나이로 보였다)은 우리를 보자마자 왜 이제 오셨느냐고 눈물부터 글썽거렸다.
짧은 머리 바짝마른 모습 억양등이 한눈에도 한국인같이 보이지는 않았고 탈북자이거나 조선족동포같아 보였다.그는 감옥을 나가는 동료죄수에게 암호같은 글을 몇번써서 보냈는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었다는것이다.사연을 제대로 쓸수없었던것은 혹시 형무소 반출과정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고 한다.
하여튼 나와 파견관은 이청년( 지금 이름은 기억할수가 없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사연이 기가 막힌 것이었다.이청년은 자신을 북한출신 이라고 소개하면서 2년전쯤 북한을 빠져나와 중국땅으로 왔다고 했다. 그후 한국으로 가려고 홍콩쪽으로 넘어갔다가 홍콩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고 다시 중국땅으로 추방됐다고 했다.홍콩에 인접한 심천(션쩐)에서 배회하다가 우연히 북한에 있을때 애인이었던 `지숙`을 만났다고 한다.(이부분에서 진술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으나 일단 그냥 넘어갔음)
지숙과 함께 한국으로 탈출하기위해 중국 운남성까지 간후 한밤중에 태국국경을 넘다가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태국 국경경비대가 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다시 중국쪽으로 쫏겨났다고 한다. 캄캄한밤이었는데 달빛에 의지해 산길을걷던중 지숙이 발을 헛디디면서 산아래로 떨어졌다고 한다.순식간의 일이었는데 부랴부랴찾아내려갔으나 부상이 심해 도저히 움직일수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궁여지책으로 라이터로 불을켜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중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면서 군복을 한 무리들이 나타났다고 한다.나중에 알게되었지만 이들은 미얀마국경부근에 거주하면서 마약거래로 군자금을 마련 미얀마로부터 독립을 꽤하고 있던 샨족의 부대원들이었다고 한다.이들이 들것을 마련 지숙을 옮겨 샨족의 집단거주지인 미얀마의 고산악지대로 함께 갔다고한다.지숙은 방광이 부서지는등 큰 부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샨족이 치료를 잘해주어 목숨은 건졌다는것이다.
이청년은 샨족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하자 얼마가 지난후 이청년을 떠나게 했는데 당시 지숙은 자기를 배웅하면서 미얀마 양곤의 한국대사관을 무사히 찾으면 꼭 자신도 데려가야한다면서 울었다는것이다.
이청년은 샨족의 산채를 내려와 큰 도로변에서 지나가는 트럭을 붙잡고 양곤으로 데려다주면 돈을 주겠다고하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돈은 중국땅에서 모은것이었다함) 이트럭운전수는 잠깐 집에 들러 가족에게 양곤에 다녀오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가자고해서 그집에 따라들어갔다는데 그집에서 받아마신 술같은것을 먹고는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깨어나니 가지고있었던 돈은 모두 없어지고 어딘지모르는곳의 길가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는것이다. 이청년은 이후 그곳 경찰에 발견되어 불법월경혐의로 인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청년은 절망속에서도 어떻게든 한국대사관을 찾고 또 지숙이도 구해야된다고 생각했다 한다.그래서 그곳 감옥측에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대사관이 있는 양곤 인근의 감옥으로 보내줄것을 집요하고 요청했다는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후 양곤 인근의 인세인감옥으로 오게 됐다는 것이었다.( 인세인 감옥에는 전두환대통령이 1984년 미얀마를 국빈방문 아웅산국립묘지참배시 폭발물을 터트려 많은 한국의 각료들을 사망케했던 북한 범인중 생존자인 강민철도 수감되어 있었다)
하여튼 여기까지가 그의 진술이었다. 이청년은 빨리 자신을 감옥에서 나오게하여 샨족 산채에 있는 애인 지숙과 함께 한국으로 갈수있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한편으로 이청년은 자신이 북한에 있을때 북한 고위인사들의 자녀들과 가까운 친구로 지냈으며 또 그런연유등으로 북한의 잠수함기지의 위치등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그러면서 자신이 한국으로 가게되면 자신이 알고있는 북한의 비밀 정보들을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이청년은 중국에 있는동안 한국정부가 탈북자라고 하더라도 선별적으로 받는다는것을 알고 있었던것 같다. 그래서 애써 그런 진술을 하는것 같았다.
나와 파견관은 대사관에 돌아와 공관장에게 보고한후 서울에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그후 우리들은 서울의 지시에 따라 이청년을 한차례 더만났던것 같다.이번에는 서울에서 보내온 설문서를 가지고 이청년이 북한에서온 탈북자가 맞는지를 재차 확인하였으며 대화내용도 녹음하여 서울에 보냈다.
얼마간이 지난후 서울에서 지침이 왔다. 말씨나 설문에 답한 내용등으로 보아 북한인임은 틀림없어보이나 받지는 않겠다는것이었다.
이 청년을 꼭 구해야겠다는 감상적 기분에 쌓여있던 나로서는 물론 실망이 컸다. 공관장과 협의하였지만 서울의 방침이 그렇다면 어쩔수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미얀마외교부에게 어떻게 이야기할까 한동안 고민하였는데 한국인이 아닌것으로 보이며 중국거주 조선족으로 보인다고 통보하는것으로 끝을냈다.
사실 미얀마정부는 이청년이 북한에서왔으며 한국으로 가고 싶어하는것을 알았을것이다.우리가 면회하는중에 미얀마외교부직원이 계속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정부가 데려가겠다고 하면 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그런데 한국정부가 연고권을 주장하지않았음으로 미얀마정부와의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났다.
미얀마정부가 그후 이청년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중국쪽으로 추방했을 가능성이 가장 클것이다.
그이후에도 이청년의 모습은 내머리에 자주 떠오르곤했다. 이청년은 우리가 데려가기를 거부했을때 얼마나 절망했을까?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지숙과 만났을까?
나는 공관장을 설득하여 이청년을 우리정부가 데려가도록 강력히 서울에 재건의를 했으면 어땠을까도 뒤늦게 생각해 보곤했다.서울에서 재검토가 가능했을까? 내가 너무 쉽게 서울의 판단과 공관장의 지시에 순응했던것은 아닐까?
물론 26년전의 당시와 지금은 우리정부의 탈북자정책에 근본적 차이가 있었다.지금의 잣대로 당시를 재단할수없음은 물론이다.당시의 남북관계는 냉정한 경쟁과 적대의 관계속에 진행되었다. 또 지금과 같이 우리의 압도적우위속에 있지도 않았다. 탈북자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이문제가 인도주의차원에서 고려된것은 중국과 우리가 수교를 하고 90년대후반 중국땅으로 탈북자들이 대규모로 넘어오면서였다.
나는 그후 이이야기를 가까이 지내던 지인( 베트스셀러소설 `아버지`의 작가 김정현씨) 에게 한일이 있는데 이지인은 나의 이야기에 크게 흥미를 가져 이이야기를 근간으로해서 소설( `길없는 사람들`)을 쓰기도 했다.이작가는 현지답사를 하면서 중국 운남성을 거쳐 미얀마샨족 거주지 근방까지 가보았다고 한다. 현지인을 통해 수소문을 했는데 놀랍게도 샨족거주지에 허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 북한출신여성이 아직도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그런데 샨족측에서는 그여성을 데려가려면 그간의 보호에 대한 댓가로 상당한 돈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지가들에게 모금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인도적으로라도 우리가 그여성을 한국으로 데려와야하지 않겠느냐는것이다.
한 탈북자를 구해내지못한 죄의식
탈북자문제가 이야기될때마다 내마음속에 부담으로 남아있는 가슴아픈이야기가 있다. 북한에서 탈출하여 천신만고끝에 태국을 거쳐 미얀마국경까지 넘어온 한 젊은이를 한국으로 귀국시키지 못하고 미얀마의 감옥에 방치하고 왔던 기억이다.당시의 북한 젊은이와 그애인( 지숙이라고 했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양곤의 주미얀마한국대사관에 근무(1990-92)했을때의 일로서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지만 기억이 사라지기전에 이가슴아픈 일을 기록해두려고 한다.
지금은 모든 탈북자를 우리가 받아들여 한국내에 정착시키는것이 국가정책으로서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우리 헌법이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부속도서로 한다고 명기하고 있어 형식적이나마 북한주민도 한국국민으로 간주되고 있는점, 또 탈북자들에 대한 인도적고려등이 그 배경에 있을것이다.그렇지만 우리정부의 탈북자정책이 이렇게 된것은 사실은 그렇게 오래 된것이 아니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탈북자들을 선별하여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경우에만 받아들였다.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아직 우리가 탈북자를 선별해서 받았을때의 이야기다.
내가 주미얀마대사관에 참사관으로 근무하던 1991년 어느날이었던것으로 기억한다.대사관 경비실로 어떤 쪽지가 전달되었는데 한글로된 이쪽지에는 도무지 무슨말인지 알수없는 글들이 쓰여있었다.약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횡설수설한것 같은 짧은 글이었던것 같은데 그이후에도 한번 더 누군지모를 사람으로부터 정체불명의 쪽지가 왔었다.나는 도무지 해석할수없는 메모쪽지를 받아들고는 누가 장난을 하고 있는지( 혹시 북한?) 의아해 하면서도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후 미얀마외교부에서 우리대사관으로 연락이 왔다.미얀마의 수도인 양곤교외에 위치한 인세인형무소에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주장하는 청년 한사람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온 혐의로 수감되어있는데 대사관에서 와서 한번 확인해주었으면 하는 요청이었다.
나는 당시 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던 파견관과 함께 인세인형무소에 가서 문제의 청년을 만나게 됐다.아열대의 후덥지근한 더위속에 남루한 런닝셔츠차림으로 간수와 함께 나타난 이청년( 20대 중후반정도 나이로 보였다)은 우리를 보자마자 왜 이제 오셨느냐고 눈물부터 글썽거렸다.
짧은 머리 바짝마른 모습 억양등이 한눈에도 한국인같이 보이지는 않았고 탈북자이거나 조선족동포같아 보였다.그는 감옥을 나가는 동료죄수에게 암호같은 글을 몇번써서 보냈는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었다는것이다.사연을 제대로 쓸수없었던것은 혹시 형무소 반출과정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고 한다.
하여튼 나와 파견관은 이청년( 지금 이름은 기억할수가 없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사연이 기가 막힌 것이었다.이청년은 자신을 북한출신 이라고 소개하면서 2년전쯤 북한을 빠져나와 중국땅으로 왔다고 했다. 그후 한국으로 가려고 홍콩쪽으로 넘어갔다가 홍콩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고 다시 중국땅으로 추방됐다고 했다.홍콩에 인접한 심천(션쩐)에서 배회하다가 우연히 북한에 있을때 애인이었던 `지숙`을 만났다고 한다.(이부분에서 진술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으나 일단 그냥 넘어갔음)
지숙과 함께 한국으로 탈출하기위해 중국 운남성까지 간후 한밤중에 태국국경을 넘다가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태국 국경경비대가 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다시 중국쪽으로 쫏겨났다고 한다. 캄캄한밤이었는데 달빛에 의지해 산길을걷던중 지숙이 발을 헛디디면서 산아래로 떨어졌다고 한다.순식간의 일이었는데 부랴부랴찾아내려갔으나 부상이 심해 도저히 움직일수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궁여지책으로 라이터로 불을켜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중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면서 군복을 한 무리들이 나타났다고 한다.나중에 알게되었지만 이들은 미얀마국경부근에 거주하면서 마약거래로 군자금을 마련 미얀마로부터 독립을 꽤하고 있던 샨족의 부대원들이었다고 한다.이들이 들것을 마련 지숙을 옮겨 샨족의 집단거주지인 미얀마의 고산악지대로 함께 갔다고한다.지숙은 방광이 부서지는등 큰 부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샨족이 치료를 잘해주어 목숨은 건졌다는것이다.
이청년은 샨족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하자 얼마가 지난후 이청년을 떠나게 했는데 당시 지숙은 자기를 배웅하면서 미얀마 양곤의 한국대사관을 무사히 찾으면 꼭 자신도 데려가야한다면서 울었다는것이다.
이청년은 샨족의 산채를 내려와 큰 도로변에서 지나가는 트럭을 붙잡고 양곤으로 데려다주면 돈을 주겠다고하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돈은 중국땅에서 모은것이었다함) 이트럭운전수는 잠깐 집에 들러 가족에게 양곤에 다녀오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가자고해서 그집에 따라들어갔다는데 그집에서 받아마신 술같은것을 먹고는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깨어나니 가지고있었던 돈은 모두 없어지고 어딘지모르는곳의 길가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는것이다. 이청년은 이후 그곳 경찰에 발견되어 불법월경혐의로 인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청년은 절망속에서도 어떻게든 한국대사관을 찾고 또 지숙이도 구해야된다고 생각했다 한다.그래서 그곳 감옥측에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대사관이 있는 양곤 인근의 감옥으로 보내줄것을 집요하고 요청했다는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후 양곤 인근의 인세인감옥으로 오게 됐다는 것이었다.( 인세인 감옥에는 전두환대통령이 1984년 미얀마를 국빈방문 아웅산국립묘지참배시 폭발물을 터트려 많은 한국의 각료들을 사망케했던 북한 범인중 생존자인 강민철도 수감되어 있었다)
하여튼 여기까지가 그의 진술이었다. 이청년은 빨리 자신을 감옥에서 나오게하여 샨족 산채에 있는 애인 지숙과 함께 한국으로 갈수있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한편으로 이청년은 자신이 북한에 있을때 북한 고위인사들의 자녀들과 가까운 친구로 지냈으며 또 그런연유등으로 북한의 잠수함기지의 위치등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그러면서 자신이 한국으로 가게되면 자신이 알고있는 북한의 비밀 정보들을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이청년은 중국에 있는동안 한국정부가 탈북자라고 하더라도 선별적으로 받는다는것을 알고 있었던것 같다. 그래서 애써 그런 진술을 하는것 같았다.
나와 파견관은 대사관에 돌아와 공관장에게 보고한후 서울에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그후 우리들은 서울의 지시에 따라 이청년을 한차례 더만났던것 같다.이번에는 서울에서 보내온 설문서를 가지고 이청년이 북한에서온 탈북자가 맞는지를 재차 확인하였으며 대화내용도 녹음하여 서울에 보냈다.
얼마간이 지난후 서울에서 지침이 왔다. 말씨나 설문에 답한 내용등으로 보아 북한인임은 틀림없어보이나 받지는 않겠다는것이었다.
이 청년을 꼭 구해야겠다는 감상적 기분에 쌓여있던 나로서는 물론 실망이 컸다. 공관장과 협의하였지만 서울의 방침이 그렇다면 어쩔수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미얀마외교부에게 어떻게 이야기할까 한동안 고민하였는데 한국인이 아닌것으로 보이며 중국거주 조선족으로 보인다고 통보하는것으로 끝을냈다.
사실 미얀마정부는 이청년이 북한에서왔으며 한국으로 가고 싶어하는것을 알았을것이다.우리가 면회하는중에 미얀마외교부직원이 계속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정부가 데려가겠다고 하면 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그런데 한국정부가 연고권을 주장하지않았음으로 미얀마정부와의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났다.
미얀마정부가 그후 이청년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중국쪽으로 추방했을 가능성이 가장 클것이다.
그이후에도 이청년의 모습은 내머리에 자주 떠오르곤했다. 이청년은 우리가 데려가기를 거부했을때 얼마나 절망했을까?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지숙과 만났을까?
나는 공관장을 설득하여 이청년을 우리정부가 데려가도록 강력히 서울에 재건의를 했으면 어땠을까도 뒤늦게 생각해 보곤했다.서울에서 재검토가 가능했을까? 내가 너무 쉽게 서울의 판단과 공관장의 지시에 순응했던것은 아닐까?
물론 26년전의 당시와 지금은 우리정부의 탈북자정책에 근본적 차이가 있었다.지금의 잣대로 당시를 재단할수없음은 물론이다.당시의 남북관계는 냉정한 경쟁과 적대의 관계속에 진행되었다. 또 지금과 같이 우리의 압도적우위속에 있지도 않았다. 탈북자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이문제가 인도주의차원에서 고려된것은 중국과 우리가 수교를 하고 90년대후반 중국땅으로 탈북자들이 대규모로 넘어오면서였다.
나는 그후 이이야기를 가까이 지내던 지인( 베트스셀러소설 `아버지`의 작가 김정현씨) 에게 한일이 있는데 이지인은 나의 이야기에 크게 흥미를 가져 이이야기를 근간으로해서 소설( `길없는 사람들`)을 쓰기도 했다.이작가는 현지답사를 하면서 중국 운남성을 거쳐 미얀마샨족 거주지 근방까지 가보았다고 한다. 현지인을 통해 수소문을 했는데 놀랍게도 샨족거주지에 허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 북한출신여성이 아직도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그런데 샨족측에서는 그여성을 데려가려면 그간의 보호에 대한 댓가로 상당한 돈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지가들에게 모금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인도적으로라도 우리가 그여성을 한국으로 데려와야하지 않겠느냐는것이다.
벌써 16년전의 이야기지만 내가슴속에 다시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너무나 가슴아픈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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